VIXX LR - Beautiful Li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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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력 213년 X월 XX일
하루하루를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이 곳으로 보낸 형을 원망했지만, 어차피 형도 큰 실수를 저질렀던 나를 구해주기 위해 먼저 나서서 내 등을 떠민 거였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태자가 내게 선사한 지금 이 상황이 결국 죽음이 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만회하고 앞으로 나아갈 기회가 될 것인지는 내 손에 달렸다.
나는, 언제라도 내 정체가 들킬까 편하게 잠에 들지 못하는 것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사실을 빼면 나름 잘 지내고 있다.
태연하게 신분을 위장해서 원래부터 이 곳에 나올 사람이었던 척, 지금 현나라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나. 적군들이 내놓는 전략들을 보고, 의견에 동조하고 반대하기도 하며 동화되고 있다. 때때로는 좋은 전략을 내놓는 척 하면서 몰래 이 내용을 빼돌리고 본국과 손발을 맞춘다. 나는 맡은 일을 무탈하게 수행하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약속할 수 없는 내일이 두려웠다.
죽음이 끊이지 않는 이 전쟁터가 무서웠고, 옆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배로 무서웠다.
[ 태형아, 힘내야 해. 네가 할 일만을 생각해. ]
죽음이 두려웠던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항상 불안에 떨었다. 형이 전해준 말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내 역할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되뇌여봐도 두려움의 근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그러한 존재가 없다는 게 나를 더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그 녀석을 만났다.
"두려움을 굳이 없애려 하지 마."
나에게 스쳐지나가듯이 말을 던져준 남자.
저 녀석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여기로 들어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들어온 남자.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답지 않게 여리여리한 겉모습이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듣자하니 몸이 약해서 전쟁에 나오기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 거라고 했는데, 그래서 더 싫었다.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그렇다. 다른 녀석들도 겉모습과, 들린 평판들 때문인지 다 저 녀석을 무시했다. 그래서 나도 저 녀석을 신경쓰지 않았다. 내 코가 석 자거든. 내 앞길 챙기기도 바빴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마디를 던지고 지나가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던진 말에 뭐에 홀린 듯 팔을 붙잡았다가 내가 하고 있던 행동을 깨닫고 바로 손을 놓았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저 녀석이 그냥 지나갔으면 했다. 그러나 날 보던 녀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려움 자체는 나쁜 게 아니야."
"........."
"오히려 두려워할게 하나도 없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그러한 자만은 자기 자신을 해칠 테니까."
"......."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걱정하지마.
그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크게 일렁이던 불안감의 파도가 조금 잦아든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감정을 느꼈음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석은 피식 웃고는 말을 했다.
내일, 우리가 살아돌아온다면 친구할래?
* *
- 황력 213년 X월 XX일
지금은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죽어나가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전처럼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을 척할 뿐 속으로는 비명을 내질렀던 나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피가 튀어 내 얼굴과 손에 묻고, 피비린내가 코를 마비시킬정도로 독하게 풍겨와도 동요하지 않는다. 살과 뼈를 잘라내는 감각이 손으로 전해져도, 지루하다 라는 감정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언제쯤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돌아오려면 전쟁이 끝나야 해,라던 형의 말이 떠올랐다.
강기슭에 있는 지금 진영은 내일이면 또 옮겨진다. 시시각각으로 바뀌어지는 진영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은 며칠 동안 씻지 못해서 쌓인 피비린내를 조금이나마 씻어내기 위해 강가로 걸어갔다. 걸어가던 날 본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옆을 지나간다.
허.
무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치고 있었지만 속으론 저들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저께의 패배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이런 작은 첩자 하나 눈치채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정말 바보같았다. 멍청한 놈들. 여기에서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전쟁의 끝은 현나라의 패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깨닫고 있었다.
대충 물을 끼얹어 씻어내린 후, 물기를 털며 강을 걸어나오자 비딱하게 기댄 채 있던 사람이 날 보고 입을 열었다.
"태평하네."
비실이였다.
내게 던져주는 마른 옷가지를 팔을 들어 반사적으로 잡아챘다가 다시 도로 내려놓았다. 왜 안 입어.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물어오는 목소리에 대한 답으로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녀석이 한숨을 푹 쉰다. 나는 실실 웃으며 허리를 살짝 굽히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댔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머리 위에 내려앉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다가 물을 튀기고 있냐."
약간 열받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손으로는 마른 천을 움직여 물기를 털어주는 것에 집중한다.
조금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그다지 싫지 않았기에 나는 허리를 숙여준 채 가만히 있었다. 몇 번 털어낸 후, 젖어버린 천을 어깨에 둔 녀석은 내 손에 들려있던 옷가지를 가리켰다. 입으라는 뜻이었다. 팔을 꿰어 옷을 입고 앞을 대충 여민 후 입을 열었다.
"내 마누란줄 알았네."
물기도 털어주고.
내 말에 발끈한 건지 발을 꾹 밟아와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욱하는 성질은 알아줘야 했다. 키도 작고, 선도 여리여리하고, 이렇게 가끔 보여주는 행동에 내가 여자같다고 놀리면 화를 내는 녀석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저 멀리 앞서나가는 뒷모습을 쫓아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용맹한 대장님이 자상도 하단 뜻이었어."
흘끗, 날 돌아보는 눈빛 끝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조약돌이 발끝에 채여 비명을 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김태형. 어, 왜 비실아. 좀 갑작스럽긴 한데, 난 네가 고맙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나는 되물었다.
"뭐가?"
그러자 조용하게 대답한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그 말을 듣자 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녀석은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웅얼댔다. 친구가 없었는데, 처음 생긴 친구가 너라니 조금 짜증나긴 하면서도 마음에 들어.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나도 멈추었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앞으로 더 오래 친구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말이 곧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금 상황을 빗댄 뜻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 때까지, 날 친구로 받아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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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자에게 정은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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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력 213년 X월 XX일
첩자에게 정은 사치다. 그건 확실하다. 내가 고국을 떠나오면서, 여기에서 지내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가슴속 깊이 새겨놓고 있던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
* *
- 황력 213년 X월 XX일
"비실아."
"........"
"비실아?"
"........."
"김여주."
"왜."
"그냥 심심해서 불러봤어."
내 말에 헛웃음을 내뱉다가 주먹으로 옆구리를 퍽 친다. 제법 매서운 손길에 옆구리를 싸매고 낑낑대자 안 아프게 쳤으니 엄살부리지 말랜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아팠다. 손 크기도 나보다 한 마디정도 작은 주제에 주먹은 더럽게 아프다.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가서 쳐 자. 날이 선 말에도 실실 웃으며 어깨동무한채 '나 무서운데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친구'했다가 같은 곳을 또 얻어맞아서 정말 죽을 뻔 했다.
김여주, 이녀석은, 지민이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릴때부터 오랜 시간을 자연스럽게 함께 해서 서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만큼 소중한 친구인 박지민과는 다른 느낌의 '친구'.
친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먹을 쥐었다. 김태형, 저 자식은 친구가 아니야. 친구로 생각하면 안 돼.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죽여야 하는 그런 적군이란 말이다 이 멍청한 놈아.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마음은 계속 풀어져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길은 저절로 김여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입술색과 지쳐보이는 얼굴에는 안쓰러움까지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저녀석만큼 피곤하고,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안쓰러움과 걱정이 느껴지는 것은 저 녀석뿐이다.
채 씻겨나가지 못한 피비린내 속에 섞여있는 본연의 살내음을 맡았을 때는 가슴이 살근거렸다.
이 감정은 뭘까.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긴 고민 끝에,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지만 부정했다.
저 녀석은 남자다.
겉모습은 여자처럼 여리여리하고, 가끔씩 튀어나오는 행동들도 여자 같지만 그래도 남자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시작을 고하고 마음대로 달려가려고 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내가 미친게 아닌가 싶었다. 적당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비정상이다, 김태형. 시작하면 안 돼. 왜냐하면,
쟤도 남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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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력 213년 X월 XX일
뺨을 찰싹 때려봤다. 저 녀석도 남자야 이 미친 놈아.
볼이 얼얼해서 쓰러지듯이 엎어진 후 푹신한 천에 파묻혀 한참을 되새겼다. 남자, 남자. 나랑 같은 거 달린 남자. 젠장, 왜 여자처럼 이쁘장하게 생겨가지곤 이렇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드는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형한테 전달해야 할 정보들이 있는데.
아 몰라, 머리가 너무 복잡해. 사내새끼가 결정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다니. 남자, 남자, 남자......
벌떡 일어났다.
남자면 어때. 남자면 어때? 하늘이 무너져, 땅이 꺼져?
나 자신을 설득시키려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또 홀로 대답했다. 내가 남자고, 걔도 남자고.
내가 걔를 좋아한다고 하면 하늘이 무너지나?
아니다.
그럼 땅이 꺼지나?
아니다.
손톱 끝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성별이 같다고 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지도 않고, 큰 일이 벌어지지도 않고, 그냥 지금과 똑같이 계속될 뿐이다.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러다가 퐁 하고 떠오른 다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적인데 어떡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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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력 213년 X월 XX일
책략은 성공했다.
많은 수의 현나라 군사들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척, 몰살시키기 위해 짰던 전략이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한 후의 나는 분명 기뻐해야 하는게 맞았는데, 그래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 나 때문에 죄없는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죄책감? 그러한 죄책감은 이미 옛전에 사라진 지 오래다.
침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막사로 들어가 입술을 꾹 깨문채 말을 듣다가 눈에 띈 빈자리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비실이가 사라졌다. 무너져버린 지반과 함께 아득한 땅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죽었을까. 죽었겠지.
하지만 틀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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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력 213년 X월 XX일
형한테 황태자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들은 생각은 아 나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제 다 글러먹은 것 그냥 편하게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자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형은 황태자는 살아있을 테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분명히 살아계실테고, 빨리 찾아낼 테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받은 서신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예전에 가슴에 칼을 맞고서도 살아난 황태자를 알고 있기에 형의 저 근거없는 자신감이 조금 믿음직했다. 그렇게 근심을 조금 덜어내자 다시 사라진 그녀석이 떠올라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민이처럼 오랫동안 보아온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생각나고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지는지.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이 배어나왔던 것일지 모른다.
* *
- 황력 213년 X월 XX일
걔, 여자였다.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녀석을 마른 계곡 속에서 다시 만났다. 피를 뒤집어쓴 채 나를 부르려 벌어지던 입. 그 순간만큼은 난 무슨 생각을 하고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생각을 할 의지조차 없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그녀석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말의 방향을 틀었다. 어느 새 그 앞에까지 달려간 나는 손을 뻗어 걜 내 뒤로 올려주었고, 진영으로 돌아왔었다.
김여주의 옆구리에 화살이 스쳐지나가 피가 진득하게 묻어나오던 새빨간 내 손바닥을 기억하고 있다. 당황해서 상처부위를 보려 옷자락을 헤쳤던 순간, 멈춰섰던 나 자신의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칭칭 동여맨 붕대 사이로 느껴지는 봉긋한 감각.
당황해서 손을 뗐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이 녀석이 여자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볼품없는 천막 안에 누워있는 김여주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만일, 일어나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충동적으로 다시 진영까지 데리고 돌아왔지만 사실 저 녀석은 마른 계곡 속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게 내가 짠 전략이니까. 나는 그 녀석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도,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모든 게 복잡해진 지금, 결정을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태형아, 나야.
현실로 돌아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
- 황력 213년 X월 XX일
바보같은 김태형.
죽일 수 없었다. 결국, 적군을 살려준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내 행동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와도 나는 살려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던 나를 붙잡아주고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것은 두려움 속에 침잠해가고 있던 나를 꺼내준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피어나지 못한 마음에 대한 속죄.
도망쳐.
다시는 내가 잡을 수 없게, 애초부터 잘못된 끈이 이어지지 않게,
멀리멀리 달아나라,
내 사랑아.
* * *
황제한테 전달할 것이 있다며 한 손에 문서를 든 채 걷던 태형을 불러세운 사람은 정호석이었다. 늦었지만 승진 축하한다? 자신에게 걸어와 웃으며 건네는 축하인사말에 태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사단의 부단장에서 단장으로 승진한 태형은 늦은 축하인사라고 하더라도 그저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어차피 직함만 바뀌었을 뿐 사실 태형이 하는 일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전(前) 4사단 단장이 물러나기 전에도 자신이 거의 도맡아 했었으니까. 익숙한 업무를 처리하다가 문득, 뭉치더미에서 발견한 서류에 태형은 그것을 들고 백화궁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태형이 들고 있는 것을 흘끗 본 호석은 그 내용이 뭔지를 알아채고서는 물어왔다.
"아, 그거냐?"
태형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 함은 재작년부터 새로 생긴 대내외적인 황궁 행사였다. 수도 중앙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조금 각색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가면 시합장.
참가자들은 전원 가면을 써야 하고 오로지 검만을 이용해서 시합을 해야 했다. 승자가 되려면 상대의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시합은 계속 이어지지만, 부상이 심각하면 심판의 자체적인 판단으로 경기를 강제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었다. 경기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약 7일간 펼쳐지고, 마지막 날에는 지금까지 이겨 올라온 10명의 시합이 열린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에는 황제와 황후 또한 참석하는 자리였다. 일반 백성들은 경기의 재미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으나, 귀해서 자주 볼 수 없는 황제 일가를 보기 위해 찾는 것도 있었다.
최종으로 승리한 자에게는 거대한 상이 내려진다. 그것은 공식적인 보상이었다. 그리고 숨겨진 보상으로는 다른 게 있었다.
바로, 가면을 쓰고 위장해서 시합에 몰래 참가하는 황궁 사단의 검사를 이기거나 일정한 시간 이상 버티면 별다른 절차 없이 황궁 사단에 입단할 수 있다는 특권.
물론 이러한 황궁 검사가 참가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시합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었다. 시합이 다 끝난 후, 그 황궁 검사를 버텨낸 사람이 있을 경우엔 그사람이 최종 승리자인지의 여부는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큰 상이 내려진다. 이는 비밀이었지만 누가 퍼뜨렸는지 새어나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재작년과 작년 모두 황궁 검사가 존재했기에 사람들은 이번 시합에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황궁 검사'에 대한 것을 호석이 물어왔다.
"그래서 누가 나가기로 했는데?"
"그건 아직 안 정했는데. 왜?"
"나도 나가고 싶어서."
"그 날 할일 있지 않아?"
그럼 하던가, 라고 말하려던 태형은 잠시 시합이 열리는 날이 언제인지를 상기하고선 되물었다. 수련생들의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지도관인 호석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했다.
호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도 당일날 뭐 갑작스러운 휴가라도 내려질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겠냐? 되묻는 말에 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시무룩해진 호석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무렵, 그런 호석은 내버려두고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태형이 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또 물어왔다.
"거기 내궁 가는 길 아니지 않아?"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를 물으려 했던 호석은 태형이 뭐 때문에 백화궁을 가는지 눈치채고서는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황녀님 광신도 같으니."
태형이 발끈해서 뒤를 돌아보자 호석이 사실인데 뭐?를 나타내는 표정을 짓는다. 내심 찔린 태형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면 황제 폐하가 널 죽여서 묻어버린 것으로 아마."
호석이 쯧쯧거리며 혀를 찬 후 뒤돌아 사라진다. 사라지는 호석을 잠깐 노려본 태형은 다시, 백화궁으로 착실하게 발걸음을 놀렸다. 사실 정말 정호석의 말은 맞았다. 굳이 백화궁까지 갈 필요없이 내궁에 전달하라고 밑에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은....
귀여운 황녀를 보기 위해서가 맞긴 하다, 젠장.
* *
황녀는 낮잠을 자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놀고 있는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태형은 조금 아쉬웠지만 나중에라도 또 볼 수 있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황제가 있을 곳을 향해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어제오늘 내궁에서 한 번도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황제였기에 분명히 백화궁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문을 연 순간 보이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태형은 살짝 놀랐다. 어디 가신 거지. 오후 늦게서라도 일을 처리하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궁으로 가셨나? 태형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행방을 몰랐기에 책상 한가운데에 서류를 내려놓은 태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왕 허탕친 거, 다시 밖으로 나가 혹시라도 뛰어놀지 모르는 황녀를 잠시동안만이라도 찾으러 가보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좋아하는 이 버릇은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형은 아이가 그렇게 좋다면 빨리 결혼해서 낳으라고 하긴 했지만... 30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한 여자에게 구제되어 노총각 신세를 면한 사람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또 주제에 자기는 아기를 낳기 싫다고 그런다. 어쩌라는 건지, 원.
백화궁 주변을 슬슬 돌아다니던 태형은 후원까지 갔다가 어디에서도 황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 포기하고 사단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랬는데, 저 쪽에서 미묘한 소리가 들려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분명히 주변에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저긴 수풀밖에 없는데 왜 웅웅거리는 거지. 혹시 침입자인가? 만일의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용히 걸어간 태형은 허리춤에 찬 검을 언제든지 빼들 수 있게 살짝 빼어놓은 후 빠르게 수풀을 헤쳤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을 때 저도 모르게 굳고 말았다.
한동안 끔찍에 가까운 침묵이 흘렀다. 태형은 가까스로 입을 뗄 수 있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둘의 머리카락과 옷차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황제의 흐트러진 숨소리와 발개진 황후의 얼굴을 보았을 때, 태형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말았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어린것들이 진짜 미쳤나. 태형은 정색했다.
"굳이 밖에까지 나와서 이러지 마세요."
"아니,"
"폐하가 안 계셔서 중앙 행사에 관한 서류를 지금 이 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나왔으니 그것 좀 결재해주시고요."
두 사람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 태형은 몸을 돌려세웠다. 그럼, 전 이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던지라 태형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아니, 벌건 대낮에 그 짓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만 하고 싶으면 최소한 실내에서 해야 할 게 아닐까? 민망한 장면을 생각해보니 더 아찔해진다.
도저히 저 둘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중 누가 밖에서 해보는 건 어떠냐며 끌고나왔던지, 아니면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불타올랐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 됐다. 양측 다 생각하기 싫었다.
"잠깐, 잠깐만!"
뒤에서 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태형은 못들은 척 더 걷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저것들은 미쳤어.
뒤돌아보지도 않고 백화궁을 나가려는 태형을 따라잡은 그녀가 어깨를 잡아챘다. 그제서야 태형은 뒤를 돌아보았다. 절 잡으려 달려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낯부끄러운 장면을 들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은 살짝 빨개져 있었지만 태형은 태연했다.
"제 방해로 멈추셨던 거 계속 하지 그랬어요."
"아 진짜... 김태형. 황제는 네가 놓은 거 확인하러 올라가셨어. 그리고 정말 그런 거 아냐."
둘이 있을 때면 말을 놓는 김여주인걸 알고 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변명하는 말에 태형이 따라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그런 게 뭔데?"
"아니,"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설명 좀 해줘."
괜히 태형이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자 그녀가 골치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쉬다가 내뱉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분위기가 갑자기 그렇게 흘러갈 줄 몰랐어.
순순히 인정하는 말에 태형이 그제서야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황궁 전체가 집처럼 안락하게 느껴지더라도 장소는 좀 가려서 해."
"알았어, 알았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은 부끄러움은 그녀 자신의 몫이다. 대충 지끈거리는 느낌도 사라져서 태형은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려는 태형을 그녀가 다시금 붙잡았다. 그거, 결재해야할 서류가 이번에 공개 시합 맞지?
"어."
"누가 나갈지 정해졌어?"
"아직은. 근데 왜?"
"그렇구나. 아니, 폐하랑 내기하려고. 누가 이길지 같은 거."
"귀띔같은 건 안할 테니 나한테서 정보 빼내려는 마음일랑 접어놔요."
"치사하네. 어쩔 수 없지. 그럼, 수고해요."
작년처럼 정보를 흘려주지는 않을거라는 말에 그녀가 입을 비죽이고 단칼에 태형을 돌려보낸다.
볼일이 끝났다는 뜻으로 태형이 먼저 경어를 쓰자, 똑같이 쓰고 있던 편한 말을 버리고 경어로 되돌아온 그녀가 피식 웃으며 다시 백화궁 안으로 들어간다.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던 태형은 햇살에 비치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나온 채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넌, 시작하지 않은 사랑의 형태.
- 김태형.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