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 레오 - 꽃잎놀이
* * *
당신은 내 기억의 꽃송이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져버린 기억이다.
* * *
"어디로 가?"
옆에서 물어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태형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끝으로 흙바닥을 슥슥 긁는다. 그런 행동을 지켜보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냥, 이곳저곳. 발 닿는 대로 가보려고. 내 말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인다.
앙상하게 남은 가지에서는 어느덧 초록색의 잎사귀들이 살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잠깐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에 약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지."
태형이는 입술을 쭉 빼낸 채 툴툴거렸다. 너 가면 나 누구랑 술 마셔? 물어오는 말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술 좀 그만 마셔, 그러다 몸 망가진다.
내 말에 건성으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태형이는 곧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돌아올거야?"
"몰라."
"돌아오긴 할 거야?"
"...그것도 모르겠어."
"그래."
애매하기만 한 내 대답을 듣고서도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된 지금 이 순간에도 가끔씩 떠오르는 감정들을 생각하면 속이 어지러워졌다. 분명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일까.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결혼식에서의, 백색의 아름다운 옷을 입은 채 그 누구보다 행복해보였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가 여행을 떠나려는 이유에는 그간 느꼈던 지친 시간들을 다 내려놓고 여러 경험들을 하며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채 지워지지 않은 감정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려는 목적 또한 존재했다.
- 행복해지세요.
그녀가 건네준 말대로 나는 내가 행복해지면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 줄은 나 자신조차 몰랐기에 여행의 끝 또한 확답할 수 없었다. 남준이 형은 그러한 나를 존중하겠다고 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태형이의 목소리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연락은 줄 거지?"
"응?"
"그래도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는 알려줄 거지?"
"당연하지."
편지 보낼게. 내 말에 태형이가 비웃으며 옆구리를 친다. 너 악필인거 다 안다 임마. 열심히 보내와도 내가 내용을 잘 알아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묻어나오는 시비조에 발끈해서 걔 뒷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린 시절처럼 투닥거리고 있다가 서로 그만두기로 약속한 후 떨어지자, 저 쪽에서 남준이 형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벼운 짐만을 챙긴 남준이 형은 가까이 다가와 서서 우리 둘을 보곤 물어왔다.
"뭐하냐?"
"음... 작별 인사?"
"영영 못 볼것도 아닌데 그걸 왜 해."
남준이 형은 대답한 태형이의 등을 가볍게 치며 핀잔을 줬다. 그런 거는 죽으러 갈 때만 하면 된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떠나서 또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면 되는 거야. 처음부터 떠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준이 형의 언어는 어려워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태형이가 남준이 형에게 묻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작별 인사 안해줄 거야? 어. 설마... 부모님한테도 안 한건 아니지?
그걸 듣고 나도 혹시나 하는 말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았으나 남준이 형은 머리를 긁적일 뿐 대답이 없었다. 태형이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지는 않길 바랄게.
"지민이 길 잘 모르니까, 형이 잘 챙겨줘."
"그거야 얘가 잘 얼마만큼 잘 따라오냐에 대해 달렸지."
정없는 말에 슬쩍 형을 흘겨보았지만 정말 진심으로 말한 표정이라 속으로는 절대로 남준이 형 옆에서 떨어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가자.
남준이 형과 같이 길을 나서는 내 뒤로, 태형이가 말을 던졌다.
"모든 게 다 정리되면 돌아와. 기다릴게."
그 말에, 그저 웃어보였던 것 같다.
* *
남아도는 게 시간뿐이라 서두를 것도 없었기에 정말 천천히 길을 떠났다. 어느덧 국경을 넘어와 안혜국으로 들어오고 통과문서를 작성하자 그제서야 내가 적나라를 떠나온 게 실감이 났다.
왁자지껄한 시장 바닥, 즐겁게 길거리 공연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활기넘치는 길거리들, 깔깔거리며 정신없이 길을 헤치고 달리는 아이들. 오랫동안 황궁에서 지내오며 예법을 중시해야 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매일을 보내다가 이런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자 신기해서 눈이 저절로 갔다.
"그렇게 신기하냐?"
아주 눈을 못 떼네.
피식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괜히 민망하져 고개를 바로 했다가 눈앞에 들이밀어진 꽃다발에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노란색과 다홍색, 흰색의 꽃들이 적당히 섞여있는 예쁜 꽃다발이었다. 들이밀어진 걸 멍하니 보고 있자 그것을 들고 있던 아이가 다른 손을 펼치며 냉큼 입을 연다.
"동전 1잎만 주세요!"
"안 산다, 꼬마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형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아이가 입을 비죽거린다. 안 돼. 형이 다시한번 단호하게 말하자, 시무룩해져선 뒤를 돈다. 자그마한 어깨가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 모양을 보던 나는 다가가 아이를 잡고 돌려세웠다. 아니야, 하나 주겠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든 나는 다시 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고서 미간을 설핏 구기며 내뱉는다.
"쓸데없게 그걸 왜 사."
"가엾잖아. 어린 나이부터 벌써 고생하고."
"돌아다니면 저런 애들은 앞으로 정말 많이 볼 거야. 그럼 넌 앞으로 계속 사줄 거야? 그런 거 아니면 적당히 무시해."
조언해주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깐 코를 파묻고 향기를 맡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형은 한숨을 쉬곤 앞서나갔다. 코를 뗀 후 다발 속에서 옹기종기 서로 모여있는 꽃송이들을 잠깐 바라보았다. 노오란 꽃송이를 닮은 그녀가 얼핏 떠올랐다.
"남는 방 있을까요?"
"방이... 아, 이게 누구야!"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남은 방이 있나 찾아보던 여관 주인이 고개를 들어 형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형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남자가 깍듯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오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민망한 듯 코끝을 긁적이던 남준이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었다.
"아, 선생님은 무슨...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제 아들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잖습니까."
"에이... 그러고보니 승완이는 어때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렇습죠. 승완아, 이리 와봐라!"
뒷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아이가 부르는 목소리에 재빨리 뛰어왔다. 여관 주인의 목소리에 달려온 소년은 형을 보고서는 얼굴이 급격히 밝아지며 밝게 인사를 건넨다. 준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제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키도 많이 자랐네."
"히히, 그쵸? 아버지보다 더 클 거에요!"
"녀석도."
소년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주는 형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여관 주인은 방은 어떻게,냐며 되묻는 형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본 목적을 상기해냈다. 아무튼, 오랜만에 뵈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여기서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해드립죠.
* *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은 후 물기를 털어내고 거울 앞에 선 내 눈에는 조금 파인 왼팔의 살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패인 부근을 만져본다. 다른 피부와는 달리 보기싫은 흉터가 자리해 있는 이 흔적은, 볼때마다 그 날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생살을 파내고 들어내던 감각은 지금 되새겨보아도 끔찍했었기에 살짝 진저리를 치고서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 묵기로 한 방으로 돌아오자 약초 향이 온통 방을 감싸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또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남준이 형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서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로 말소리가 날아온다.
"왜 여냐."
"향이 너무 심해서 그렇지. 머리 안 아파?"
"그다지."
집중하고 있을 때면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모습에는 이제 익숙해졌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서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몸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부스럭거리기를 반복해도 정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형에게 흥미를 잃은 나는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았다가 궁금한 점에 입을 열었다.
"형은 그 오랜시간 동안 집을 떠나있으면서 약초에 대해서 공부한 거야?"
"어."
"정말 집안과는 홀로 다른 성향이네. 형만 검을 안 쓰잖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보다는 반대로 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선택한 거야."
"검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구할 수 있어. 그리고, 약초로도 충분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고."
맞받아치는 말에 형은 말이 없었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느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형이 생각한 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저번에 여관 주인 아들도, 보니까 형이 도와준 것 같은데."
"별 거 아닌 일이었어."
"누군가에게는 그 별거 아닌 도움이라도 크게 느껴질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독학한거야?"
몸을 일으킨 후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집안과는 아예 다른 쪽이라 집에 관련 서적도 별로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모르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을 터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텐데.
내 말에 지금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집중하고 있던 형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대답이 들려온다.
"물론 아니지."
"그럼 누구한테 배웠는데?"
"있어, 그런 사람."
"그게 누군데? 형에게 가르쳐줬을 정도라면 정말 대단했겠는걸, 그 사람. 나도 보고싶다."
"못 봐."
"왜?"
"죽었거든."
뚝 하고 떨어진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죽어서, 못 봐. 쐐기를 박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미안. 형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들려온다. 괜찮아. 어차피 오래 전 일이고, 복수도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복수?"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눈이 내리던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절정으로 치달아 사방이 온통 절망이었던 날. 지친 몸을 이끌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중 나타난 황제, 그리고 월영단.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잔인했던 형의 모습도.
* *
하는 일이 없는데도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더워서 땀을 미친듯이 흘리던 계절도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기온에 밀아국의 길거리는 활력이 감돌고 있었다. 창문에 기대앉아서 공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여행은 재밌었다. 그래도 마냥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매치기를 당해서 일주일을 빈털털이로 살아야 했었던 적도 있었고, 지나가다가 시비가 붙어 크게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나는 폭력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래서 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길 무시하는 거냐며 펄펄 날뛰는 덩치에 어쩔 수 없이 주먹을 휘둘러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사소한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어찌되었든 간에 '여행'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저녁, 광장에서 파티가 열린다는데."
"가자고?"
"여행이 원래 그런 맛이지."
음악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이어지는 정신없는 행사같은 곳은 형이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파티라. 황궁과는 다르게 모두가 편하고 재미나게 놀겠지? 나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에서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서로 짝을 맞춘 채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경쾌한 음악소리가 온통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왠지 어울릴 수 없는 느낌에 나는 가만히 서서 어색하게 박수만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음악이 멈추고, 내 앞쪽에 있던 여자가 치마를 살짝 접어들며 상대가 되어주었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음에 들면 계속 같은 사람이랑 추어도 되고, 다른 사람과 추고 싶으면 언제든지 짝을 바꾸어도 되는 것이라 저걸 보니 여자는 다른 상대를 찾고 싶은 듯 했다. 여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맞인사를 한 남자도 곧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다른 남녀들도 짝을 바뀌어서 곧 흘러나오는 가락에 맞추어서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방금 남자에게 인사했던 여자가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랑 같이 추실래요?"
여자가 먼저 제의하는 경우에는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임을 알았기에 얼떨결에 내민 손을 붙잡고 광장 한복판으로 끌려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빙글빙글, 한바퀴 돌리고 또 돌리고.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던 여자가 음악소리 사이로 말을 건넨다.
"춤 잘 추시네요."
"그쪽도요."
전에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 발을 움직이고 있던 내 행동이 얼추 들어맞았나 보다. 여자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건넨 말에 그녀는 마음에 든 듯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김여주의 모습이 겹쳐져 나도 모르게 발이 꼬였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곧 중심을 되찾았지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는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네고 광장을 빠져나왔다.
* *
남준이 형이랑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한 병 두 병 비워지고, 밤이 깊게 무르익어가서야 나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형. 어, 왜. 예전에... 그 때 있잖아, 눈 내린 산에서 월영단들을 만났을 때 말이야.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에 형은 반응이 없었다. 괜찮은 건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만하라고 제지하지는 않았기에 그에 조금 힘을 얻어 말을 이었다.
"그녀...라고 했던 말."
".........."
"그게 누구야?"
형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잔을 들어올리는 행동에 안에 들어있는 갈색빛 액체가 흔들거렸다. 흔들리는 술을 바라보다가 단번에 들이킨 남준이 형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전에, 나한테 약초를 알려주었다고 한 사람이 있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몇 개월 전에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그녀야. 일종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지."
그 말을 듣는 나는 자연스럽게 결말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죽었어. 담담하게 내뱉었지만 가늠할 수 없는 단어의 무게가 떠올랐다. 형은 빈 술잔에다가 다시 술을 따랐다. 형은 손끝으로 날 한 번 콕 짚었다.
"네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달랐지."
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나 알려줄까? 그 여자도, 월영단이었어.
충격적인 사실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형은 한 모금 술을 마시고서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물론 나도 그걸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어.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당차면서도 순수했던 사람이었거든.
"약초라는, 관심있는 부분이 같아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다가 정이 든 경우였지."
"........."
"어쩌면 그 시간이 길었다면 마음이 깊어졌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시간이 길었다면.' 감정이 싹트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면 귀찮은 척 하면서도 반갑게 맞이해주었었는데, 어느 날 방문했더니 바닥에서 피를 쏟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사방이 온통 피냄새였지. 손끝에 닿았던 피부는 무척이나 차가웠고.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서 말하는 형의 눈동자는 살짝 흐릿해졌다가 도로 또렷해졌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 눈빛은 아직도 기억나.
"그리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
"...내 손으로 죽였지."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남준이 형은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나도, 차마 물었을 때 이처럼 아팠던 기억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라 그저 술잔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던 남준이 형이 피식 웃으며 다물려있던 입술을 뗐다.
"말로는 다 정리했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안다."
짧았지만 그만큼 복잡했던 여주와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형이 말을 잇는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간 문제지.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그걸 나처럼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 *
- 어릴때 태형이랑 진지하게 말하다가 싸웠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 만일 우리가 같은 사람을 동시에 좋아하면 어떡하지?
그때 나는 서로 싸우지 말고 양보하자 라고 말하려다가 먼저 선수를 쳐서 자기가 채가겠다는 말에 열이 받아서 그럼 나도 양보 안 해!라고 했다.
- 선녀님을 만났다. 어쩌면 조금 살벌한 선녀님일지도 모르겠지만.
- 맑게 웃음짓는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정자에 앉아서 전하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절로 눈이 갔다. 나도 나중에 결혼한다면 저런 미소를 짓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잡았어야 했는데.
- 다시, 그녀를 보았다. 전과 달리 맑은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왜지? 그 이후로 그녀가 자꾸 떠오른다. 반년도 더 지난 일인데 왜 이제와서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지 모르겠다.
- 알겠다. 이건.....
- 사랑이 죄는 아니지만,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죄다.
- 그런데 보고 싶다. 누가 날 말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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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에 태형이랑 싸웠던 그 문제는 쓸데없는 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 그분에게서 행복하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했다.
-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게 있다면 세상은 넓고, 보고 느낄 게 많아 정신이 없지만 그래도 남아있던 감정을 단시간에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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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길에 오른지 3년이 되어간다.
-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 갈색 단발머리.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입가에 배이는 미소보다 부드럽게 접어지는 눈웃음이 더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모든 게 그녀와 정반대인 사람을 만났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 * *
- 박지민이 떠나고, 4년 후.
중앙 경기장에서는 검은색 가면을 쓴 사내가 경기장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갈색 가면을 쓴 채 이미 경기장에 들어와있던 사람은 그러한 상대방을 보고 천천히 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심판이 가리키는 위치에 선 검은 가면이 천천히 검을 빼어들었다. 사방에서는 관중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 열리는 마지막 경기. 관중들은 더욱 흥분하고 열광하고 있었다. 이번년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검은 가면일 것인가, 갈색 가면일 것인가! 내기를 거는 자들은 각기 지지하는 자들을 응원했다. 장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함성소리를 듣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시작해라."
옆에서 말을 들은 사람이 심판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심판이 깃발을 아래로 내리긋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면을 쓴 검사 두 명은 쉽게 달려들지 않은 채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경기장에 감도는 긴장감에 함성소리도 덩달아 작아지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서로 반대로 움직이던 두 명은 갈색 가면이 먼저 공격을 넣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검의 부딪침에 다시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커졌다.
화려한 기술들보다는 깔끔한 동작들로만 이어지고 있었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 채였다. 두 명은 모두 비등비등하게 검을 놀리고 있었다. 갈색 가면이 검은 가면의 오른팔을 노렸다. 검이 빗겨나가며 입은 소매가 살짝 잘려나갔다. 그 때, 빈틈을 놓치지 않은 검은 가면이 갈색 가면을 향해 날카로운 검을 휘둘렀다. 화들짝 놀란 갈색 가면이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툭. 갈색 가면이 뒤로 빠진 자리에는 얼굴을 가렸던 가면의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왼쪽 눈을 드러내보인 갈색 가면의 남자가 씩 웃어보인다.
"제법이네."
피식 웃은 남자가 반쯤 거추장스럽게 남아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탕. 반쯤 날아가 볼썽사나워진 가면이 땅으로 떨어졌다. 말끔한 얼굴에다 앳된, 경기 중 유례없이 드러난 검사의 얼굴에 관중석에서는 함성소리가 더 커졌다.
태형은 얼굴에 묻어나온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긴장감이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가면 대신에 얼굴에 상처가 났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형은 제 얼굴이 드러난 모습을 보고 상대편의 검사가 잠시 머뭇대는 느낌을 받았다.
"덤벼."
태형이 고개를 까닥였다. 검은 가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관중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검사에게 여자들은 신이 나서 열광했고, 남자들은 그러한 태형의 반대편인 검은 가면이 침착하게 상대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겨라, 꼭 이겨서 저 놈의 콧대를 눌러줘!
목소리들이 서로 충돌해서 정작 경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치열하게 맞부딪히던 경기의 승패가 났다. 날아오는 힘에 실수로 태형의 손에서 떨어져나간 검, 그리고 그 후 바로 목끝에 겨누어진 날카로운 검 끝. 태형은 눈동자만을 내리깔아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예리한 칼끝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본 심판이 큰 소리로 승자를 알린다.
"승자는, 검은 가면의 검사입니다!!"
아쉬움과 환호 소리가 모두 섞인 목소리들이 경기장을 떠나갈 듯이 울려댔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패배를 인정하고선 웃어보였다. 들이밀어진 검이 치워지자 태형은 이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빈틈을 일깨워준 검은 가면에게 악수를 청한다.
"대단한데."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 대신, 검은 가면의 남자가 손을 들어올려 천천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내렸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던 태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박지민이 제 눈 앞에 서 있었다.
"다녀왔어."
지민은 웃으며 가볍게, 무척 홀가분해진 말투로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잠시 놀란 표정으로 있던 태형도 곧 얼굴을 무너뜨리고 지민을 환영했다.
지민은 태형의 어깨 너머로 저 위에서 절 바라보고 있는 황후를 볼 수 있었다. 뜻밖의 인물에 놀라움으로 잠시동안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자신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지민도 자신에게 웃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따라 웃어보였다.
당신을 놓아보낸 지금,
나는 행복하다.
- 박지민.fin
▷ 1부 적국의 황태자 ~ 2부 천야일야 + 번외
: 2015. 11. 18 ~ 2016. 2.14
END.
▶ 번외도 끝, 완전한 끝! |
별로 안 찌통이였죠? 제가 원래부터 계획했던 번외 두 편은 찌통보다는 그냥... 예쁜 느낌? 아련하지만 다 해결된 느낌? 뭐라냐 나 말 진짜못한다..ㅠㅠ 암튼 그런 느낌으로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 * *] 부분으로 제가 본문과 갈라놓은 밑부분은 일부러 태형이 번외와 이어지게끔 만든 거랍니다! 4년간 여행을 떠나면서 완전히 정리하고, 어쩌면 새 사랑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지민이가 돌아와서 예전의 추억을 잠깐 바라본 정도....!
본문도 끝 번외도 끝끝 이제 정말 끝났네요! 마지막부분 지미니처럼 저두 홀가분해진 느낌~!
오늘 발렌타인 데이라구 하는데...저는 상술이라 그딴거 챙기지 않았습니다(뻔뻔) 초콜릿 대신 제 하트를...♥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