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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막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루한의 행동에, 레이는 의아함을 느끼며 술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렘으로 두셨으면서, 어째서 취하지 않으십니까? 항상 제 곁을 따라다니며 술탄을 보호하고, 술탄을 보좌하는 레이의 말에, 루한은 턱을 두어번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순수한 아이를 억지로 취하고 싶지는 않아. 새삼 처음 보는 루한의 태도에, 레이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원래 술탄이라면, 소유해야 할 것은 모조리 가져야 직성이 풀리시는데.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가는 루한을 뒤따라가며, 레이는 새삼 저 하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방방 뛰는 루한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보였다. 


 술탄이 많이 웃으신다. 궁정 안에서 일하거나 생활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한가지 더 딸려온 소문은 술탄께선 남자 하렘을 총애하신다 라는 말이였다. 레이가 옆에서 아무리 걱정을 해줘도, 루한은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낙천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웃는 모습이 보기 좋으십니다. 레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에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을 루한에게 해줄때, 고맙다며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화로운 술탄이였다.


 한밤중의 하렘의 방이였다. 모래시계를 돌려가며, 밤을 지새워 기어이 동이 터 오를때 쯤에야 민석을 품에 안고 잠이 드는 루한이 있으리라. 왠일로 무릎을 내어달라 칭얼거리더니, 민석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베고 누워버린 루한이였다. 슬슬 다리가 저려오는데 술탄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옆에 침대가 버젓이 있는데도, 굳이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속으로 꿍얼거리며, 눈을 감은 술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민석."
 "네."
 "요즘에, 다들 내가 많이 웃는다고 말해줘."
 "술탄께서는 원래부터 잘 웃으시지 않으셨어요?"
 "음. 그런것 같아."



 그러니까 나한테 자주 웃는다는 소리를 해주겠지. 잔소리에 이은 레이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루한은 그릇에 담겨있던 포도알을 만지작 거렸다. 술탄에겐 아주 좋은 일이겠네요. 덤덤하게 들려오는 민석의 목소리에, 그럼 그렇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루한이였다. 서로는 서로에게 덤덤했다. 루한도, 민석도 그렇게 개의치는 않는 듯 했다. 민석의 요청에 창문가에 달아둔 천 자락이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유여하게 흐르는 모습에, 민석은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해?"
 "저 분홍 천이 나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화같은 생각이네. 루한은 허벅지를 다시 베고 누워버렸다.
 "고작 천 자락인데, 참 자유로워 보여요."
 "민석은 지금도 충분히 자유롭잖아."
 "그런가요. 술탄이 그러시다면 그런거죠."



 후후. 민석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루한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이제 민석의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맨 처음 만난 날의 약속을 아직도 실천하고 있는 루한이였다. 이럴때만 부지런하지. 틱틱거리며 민석은 입술을 내밀었다. 주황빛의 머리가 살짝 자린 느낌을 지어냈다. 지긋이 민석을 올려다 보던 루한의 손이 민석의 머리로 향하자, 몸이 흠칫 떨리는게 느껴졌다. 귀엽기는. 큰 손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제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몰라요."
 "네가 말하던 그 고향이 아니였나?"
 "말했잖아요. 전 유랑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아. 그랬지. 기억속에서 민석의 이야기를 다시금 상기시킨 루한이 말을 계속 하라며 민석에게 이르렀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랬어요. 네가 태어난 곳이 어디든, 지금 있는 곳을 고향처럼 생각해라. 그래서 전 유랑 생활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제 1의 고향이 아닌, 제 2, 제 3의 고향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멋진 일이였으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생활을 해보는게 매력적이였고, 흥미로웠어요."
 "응."
 "이제는 제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되게 궁금해요. 되게 이국적인 물건들을 많이 보면서, 과연 내가 있었던 곳은 어떤 문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니까."

 "......"
 "루한은 좋은거에요. 전 제 1, 제 2, 제 3의 고향들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데 정작 최초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모르니까요. 루한은 지금 이곳이 최초의 고향이잖아요.
 "부러운 것도 참 특이하네"
 "아무튼요. 루한은 복받은거에요."



 중얼중얼 이야기를 늘어놓는 민석의 눈에서는 허탈함과 씁슬함이 교차하는 듯 했다. 부모님에겐 온갖 이국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서방 국가에선 볼 수 없는 줄로 된 목재 악기들도 그랬고, 동양 국가에선 볼 수 없는 식기들과 수저 도구들이 그러했다. 어머니는 해금을 켰고, 아버지는 나무를 깎아 실생활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만들었었다. 사막을 건널때도 혼자가 아니여서 행복했었다. 오아시스를 찾을때면, 고단했던 여행길을 추억으로 쟁여둘 수 있어서 좋았다.



 "고향이랑, 자유는 그런거에요."



 민석이 푸스스 웃었다.



 "누릴수 없을때는 간절히 생각나는게 둘이 똑 닮았어요. 누리고 싶지 않을때는 질리도록 반복해서 찾아 오는데."
 "그렇구나."
 "네. 그래요."



 모래시계가 돌려졌다. 바깥 사막은 매우 어스름했고, 하늘은 어두운 먹색을 머금은 채 반짝이는 별들을 콕콕 박아 놓았다. 옅은 바람을 탄 분홍빛의 천자락은 유수처럼 나부꼈고, 촛농이 만연한 촛불은 다시금 제 빛을 되찾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은 루한은, 민석의 말엔 배울점이 많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삶의 지혜를 아는 민석이였으니까.


 저도 모르게 루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민석은 방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화려한 침대와 색색의 쿠션들이 쌓여있고, 붉은 카펫과 하얀 대리석 벽들과 기하학적인 무늬들로 이루어진 천장. 과일이 담겨 있었을 그릇과, 물을 좋아하는 민석을 위한 금빛 주전자와 각종 잔들. 술탄의 모자와 신발들. 그리고 자신이 신었던 신발과 둘렀던 옷들. 그리고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는 술탄. 고요한 숨소리가 민석의 방을 울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께요."
 "아쉽기는 하지만, 내일이 있으니까. 잘들었어. 민석."



 머리에 닿아오는 작은 손의 느낌이 좋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루한이였다. 루한의 말에 민석은 기쁜듯 웃었다.



 "민석."
 "말하세요."
 "민석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얻어서 여러곳을 찾아 다녔잖아."
 "그렇죠."
 "나는 내 고향을 지키고, 그 안에서 자유를 얻으려고 피터지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어."



 피로 얼룩지기만 했던 그 날의 아픔은 동그랗게 뜬 보름달만이 가지고 있을 필름이리라. 과거를 회상하며 루한의 시선이 멍한 곳에 닿자, 민석은 의아한 눈치로 눈을 굴렸다. 이 사람은 술탄이다. 머리를 쓰다듬던 민석의 손이 멈칫했다.



 "보통 그렇잖아. 술탄에겐 자식이 셀 수 없이 많고, 그에 따라서 권력 싸움은 암투와 피를 불러온다고. 이 말이 딱이였어. 난 서열 30위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왕자에 불과했으니까."
 "...아."
 "어느날 어머니가 아버지라는 술탄에게 맞는 모습을 봤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잠자리를 거부해서 때렸다더라. 순간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칼을 뽑아 술탄의 심장에 꽂아버릴까 생각했어. 근데 그러면 반역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어머니가 완강하게 말리시더라. 그때부터 생각했어. 내가 살 길은 내 편을 모아서 이 궁을 장악하는게 유일한 길이라고. 악착같이 내 편을 모으고, 반란을 일으켜서 권력을 잡았어. 이 길을 돌아보면, 온통 핏자욱으로 얼룩져 있어."



 달빛이 완연하던 그날은, 루한이 자신의 형제들과 어머니들을 베어버리고, 마지막으로 술탄의 배를 찔러버렸을때야 비로소 끝이 났다. 술탄의 궁전 안은 피냄새로 진동했고, 냄새를 맡고 모여든 굶주린 독수리들이 한참동안을 날아다니며 먹이를 채갈 기회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었다. 술탄의 궁전 꼭대기에서 피가 묻은 칼을 쳐들었을때, 루한을 따르던 자들은 환호하며 저들끼리 기뻐했다. 레이가 고생했다며 루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을때, 그제서야 빨개진 손을 들고 흐느끼던 루한이였다. 아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복수로 시작했던 자그마한 일이, 너무 크게 끝나 버렸다.



 "무섭지는 않았어."
 "......"
 "근데, 나중엔 진짜 후회스럽긴 하더라."



 그만해도 괜찮아요. 민석은 술탄의 표정을 살펴가며 그를 말렸다. 모래시계가 한번 더 돌아갔다. 많은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민석은 동화같은 생각을 하고, 나는 현실적인 생각을 해."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 같다 이런거에요?"
 "족집게네."
 "루한. 사람은 서로 틀리지 않아요. 단지 생각하는 사고가 다르기만 할 뿐이에요. 루한이 현실적인 생각을 하던, 무슨 생각을 하던, 루한은 그대로 루한이니까 상관 없어요."



 비로소 완전한 위로를 받는다. 루한은 속으로 안도감과 그동안 지고 있었던 죄책감을 그제서야 씻어 내리기 시작했다. 술탄은 술탄의 일을 해낸거니까요. 민석이 배시시 웃으며 루한의 볼을 쓰다듬자, 루한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찾아 들었다. 술탄의 눈은 반짝이는 별 같다. 하늘에 떠오른 별을 생각하며, 민석은 계속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민석은 특별한 하렘이야."
 "이젠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네요."
 "그래도, 민석은 진짜 특별해. 너무 좋아."



 술탄은 제 하렘의 손을 잡고 사랑스러운 말을 되풀이 했다. 직접적인 입맞춤이나 포옹같은건 없었지만, 마음속으론 충분히 서로를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둘이였다. 바깥에서 조용히 서 있던 첸은 곧 두분께서 무슨 일을 내시겠구나 생각했다. 궁엔 황후가 없고, 하렘이 별로 없다는 이유를 감안하면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니까. 이내 보초를 서기 위해 다가온 레이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첸은 뒷걸음으로 바삐 사라졌다. 어지러이 걸려있는 유리발의 너머에서 루한과 민석의 말이 조곤조곤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깊은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즐거우셨지요? 아니면 조용히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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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안녕하세요 작가님!!!!!!!!! 인사드리업니다 흐흫 언제봐도 이야기가 참 좋은거같아요 쪽지보고 바로 왔네요 루한이가 민석를 정말 위한다는게 왜 이렇게 좋죠 잌ㅋㅋㅋㅋㅋ 나도 나쁜사람인가봉가 그렇군요 밍석이는 고향이 없었네요(씁쓸).. 저렇게 둘이 얘기 하다가 민석이도 깨닭게 되는게 있겠지요ㅎㅎㅎㅎ 작가님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닿ㅎㅎ
10년 전
메카
그대신 민석이는 언제든지 찾아갈 고향들이 많으니까요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용
10년 전
독자2
달걀찜이에요!! 와... 정말 사람 그자체를 보아라. 라는 말이 맞는것 같아요ㅠㅠㅠㅠㅠ 민석이가 루한이에게 어찌 보면 어렵고 어찌 보면 되게 당연한 말을 건네주었을때 어우... 소름이 막ㅠㅠㅠㅠㅠㅠ 저도 주위에 저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네요ㅠㅠㅠㅠ하물며, 저도 저런 사람이 되기를 항상 노력하고ㅎㅎㅎㅎㅎ힣 ㅠㅠㅠㅠㅠ엉 몰랐던 둘의 과거가 드러났네요ㅠㅠㅠㅎㅎ 서로 의지가 되어주는 두사람의 관계가 정말 보기 좋아요ㅠㅠㅠㅠㅎㅎ 작가님 항상 잘보고 갑니다♥♥
10년 전
메카
감사합니다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여!
10년 전
독자3
푸른사막도 너무재밌어요ㅠㅠㅠ이런아이디어는어디서내시는거에요ㅠㅠㅠ1호팬저기억하시죠?!작가님글다읽어야겠어요ㅠㅠ라디오기다리면서!ㅎㅎ좋은글감사해요♥♥항상잘볼게요!!!!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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