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A tempo.
09
우리의 첫 기념일 (이른 사랑)
연애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찾아온 기념일은, 내 생일이었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고 맞는 생일이라,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별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뭐 거대한 이벤트나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정국이가 한창 수시 준비로 머리가 복잡해보였기에, 내가 오히려 힘을 줘야지! 하는 생각이 컸다. 생일을 핑계로 맛있고 비싼 것 좀 먹여야지.
생일 당일 날, 정국이를 만나기로 한 주택단지 사이의 놀이터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름 생일이라고 원피스를 입었다가, 노숙해 보이는 모습에 평범한 흰 면티와 반바지를 입었다. 꾸꾸야. 빨리 와. 그렇게 혼자서 정국이를 기다리며 그네를 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닿았다. 살며시 눈을 감아보았다. 생일 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 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정국이가 소중해졌다. 혼자 눈을 감고 있자, 정국이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져왔다. 이것도 병이야. 진짜. 머릿속에 잔뜩 정국이를 그려내고 있는 데, 앞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동시에 불어온 바람에 정국이의 향이 전해졌다.
"정국아!"
"그네 재밌어? 사람 온 지도 모르고 타네."
"언제 왔는데?"
"혼자 히죽히죽 웃을 때부터?"
"...이씨. 왔으면 말을 하지!"
"그네 타는 거 보느라."
"그걸 뭘 봐!:"
"애기 같아서."
"...무슨 내가 나이가 몇 갠데..."
"궁금해."
"뭐가아"
"애기 때도 이렇게 예뻤을까?"
"...당연하지."
"내가 방금 본 것처럼 예쁘게 그네 타고 놀았겠지?"
"훨씬 예뻤을 걸?"
"아쉬워-."
"뭐가 아쉬워?"
"어릴 때 너를 못 봤잖아."
"푸흐. 뭐야."
"...진심이야. 너보다 먼저 태어날 걸."
정국이는 아마도 저를 생각하며 베시시 웃는 나를 본 것 같았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왔으면 말을 하지 하고, 조금은 높아진 목소리를 뱉었다. 그러자 정국이는 내가 그네 타는 걸 보고 있었다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그런 정국에게 그네 타는 걸 왜 보냐고 말하며, 그네에서 내렸다. 손을 두어 번 탁탁 털고, 그를 향해 걸어가자. 그는 내게로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애기 같아서. 하고. ㅇ, 애기? 나는 나에게서 이미 소멸된 단어를 듣자 마자, 온 몸이 꼬여왔다. 애기는 무슨. 내가 나이가 몇 갠데. 나는 사과처럼 아주 잘 익은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묻었다.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제게 마주하며 말했다. 궁금해.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뭐가아. 부끄러운 마음에 길어지는 말꼬리였다.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자꾸만 얼굴에 붙어버리는 머리칼을 넘겨주며 물었다. 애기 때도 이렇게 예뻤을까? 하고. 그의 질문에 잠깐 동안 어릴 적의 나를 떠올렸는데, 내 어릴 적의 미모는 진짜 거짓말 안하고 장난 없었다. 내가 봐도 너무 예뻤으니까. 나는 그에게 뻔뻔하지만 솔직하게, 당연하지 하고 답했다. 나는 그의 품에서 가만히 그의 비웃음을 기다렸는데, 그는 비웃기는 커녕. '내가 방금 본 것처럼 예쁘게 그네 타고 놀았겠지?' 하고 되물어온다. 나 역시 다시금 뻔뻔하게 말했다. 훨씬 예뻤을 걸? 정국이는 내 대답에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아쉬워- 하면서 내 어깨에 제 고개를 묻었다. 갑자기 뭐가 아쉬워? 나는 그런 정국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내리며 물었다. 뭐가 아쉬워? 그는 내 목덜미에 제 고개를 묻은 채로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너를 못 봤잖아. 나는 그의 어이없는 말에 푸흐- 하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진짜. 그러자 그는 꽤나 진지했던 모양인지, 제법 엄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진심이야. 너보다 먼저 태어날 걸.
"다음 생에는 너가 먼저 태어나라. 그럼!"
"그럴 거야."
"우리 빨리 가자!"
"어디를"
"밥 먹으러!"
"어디 갈 건데?"
"비밀이야.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여깄어!"
"왜 누나 마음대로 해?"
"...어... 내 마음이야!"
나는 정국이의 투정에 다음 생의 탄생 순서를 양보했다. 나는 정국오빠도 좋으니까. 뭐. 정국이와 놀이터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식당 예약 시간에 늦을 지도 몰랐다. 나는 정국이의 큰 손을 마주 잡고, 우리 빨리 가자! 하고 그를 보챘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어디를 가냐고 물었고, 나는 밥 먹으러!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 많은 질문들이 따라 붙었지만, 말 해 줄 수 없었다. 생일 끝나기 전에 서프라이즈로 말해주고, 소원 들어달라고 해야지! 히히. 정국이는 밑도 끝도 없이 내 마음이야! 하고 답해오는 내 손을 단단히 움켜잡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옆에 서서 걸었다.
너무 비싼 음식을 사면 정국이가 부담을 느낄까 싶어, 적당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왔다. 정국이 역시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다행이다. 정국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나는 그런 정국이에게 응. 하고 답 한 다음, 음식을 가지러 갔다. 아 뭐 먹지? 우선 연어부터...!
정국이가 뭘 좋아할 지는 몰랐지만, 내 나름대로 선정한 음식들로 정국이의 접시도 채워왔다. 하지만 자리에 도착했을 때에도 정국이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뭐야 - 얘 이러고 도망간 거 아니야? 나는 이성과 식욕 사이에서, 먼저 먹을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 혼자 먹는 건 좀 아니다 싶어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십 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헝클어진 제 앞머리를 정리하며 내게 걸어오는 정국이었다.
"야! 빨리 와!"
"..."
"뛰어왔어? 왜 이렇게..."
정국이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제 손등으로 쓸어냈다. 화장실이 그렇게 멀었나? 나는 그런 정국이에게 물을 건네며, 뛰어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국이는 내가 건네는 물은 받지도 않고, 이곳의 직원분들처럼 테이블 옆에 무릎을 굽혔다. 마치 주문을 받는 것처럼.
"뭐 하는 거야?"
"...싸인해주세요."
"...?"
"제가 작가님 엄청 팬이에요."
정국이가 제 등 뒤에 숨겨뒀던 책을 들이민다. 내 첫 소설집이자 등단작이었다.
[A tempo : 본래의 속도로]
나는 제법 진지하게 '제가 작가님 엄청 팬이에요.' 하고 말해오는 그를 바라봤다. 으아. 귀여워 진짜. 우리 정국이 오늘은 장난치고 싶은 날이니? 누나가 얼마든지 놀아줄게!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제 팬이시라니까 싸인 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정국이요."
"멋진 이름이네요-"
"네. 근데 이름보다는 얼굴이 더 멋진 편이에요."
"푸흐흐흐. 이거 뭔데에? 계속 해야 되는 거야?"
"응. 준비한 거 다 해야 돼. 계속 싸인해주세요."
"흐흥. 알았어. 피에쓰 써드릴까요?"
"네"
"제 마음대로 써도 돼요?"
"뭐, 마음대로 하세요."
"...자. 됐다! 여깄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안 끝났어?"
"책 맨 뒤에 포스트잇 있어요. 거기에 체크 좀 해주세요."
진짜 팬처럼 싸인을 받는 그가 낯설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 싸인을 해주면서도, 자꾸만 나오는 웃음에 물었다. 계속 해야 되는 거야? 그는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준비한 걸 다 해야 한다며, 단호하게 입 꾹꾹이를 해온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알았다며, 야무지게 피에쓰까지 적어주었다.
'고마워. 내 뮤즈야.'
자. 됐다! 나는 피에쓰까지 마치고 그 다음 단계는 뭘까 생각했다. 손 잡아주세요? 아니면 뭐 사진 찍어주세요? 하지만 그는 책 맨 뒤를 가리키며, 그곳에 포스트잇이 있다고 체크 좀 해달란다. 나는 무슨 포스트잇인가 하고 책의 맨 뒷장을 폈다. 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의 말을 적는 편인데 - 거기에 뭐 적어 뒀나?
-
첫 소설집이네요. 가슴이 벅찹니다.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는 작품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작가의 말 밑으로 보이는 건, 귀여운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이었다.
첫 번째 포스트잇에는
1. 작가님의 이상형은?
ㅁ 전정국 ㅁ 정국이 ㅁ 기타는 없음 (기타라면 생각을 바꾸길)
음... 이건 풀네임으로! 가장 첫 번째 칸에 체크했다.
두 번째 포스트잇에는
2. 작가님의 생일은?
ㅁ 8월 1일 ㅁ1994년 8월 1일
얘... 이거 생일 이벤트야? 나는 두 번째 포스트잇을 보자마자 정국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빨리 해. 하며 나를 채근했다. 이건 두 번째 체크.
세 번째 포스트잇에는
3. 생일 날 하고 싶은 건?
ㅁ 정국이랑 데이트 ㅁ 전정국이랑 데이트 ㅁ 팬이랑 데이트 ㅁ 연하랑 데이트
고민 할 것도 없지. 이건 전부 다 체크.
그렇게 드디어 도달한 마지막 포스트잇에는
4. 사랑해
나는 정국이에게 처음 받아 본 '사랑해'라는 글자에, 괜히 그 글자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책상을 제 손가락으로 툭툭 - 치며 말해온다.
"나 좀 봐봐."
"뭐, 뭐야... 나 생일인 거 알았어?"
"응. 여자친구가 너무 잘나서 인터넷에 다 나오던데."
"아..."
"얼굴 말고 생년월일은 짠 하고 나와 있더라."
"..."
"책 맨 앞에 작가이력에도 있어."
"뭐야. 그럼 안다고 말하지..."
"지금 말하잖아."
"...고마워."
"오늘 작가님 생일이니까, 작가님 이상형 전정국이랑 데이트 하자."
"이미 하잖아..."
"그냥 데이트 말고."
"...그럼"
"사랑해."
그가 내 생일을 알 수 있는 경로는 참 많았는데, 난 또 그걸 모르고 있었네. 으휴. 바보. 정국이는 내가 체크한 포스트잇을 제 손에 들고 한 장씩 보며 말했다. 오늘 작가님 생일이니까, 작가님 이상형 전정국이랑 데이트 하자. 하고. 나는 그런 정국이에게 이미 하고 있지 않냐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냥 데이트 말고... 하며. 마지막 포스트잇인 '사랑해'를 내게 보여주며, 아주 갑작스레 말했다. 사랑해.
그에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 역시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말이었고. 사실 그 '사랑해'의 의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 작품 속 구절에 대한 대답 같았다.
- '사랑해'라는 말이 거북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나를 향해 장미꽃을 들이밀며, 프로포즈 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를 사랑할 거라면,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무너트려도 괜찮을 것 같을 때 와요.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어도 괜찮을 때." -
정확히 기억하는 문장이다. 전 남자친구들한테 적지 않게 상처를 받았던 지라, 독기에 바짝 올라 쓴 문장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청혼을 거절하며 하는 말이었다. 정국이는 이 문장을 보고 하는 말일까?
"너 때문에 내 모든 게 무너져도 좋아."
"...!"
"너무 이르다고 생각 안했으면 좋겠어."
"...야."
알고 있었구나.
"사랑해."
"..."
"너로 인한 파멸도 괜찮아. 나는"
"..."
"원래는 내가 읽던 그 책을 가져 오려고 했는데, 집에 두고 와서... 생일은 오늘인데 지나면 의미 없잖아."
"..."
"그래서 서점에 가서 새로 사 왔어."
정국이는 알고 있었다. 내 작품 속 이야기를. 내게 '사랑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면서도, 이기적인 내 사랑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는 내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나 때문에 모든 게 무너져도 좋다고. 나로 인한 파멸도 괜찮다고. 그는 한없이 흔들리는 내 눈을 마주하고 다시금 말했다.
"사랑해요."
"..."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나는 결국, 그에게 사랑한다는 답을 해주지 못했다. 용기가 안났다. 정국이는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나를 향해 말갛게 웃으며 '생일 축하해' 하고 말을 건넸다.
Boy Moment
아. 별로 안 친한데. 말을 걸어 말아. 내 앞자리에 앉은 이름도 모를 여자애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답에, 아이의 어깨를 쳤다. 아이는 놀랐는지, 나를 향해 돌더니 잔뜩 얼굴을 붉힌다. 요즘 여자들은 얼굴이 다 빨간가? 우리 누나도 툭 하면 빨개지는데... 아. 귀여워.
"...왜?"
"물어볼 게 있어."
"나, 나한테?"
"응."
"뭐...뭔데?"
"그 여자들은 뭐해주면 좋아해?
"응?"
"아니. 그냥 여자 말고. 큼. 사람들은 뭐 해주면 좋아해?"
"...? 사람들이 뭘 해야 좋아하냐고?"
"응. 너 저번에 학교에서 누구 생일 축하 뭐 하다가 생물한테 뺐겼잖아."
"아... 응."
"그거 뭐였어?"
"..."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줄게."
"그..."
"빨리"
"그... 앨범 같은데에 포스트잇..."
"포스트잇?"
"응... 그 거기에 내가 질문 적으면 답해달라구..."
"왜?"
"싸인회 가면 말 할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싸인회?"
"응..."
"누구."
"방탄소년단..."
"그게 누구...아. 박지민 닮은 애 있는 거기?"
"...응"
"너도 참. 쨌든 고맙다."
"근데... 왜?"
"...나도 싸인회 갈거야."
"...?"
"너 포스티잇 있냐?"
"응..."
"좀 빌려주라."
"잠깐만. 여, 여기"
"다른 모양은 없어?"
"응?"
"하트나 별이나 뭐, 우주선 모양이나 그런거."
"아... 있어! 여기!"
"고마워"
요즘은 생일축하를 싸인 받으면서 하나보네. 나는 포스트잇에 뭐 적지.
- 정국이 앞자리의 여자아이이 / 그 날, 트위터 -
아미들아. 오늘 내 뒷자리에 앉은 존잘 남자애가 자기도 싸인회 간다는데... 아무래도 방탄 남덕인가봐. 내일 걔 앞에서 고엽 불러볼까?
나보다는 너. (더딘 사랑)
자료조사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밤 늦게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데, 창문을 무언가 툭- 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창문에 투둑, 투둑. 하고 빗방울이 맺혔다. 으아. 비온다. 평소 비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괜히 마음이 방방 들떴다. 하지만, 집까지 가는 데에는 꽤나 골치가 아플 듯 했다. 자료조사를 하느라 들고 갔던 노트북과 창작노트 그리고 거기서 조금씩 가지고 온 풀, 돌, 모래, 꽃. 거기에다가 현장에서 찍어 바로 출력한 사진들과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지만 소리 녹음에는 최고인 녹음기까지. 또 녹음을 마친 테잎들을 더하면.
두 손 두 발을 다 사용해도 무사히 집까지 들고갈까 말까인데... 비까지 내리다니. 나는 정국이와의 메신져 창에 들어갔다.
'언제 도착해'
'늦어~~ 먼저 자!'
'뭘 먼저 자. 데리러 갈게.'
'싫어! 너 내일 대학 실기 간다며'
'평소에 열심히 해서 괜찮아.'
'됐어. 너 오기만 해봐. 나 진짜 화내.'
'아 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얼른 자세용'
'...알았어.'
'잘 자구, 내일도 그냥 평소처럼 해! 우리 정국이'
'응. 끝내고 연락할게.'
'아 왜 내가 다 떨리냐ㅜㅜ 누나가 응원할게! 마이꾸 화이팅! 아자!'
'떨지마. 누나 애인 잘하고 올 거니까.'
'알았어!! 안녕! 잘 자요~'
'응. 누나도 잘 들어가요.'
정국이에게 와주면 안되겠냐고 텍스트를 보내려다, 내일이 대학 실기라는 사실에 그 생각을 아주 곱게 그리고 아주 빠르게 접었다. 우리 아가... 안돼. 괜히 나왔다가 감기라도 들면...! 나 평생 죄책감에 살 거야. 그리고 이미 한 시간 전의 대화였다. 잠이 많은 아이여서, 빗소리에 깬다거나 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괜히 자는 애 깨우지 말고, 집에 조용히 들어가야지.
터미널에 도착해서, 내 눈 앞에 가득 쌓여진 이 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일단 노트북은 백팩에 넣고 매자. 아, 사진도 넣고. 꽃은 가방에 넣으면 모양 망가지니까 손에 들고... 카메라는 목에 매고. 음... 녹음기도 손에 들고, 테잎들은 쇼핑백을 구해가지구... 아. 우산은 어떻게 들어. 그냥 우비를 입을ㄲ... 안돼. 가방이랑 녹음기가 젖잖아.
대충 짐들을 꾸역꾸역 들고, 매고 하니 얼추 출발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일단 택시 정류장까지만...! 터미널에서 바라보는 택시 정류장은 주말이라 그런지 술에 취한 채로 집에 가려는 취객들과 터미널에서 저마다의 짐을 챙겨서,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많던 택시가 왜 오늘은... 진짜 울고 싶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신호등을 기다렸다. 목이고 허리고 손이고 다 아파왔다.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지. 기다리던 신호등이 초록불로 변하고,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때 좌회전 하던 차 한 대가 물 웅덩이를 스쳐 지나갔고, 웅덩이는 그대로.
"...으..."
내게 튀었다. 나는 그 와중에 본능으로 중요한 것들을 내 등 뒤로 감췄고, 그 덕분에 우산은 보기 좋게 아래로 떨어졌다. 우산을 주어야 하는데... 우산을 주울 손은 없고, 주변에는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데 무슨... 결국 빨갛게 변해버린 신호등에 제자리에서 우산을 줍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는 나였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우산에 스스로의 무능함에 화가 쌓이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우산을 직접 주워 내 손에 들려주었다.
"와.... 감사합니다."
"...미친다. 진짜."
"...헐?"
"이리로 와."
다시 손에 들린 우산 덕분에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아도 됐다. 나는 남자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말을 건넸는데, 돌아오는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정국이? 짧은 탄식과 함께 제 머리를 헝클이는 그였다. 얘 왜 여깄어? 나는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헐? 하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정국이는 나를 잡아끌며 이리로 와. 하고는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너 왜 여깄어?"
"다 젖었잖아."
"아니,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차타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 지금 엄청 속상해. 알아?"
"..."
정국이는 내 모든 짐을 다 내려두게끔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가 입고 온 후드집업을 내게 입혀주었다. 정국이의 행동을 말리려 했지만, 그의 표정이 아주 정직하게도 '속상함'을 나타내고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 백팩만을 내게 건네주고는 모든 짐을 들었다.
"빨리 와."
"...하나만 나 더 줘..."
"여기선 택시 안잡혀. 조금만 걸어가면 많으니까 거기서 잡자."
"...응"
정국이에게 짐을 하나만 더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우산을 펼쳤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정국이가 나를 돌아봐줄까 하는 생각에, 가방 속에 들어있던 창작노트를 꺼내 그의 옆으로 갔다.
"이것 봐. 꾹아. 이게 내가 오늘 발상한 내용이야 - 읽어볼래?"
"앞에 보고 제대로 걸어. 넘어지지 말고."
"안 넘어져 - 오느라 힘들었지?"
"응."
"미안해..."
"미안하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이따가 나 안아달라고 하는 소리야."
"...완전 꽉. 안아줄게"
정국이에게 노트를 펼치며 그의 옆에서 조잘조잘 말을 이어가니, 그는 넘어지지나 말라며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좀 만 더 하면 화 풀리겠다! 나는 정국이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느라 힘들었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국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응. 하고 답했다. ㅇ...이게 아닌데? 하지만 미안한 건 정말로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늦게까지 연습해서 피곤할 텐데...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해... 하고. 그는 내 사과에 제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짐들을 재정비해서 들고는, 이따가 자신을 안아달라는 귀여운 심술을 부렸다. 백 번이고 안아주지! 나는 어느정도 풀린 정국이의 옆에서 오늘의 창작노트를 보며, 오늘 쓴 구상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트 집어넣고 우산을 제대로 들라고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괜찮아- 괜찮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마야!"
나는 정국이가 나를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들떠서, 우산이 들리지 않은 반대손에 창작노트를 들고는 약하게 흔들었다. 룰루. 비도 오고, 정국이도 내 옆에 있고. 기분 최고다!
하지만 이 덜렁거리는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손이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툭- 하니 힘없이 떨어진 노트였다. 나보다 조금 앞에서 걷던 정국이는 내 짧은 비명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미 가득찬 두 손에서 제 우산을 떨어트리고 빠르게 걸어와 노트를 주웠다.
"빨리 가방에 넣어."
"야! 너 우산을...! 빨리 내 우산으로 들어와!"
"노트 먼저 넣으라고."
"노트가 중요해? 너 다 젖잖아. 빨리 들어ㅇ"
"너 이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
"나 우산까지 버리고, 이거 주웠는데 - 좀 넣어주지?"
"..."
정국이는 매순간, 내가 우선이었다. 저보다는 내가 먼저. 또 제 일보다는 내 일이 먼저.
정국이의 마음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언제쯤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밤을 고민했음에도 쉽게 떨어지지 않던 입이. 거짓말처럼 툭 - 하고 벌어졌다.
비에 젖어 가면서도 내 노트를 가리기 바쁜 그를 바라보니.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에 젖어드는 그의 옷을 보니. 아주 쉽게.
단 한 번도, 내게 보챈 적 없는 정국이었다. 그냥 천천히, 매번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해주는 그였다.
그토록 무겁던 그 말이, 정국이에게 닿았다.
"...사랑해."
"...!"
"늦어서 미안해."
"...뭐라고 했어?"
"사랑한다고."
나 역시 정국이 때문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우선은 오늘 새벽 4시경에 한 번 올렸던 글인데, 핸드폰으로 보니 문제가 좀 있더라구요ㅜㅜ 글에 링크가 걸려서 전부 다 밑줄이...! 전공 시험이 끝나고 와서 수정해서 올립니다. 댓글은 다 확인했어요! 댓글 지우기 싫어서 수정으로 하려고 했는데, 수정에서는 자꾸 링크가 걸려서 새로 올리네요...ㅜ 미안합니다!
9화부터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고 합니다! 둘에게 의미있는 순간들로 엮어 보려구요. 시점이나 시간이 이해 안가시는 분들은 얼마든지 질문해주세요.
오늘은 소중한 아이들의 3주년이네요. 아이들이 땀 흘리며 고민했을 그 모든 시간들이 '사랑하는 시간' 이길.
오늘 하루 그 어느 날보다 소중한 하루 보내세요!
암호닉
미미 / 미스터 / 윤기윤기 / 뉸뉴냔냐냔☆ / 낮누 / 인연 / 청보리청 / 꺙 / 지민이랑 / chouchou / 둘리여친 / 맙소사 / 비둘기 / 2330 /됼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