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다툼
14
정국이가 군대에 가고, 한동안은 그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그였어도, 이따금씩 느껴지는 특유의 어리광들이 있었는데. 그곳의 밥은 입맛에 맞을지, 잠자리는 편안한지, 혹시나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 아주 사소한 것부터 그가 밟혔다. 더욱이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공간이라, 그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금새 제 덩치를 키우고는 했다.
정국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를 해줬다. 또 면회를 나올 때마다 종일 나와 있어주었고. 뭐, 덕분에 상대적인 외로움이 크지는 않았다. 나 역시 몇 번 면회를 갔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좋아하면서도 - 강원도까지 찾아오는 나를 탐탁치 않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앞으로 자신이 포상 휴가는 다 따서 올 테니, 더 이상 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정국이가 너무 미워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정국이 욕을 그렇게 했는데. 그는 그 후로 제 말을 증명 하기라도 하듯, 온갖 포상 휴가를 다 받아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니 뭐 - 내가 별 수 있나. 서울에서 얌전히 기다려야지.
그와는 군대에 가 있는 동안은 서로의 생일과 기념일을 챙기지 않기로 했다. 전화와 편지. 거기까지만 주고 받기로 했다. 앞으로 같이 보낼 날들이 몇 갠데. 지금은 기념일 하나 잘 챙겨주지 않았다고, 다투고 토라지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에 서로의 하루를 더 듣고 싶었지.
나는 정국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더욱 작품에 몰두했다.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는 작업이었기에, 다른 때보다 유독 날카로웠던 것 같다. 매일 같이 자료 조사에 같은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윤기오빠는 '혹시 좀비처럼 사는 게 꿈이야?'하고 물어왔고, 다른 친구들은 내게 술자리 제안도 하지 않았다. - 나중에서야 그때의 내 상태를 들어보면, 당시 나에게 술에 시옷만 꺼내도 욕을 한 바가지 해 줄 것 같았단다. - 하지만 그래도 별 수 없었다. 정국이가 제대했을 때, 꼭 이 작품을 전해주고 싶었다. 네가 멋지게 나라를 지키는 동안, 나는 네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말하면서 선물해주고 싶었으니깐. 사실 한 작품을 쓰는 데, 2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였다. 나에겐 더욱 그랬다. 퇴고에 있어서 까다롭고, 까다로운 편이었기에 - 출판사에서도 꽤나 애를 먹고는 했으니까. 가끔 '화재'에 관한 자료조사때문에, 내가 지원하는 소방서를 갈 때면, 그곳의 직원분들은 나를 환하게 반겨주셨다.
"탄소 왔네!"
"안녕하세요!"
"그래그래. 정구ㄱ"
"입 좀 다물고. 저 가서 걸레질이나 해라. 빡빡. 그래 우리 탄소 밥은 먹었는교?"
"...먹, 먹었어요! 아저씨는요?"
"오? 탄소 왔네 -"
"어!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그러게 - 어때. 곰신노릇은 할 ㅁ."
"...네?"
"이노무 새끼들이 단체로 배가 고파가지고, 도, 돌아삤다!"
"...밥 드시면서 일 하셔야죠!"
...언제부턴가 분위기가 꽤나 달라진 소방서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전과 다르게 자꾸만 서로서로 눈치를 보시는 느낌이었달까나. 내가 계속 오시는 게, 불편하신 모양이었다.
그 날도 자료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닥 늦은 시간은 아니였지만, 누군가 자꾸 내 뒤를 밟는 듯한 느낌이 들어 - 정국이가 준 호신용 기계를 두 손에 꽉 쥐고는 뒤를 돌았는데.
"...아저씨?"
소방서의 몇몇 아저씨들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나를 지켜보던 시혁이 아저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델따주려고. 우애. 기분 나빴능교?"
그건 아닌데.
다들 너무 수상하게 따라오셔서.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였다. 몇 번 뒤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구나 싶어, 바닥의 그림자를 보면.
익숙한 그림자들이 쪼르르, 나를 따랐다. 그때마다 뒤를 돌아 물으면, 가는 길에 들리시는 거라는데 - 별 수있나. 이제는 그냥 모른척하고는 걸음을 옮긴다. 덕분에 집으로 가는 길이 무섭지도 않고. 좋지. 뭐.
*
정국이랑은 크게 다투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정국이가 군대에 있는 동안, 딱 두 번 싸웠는데 - 그 두 개가 전부 다. 나의 잘못이었다.
첫 번째는 그가 군대에 가고, 한 일 년 좀 안돼서다. 글을 쓴다고, 일주일 정도 그의 전화를 받지 못 했던 적이 있었다. 한창 예민함의 정점을 찍었을 때였다. 일주일 뒤에 통화가 된 그는 그날 처음으로 내게 언성을 높였다. 근데 그게 억울하면서도, 정국이는 참 여전하구나 싶어 연애초기 때의 느낌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가 어딨어도 나는 보살핌을 받고 있는다는걸, 확실히 깨달은 순간 중 하나였다.
두 번째는 사실 아직도 억울하다. 이건, 방금 일어난 다툼이었다.
사건은 우연히 인터넷에서 '탱크보이 스킬'을 보고 나서, 시작됐다.
"그럼 이제 진짜 곧 있으면 나오네?"
"그러게. 얼마 안 남았다."
"나오면 나 고생했다고, 꽈악 - 안아줘야 된다!"
"말이라고."
전역 전 마지막 휴가를 앞두고 하는 전화였다. 이제는 제법 목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더욱 어른스러워진 그였다. 잘 키웠어. 우리 정국이. 나는 괜히 뿌듯해지는 마음에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거리며, 그와의 전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침대 밑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봉투가 눈에 들어왔고.
"...아. 맞다."
"왜?"
"나 아까 편의점 갔었거든?"
"언제-"
"한 네 시, 다섯 시...?"
"왜 갔어."
"아이스크림 사러!"
"애기야?"
"...무슨 아이스크림 먹으면 다 애기야?"
편의점을 다녀왔다는 내 말에, 무심하게 왜 - 하고 묻는 그였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스크림 사러! 하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살풋 웃으며, 애기야? 하고, 제 목소리를 뱉는다. 순간적으로 내가 편의점 이야기를 왜 했지 -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하여튼, 전정국. 군대 가서 더 능글거려졌어. 붉어진 얼굴은 보이지도 않을텐데, 그래도 부끄러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 다 애기야?
"알았어. 알았어. 편의점 갔는데 - 왜."
"...거기서 엄청 하얀 남자 봤어."
"...뭐?"
"피부가 엄청 하얗더라. 사람이 그렇게 하얀 거 처음 봐서, 신기했다구."
"...자세히도 봤네."
"아니. 안 보려고 했거든? 근데, 얼굴이..."
"계속 말 해봐."
"...그... 너무, 잘생겨가지고..."
"그래서."
그는 어린 아이를 달래 듯, 나긋하게 내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갔는데 - 왜. 나는 괜히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말했다. 엄청 하얀 남자 봤어. 수화기 너머로 즉각 답이 올 줄 알았는데... 순간의 정적이 오갔다. 정국이는 전보다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음...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닌데...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이도저도 안되니까! 나는 그런 정국이에게 보지도 못 한, 남자의 피부 이야기를 늘어놨다. 소설 쓰는 게, 이럴 때 좋네. 상상력이 마구마구 뻗어가고 있어. 좋아. 그는 뻔뻔하게 나오는 내가 어이 없는 지, 자세히도 봤네 - 하며 제법 토라진 티를 냈다. 으아 -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귀여운데... 얼른 보고 싶다. 우리 꾸기. 나는 자꾸만 잇새 사이로 세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마지막 쐐기까지 땅땅. 하고 박았다. 그.. 너무 잘생겨가지고... 정국이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래서. 하고 되물었다. 음. 이것도 생각한 범위에 없는 대답인데...? 이쯤에서 탱크보이인 걸 밝혀야 되나...?
"큼큼. 근데 그게 누구게!"
"내가 어떻게 알아."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내가 안다고?"
"응! 하얗고, 노란색 옷 입은 -"
"..."
"히히. 모르겠지?"
"...야."
"응?"
"너 그때 그 사람 말하는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대화였다. 우리가 언제 탱크보이 같이 먹은 적 있었나 -
"누구?"
"나 일 학년 때, 술집에서 본 남자."
"그게 누구ㅇ...아!"
"그. 너 목 만지고, 수작 부리던 사람."
"...윤기 오빠?"
"...몰라. 군대 군대 거리고 나이 들먹이던 남자."
"그게 아마... 윤기 오빠 맞을 걸?"
그 날 윤기오빠가 노란색 티셔츠를 입었던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 안나는데 - 근데 얘는 나도 기억 못하는 걸...
"그 날 윤기오빠 노란색 옷 입었어?"
"어. 노란색 반팔. 나이키."
"...?"
"안에 흰 티 레이어드 된 거."
"..."
얘... 뭐야?
"신발은 조던."
"...너가 다 어떻게 알아?"
"그야 당연히..."
"...?"
"...나 끊어야 돼. 나가서 연락할게."
"...ㅇ"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끊겨버린 전화였다. 아니. 그나저나 얘 그 날, 윤기 오빠를 뭐 그렇게 자세히 봤어. 안에 레이어드 된 티까지 기억할 줄이야.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국이는.
*
다른 때의 휴가보다는 어색한 분위기로 마주한 우리였다. 나는 어찌됐든 오해는 풀어야겠다 - 싶어, 먼저 다가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보고 싶었어. 꾸야- "
"..."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는 싶었어."
"에이 - 그게 뭐야!"
그의 아이러니한 답변에 애써 애교 섞인 말투로, 그게 뭐야!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제 자리에 멈춰선다.
"...보고는 싶었는데, 미웠어."
"내가?"
"응."
"왜 그랬을까. 정국이가?"
"...애 취급하지 말고."
"다 컸어... 이제 이런 것도 못하게 하구우-"
"말꼬리 늘리지 마."
"애교는 해도 돼?"
"안 돼."
그는 내가 미웠다며, 마주 잡은 손을 들어올려 - 약하게, 내 엄지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나는 그런 정국이에게 내가 왜 미웠냐며, 어루는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정국이는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낮게 한숨을 내뱉고는 애 취급하지 말고. 하며 걸음을 옮긴다. 그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말꼬리까지 길게 해가며 제법 애교를 부렸음에도, 그는 단호하게 말꼬리 늘리지 마. 라고 답한다. 이번에는 짐짓 심각해 보이는 그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에게 눈을 초롱초롱 하게 떠가며, 애교는 해도 돼? 하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좀 전보다 더욱 단호하게 안 돼. 하고 답하는 그다.
"왜에에."
"...하지 말라니깐."
"..."
"...입은 왜 삐죽거려."
아니. 뭐 말할 기회도 안 주고! 혼자 토라져서 틱틱 거리는 그가 귀여우면서도, 지나가는 이 시간이 아까웠다. 나 빨리 그 동안 너가 어떻게 지냈나 듣고 싶단 말이야... 나는 괜히 모난 마음에 뱉지 못 한,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나 삐졌어요-' 티를 내기 시작했나 보다. ...이게 아닌데.
"나 너랑 싸우기 싫어..."
"내가 더."
"그때 그거 윤기 오빠 아니야... 바보야!"
"...그럼 또 있어?"
"뭐가 또 있어!"
"흰 색에 노란옷 입은 남자."
"...내가 너때문에 늙는다. 늙어."
"누구였는데."
윤기오빠가 아니라는 말에 그의 얼굴이 유하게 변했다가도, 금방 다시 굳어진다. 이번에는 왜 또. 나는 알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정국이는 윤기 오빠말고 또 누가 있냐며 추궁한다. 아니. 이 남자가 진짜! 정국이는 그때 그 일이 조금도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흰 색에 노란옷 입은 남자.' 라는 말을 툭 하고 내뱉지.
"...이씨."
"말 예쁘게."
"...탱크보이다!"
"뭐가."
"그 남자! 탱크보이라고!"
"거짓말 하지 ㅁ."
"너 진짜 바보야. 전정국."
"...아."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눈치는 저 멀리 던져버린 그 때문에 - 모든 계획이 망했다. 이게 뭐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Boy Moment
그녀의 전화를 받았던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그때 그 남자만 떠다녔다. 아니. 그 남자는 선배면 다야? 왜 편의점에 있어. 있기를. 그때 피부 보니까, 뭐 어디 돌아다니게 생기지도 않았더만. 그냥 집에만 있지. 그녀는 모르겠지만, 난 그날 그 남자가 입은 옷, 신은 신발. 하다 못 해 술을 몇 잔 마셨는 지도 기억한다. 내 여자 옆에서 추근덕거리는데, 세상 어느 남자가 그걸 안 쳐다봐. 그나저나 내가 없는 공간에서 그와 둘이 있었을 그녀를 생각 하니, 쉽게 화가 줄어들지 않았다. 또 본인도 모르게 완전 예뻤겠지. 아니. 소방서 아저씨들은 뭐하고 계시는 거야.
이번 기회에 제대로 그 남자를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꽤 단호하게 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자꾸만 말꼬리를 늘이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날 쳐다보는데... 참나. 이러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아나. 그냥은 절대 안 넘어가지 - ... 완전 넘어가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내게 탱크보이야 - 소리 치고는 앞서 걷는 그녀였다.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ㅇ...
아.
흰 색에 노란옷...
탱크보이...
저런 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인간적으로 너무 귀엽잖아.
*
정국이는 내가 스스로 그 남자가 탱크보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야,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내게 '그런 거 안 해도 완전 귀여워.' 하며 내 모난 마음을 감싸주었는데, 난 또 바보 같이 그런 행동에 풀려버린다. ...아. 몰라. 좋은데 어떡해!
그에게 제법 큰 소리를 낸 덕에 목이 텁텁했다. 그와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언제나 그렇듯,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아메리카노 먹을거지?"
"응."
유일하게 그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사실, 음식도 아닌 음료지만. 내가 워낙 입이 짧은 탓에 -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어서, 그와 식성 만큼에 있어서는 맞는 게 없었다. 그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아두고, 그냥 서로 마냥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데 - 진동벨이 울렸다. 정국이는 진동벨을 들고 제가 내려가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내 입에 짧에 제 입을 맞추고는. 갔다 올게 - 한다.
쟤 군대가서 이상한 거 배워왔어...
음료를 가지고 올라온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에게 먼저 음료를 건넨다. 고마워. 정국아 -. 꽤나 목이 말랐던 터라 단숨에 들이킨 아메리카노였다. 정국이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갑자기 내게 가까이 와보라며 손짓한다. 왜?
"왜? 뭐 묻었어?"
"...아니."
"근데 왜?"
나는 의자를 당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역시 테이블 위에 제 팔을 올려두고는, 내 얼굴을 살피듯 느리게 시선을 움직이며 나를 바라봤다.
"왜에."
"살 빠졌어."
"나?"
"응."
"아닌데?"
"뭐가 아니야."
"진짜 아닌데..."
그는 내 손바닥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대고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닿아오는 입술이 간지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정국이는 그런 나를 보면서, 이제는 내 손바닥에 제 입을 맞춰온다. 나는 자유로운 나머지 손으로 그의 뒷통수를 쓸어내렸다. 이제는 제법 긴 머리칼이었다. 정국이는 내 손길이 좋았는지,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좋아."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좋아?"
그는 내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답했다. 너가 해주는 건데, 뭔들.
나는 여전히 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심장이 떨려왔다. 아니... 쟤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천천히 쓰다듬던 그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웃으며, 보지 않고 제 뒷통수에 가 있는 내 손을 제 손으로 잡아온다. 그리고는 내 손을 큼지막한 제 손으로 감싸온다.
"다 가려지네."
"진짜다. 신기해!"
"...누나."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
"...누나 맞지?"
"뭐야 - 당연하잖아!"
"근데 왜 이렇게 작지. 진짜."
"..."
"아기 발이다. 아기 발."
제 손에 감춰진 내 손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돌려보는 그였다. 그리고는 제 손으로 내 팔목을 약하게 잡아온다. 그의 큰 손 덕분에 거의 팔뚝까지 한 손에 잡히는 팔이었다. 그러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혼잣말로 '말랐어 -' 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꾸만 왜 이렇게 작지. 하며, 테이블 아래로 나란히 교차 되어 있는 신발을 바라봤다. 아기 발이다. 아기 발. 그의 신발에 반을 간신히 넘는 내 신발이었다. 그는 정말 아기 신발을 보는 듯, 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몇 분을 장난쳤을까. 어디선가 정국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정국?"
그 역시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멈칫한 곳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엄청 예쁜.
여자는 정국이를 확인하자 마자,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앞자리의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여자는 정국이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뭐야! 진짜 오랜만이다!"
"..."
"나 잊은 거 아니지?"
"...가라."
"너 이렇게 나오면 나 섭섭하다? 우리 그래도 나름 추억도 많았는데 -"
"지난 얘기 하지 말ㄱ"
"뭐야. 너 이거 커피야?"
"..."
"너 커피 못 마시잖아 - 입맛이 변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아. 가라고."
"커피 먹느니 차라리 목 말라 죽겠다며. 게다가 헐. 대박. 아메리카노?"
"적당히 해."
"아. 앞에 일행 분이 계셨네. 안녕하세요!"
낯선 여자가 정국이의 옆에 앉아 말을 건 순간부터, 비켜달라고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 그래도 나름 추억. 도 많았는데. 추억. 추억 -. 정국이와 꽤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았다. 그랬기에 여자에게 하려던 말을 참았다. 정국이 이미지도 있으니까. 정국이는 내가 신경쓰이는지, 계속해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 여자에게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자는 눈치가 없는 건지, 뻔뻔한 건지. 제 말을 계속 뱉어낸다. 그러더니 정국이의 앞에 놓여진 음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제가 마신다. 정국이가 재빨리 여자가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나 역시 이건 아니다 싶어 여자에게 말을 걸려는데 - 뜻밖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너 커피 못 마시잖아. 뭐야 - 전정국 커피 못마셔? 여자는 정국이에 대해 엄청나게 잘 아는 듯, 계속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그 여자에게 뭐라 말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국이가 커피를 못 마신다는 데에 생각이 멈춰 있었다. 그럼 - 지금까지.
"저는 정국이 친구에요! 언니...는 누구세요? 언니 맞죠?"
"너 가라고."
"야 - 인사정도는 시켜줘라! 그래도 명색이 네 전여친인데."
"아 좀."
"너 군대 갔다고는 페북에서 봤는데, 지금쯤이면 나올 때네. 완전 나온 건 아니지?"
"..."
"박지민한테 연락 없었으니까. 뭐."
정국이가 열아홉일 때 처음 만나서, 지금은 그가 스물 셋이니. 그와 연애를 한 지도, 벌써 사 년이었다. 그런데 - 지금 이건. 지금 이 순간은. 그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소외감이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모습, 내가 모르는 그의 사람들의 이름이 그의 전 애인의 입에서 나오다니. 나는 방금 전까지 그와 마주 잡았던 손의 여린 살을 뜯어냈다. 불안정 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내 손을 덥썩 잡아온다. 뜯지 마. 피나. 하며.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뭐야. 여자친구?
"어. 그러니깐 좀 꺼지라고."
"갈 거야. 눈에서 불 나오겠네."
나는 그 여자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먼저 물었다.
"...너 커피 못 먹어?"
"..."
"...그럼 지금까지 나랑 있을 때, 마신 건 다 뭐야?"
"...못 먹는 거 아니야."
"내가 유치하게 이런 거에 화내고, 질투해야 돼?"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 의 옆자리에 보기 좋게 앉은 여자는 제 입가에 손을 가져대더니 물었다.
"어머. 언니는 모르셨구나 - 정국이 쓴 거 못 먹어요."
"...야. 너 가만히 있ㅇ"
"아니! 여자친구라며어 - 알 건 알아야지. 여자친구가 전 여친보다 몰라서 되냐구... 언니.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
"아무튼 금방 제대 할 것 같네. 제대 하면 연락해! 간다."
여자가 떠나고, 나는 그와 내 앞에 놓여진 아메리카노만 쳐다봤다. 이미 비어버린 내 잔에 비해, 그의 잔은 여전히 겉표면에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왜 이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나는
-
안녕하세요. 겨울 소녀입니다.
시간을 너무 건너버린 느낌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텍파가...!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텍파에 수정해서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군대에 엮여 있으니 진행이 영 더디더라구요...! 우리 이제 군필인 정국이랑 탄소의 연애 봐요 :)
그리고 늘 고맙습니다. 독자분들!
+저 사실 이게 있는 지도 몰랐는데, 그 밑에 최근 2분 사이에 인기글? 거기에 제 글 있는 거 봤어요. ㅎㅅㅎ 기분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암호닉 신청했는데 빠지신 분들은 꼭! 말씀해주세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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