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모든 것을 천사라 칭해야 한다고 했다.
안 자냐.
애 데려갈 거지.
생각 중인데.
그거 하지 마라.
* * *
여전히 닷새째, 현관 앞에서 죽은 루한을 마주한 그 날 밤, 집에 있고 싶지 않다며 무작정 현관문을 열고 나왔을 때 검은 하늘 아래로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종일 구름 속에서 이곳으로 떨어지기만을 고대했다는 듯 그 양은 많았다. 현관문 옆 플라스틱 통에서 방송국에서 받은 가장 크고 검은 우산을 머리 위로 펼쳐 쓰고는 미끄러운 돌길을 조금 걸어나가서 대문을 열어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는 다시 마당으로 들어와서 대문을 닫았다. 낮에 마당에서 루한이 그토록 내게 혼나가며 널어놨던 빨래들이 신이 난 눈송이들 아래 젖어가고 있었다. 마냥 루한의 두 손 때문에 제멋대로 매달려 있었을 뿐인데 다시 젖어갔다. 갑작스럽게 눈을 맞고 있는 그 모양이 꼭 나와 같아 건조대 앞으로 걸어가 우산을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수건을, 흰 티를 그리고 뒤집어진 흰 양말을 무작정 걷어냈다.
“쟤는 무슨 빨래를 지금 걷어.”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 여자가 대문 앞에 나타났다. 대신 이번엔 마당 밖이 아닌 마당 안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머리에 쌓여가는 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게 걸어왔다. 여자의 두 눈은 여전히 빨래를 걷는 내 손을 따라다녔다. 말없이 지켜보던 여자는 한 손으로 한 개씩 천천히 빨래를 걷는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듯 눈을 맞지 않는 현관문 근처까지 건조대를 통째로 끌고 가다 이내 대충 벽 쪽으로 밀어놓은 뒤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여자의 머리 위 눈송이가 곳곳에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일단 다짜고짜 물어서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급해서.”
“뭐가?”
“오늘 지나면 하루네?”
여자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건 굳이 재확인을 시키는 여자가 미워서인 동시에 재확인의 대상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걔 대신 니가 갈래?”
“어딜 가?”
여자가 대답 대신 자신의 검지 끝으로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하늘을 가리켰다. 여자는 오늘 하루 내게 ‘미친년’이라 두 번 칭해졌다.
CAME FOR COMING 下
텔레비전이 꺼져 있는 밤이 오랜만이었다. 루한도 나도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잘 생각이 없었다. 루한과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괜히 식탁 의자에 앉아 읽지도 않는 소설책을 펴놓았지만 사실 루한에게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았다. 일부러 루한에게서 등을 돌려 앉아있지만 루한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먼저 입을 열어줬으면 하는 마음도 사실 갖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여자에 대한 신뢰성을 쌓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내게 말해준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루한에겐 단지 확인사살이 필요할 뿐이었다.
“자.”
책 한 장을 십 초도 채 되지 않아 넘기며 읽는 척에 한창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루한에게 등을 돌린 채로 이곳에 앉기 전까지 루한은 분명 소파 위에 앉아있었지만 계속해서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현재 루한이 집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한 상태였다. 두 눈이 뒤통수에도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럴 때 하는 것임을 확신하며 온 신경을 등 뒤에 쏟고 있을 한창,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내 바람대로 루한은 부엌으로 먼저 다가왔고 더불어 책 옆으로 내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루한을 쳐다보자 루한은 멋쩍게 웃으며 안 자? 물었다.
“왜. 오빠가 침대에서 자게?”
“응.”
“자. 그럼.”
“같이?”
내가 거실에서 잘게. 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루한은 나를 그대로 안아 들어 내가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빠르게 내 방으로 들어가 날 조심스럽게 침대 한쪽에 눕혔다. 몇 번이고 상체를 일으키면 몇 번이고 내 어깨를 밀어 다시 눕히다가 잠깐 사이에 자신도 내 옆자리에 누워 등 밑에 깔려있던 이불을 빼내서 내게 덮어주었다. 그래놓고선 이불 또 없어? 물어오기에 덮고 있던 이불을 같이 덮어주었더니 루한은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하는 짓은 꼭 사람인데.”
왜 죽었어….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 듯한 루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삼켰다. 거실과 부엌의 형광등 빛이 내 방까지 들어와 잠을 자기엔 충분히 불편했지만 루한처럼 눈을 감았다. 곧 자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실로 나가 불을 끄고 다시 오거나 완전히 거실로 나가서 잘 생각 또한 없었다. 눈을 감고 루한에게 귀를 기울이고 온 신경이 쏠려갔다. 가만히 이렇게 있다 보면, 매일 들려왔기에 오늘도 들려올 것 같았던 루한의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를 재운 뒤 어디론가 사라진 건 아닌가 싶어 눈을 뜨려 했을 때였다.
“너 보러 온 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
“다시 가기 싫고….”
“…….”
“살고 싶다.”
머리를 넘겨주는 포근한 손길과 이마부터 코끝 그리고 두 볼을 지나 입술까지 천천히 내려오는 입술.
“다시. 너랑.”
그 입술이 마지막으로 귓가에 머물며 속삭였다.
* * *
어렵겠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오늘이 아닌 내일이 마지막 하루인 것을 감사히 여겨야 했고, 또다시 눈이 가득 내린 골목은 지금이 이른 새벽임을 알리듯 고요했다. 새들도 잠에서 깨지 않은 탓에 들려오는 것은 고작 하루 사이에 초라해진 내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일찍 눈을 떴을 땐 밥도 챙겨 먹을 틈도 없이 허겁지겁 옷만 챙겨 입고 집을 나선 건, 죽은 루한을 위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 아가씨 왔어? 여기, 이리와. 여기 앉아. 길 미끄럽지?”
“네.”
“근데 뭔 일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응?”
“그냥, 잠을 못 자서….”
다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교회 아줌마는 내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내 등을 여러 번 두들겼다. 분명 이른 새벽임에도 이곳은 사람이 북적거렸고, 아줌마는 자신의 옆자리로 날 앉힌 뒤 조그마한 성경책을 내게 건넸다. 우리 딸 책인데, 아가씨 가져. 굳이 진득하게 눈을 마주해오는 아줌마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포함한 그 어떠한 대답도 건넬 수 없었다. 곧이어 고요해진 교회 안에 목사님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지만, 그 목소리에 집중할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기에 내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내가 해야 할 기도를 했다. 아줌마는 나를 포함한 내 지인들이 모두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 했지만 루한을 천국에도 보내기 싫었다. 루한 살게 해주세요.
“어쩐지 가만히 있다 했더니, 별 지랄을 다 하네.”
길고 긴 목사님의 말씀이 끝난 뒤 기도 중인 조용한 교회 안, 내 가까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홀로 눈을 떠 옆자리를 확인했을 땐 그 여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교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자 여자는 기도 안 해? 내게 물어왔다. 할 거야, 대답하려다 이내 거두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기도 중에 삐딱하게 앉아서는 혼자 중얼거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고, 기도하던 내게 별 지랄을 다 한다고 말했던 여자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꼭 감고서는 기도 중이었다. 꽤 당황스러운 마음도 있었고, 혹시나 여자가 눈을 뜰 수도 있었기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여자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 * *
“일찍도 온다. 열혈 신도라도 됐나 봐?”
계획에 없었지만 아줌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새벽 기도만 하고 가려던 나는 얼떨결에 오전 기도와 점심까지 교회에서 모두 해결하게 됐다. 교회에서 나와 핸드폰 액정의 시계를 확인했을 땐 오후 한 시 반. 루한이 잠에서 깨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문제는 루한의 아침 식사를 차려놓지 않고 왔기 때문에, 집에 가는 걸음이 다급했다. 허겁지겁 대문을 열고 그대로 현관문으로 직행하려던 계획도 어긋났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떴을 때 내 옆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여자가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결국 집안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한 채 테라스로 가서는 거실 안을 확인했을 때 중년의 아저씨처럼 소파에 누워 한창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야 할 루한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벌써 간 것인가 싶어 순식간에 다급해진 마음으로 테라스를 통해 곧장 거실로 들어가려던 나를 막은 건 여자였다.
“잔다, 걔.”
새벽에 걔 한숨도 못 잤어. 차분히 말한 여자가 나를 잡아내려 자신의 옆에 앉혔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냐 물었을 때 여자는 그런 당연한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여자와 내 사이가 처음으로 조용했다. 할 말이 뭔데? 발등까지 쌓인 눈을 발끝으로 살살 걷어차며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답지 않게 헛기침을 연발했다.
“너 말이야.”
“응.”
“너 진짜 안 갈래?”
눈을 걷어차던 움직임을 멈췄다. 분명 어제 내게 미친년이라고 칭해졌음에도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뭔데.”
“내가 하늘에서는 이래 봬도 천사거든.”
“장난 칠 기분 아닐 텐데.”
“장난으로 보여? 말이 저래도 진짜야.”
진짜라고 말하는 여자에겐 침묵으로 응답했다. 여자가 천사이건 말건, 사실 내 머릿속은 온통 내가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 하의 상황으로 가득했다. 마음은 가능만 하다면 루한 대신 죽을 수 있었지만 세상에서 죽음을 쉽게 여기는 사람이 웬만해선 없듯 나도 그랬다. 여자가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왜.”
그래서 괜히 물었다.
“너 아까 교회에서 걔 살려달라고 기도했지?”
“…….”
“난 너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왜? 다시 물을 틈도 없이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걔가 왜 자살한 줄 알아?”
“아니.”
“당연히 모르겠지. 걔 안 죽었으니까.”
자연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루한이 죽었다고 내게 말해줬는데 오늘에 와서는 루한이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뭐하는 짓이냐며 따지기엔 여자는 단호했다. 표정부터 말투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머뭇거리는 것 하나 없이 내게 말해오는 것이 그랬다.
“말해두는데, 한 번 죽은 사람은 자연적으로 죽을 때까지 다시 못 살아.”
“그럼, 루한은?”
“지금 걔 얘기하는 거 아닌데?”
너 얘기하는 거야.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만 지금 이해 못 하는 거야? 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또 뭘 나한테 말해주려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거 좋아한다고?”
“그렇다고 칠게.”
“죽은 건 걔가 아니라 너야.”
내일이 걔가 가는 날인 줄로만 아는데, 내일 니 기일이야. 걔? 걔는 니 대신 잠시 죽어있는 거지. 죽은 건 너라니까? 아, 그래. 알아듣게 말해달라고 했지. 넌 작년 겨울, 그니까 일 년 전에 여기 앞에 골목길에서 죽었고 단순한 교통사고였어. 물론 니가 피해자고. 자, 여기까지 니가 걔 대신 가야 할 첫 번째 이유였다면 두 번째 이유, 너랑 걔랑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했던 사이였지. 이것도 못 알아들어? 니들 둘이 오랫동안 사귀는 사이였다는 소리야. 근데 니가 죽고 육 개월 뒤에 걔한테 찾아갔지. 걔가 지금 너한테 일주일 찾아온 것처럼. 물론 걔는 너를 기억하지 못했어. 그냥 니가 실종 상태라는 것으로만 알았지. 지금처럼. 걔가 지금 잠시 죽어있는 이유도 지금이랑 같아. 근데 지금이랑 다른 게 하나 있어. 넌 원래 죽은 사람이니까 내가 도로 데려가려고 이렇게 구구 절절 설명하고 있는데, 걔한텐 너 대신 가라는 말 입 끝에도 붙인 적 없어.
“알아들어? 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눈치채고 너 대신 죽어줬다는 말이야.”
존나 입 아프네, 진짜. 이제 대신 갈 이유가 생기긴 했냐. 진작 갔으면 위에 가서 천천히 설명해줘도 될 것을. 하여간 넌 그때도 이랬어. 일 라운드에서 끝내면 될 일을 이 라운드까지 끌고… 야, 어디 가? 야!
* * *
‘거기서 기다려. 인사만 하고 올 테니까.’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인지, 통 전화를 받지 않는 변백현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할 순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애써 담담한 척 문자를 남겼지만 어찌 됐던 그만 만나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자의 말대로 내가 정말 루한 대신에 저 위로 갈 수 있을지는 도통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인 것 같았고,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루한을 살려야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사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서 복잡했다. 여자는 내게 오랫동안 말했지만 결국 내 기억에 남는 건, 루한은 살아야 할 사람이고 난 죽은 사람이며 루한은 나 대신 잠시 죽어있고 그게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백현아. 」
나 일도 관둬. 그만 만나자. 짧은 문자가 변백현에게 전송이 완료됐음을 확인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자 신발을 신고 있는 루한이 눈앞에 있었다. 어디 가게? 묻자 루한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두 손에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투를 들어 보였다.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루한이 왜 하필 지금에서야 나서려 하는지, 나는 일단 루한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버릴게.”
루한에게 두 손을 내밀자 루한이 고개를 저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물었을 때 루한은 버리고 오는 김에 그 여자를 만나고 올 거라고 대답했다. 이런 경우엔 더더욱 루한에게 쓰레기 버리는 일을 맡겨선 안 되는 것이었다. 조급한 마음을 숨기며 루한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할 게.
“들어가, 쉬어.”
“아, 진짜 답답하게. 내가 한다니까? 원래 내가 했던 거잖아!”
어디에 갖다 버리는 줄은 알아? 따로 버리는 봉투 있는 건 알고서 이 봉투에 모아서 버리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해. 사람 두 번 움직이게 하지 말고. 쉴 틈 없이 루한에게 쏘아붙이는 와중에도 루한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면 루한도 참 바보 같아 멍청하다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러운 내 짜증에 그저 쓰레기가 가득 찬 봉투만 바라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빨리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미안. 나 버리고 올게.”
루한이 내게 주길 바랐지만, 결국 내가 루한의 두 손에 들린 쓰레기 봉투를 뺏어 들었다.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눈다면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다시 뺏어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곧장 루한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쓰레기 버리는 곳이 아닌 그 여자에게로 가야겠지만, 어쨌든 나가야 했다. 잠시 양손에 들린 봉투 두 개를 한 손으로 들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루한이 나를 불러왔다. 무언가 눈치를 채서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막내야. 잠깐만.”
“어?”
“장갑 끼고 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루한을 피하려 그 부름에 등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려 할 참에 루한은 뒤에서 내 손을 잡아 장갑을 씌워주었다. 유독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지는 몰라도, 한 짝씩 아주 천천히 그랬다. 추우니까 조심히 갔다 와. 루한의 목소리를 두 귀로만 들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한이 나를 돌려세워 장갑을 씌워주었더라면 행여 그 얼굴을 보며 울지는 않았을까, 그 여자가 이렇게 내게 말했고 그래서 나는 지금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하진 않았을까.
사실 내가 루한을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했다는 것은 그게 어느 정도였는지, 어떻게 그랬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작년 겨울 교통사고의 느낌? 전혀 기억할 수 없고 루한에 대한 애정이 그동안 특별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자를 신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다시 죽으러 가는 이유는 또 루한이었다. 내가 죽은 뒤 루한에게 찾아갔을 때 루한은 지금의 나처럼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고 하는데, 루한은 왜 그리고 어떻게 나 대신 죽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허나 나는, 내 경우에는 지금… 오빠가 나한테 와준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 오빠 목숨까지 바칠 만큼 내가 소중한 존재였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내가 죽은 사람인 것이 반가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다는 마음보다는 오빠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갈 게. 만약에 나에게 또다시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그땐 오빠한테 절대 안 갈게. 물론 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빠겠지만… 안 갈게.
정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그런 건 너무 많아 없는데, 딱 하나 바라는 건 내가 오빠에게 내려올 그 일주일 동안에 오빠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으면 좋겠다.
* * *
7월.
“카이 끝나기 이 분 전입니다! 다음 개인 무대 두 개 스탠바이요!”
“레이야. 루한 어딨어?”
“루한 화장실에 갔어요.”
아주 오랜만이었다.
“레이야! 둘째 칸 들어가자, 의자 위에 신발 챙겨!”
때로 치자면 칠 개월?
“막내 어딨냐.”
“예? 저 종인이 대기….”
“종인이 대기 둘째로 바꼈다니까? 정신 안 차리네, 신발 정리할 줄 알지?”
“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
“칠 개월도 넘은 게. 아, 큰오빠랑 같이 루한 옷 먼저 좀 봐주고 정리해둬. 어?”
루한보다 이 개월이나 늦은 셈이다.
“루한아. 제일 마지막 칸으로 들어가. 오른쪽. 옷걸이만 받아서 들어갈게.”
“네.”
그래서 그 이 개월 동안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그 여자는 루한을 편애한 게 틀림없다.
“안 들어가? 왜. 안에 누구 있냐?”
“…….”
“뭐야, 비었네. 야. 뭐하냐니까?”
루한은 탈의실 마지막 칸 안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버린 나, 그리고 그 여자와 마주쳤다. 한껏 올린 연갈색 머리와 짙은 화장으로 덮인 얼굴 그리고 잔뜩 땀에 젖은 그 모습이 정녕 슬픈 것인 줄은 살아생전 몰랐다. 보고 갈 생각은 없었다 전하러 왔음에도 보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작년 겨울 루한이 내게 찾아왔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나, 나는 도저히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는데 루한은 그 겨울 현관문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내게 농담조를 내뱉었는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린 뒤 다급하게 루한의 뒤로 다가온, 나를 볼 수 없는 큰오빠와 새 막내는 루한의 옆에서 끊임없이 루한을 재촉해왔고, 루한은 전혀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내게 찾아왔던 루한처럼 능청스레 루한을 대하려 했던 마음이 루한 앞에서 무너진 지는 오래,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울음에 고개를 숙였을 때 허리춤에 머물고 있는 두 손에 끼워진 장갑을 재빨리 벗어냈다.
“한여름에 장갑 끼고 있으니까 이상하지?”
“…….”
“그치… 지금 오빠가 꿈꾸고 있는 거야. 이상해서.”
이대로 있다간 루한이 콘서트 개인 무대에 늦는 수가 있었다. 영문을 모를 루한에겐 이 순간을 그저 잠깐의 혼돈이나 착각, 아님 아주 짧은 꿈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횡설수설 루한에게 튀어나왔다. 꼭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기서 상황 설명을 한다 한들 또다시 내가 잠시 살고 루한이 잠시 죽는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여자의 말처럼 나는 영원히 죽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루한의 옆을 지나서 분주한 대기실을 거쳐 밖으로 나가야 했다. 작년 겨울 귀신처럼 홀연히 이동하지 않았던 루한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자와 함께 탈의실을 벗어나려 할 참이었다.
“막내야.”
“네?”
내가 아닌 새 막내가 대답했다. 익숙한 호칭에 무의식적으로 루한을 바라봤을 때 루한의 시선은 아직도 내게 머물고 있었다.
“막내야.”
헛웃음을 지으며 한 번 더 나를 부르는 루한의 옆으로, 여자는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루한과 무언가를 주고받듯 잠시 눈을 마주하며 나를 지나쳐 탈의실을 벗어났다. 당연한 듯 여자를 따라 나가려 할 때 루한은 탈의실 문을 확 닫고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탈의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며, 밖에서는 큰오빠와 새 막내가 계속해서 탈의실 문을 두들겼고, 난 마냥 웃는 루한과 홀로 나가버린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내려왔던 것과는 달리 그야말로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여자는 분명 루한이 작년 겨울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했는데….
“막내야.”
“…….”
“좀 늦었네.”
그랬지만, 루한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해석
루한이 텔레비전을 좋아한 이유
- 일주일 뒤면 다신 텔레비전을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막내에게 매일 잔소리를 들어도 죽기 전에는 챙겨보다가 결말까지 다 못보고 죽었기 때문에 회차가 남아있는 드라마를 마저 다 봐요.
中편 마지막 장면
- 루한이 현관문 앞에서 혼란 가득한 막내를 안아주는 장면입니다.
결국 정말 죽은 사람은 누구?
- 현재를 막내가 7개월 후 돌아온 2014년 7월이라고 두어 보면, 막내는 2013년 1월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당시 루한과 막내는 연인 사이였는데, 막내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2013년 7월에 루한에게 찾아가 일주일간 머무릅니다. 그리고 그때 루한이 막내를 살리는 대신 자신이 죽는 것을 택하여 막내가 자신이 교통사고로 죽은 기억부터 모두 사라진 채로 환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루한은 모든 것을 여전히 기억에 담아둔 채로 5개월 뒤인 2013년 12월에 막내를 찾아갑니다. 이때 일주일 사이에 ‘그 여자’ 덕에 2013년 1월부터의 일들을 모두 알게 된 막내가 루한을 살리며 자신은 다시 죽게 됩니다. 그리고 2014년 7월, 루한을 잠시 찾아가는 것으로 글이 마무리 됩니다. 결국 죽은 사람은 2013년 1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막내입니다.
下편 마지막서 그 여자가 웃은 이유
- 원래대로라면 2014년 7월에 막내가 루한을 찾아갔을 때 루한은 막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마지막 대사에서 알 수 있듯 루한은 막내를 기억했어요. 그 여자가 루한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루한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은 루한도 알고 있었어요. 어쨌든 무조건 다시 가야 하는 막내에게 잔인하거나, 되려 마지막 일주일을 기억이 있는 루한과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배려이거나 둘 중에 하나! 여러분이 해석하시기에 달려있습니다.
왜 그 여자가 자꾸만 막내에게 말끝마다 죽여 버린다고 했나요?
진짜 죽이러 온 거니까요..
이곳에 없는 해석이 궁금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이외에, 그냥 쓰면서 독자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에피소드 같은 건
1. 그 여자는 여자지만 쓸 때는 세훈이 생각하면서 썼어요 결말 쓸 때 그냥 세훈이로 쓸 걸 하면서 땅을 치면서 후회했네여ㅠㅠ원래 루한이 탈의실 문 열자마자 그 여자가 세훈이였다면 바로 주먹 내리 꽂을라 했는데..왜냐면 루한이 분명 데려가지 말라고(본편 맨 처음 대화)했는데 루한 몰래 막내를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2. 원래 제목은 불청객으로 하려고 했어요 근데 뭔가 거창한 호러물이나 범죄물같고 그래서 패스 왜냐면 이 글은 거창한 게 아니라서여
3. 그래서 현 제목 뜻은 (you)came for (i'm)coming=(니가)왔다 (내가)오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니가=루한, 내가=막내이며 막내가 본 위치로 올 수 있게 루한이 왔다 이런 뜻이에요 결론은 저만 해석할 수 있는 영어네여 앞으로 영어 안 쓸게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편에 찾아와주신
비타민 / 금요일 / 빠삐코 / 쟈냐쟈냐 / 우리쪼꼬미 / 하이 / 호두 / 둠칫 / 오레오 / 핫초코 / 준짱맨 / 고백 / 웨하스 / 됴민대 / 뚜시뚜시 / 이든 / 바베큐 / 치즈 님 외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선 수능보신 수험생분들 수고하셨어요 자랑스럽다ㅠㅠㅠㅠㅠ결과에 상관없이 그동안 안고 오셨던 짐들 다 내려놓으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맨날 이상한 페북만 쓰다가 더 이상한 글 들고와서 뎨둉해요ㅠㅠ상중하만 있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읽기 편하신 썰로 가져올까 생각중이에요! 그냥 생각..
추위 조심하세요! 안녕ㅠㅠ하루 빨리 또 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