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멋대로 피어난 마음들
07-1
"정호석씨!"
막무가내로 다시 찾아온 그의 회사였다. 회사 앞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은 며칠 전, 그와 함께 왔던 나를 기억하는지 쉽게 길을 터주었다. 나는 엘레베이터에 타자마자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원래 대장은 늘 머리 위에 있는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여러명의 비서가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저 좀 들어갈게요. 하고는 앞에 보이는 문을 무작정 열었다. 비서 여럿이 일어서서 나를 말렸지만, 그보다 빨랐던 건, 카페에서 나와 대화를 나눴던 남자였다. 남자는 내가 다시 올 줄 알았다는 듯, 비서들을 제지하고는 '들어가요.' 하고 답했다.
*
소파에 누워있던 남자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키웠다. 나는 그에게 걸어가서는 그가 있는 소파 앞에 섰다.
"잤어요?"
"...뭐하자는 ㄱ"
"아. 반말하자고 그랬지."
"..."
"잠이 오나봐. 나는 밤새 한 숨도 못잤어. 궁금해서."
그는 이내 곧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얼굴 좋네. 누구는 겁나 푸석푸석한데. 나는 러그가 깔려있는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물어볼 거 엄청 많은데. 답은 다 해주나? 소파에 앉은 그는 바닥에 앉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더니, 못 말리겠다는 듯 제 머리를 젓는다.
"올라와서 앉지?"
"정자세로 앉아 있으면, 답답해서."
진심이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해야 막힌 속이 해결 될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나 한 잔 하면서 할, 그런 이야기가 아니였다. 그러자 그는 짐짓 인상을 구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제 팔을 내 팔 사이에 넣어, 나를 소파 위로 앉혔다. 동시에 소파 옆에 있는 탁자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탁자 위의 전화기로. 그는 1번을 길게 누르고는, '의자 하나만.' 하고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를 들고 온 남자였다. 카페에서 본 그 남자. 남자는 의자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그에게 묻는다. '너가 앉게?' 그는 대답 대신 의자를 가져와 내 앞에 두었다. 그리고는 제가 그 의자에 앉았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리며 방을 나섰다.
"내가 거기 앉을ㄱ."
"의자 주인이 중요한 대화야?"
"어?"
"의자 주인이 중요한 거 아니면."
"..."
"그냥 이렇게 얘기하지."
"..."
"또 움직이기 귀찮은데."
그의 말이 맞았다. 의자, 소파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물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야?"
"박지민한테 다 안 들었나보네."
이것 봐. 박지민. 숨기고 있었어.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박지민의 이름을 던졌다.
"걔는 말 안 해줄 것 같아서. 여기 온거야."
"그런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나는 조금도 너에 대한 기억이 없어."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목을 크게 한 바퀴 돌리고는, 나와 올곧게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말했다.
"박지민한테 어디까지 들었어."
나는 그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다.
"너가 고아원에서 자랐고, 나랑 지민이가 거기에 봉사를 간 거."
"..."
"거기서 박지민이랑 너가 만난 거."
"..."
"딱 거기까지 알아."
그는 내 답변에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였다. 개구진 미소나 조소가 아니였다. 정말 힘이 빠진다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답했다.
그러면 앞에 설명은 뭐, 필요 없겠네. 고아원에서 자랐고,
거기서 박지민 그리고 너. 만난 것도 사실이니까. 박지민은 친구... 라고 생각했었어.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 역시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 답답해.
"확실하게 좀 말ㅎ"
"그리고 너랑 나는."
"..."
"이거면 설명이 되려나."
그는 오른 팔의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렸다. 은색의 팔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내 눈 앞에서 제 팔을 두어 번 흔들어 보이더니, 팔찌를 풀어 내게 건넨다. 어딘가 낯이 익은 팔찌였다. 나는 팔찌를 받아 들어 살폈다. 어디서 봤지? 되게 많이 본 것 같ㅇ... 아.
팔찌 안의 문구가 반짝였다.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
팔찌를 손에 쥔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제 어깨를 으쓱이며, '기억해?' 하고 묻는다.
"...왜 이게 너한테 있어?"
"그 날, 고아원에 생일인 아이는."
"..."
"나 하나였거든."
"...말도 안ㄷ"
"늦었지만."
"..."
"생일 선물 고마웠어."
**
[탄소의 이야기, 17살]
고아원 내 도서관은 지민이와 함께 치우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안 좋은 지민이를 대신해 나 혼자 해야만 했다. 나는 도서관 끝에 작게 마련된 독서실로 향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 우선 작은 곳부터 천천히 치워나가야지.
책상 위에 흐트러진 교과서들과 벽 한 쪽의 낙서들이 가득한 자리와는, 대비되는 자리였다. 내 책상보다 깨끗한거 같은데...? 나는 가장 구석에 위치한 책상으로 향했다. 손으로 책상을 쓸자 쓰레기는 무슨, 먼지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다. 뭐야. 얘 공부 완전 안하고, 그냥 잠만 자서 이런거 아니야? 나는 독서실 위의 서랍을 열었다. 책상 위의 서랍에는 저금통이 가득했다. 빨간색의 작은 돼지 저금통이. 각각의 저금통에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그 안에 든 금액을 적어둔 것 같았다. 나는 별 다른 생각없이 저금통 하나를 들었다. 그러자 저금통들 밑에 깔려 있는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어려운 이웃 돕기 캠페인'
종이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신청서였다. 아이는 '소년가장, 독거노인, 유기동물' 모두를 도우려는 모양이었다. 모든 칸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순간, 지금까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한테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고아원에 있는 애들도 충분히 불쌍한 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불쌍한 애들이 더 불쌍한 사람을 돕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엄청난 일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온 몸을 감쌌다.
자리의 주인이 궁금했다. 하지만 교과서에도 필통에도, 아이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책상 위의 노트를 집어들었다. 노트는 아이가 제 일기를 쓰는 일기장이었다. 남의 일기를 몰래 훔쳐 읽는 게 어딘가 엄청난 범죄같아, 제일 마지막 장을 폈다. 딱 하나. 마지막 일기만 읽자.
아이의 마지막 일기는 어제였다.
'조금 이르지만. 하루 일찍, 생일 축하해. 내 자신아.'
일기의 마지막 줄은 아이의 생일을 알리고 있었다. 내일이 셍일인가보ㄴ... 내일? 나는 생전 본 적도 없는 아이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사실에 괜한 조바심이 들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이 아이가 내 많은 걸 변화시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 눈 앞의 저금통과 이웃돕기 캠페인 신청서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아이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딘가 운명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우연히 훔쳐본 일기장 주인의 생일이 내일이라니...!
내일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를 변화시킬, 나만의 운명이 될 아이의 생일이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밤이었다.
*
비서 아저씨에게 부탁한 팔찌였다. 은색의 팔찌. 그 안에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고 싶었다. 편지를 쓸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에. 사실 선물도 오바였다. 완전 오바. 그래도 뭐, 난 걔랑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우연히 보게 된 아이의 일기장에서 꽤 절망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얼핏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말이 유독 많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를 도우려는 생각이 강한 아이였고. 나는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을 옮겨 적었다.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
다이어리는 무난한 검은색으로 세 개 샀다. 일기를 매일 쓰는 것 같아서, 노트 말고 좀 더 예쁜 일기장에 쓰라고. 아마 금방 다 쓰겠지...?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거라 안 쓰려나?
나는 다이어리 표지에 포스티잇을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글자를 적었다.
'생일 축하해.'
*
고아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누군지도 모를 아이를. 그냥 지나가는 아이가 있으면, 잡고 물어보려 했다. 혹시 오늘 생일이야? 하고. 대책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밤 늦게 고아원에 외부인 출입은 금지였다. 하지만 방학에도 변함없는 야자를 끝마치니, 이미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야지.
얼마나 아이를 기다렸을까. 골목 끝에서 남자 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또래인 것 같았다.
아이의 책상 위에는 나와 같은 교과서가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학년인 듯 했다.
나는 저들 중에 한 명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그들이 가까워 질 수록 선물포장을 확인했다. 어디 찢어지지는 않았겠지?
잠시후, 남자 무리가 내 앞까지 닿았다. 나는 제법 당당하게 그들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저... 너네 중에 오늘 생일인 사람 있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이들한테는 얼핏얼핏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묻어났다. 뭔가 얘네는 아닌 것 같은데.
"생일인 애 있으면 어쩌려고."
"...ㅇ, 아니야. 그냥 가..."
"나 오늘 생일인데."
"...어?"
"몸이라도 대줄거야?"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뒷걸음질 쳤다.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나를 따라왔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로 들어난 목선에 찬 바람이 불어왔다.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했다. 늦겨울의 바람은 매서웠다. 사내 중 한 명이 어깨를 잡아챘다.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ㅎ...하지, 하ㅈ..."
"뭐래냐. 얘."
사내들은 나를 조롱하듯, 내 옷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중 내 어깨를 잡아챈 사내가 말했다. '추운가봐. 많이도 껴입었네.' 동시에 한 사내가 내 등 뒤의 가방을 빼앗았다. '지갑은 여기 있으려나.' 하며. 가로등 밑으로 어렴풋이 사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최대한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초점은 자꾸만 그들을 벗어났고, 이윽고 뿌옇게 차올랐다. 호흡 역시 더욱 거칠어졌다.
나를 우악스럽게 껴안은 사내의 품에서 정신을 잃어갈 때 쯤, 그들의 얄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져 갈 때 쯤.
낯선이가 몰고 온 바람이 내게 닿았다. 그 낯선이는 내 손목을 잡아당겨, 제 등 뒤로 감쳤다.
나는 그 등 뒤에서, 기억을 잃었다.
그 등에 내 몸을 맡기며.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아이들의 관계가 들어나는 회차였어요. 분량이 길어서 17-1, 17-2 로 나눠서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