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아홉의 나, 스물일곱의 너
09-2
*
[탄소 시점]
"왜 연락을 안 받아."
"...지민아."
방으로 향하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우선 자고 일어나서 모든 일을 다시 생각해야겠다 - 싶었다. 한껏 축 처진 몸으로 방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지민이었다. 지민이는 내 침대 끝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왜 연락을 받지 않냐고 물어왔다. 지금은 기댈 곳이 필요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민이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지민이는 내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 있었어?"
"..."
"...왜 그ㄹ, 아."
"..."
"...정호석 만났어?"
"...응."
그를 만났냐는 지민이의 물음에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니, 지민이가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꽤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나는 지민이의 허리께에 내 손을 둘렀다. 아이가 나를 구해줬던 그 때처럼. 기대고 싶었다. 지민이는 익숙하게 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탄소야."
"...응."
"우리 여행갈까?"
지민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민이는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지쳐보여서."
"..."
"너도."
"..."
"나도."
며칠 사이, 많이 푸석해진 지민이의 얼굴이었다. 지민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친구로서는 정호석의 일을, 아버지의 비서로서는 정호석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서, 내 오랜 짝사랑의 대상으로는...
그때 나를 구해준 게, 정말 너가 맞는지.
그렇다면 그 팔찌는 왜 너한테 없었는지.
나는 지민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행을 가서,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 주말에 떠나자는 그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
[지민 시점]
"언젠가 터질 일이었어. 혹여나 머저리 같은 죄책감은 가지지도 말고, 나오거라."
"..."
" 네가 몸 담았던 그 곳에서, 네 모든 걸 챙겨서."
제 아버지는 분명 '내 모든 걸' 챙겨 나오라고 했다. 나는 그랬기에, 그녀도 함께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 내가 막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였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벌어질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떠다닐 그녀를 붙잡아 주는 것. 그녀와 함께 있어 주는 것.
*
기사는 생각보다 이르게 터졌다. 각종 신문의 첫 면이 '두드림 비리' 로 가득 찼고, 그녀의 집과 회사 앞은 기자들로 북적였다. 집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회사에 앉아, 급하게 언론을 매수하는 중이었다. 그 시간 지민은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자신에게 주말에 기사가 나갈거라고 했다. 그런데 기사는 수요일에 터졌다. 신문까지 인쇄가 된 것을 보니, 화요일부터 준비했을 터였다. 제게 한 마디도 없이. 지민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오는 전화를 전부 다 무시했다. 제 아버지가 긴급속보로 기자회견을 열고 있으니. 이 문제의 주범으로 나를 의심, 아니 확신하는 게 당연했다. 지민은 차 키를 빼들었다. 그녀에게 가야만 했다.
*
[여주 시점]
"...진짜야?"
엄마는 내 시선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아빠는 아홉 살 아이의 부모를 앗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자사 제품을 사용한 사람들의 목숨을 훔쳐가는 중이었다. 아빠가. 나의 아빠가.
담장 너머로는 기자들의 외침이 간간히 넘어왔다. 나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아닐거라 애써 부정했다. 책상 위의 가족사진 속 아빠와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방 어디로 몸을 옮겨도, 그 눈동자가 나를 따라왔다. 핸드폰에는 연락도 하지 않던 자들의 부재중과 문자들이 가득 찍혀있었다. 각종 포털에는 우리 집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둔 겉옷을 챙겨입었다.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만약 아빠가 한 모든 일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나는. 그 모든 것들로 이뤄낸 공간, 그 속에서 보호 받는 중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
집 앞은 기자들로 가득했다. 후문과 비상문까지 전부 다 그들의 차지였다. 어느 곳이든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대문에 몸을 기댄 채로, 쓰러지다 싶이 앉았다. 기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내가 이곳을 벗어나서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한국에 와서 가본 곳이라곤 ...아빠의 회사와. 정호석. 그 아이의 사무실 그리고 술집 뿐이었다. 그 어디도 지금 가기에는 부적절했다. 깊은 바다 속에라도 빠진 듯, 숨 쉬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고질병 같은 증세였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시작되는.
"뭐하냐."
그 순간, 절대 열릴 일 없는 대문이 열렸다. 그 덕분에 대문에 기대고 있던 내 몸은 자연스레 뒤로, 기자들이 있는 밖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보다 빨랐던 건, 다시 대문을 닫는 그였다. 기자들이 대문을 흔들었다.
'방금 들어가신 분은 누구시죠?'
'가족 분이신가요?'
'한 말씀만 부탁 드립니다!'
정호석이었다. 그는 얼핏 본 문 앞의 기자들과 같은 정장 차림이었고, 심지어 기자 사원증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뭐ㅇ"
"너가 얼마를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많이 있어. 기자들."
그는 제 사원증을 거칠게 빼내며, 제 겉옷을 내게 둘렀다. 그리고는 어린 아이를 안아드는 것처럼, 나를 제 품에 안아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기울어진 중심에 그의 목에 내 두 팔을 감았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는 나를 제 쪽으로 조금 더 감싸 안았다.
"내 쪽으로 몸 기울여."
"...아니. 뭐하는 ㄱ"
"사진 찍히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좀 해."
"...나갈거야?"
"어."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로, 그는 문을 열었다. 동시에 플래쉬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그의 겉옷을 덮은 채로, 그의 품 쪽으로 더욱 몸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우리를 밀치는지, 그의 걸음이 꽤나 비틀거렸다. 그의 겉옷으로 차단된 시야였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우리 앞에 차가 멈춰선 것 같았다. '형님!' 하는 소리가 기자들 목소리 틈을 비집고 들려왔다. 곧 이어, 기자들의 목소리가 차단됐고. 그는 내 시야를 가리던 겉옷을 내려주었다.
차 뒤로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기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호석 시점]
기사가 터졌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 측에서 두드림에게 보내기 위해, 삼 년 가까이 모아온 서명서였다. 물론 그들과 피해자를 합의 시키기 위함은 아니였다. 힘 없는 피해자들을 모아,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경고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이 오면, 그 순간에 터트릴 예정이었다. 단순히 감옥에 갇혀서 고작 몇 년을 살게 하고, 다시금 궁궐 같은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우리들 나름의 정의로. 그들의 목숨으로 모든 사과를 대신 할 작정이었는데.
박 건.
박지민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제 명분을 앞세워서, 제 입지를 세우기 위해.
헛짓거리를 저질렀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였다.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눈에 박혔다. 그녀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고, 황급히 떠난 그녀가.
또 다른 풍파를 만났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로.
아홉의 나처럼,
스물의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던, 나처럼.
나는 적어도 그 순간들마다.
이 팔찌에 나를 기댔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없다.
이건, 한낱 풋사랑 혹은 과거의 첫사랑의 감정에서 일어난 감정이 아니였다.
바닥의 감정을 미리 느껴본 자의 동정이었고,
열일곱, 나의 전부를 심어준 그녀에 대한,
보답의 차례였다.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이제 좀 스토리가 완벽하게 이해 되셨나, 싶어요! 너무 저만 아는 이야기들의 연속 같아서, 마음이 안좋았거든요ㅜㅜ
여러분이 빨리 오라고 하셔서, 저 빨리 왔어요...! ㅎㅅㅎ
빨리, 자주 오니까 저도 다 많이 힘 얻고...! 완전 좋아요!
댓글은 시간 될 때, 천천히 하나하나 다 읽어볼게요!
고마워요. 정말 상상도 못할만큼, 많은 힘 얻고 있어요. 정말, 정말로.
다정한 사람들
- 암호닉 신청 했는데, 없으신 분들은 말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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