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당연히 사랑해
23(完)
***
우리의 거실에는 타이머 오류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렸다. 나는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그는 제 무릎에 손을 얹고는 숨을 고르는 사진. 처음에는 남준씨가 왜 이 사진을 선택했나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액자 속 우리를 보면 절로 이해가 되고는 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를 따라나오는 헝클어진 머리의 그와 사진 속 그가 닮아 있어서.
덕분에 사진을 앞에 두고 닮은 행동을 하는 우리였다. 나는 그의 붕붕 뜬 머리를 재워주고, 그는 그런 내 손길을 다 받기 전까지 눈을 감고는 옅은 잠을 몰아내고. 내 손길이 끝나면 서로의 코를 맞대어 간질이고는 함께 칫솔을 입에 무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주 평범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우리의 날들이었다. 하루하루가.
**
"이거 하기 싫어."
제 머리 위의 곰돌이 머리띠를 가리키며 말하는 호석이었다. 나는 그의 칭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리라의 선물을 포장했다. 리라는 건너편 집의 아이였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오늘 생일을 맞이한. 우리는 리라의 깜짝 손님으로 초대받아 나름의 준비를 마쳤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과 그의 주장으로 사게 된 이름 모를 괴물 피규어. 거기에 세상 귀여움은 호석이에게 다 간 것 같은 곰돌이 머리띠까지. 완벽했다. 평소 남들 앞에서는 표정을 굳히고 있는 때가 가끔 있는 호석이라, 리라가 그에게 꽤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취한 나름의 조취이고. 나는 누가 여덟 살인지 모르겠는 호석이를 어루고 달래, 리라네 초인종을 눌렀다.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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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네가 줘."
내 말에 호석이는 제 머리 위에 달린 곰돌이 귀를 만지작거리며, 포장해 온 선물을 건넸다. 리라는 그런 호석이의 귀를 만지고 싶은지, 그의 귀만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그에게 고개라도 숙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호석이가 먼저 리라에게 고개를 숙여 리라의 손을 그 위로 얹었다. 그리고는 제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생일 축하해. 리라."
리라는 그의 축하에 놀란 듯, 살짝 멈칫하다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고마워. 삼촌. 하고.
리라는 내가 사온 가방을 끌어안고는 연신 쫑알거렸다. 자신이 정말 가지고 싶었던 거라며. 내게 손키스까지 날리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선물은 그의 것이었다. 리라는 지금껏 선물들과 다른 포장에 한껏 기대를 하고는 선물을 풀어냈다. 동시에 비명인지 환호인자 모를 목소리를 내지기까지 하면서. 리라의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의 피규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리라는 내가 준 가방까지 내팽겨치고는 그 피규어를 끌어안았다. 어쩐지 눈물까지 맺혀 있는 것 같았다. 단언컨데 지금까지 중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뭐를?"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맨날 여섯 시만 되면 삼촌 집 오잖아. 너."
"..."
"집에서 보면 혼날까봐 삼촌 집에 와서 이 만화 보는거지?"
"...삼촌 자는 거 아니였어?"
"삼촌은 이모 없으면 못 자."
내가 밖에 있을 때의 시간이었다. 여섯 시는. 내가 집에 없는 사이 이런 일이 있었구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워낙 가까운 집이라 왕래가 자주 있었는데, 집에 와서 이 어마무시한 캐릭터가 그려진 만화를 보고 갔을 줄이야. 리라가 올 때마다 방에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는 호석이도 참. 나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둘의 모습에 잠시 우리의 아이를 상상해보았다.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며. 리라의 부모님은 내 어깨를 살짝 치며, '고마워. 당신 남편.' 하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의 칭찬에 한껏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 없이는 못 잔다는 그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저렇게 사랑스러운데.
"근데 왜 자는 척했어?"
"너가 나 무서워 하잖아."
"...미안."
"괜찮아. 대신 앞으로는 같이 봐."
"좋아!"
"그리고 이런 거 좋아해도 돼."
"...그래도 나는 여자아이인걸."
리라의 귀여운 사과에 결국 리라네 아버지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동영상 녹화 소리가 들렸다. 뭐랄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간질거리는 그런 장면이었다. 마냥 사랑스러운 리라에게 저런 고민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고민을 가장 먼저 알아준 게, 호석이라니.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 입이었다. 과거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이었기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좋아하는 걸 좋아하면 돼."
"정말?"
"응.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멋진 일이야."
"고마워. 매일 안고 있을게."
"대신 학교에 데리고 가는 건 안 돼."
"응. 조심할게!"
리라의 어린 고민에 참으로 정확한 답을 내어준 그였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멋진 일이라니. 리라네 어머니가 내 어깨를 한 번 더 약하게 밀어냈다. '멋진 사람들이네.' 하며.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다정한 사람이 된 건지. 나도 모르게 말간 웃음이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리라가 너무 좋아하더라."
"그러게. 다행이야."
"고마워."
"뭐가."
"멋진 사람 됐어. 덕분에"
"...뭐래. 얼른 자."
"아. 좋다. 너 덕분에 멋지고 근사한 사람은 내가 다 하네!"
"나도야."
집에 돌아와 잠에 들 시간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따스했다. 바깥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기면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답을 마지막으로 한참 생각하다 말을 뱉었다. 사실 오늘 말할 계획은 없었는데. 나도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말하려 했는데. 오늘 하루 그의 모습을 보니 내가 부족해도, 그가 완벽한 남편 그리고 아빠가 될 것 같았다. 정말로.
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천장으로 뻗어 손의 크기를 쟀다. 그보다 두 마디는 더 작은 손이었다. 그는 그런 내 손을 보더니, 새삼 작다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손바닥 한 구석에 작은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그려내고는 물었다.
"손이 이 크기면 어떨까?"
"너무 작다. 너보다도 작잖아."
방금 전의 크기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동그라미를 그려내고 물었다. 발이 이 크기면? 하고. 그러자 그는 이것도 너무 작다며, 두서없는 내 물음에 얕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호석이의 손을 잡아 내 배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와 손을 겹쳐 내 배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다, '어리광이야?' 하며 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말해야 할 때였다.
"나는 이제 어리광 안 돼."
"왜. 계속 예뻐해줄 건데. 내가."
"아니야. 안 돼."
"그니까 왜."
"쪼그만 거 언제 다 키워. 그럼."
"뭘?"
"손도 작고, 발도 작고"
"..."
"다 작을 텐데. 빨리 키워야지."
"...무슨 소리야?"
"뭘 무슨 소리야!"
"...응?"
"아빠 되는 소리지."
"..."
"너 이름 하나 더 생겼다."
"..."
"우리 아가 아빠."
"...진짜야?"
"응. 아빠 된 거 축하해."
"..."
"남편"
내 마지막 말에 돌아오지 않는 답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추궁하려는데, 내 목소리 보다 빨랐던 건 그의 눈물 어린 목소리였다. 뭐야... 울어?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우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나는 그의 등을 일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 울지마. 하고. 그는 쉬이 그치지 않는 눈물을 애써 삼켜내다 말했다.
"열심히 살게."
"...당연히 그래야지."
"진짜 네가 생각하는 거에 몇 배로 그렇게 살게."
"...지금도 충분해."
"고마워. 진짜. 정말, 뭐라 말해야 될 지 모르겠는데..."
"알아. 다 알아."
"...고마워."
또 다른 약속을 한 우리의 밤이었다.
**
[호석 시점]
"정희망."
"시러."
"아이스크림."
"...한 개?"
"인심 썼다. 두 개!"
"아빠 최고!"
"그러니까 엄마한테 가서, 빨리 이거 주고 와요."
"멍데요?"
"엄마 생일이잖아. 아들."
"응!"
"축하합니다. 해줘야지."
"해줘야지!"
"이거 비싼 거야. 임마. 제이슨 삼촌 붕붕이 보다 돈 더 많은거야."
"이거가 붕붕이 보다 비싸?"
"응. 그니까 가서 엄마한테 예쁘게 주고 오세요."
"네에."
그녀의 생일이었다. 뭐 하나 예쁜 구석 없는 남편 데리고 산다고 고생하는데, 거기에 나를 닮은 아들 녀석까지.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 역시 한국에 두고 온 회사를 정리하고 이 곳에 법무 지사를 차려, 남준이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처리하며 꽤 적지 않은 수입을 냈다. 남준이는 한국에서 직접적인 법무 업무를 봤고, 나는 한 발짝 떨어져 지시만 내렸기에 그닥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위법은 결코 아니었다. 감히 희망이와 그녀를 두고.
희망에 희망이 더해지면, 그런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아도 누구보다 바르게,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희망이는 내가 건네준 반지를 가지고 집 앞 마당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향했다. 물론 사 년 전 우리의 연약식처럼. 맨발로. 아이의 작은 발이 그녀 앞에 당도하자, 그녀는 희망이를 바라보며 무어라 물었다. 아마도 왜 맨발이냐는 것이겠지. 희망이는 내가 시킨대로 의자 밑의 꽃다발을 꺼내 제 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준비해주었던 우리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제 주머니에 넣었다. 동시에 한 쪽 주머니에서는 내가 준비한 반지를 그녀에게 건넸고. 그녀는 희망이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듯 했지만, 이내 곧 자신들을 지켜보는 나를 보며 알겠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밝은 사람이었다. 희망이는 제 역할이 끝나고 나서야 내게로 총총 달려들었고, 나는 그런 희망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밟는 맨발의 잔디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우리에게 잠시 멈추라고 손짓하고는 카메라를 꺼내 들어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나는 그녀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겨,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녀와 같은 반지를 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수 마디의 말이 건네졌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사랑해. 나도. 진심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더 잘할게. 알아, 잘 할 거라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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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드디어 <다정한 핀잔>이 마무리 되었네요. 아픔이 많았던 다정커플이었기에 아쉬움도 많이 남는 것 같아요. 그래도 두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잘 살아갈 거라고 굳건하게 믿기 때문에! 작품 속 모든 아이들의 행복을 빕니다 :) 우리에겐 번외도 있으니, 종종 아이들의 삶을 만나볼 수도 있겠죠? ㅎㅎ 위 작품에서 누구보다 고생한 우리 호석이! <다정한 핀잔>의 뮤즈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마지막까지 다정한 핀잔을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만간 신작으로 만나요! 그리고 저 여러분이 써주신 댓글 보면서 정말 많은 힘 얻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 전 회차들의 댓글 하나하나 읽으면서, 천천히 댓글 달게요. 예쁜 댓글들이 많아요. 정말로. 아. 그리고 어떤 독자분께서 마지막 화에는 배경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언젠가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음. 짧은 아이들의 단편 글들이지만 그래도 글로 이야기하는 만큼, 글로만 여러분께 목소리를 전하고 싶다고! (제 작품 속에 사진과 노래가 없는 이유입니다!) 아직 제 묘사나 문장들이 부족해서 이입이 덜 되신다면, 제가 더 노력할게요. 제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해주시는 목소리니 고마워요.
이제 한 작품이 끝났으니 소소한 사담방으로 인사할게요.
+ 암호닉은 수능이 끝나고 다시 올게요. 수험생 독자분들을 위한 작은 배려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울고 들어온 너에게 中 <달의 무게> - 김용택
달은 무슨 힘으로
자기의 무게를 버틸까
...
그래도 달은 버티잖아요. 저만의 힘으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더욱 잘 버틸 거예요.
당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