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손가락 OST- 지호의 theme
(열스 숨스 기간이므로 음악 자동설정 꺼두었습니다.)
경성 비밀결사대 07
written by 스페스
포드사의 검은 T 모델 자동차가 경성운동장 옆으로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이윽고 시동을 끈 석진이 차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이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지민과 비슷한 얼굴이 얼핏 스칠 때마다 석진은 낮게 내린 창틈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찾는 얼굴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운동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운동장 외벽에 크게 걸린 홍보 현수막으로 미루어보아 곧 있을 한성역전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는 참가자들 일테다.
석진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곗바늘은 이제 막 7시 55분을 지나고 있었다. 지민과 약속한 시각이 채 오분도 남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씩 초조해지는 석진이었다.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동경발 여객선의 도착시간을 고려한다면 지민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넉넉잡아야 이십여 분 내외다. 아니 그보다 지민이 나타난다는 보장도 딱히 없었다. 자신의 제안에 응하겠다는 답을 들은 것도 아닌데, 석진은 지민이 약속한 장소에 나올 것이라 줄곧 확신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육감이 석진에게 그리 말했다. 지민은 분명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이라고.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덟시를 넘어서자, 석진이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껏 그의 직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일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석진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나 생각했다. 허나 진료실에서 보았던 소년의 강직한 눈빛만은 석진의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다시 자동차의 시동을 켜려고 기어에 손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백미러로 비친 얼굴에 석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지민의 모습이었다. 자동차 주변에서 두리번거리던 지민은 차창 사이로 비친 석진의 얼굴을 알아보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쭈뼛쭈뼛 차에 탑승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 친구 사람 심장 졸이게 하는데 뭐 있네."
석진이 다시 시동을 걸며 말했다.
"죄송해요. 늦잠을 자느라."
지민이 민망한 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날 보았던 인상과는 딴판이었다. 순진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에 석진 또한 운전대를 잡은 채 피식 웃었다.
자동차는 곧 유유히 도시를 빠져나갔다. 경성 외곽으로 진입하자 포장되지 않은 도로 사정 탓에 자동차가 탈탈거리며 움직였다. 차체가 들썩일 때마다 몸이 붕 떠오르자 지민은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피식피식 웃어댔다.
"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네."
"네?"
"그 때 병원에 왔던 그 친구 맞아?"
지민이 의아한 얼굴로 석진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치료받았던 그 친구랑 동일인물 맞냐고. 그때 그 결연함은 어디에 두고 왔어."
"... 저 실은 지금도 긴장하고 있어요."
"아, 맞다. 어깨 상처는 다 아물었어?"
"네. 덕분에."
"그 날 총은 왜 쏜 거야?"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석진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지민이 침묵하자 석진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빗맞아 쏜 건 의도적인 거야? 아니면 일부러야?"
"그 날 당황해서 손이 미끄러졌어요."
"그럼 살해 의도는 있던 거고. 이유는?"
"...."
돌려 말했지만 석진은 다시금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민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런 지민을 흘끗 본 석진이 더는 되묻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숱한 사연을 가졌지만, 각자의 개인사가 독립운동의 동기가 될 필요는 없었다. 석진이 생각하기에 독립운동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끝끝내 침묵하는 지민을 보고 석진은 개인적인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제가 도와야 할 일이라는 게 뭐예요?"
지민의 말에 석진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흑백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지민이 사진 속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있는 사이 석진이 말했다.
"친구. 걔랑 친구가 되어줘야 해."
여전히 사진을 손에 쥔 채, 의아한 듯 석진을 바라보는 지민이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소년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석진은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친구요?"
"총 쏘는 것보다 시시해서 김빠져?"
"아니, 이해가 안 돼서요."
"총 한발 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임무 일 거야. 믿을만한 친구가 되는 건."
자동차는 어느새 인천으로 진입했다. 석진이 재차 시계를 보았다. 얼추 예상했던 시각에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금 지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마치 문을 열고 진료실에 들어선 그날처럼.
"왜요? 왜 친구가 되어야... 아니, 얘가 누군데요?"
지민이 검지로 사진 속 소년을 가리켰다. 우회전하려고 핸들을 돌리며 석진이 답했다.
"그건 이제부터 직접 알아내. 정보를 미리 알수록 네 행동은 부자연스러워질 테니까."
지민이 사진 속 소년과 석진의 얼굴을 재차 번갈아보았다. 석진이 덧붙였다.
"목적은 하나야. 그 친구가 네게 자신의 모든 얘기를 허물없이 할 수 있도록 신뢰를 얻는 것. 걔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 거야."
"정보를 빼낸다는 거 보니 일본놈들 앞잡이나 연결고리가 있다는 건데..."
"아, 이 친구 총은 못 쏴도 생각은 좀 하나 보네."
"나 그래도 부산에 있을 때 공부 좀 했어요. 근데 의사선생님 정체가 뭐예요? 신분을 위장한 독립운동가? 그럼 소속은요?"
이번에는 석진이 침묵했다. 차는 어느새 제물포항에 다다르고 있었다.
동경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이들로 항구 주변은 북적거렸다. 석진이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는 차창 너머로 사람들을 찬찬히 살폈다. 나란히 주차된 일제 군용 차량과 흔들리는 일장기가 일본 고위 인사가 곧 조선 땅을 밟을 것을 암시했다. 석진은 아침에 본 매일신보 기사를 떠올렸다. 곧 총독부에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단행된다는 머리기사. 그렇다면 오늘 입국하는 이들 중 총독부의 수뇌부가 포함되어 있을 확률도 적지 않았다.
"박지민."
밖으로 펼쳐진 은빛바다를 보며 지민은 수평선 끝에서 나타날 선박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석진의 부름에 지민이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총격전이 발생할 수도 있어. 혹시 총 들고 왔으면 여기 놓고 가. 괜히 잘못 엮여서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까. 위험할 수 있으니 사람들 내리는 장소에 너무 가까이 붙지 말고. 그냥 걔 얼굴만 확인하면 돼. 걔 입국했다는 것만 확인되면 경성에서 진짜로 행동 게시할 거니까. 얼굴 확인하고 다시 차로 돌아와. 오늘은 거기까지야."
평소 또박또박 느리게 말하는 석진이었으나 방금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통에 지민은 어리둥절했다. 무엇 하나 시원하게 이해되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잖아요. 지금."
지민의 반문에 석진이 지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너와 내가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거야. 이 땅에 봄날이 오도록."
지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 일을 떠올렸다. 새벽 다섯시 반. 동이 틀 무렵 깨어난 지민은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 의사의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제게 놓인 덫은 아닌가. 숱한 고민 끝에 탄환이 몇 발 남지 않은 총을 챙겨 넣은 지민이 집밖으로 나섰다. 일곱시 오십분. 약속시간보다 앞서 경성운동장 앞에 도착했지만, 지민은 끝까지 망설였다. 골목길에 숨어 운동장 한켠에 멈춰 선 자동차를 지켜보던 지민은 진료실에서 제 상처 부위를 꿰매던 석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석진의 차를 향해 달려갔다.
"이 친구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곤란한데. 배 들어온다."
석진의 말에 지민이 차창 밖을 보았다. 뿌우ㅡ 경적소리가 항구를 뒤덮었다. 여객선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수평선 끝에서 물살을 가르고 나타났다. 지민이 품 안에 있던 총을 꺼내 석진에게 건넸다. 차문을 열고 나가며 소년이 덧붙였다.
"믿어볼게요. 봄날을 위해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말."
바닷바람이 꽤 차가웠다. 지민은 외투를 여미며 선착장으로 뛰었다.
* * *
남준은 신문사에서 밤을 꼴딱 새웠다. 다음 달부터 연재될 특집기사 준비에, 마감까지 겹친 탓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무실을 빠져나온 남준은 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근처 국밥집으로 향했다. 피곤할 땐 역시 국물이 당겼다. 시래기 국밥으로 점심을 해치우고, 곧이어 그가 향한 곳은 종로에 위치한 오래된 서점이었다. 남준의 유년을 지탱했던, 가장 그리운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낡은 책방의 미닫이문이 손쉽게 열렸다. 실내로 들어오는 남준을 보고, 주인이 반색했다. "이야, 이게 누꼬. 남준이 아이가." 아마도 아직 남준의 전향을 알리 없기에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리라. 남준은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지만, 애써 웃으며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오랜 대화 끝에 서점 주인이 남준에게 물었다.
"동경에 유학 다녀온다고 소문이 파다했지. 남준이 네 그리 똑똑해가 커서 뭐가 될지 내 참말로 궁금했다 안 하나."
남준은 보조개가 패일 정도의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와 달리, 그의 눈은 차마 웃지 못했다. 침을 꼴깍 삼킨 남준을 향해, 서점 주인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돌아와서 뭐 하는데?"
"...글 써요. 옛날 버릇 못 버리나 봐요."
"시 쓰나? 아님 소설?"
"그냥. 이것저것... 저 책 좀 보 고가도 되죠?"
"되고말고. 벌써 이래 컸나. 아무튼 반갑다."
남준이 씽긋 웃고는 도망치듯 책방 한 켠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높게만 보였던 책장은 이제 자신의 눈높이에 놓였다. 손이 닿지 않아 책을 꺼내려고 쩔쩔매던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졌다. 정갈하게 꽂힌 책들을 살피던 남준의 시선이 이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세월이 지난 탓에 신간에 자리를 내어준 옛 시집이 책장 귀퉁이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시집 한 권을 빼어든 남준은 어린 시절 그랬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책장에 기대앉아 책을 펼치는 동안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대 유명한 시선이 한대 묶여있는 시집에는 자신과 월이 가장 좋아하던 시가 함께 실려있었다.
남준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김남준 이거 읽어보라니까. 먼 후일."
"네가 이것부터 읽어 봐."
"내가 먼저 말했다."
"아 유치해. 그럼 이 오라버니가 읊어준다."
책장에 기대 어깨를 붙이고 앉은 두 사람은 종종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한 권의 시집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둘 사이에서, 늘 패자는 남준이었다. 남준은 시집을 받아들고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시를 읊었다.
"먼 후일. 김소월."
빈 책방에 남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노라."
남준은 시를 다 읊고 나면 항상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펼쳐 월에게로 넘겼다. "이제 네 차례야." 여자가 넘겨받은 글귀를 읊으려 하자, 잠시 멈추라고 손짓한 남준이 말했다.
"이제 읊을 건, 조선 최고의 낭만주의자의 시야."
"아니거든. 최고는 김소월이거든."
"아니라니까. 일단 읽어 봐."
마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남준의 머릿속에는 책방에서의 추억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남준은 눈을 꼭 감은 채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가, 이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적힌 페이지를 펼쳐 속으로 한 줄, 두 줄 읽어내려갔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시를 읽는 동안만큼은 열세 살, 그 시절의 소년이 된 것 같았다. 이제 다 큰 어른이 되었건만 남준은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꾸 울컥하는 마음에 시집을 덮어두고, 남준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서점에 오지 말 걸. 달디 단 추억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현실에, 남준은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행여 제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 때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점 주인의 목소리에 남준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오늘 무슨 날이래. 우리 집 단골손님이 둘씩이나. 안 그래도 남준이 녀석 왜 혼자 왔나 했더니."
* * *
계기판에 치솟은 숫자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거의 폭주하다시피 도로를 가로지른 덕에 윤기는 간신히 시간에 맞춰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선착장 구석에 차를 세운 윤기가 곧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제 곧 태형이 도착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오찬 모임에 초대된 숙부는 직접 태형을 마중 나갈 수없음에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는 윤기를 대신 보내며 용돈을 두둑이 건넸다.
"그 녀석 먼 길 오느라 배고플 거다. 너도 같이 맛있는 것 좀 먹고."
"아버지 말씀 아니어도 같이 마중 나가려 했어요. 태형이 점심 사줄 정도는 저도 있고요."
윤기는 끝끝내 숙부가 건넨 돈을 받지 않았다. 윤기의 고집에 혀를 찬 숙부가 저녁식사 만큼은 셋이 함께 하자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윤기는 인천으로 오는 내내 어린 태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 아버지의 장례식 날, 숙부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집에 찾아온 태형의 모습을, 윤기는 잊을 수 없었다. 유해조차 거두지 못한 채, 급하게 치뤄진 친부의 장례식에서 윤기는 이름으로만 듣던 사촌동생을 처음 만났다. 한 인생을 보내주는 자리라고 하기에, 장례식은 너무도 초라했다. 윤기는 그 사실에 마음이 미어졌다. 아버지의 동료들은 밤 늦게 몰래 방문해, 짧게 조문을 하고는 다급히 자리를 떳다.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길이니 만큼 그의 동료들이 방문할 거라 계산한 일본 경찰들이 윤기의 집 근처를 배회했기 때문이다.
상을 치루고 나서 윤기는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윤기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딱 둘 뿐이었다. 윤기의 숙부, 그리고 허물없이 지내던 아버지의 동료. 윤기는 숙부의 손을 잡았다. 자신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자던 동료들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린 윤기를 숱하게 고민하게 했던 것은 외삼촌 부자가 타고 온 검은 자동차와 태형의 손에 들린 빙과였다. 윤기는 흔들리는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절뚝거리는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눈에 밟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윤기는 알았다. 혹여 만주를 간다 할지라도 제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망설이는 윤기를 보고, 태형은 제 아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윤기 형이랑 같이 갈 거야." 태형이 하루 종일 조르는 통에 숙부 또한 윤기를 종용하고 나섰다. 끝내 외삼촌 부자를 따라나서며, 윤기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태형이 때문이야. 태형이가 자꾸 조르니 같이 가주는 거야.' 자신이 숙부를 따라가는 건 순전히 태형 때문이라 했지만, 윤기는 진실을 알았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시절 윤기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짓누르는 짐이 될 거라는 사실.
* * *
지민은 항구로 들어오는 선박의 위용에 잠시 넋을 놓았다. 여객선이 선착장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선박 근처로 몰려들었다. 갑판 위에 선 몇몇 사람이 벌써 자신의 가족, 지인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지민 또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한껏 고개를 꺾고 갑판에 선 이들을 하나둘 살피기 시작했다. 사진 속 소년의 얼굴을 찾아야 했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 그 옆 중절모를 쓴 중년 남자. 일본인 헌병대 무리. 몇몇 사람들이 지민의 눈을 지나쳤다. 이윽고 지민의 시선이 여객선 한가운데 선 소년에게서 멈췄다. 사진 속 그 얼굴이었다. 지민은 인파에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소년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사진에서 느꼈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선 소년이 고개를 쭉 빼고 누군가를 향해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어댔다. 어린아이처럼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소년이 양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객선 모터 굉음에 목소리는 묻혔으나, 지민은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내린 지민은 제게서 멀지 않은 곳에 선 한 남자를 발견했다.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으며 소년과 아는 체를 하는 남자. 지민은 남자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민윤기. 카페 스페스에서 그리고 창고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
지민은 예상보다 쉽게 소년의 정체를 알게 될 것 같았다. 호석이 몇 번인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했다.
「조선방직공장 사장 아들. 실은 조카야. 진짜 아들은 동경에서 유학 중이고.」
배가 항구에 멈춰 서자, 선착장에 서있던 사람들은 이내 허름하게 지어진 사무소 앞으로 몰려들었다. 곧 여객선 탑승객들이 사무소를 지나 조선 땅을 밟을 것이다. 배를 타고 들어온 이들은 누구든 사무소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쳐야 입국을 허가받았다. 사무소 앞에서 장사진을 친 사람들은 대체로 들떠 보였다. 곧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얼굴을 만나게 될 테니.
몇몇 사람들을 시작으로 꽤 많은 이들이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사무소 안까지 진입했다.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든 탓에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지민 또한 무리를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여객선에서 내린 사람들은 여행용 가방을 손에 쥔 채 줄지어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일본인들 뒤로 제 차례를 기다리던 태형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철창 틈으로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이 미소를 지었다. 지민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수속을 마친 태형이 바리케이드를 빠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갑작스레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태형보다 앞서 철문을 밀고 나온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입은 제복으로 미루어 보아, 총독부 인사임이 틀림없었다. 이윽고 인파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총소리가 울려펴졌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또 다른 고위 인사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사람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그때 사무소를 지키던 일본 군인들이 빠져나가는 이들을 막아섰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소리를 지른 군인이 공중으로 총을 쏘자, 사무소에 갇힌 사람들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안에 범인이 있다."
지민은 쪼그려 앉으며 자신도 모르게 태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공포로 커진 태형의 눈이 철창 밖에 앉은 지민과 맞닿았다.
시간은 한참이나 지체되었다. 일본인은 가장 먼저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허락되었다, 뒤이어 일본 경찰들이 조선인들의 여권을 확인하고 몸수색을 시작했다. 배에 탑승했던 이들 중 신원이 명확한 사람들은 일본인 다음으로 풀려났다. 풀려난 사람들이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을 지목하면 함께 사무소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지민은 점점 초조해졌다. 여권은 고사하고, 탑승객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무고하게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어깨 위 수술 자국까지 발각된다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 해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제 차례가 되자,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쥔 여권을 일본 경찰에게 건넸다.
"슌케이."
여권을 훑은 일본 경찰이 태형의 이름을 되뇌고는 철문 밖으로 턱짓을 했다. 일행이 있으면 함께 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태형이 무릎을 굽혀 철창 사이로 팔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제 어깨를 건든 사람은 태형이었다. 지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僕の友だちです.(보쿠노 토모다치데스)」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경찰에게 말했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손에 든 여권을 태형에게 다시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철문을 빠져나오며 지민을 바라보고 말했다.
"일어나, 가도 된다잖아."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또 오랜만이죠. 정말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안하고 싶었는데. 6화에 저도 좋아해주시는 것만큼 같이 인사드리고 싶다고 댓글 달았는데, 그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쓸 걸 그랬나봐요. 기다려 주신 분들께는 많이 미안해요. 대략 어제는 올 줄 알았는데 열스숨스! 하고, 원음 선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고, 또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 좋자고 쓴 글이지만, 사랑받으니 너무 좋더라구요. 부끄럽네요.
+ 비지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모든 편(이전 편 포함)에 곡목을 달아놓을테니 참고하셔요.
+ 암호닉은 최신화에서 계속 받습니다. 혹시 누락되신 분들이 계시다면 댓글 남겨주세요.
사랑스런 암호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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