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남자 OST - Sub title, 보고싶다 OST- 두려움
경성 비밀결사대 12
written by 스페스
연기 사이로 보였던 두 사람의 얼굴이 금세 자취를 감췄다. 여전히 얼떨떨한 정국이었다. 자신의 옷과 얼굴, 사방으로 튄 혈흔이 방금 있었던 사건이 현실임을 상기시켰다. 정국이 조끼 안으로 총을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을 울리는 총소리와 소음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컴컴한 창고를 지나 건물을 다급하게 빠져나오던 정국이 눈으로 도로변을 훑었다. 검은 차량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임무를 수행한 다른 세 사람이 탔어야 하는 도주 차량이었다. 정국이 재빠르게 번호판을 확인한 후 차에 올라타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석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적어도 얼굴에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정국의 모습만큼은.
석진은 곧 백미러로 바깥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쫓아오는 이는 없었다. 비밀 통로가 일반 출구와는 정반대 편인 까닭이었다. 머지않아 건물 주위로 일본군이 들이닥칠 테지만 아직까지 도로는 한적했다. 석진은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자동차가 연회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자 정국이 의아한 얼굴로 석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대원들을 기다려야"
"뒤에 또 다른 차가 대기하고 있어."
정국은 입을 다문 채 석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잔뜩 긴장한 낯이었다. 정국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철물점 다락방에서 임무를 설명할 때도 지금처럼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고개 숙여."
석진의 말에 정국은 무릎과 맞닿을 정도로 낮게 수그렸다. 급하게 사건 현장을 빠져나가는 정국을 목격한 이가 없어야 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감싸 쥐고 앉은 정국은 연회장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굉음과 동시에 피어오른 연기. 유혈이 낭자했던 단상. 일본군에 붙잡히자 곧 총탄을 맞고 쓰러진 대원. 발코니를 달리며 적을 저격하던 또 다른 동지. 그리고 포연 사이로 보았던 두 사람. 머릿속에 떠오른 두 얼굴에 정국의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속도를 높인 차량은 좁은 도로를 질주했다. 고개를 숙인 터라 어디로 향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량이 좌우로 쏠리는 느낌에 그저 복잡하게 이동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어지럼증에 구토가 나오려는 찰나, 차체가 점점 느리게 움직였다. 곧 자동차가 멈추고 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전정국."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정갈한 저택 안이었다. 가끔 드나들어 눈에 익은 석진의 집이 아니었다. 창문 밖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국이 의아한 듯 석진을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감시망에 걸릴 수도 있어서 여기로 왔어.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석진이 정국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국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피딱지들이 석진을 불안하게 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넋이 나간 정국이 느릿하게 답했다.
"폭탄이 터졌고, 출구가 막혀서 형이 알려준 비밀 통로 앞을 부쉈어요. 나머지 대원들이 오면 바깥으로 이어진 길을 단번에 찾아내려고요. 통로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불러 세웠어요."
석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더 얘기해 보라는 듯 가만히 기다리는 석진을 보며 정국이 머뭇거렸다.
"총. 총을 꺼내려는데."
"총?"
"아버지 유품을..."
"전정국."
잔뜩 가라앉은 석진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정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석진은 달싹거리던 입을 다물고 머리를 짚은 채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총기 소지 안 된다고 했지. 아냐. 내 잘못이다.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널 투입시키는 게 아니었어."
석진이 차량 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때 정국이 석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안 쐈어요. 총."
석진은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정국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일본군을 쏜 건데……."
"누구."
"두 명을 봤어요."
"두 사람?"
"한 명은 남준이 형이었고, 한 명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남준? 김남준?"
"……. 네."
"매일신보 편집장 김남준?"
석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어릴 적부터 친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
"저번에 얘기했던 우리 누나 변절한 친구요. 형이 우리 집 오기 전에 붙어 다녔다던……. 그 사람이 남준이 형."
정국의 말을 듣고, 석진은 생각에 잠겼다. 차 안으로 적막이 맴돌았다. 정국은 그런 석진의 눈치를 살폈다. 눈썹을 찡그리며 복잡하게 생각하는 석진의 모습에, 정국은 일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국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총을 숨긴 채 연회장에 들어섰을 것을.
"그럼 다른 한 사람은?"
석진의 물음에 정국이 오랜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처음 행사가 시작될 때부터 계속 절 주시했던 것 같아요."
"인상 착의는?"
"좀 날카롭게 생겼고, 친일파 조선인들이 모여 있던 곳에 앉아있었으니 일본인은 아닐 거예요."
대화를 곱씹던 석진은 정국을 데리고 차량 밖으로 나왔다. 주차 공간 옆으로 작은 정원이 이어졌다. 정갈하게 정리된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선 석진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누구 집이에요?"
"있어. 일단 들어와."
저택의 규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실내였다. 석진을 따라 집 안에 들어온 정국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자, 석진이 갈아입을 옷을 주겠다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정국은 눈으로 실내를 살폈다. 거실에는 소파뿐, 그 흔한 액자 하나 없었다. 한구석에 단출하게 놓인 축음기와 그 옆으로 줄줄이 쌓인 SP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국은 문득 집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때, 석진이 방에서 꺼내온 옷을 건넸다. 하얀 와이셔츠. 정국이 셔츠를 받아들려다가 제 손에 묻은 검붉은 혈흔을 보고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서 나온 물이 피로 물든 얼굴과 손을 씻겨 내렸다. 정국은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레 거울 속으로 다시금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정국은 화들짝 놀라 다시금 얼굴을 적셨다.
욕실에서 나오는 정국의 모습을 보고, 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를요?”
아직 정국의 얼굴에 물기가 흥건했다. 정국은 이제 막 갈아입은 셔츠 단추를 채우며 석진을 응시했다.
"너희 집. 데려다줄게."
정국이 손을 멈춘 채 석진을 멀거니 바라보자 석진이 덧붙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넌 그냥 거기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놀라 도망간 거야. 알겠어?"
정국은 석진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정국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석진이 다시금 설명했다.
"임무와는 상관없는 사람, 아니 너는 애초에 이 임무는 모르는 사람이야. 김남준이 총을 쐈다면 널 밀고할 리는 없고, 다른 사람이 쐈다면 그 사람 또한 일본군을 쏜 이유가 있겠지. 넌 그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간 연회장 직원인 거야. 그러니까 태연하게 행동해."
* * *
남준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한 걸음 앞에 선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남준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행사 내내 정국을 따라다니던, 제 시선보다 줄곧 먼저 움직이던 남자. 민윤기. 그리고 그 남자의 손끝에 걸린 총기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남준은 숨이 턱 막혔다. 찰나의 순간 남준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민윤기도 독립운동에 연루된 건가. 아니면 정국이 때문인가. 갑작스레 앞에 선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닿았다. 남준의 얼굴을 본 윤기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희뿌연 연기 사이에서, 윤기가 남준에게로 바짝 붙어 섰다. 남준은 그의 눈빛에서 꽤 많은 것을 알아챘다. 그의 행동이 우발적이었음을, 총을 쏴 본 경험이 많지 않음을, 아니 방아쇠를 당긴 경험이 전무할 수도 있음을. 흔들리는 윤기의 시선이 이를 증명했다.
그러나 상념은 길지 않았다. 자신의 허리춤을 짓누르는 느낌에 남준이 시선을 내렸다. 총구였다. 제 앞으로 붙어선 윤기가 남준의 허리에 총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함부로 말했다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야."
윤기의 낮은 목소리에 남준은 재차 제 허리에 놓인 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려 총구를 붙잡았다. 순간 윤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총구를 쥔 채로 남준이 윤기에게 속삭였다.
"이거 들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생각보다 너무 순진한데요. 적어도 민윤기씨가 독립군은 아니라는 거겠죠."
총을 잡아챈 남준이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세게 밀어버리자, 창고로 날아간 총이 이내 구석진 찬장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윤기가 남준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남준이 덧붙였다.
"그 협박에 대한 내 대답입니다. 저쪽 테이블 밑에서 고개 숙이고 있다가, 검문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요."
남준이 말을 마치고는 자리를 뜨려 하자, 윤기가 남준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쌈닭 동생 때문이야?"
"총을 쏜 이유가 월이 때문이군요."
남준은 윤기의 의중을 파악했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곧 포연 속으로 사라졌다. 윤기는 뒤돌아 선 남준의 모습을 응시했다. 장내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나서야, 윤기는 다른 이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 * *
숙부와 윤기는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사건 이후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데만 수 시간이 걸렸다. 행사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일본인은 물론 친일파 부호,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초청장을 보여주고 몸수색을 당했다. 사건의 사안이 큰 만큼 모두들 복잡한 절차를 감수하는 눈치였다. 윤기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길게 늘어선 줄의 한가운데 선 윤기는 남준을 떠올렸다. 남준의 대처가 아니었다면 윤기 또한 용의선 상에 올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기는 안심할 수 없었다. 혹여나 목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부자는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기사가 모는 검은 차량에 탑승한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가지 아무 말이 없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 나란히 앉은 둘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랐다.
윤기는 차창 밖을 보며 일본군에게 질질 끌려가던 세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준의 말대로 사람들 사이로 섞여 앉았을 때, 연기가 거치며 눈에 드러난 연회장 안의 상황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욕지거리를 한 일본군들이 차례로 셋을 끌고 나갔다. 양 팔을 군인들에게 포박당한 남자들은 얼마나 맞은 건지 육안으로 생김새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중 둘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듯했다. 윤기는 애써 시선을 돌렸지만, 세 사람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차량이 덜컹거리며 흔들리자, 윤기가 다시금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서 총격 사건이 있었냐 할만큼 불야성 같은 도시의 밤이 이어졌다.
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정신없는 숙부를 대신해 윤기가 앞장서서 집안에 들어섰다. 윤기는 피곤한 얼굴로 2층으로 이어진 층계를 올랐다. 돌덩이라도 매단 것 마냥 걸음이 무거웠다.
"윤기야."
갑작스러운 숙부의 음성이 윤기를 붙잡았다. 층계 중간쯤 선 윤기가 고개를 틀어 시선을 내렸다.
"아까는 어디 갔던 게냐."
윤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뱉어보려는 순간 숙부가 다시금 물었다.
"사고 현장에서 말이야."
"……. 목 좀 축이러 잠시 밖에 갔었어요."
"그래.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구나. 들어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윤기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숙부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숙부의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윤기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윤기의 방은 2층 가장 끝에 위치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윤기는 문 앞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외투도 벗지 못한 채, 문에 어깨를 기댄 윤기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혹여 목격한 자가 있다면 자신은 물론 숙부의 인생도 끝이었다.
연회장에서의 상황은 마치 꿈같았다. 윤기는 총을 쥐고 방아쇠를 당겼던 그때처럼 허공에 손을 움직여보았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윤기는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윤기는 연회장에서의 상황을 곱씹었다. 장내을 초조하게 오가는 소년의 모습에서 윤기는 쌈닭의 얼굴을 보았다. 밀서를 돌려 달라 제게 찾아왔던 절박한 얼굴이 식장에 앉아있는 내내 윤기의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소년의 초조한 얼굴은 정미소 지하에서 마주했던 여인의 얼굴과 오버랩 되었다. 라이터 불빛이 명멸할 즈음, 동생에 대해 묻던 자신의 질문에 어떠한 답도 내지 못하던 그 슬픈 표정.
오랜 상념 끝에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저녁은 어떻게 하고요?"
일하는 여자가 부엌에서 나와 윤기에게 물었다. 그제야 하루 종일 굶어 허기진 뱃속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었다. 윤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집 밖을 나섰다. 이윽고 방에서 나온 숙부가 한동안 윤기가 닫고 나간 문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 * *
스페스의 문이 열리자, 바에 걸터앉아있던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늘 그랬듯 손님이 몰려오는 일곱 시 즈음일 테다.
"어서오..."
철문을 밀고 들어온 태형이 지민을 향해 씩 웃었다. 처음 만난 날 이후로 태형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페스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홀을 가로질러, 바 빈자리에 앉은 태형이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와, 손님 많네."
"이제 막 북적거릴 시간이야."
"근데 호석이 형은?"
"사장님?"
"응. 호석이 형."
지민이 슬쩍 얼굴을 구겼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형이라 부르는지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호석을 형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꽤 오랜 시간을 스페스에서 일하며 얻게 된 자신만의 특권이자 친밀의 척도였다. 그런데 가뿐하게 그 거리를 건너뛴 태형이 지민은 못마땅했다.
"사장님 가끔 바쁜 일 있다고 카페 비우셔."
"그렇구나."
"그래서 더 바쁘니까 너랑 못 놀아줘."
"좀 서운하다."
「여기요.」
다급한 손님의 부름에 지민이 위스키 병을 들고 쏜살같이 테이블로 향했다. 태형은 의자를 돌려 지민을 바라보았다. 주문을 받고 또 다른 테이블에 양주병과 얼음 잔을 내려놓은 지민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님이 지불한 비용을 장부에 적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며 태형이 말했다.
"나 서운하다니까."
"그니까 왜 서운한데. 못 놀아줘서?"
지민이 숫자를 계산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니까 약간 놀아준다는 말이."
"응."
"나는 이제 너랑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이제 억지로 나랑 놀아줬다고 생각한 거니까. 이게 약간 서운한데."
"어? 아냐. 김태형 놀아준 거 아니야. 나도 같이 논거야. 진짜로. 됐지?"
지민이 급하게 말을 마치고는 홀을 향해 튀어나갔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테이블 위로 그들이 먹다 남긴 음식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태형은 빈 술병과 유리컵을 들고 낑낑거리며 제 쪽으로 걸어오는 지민을 응시했다. 놀아준 게 아니라고, 진짜 그렇다고 말하는 지민의 항변에도 여전히 서운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바쁘게 일하는 지민의 모습을 보니, 푸념은 쏙 들어갔다. 태형은 바에 앉아서 내내 지민의 움직임을 쫓았다.
「여기, 위스키 한 잔이요.」
"네."
빈 테이블을 치우던 지민은 홀에 울린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지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손님에게 대답하는 태형 때문이었다. 언제 그랬는지 외투를 벗어놓고 소매를 바짝 올려 걷은 태형이 까먹을 새라 손님이 했던 말을 입으로 되뇌었다. 위스키. 위스키.
지민은 손을 멈추고 태형에게로 뛰어왔다.
"너 위스키가 뭔지는 알아?"
"음……. 이거?"
"그건 샴페인이고, 이거."
카페 한구석에는 이름 모를 술들이 즐비했다. 지민이 위스키 라벨을 가리키자, 태형이 병을 꺼내들었다.
"됐어. 줘. 내가 할게."
지민이 병을 들려고 하자 다시금 낚아챈 태형이 지민을 향해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지민은 피식 웃음이 났다.
카페는 밤이 늦도록 북적거렸다. 지민과 태형은 정신없이 홀과 부엌을 뛰어다녔다. 태형 또한 점점 일이 손에 익는 듯 했다. 홀 구석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마지막 손님마저 카페를 나서자, 태형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온몸이 욱신거려. 넌 매일 어떻게 하냐."
"금방 익숙해져."
제 어깨를 두드리던 태형이 흘끗 지민을 바라보았다.
"근데 지민아. 우리 형이 그러는데 너 부산에서 왔다며."
"응."
"나는 대구. 와! 우리 다 경상도 사나이네. 근데 경성에는 왜 왔어?"
지민이 홀에 있는 의자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형이 보고 싶어서."
"형? 그럼 너희 형도 경성에 있겠네."
태형이 워낙 자연스레 묻는 통에 지민은 엉겁결에 경성에 온 이유를 이실직고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지민은 입술을 물었다. 태형이 여전히 바닥에 앉은 채로 다시금 덧붙였다.
"형은 무슨 일해? 그럼 지금 형이랑 같이 살겠네."
"아니. 그건 아니고."
"형 보고 싶어서 경성에 왔다면서 왜 따로 살아."
제 다리를 주무르던 태형이 지민을 향해 천진하게 물었다.
".... 이제 못 봐."
지민의 답에 태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태형은 이제 못 본다는 의미를 잘 알았다. 제 어머니 또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태형은 지민이 느낄 상실의 깊이를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홀 정리를 끝내고 손님용 테이블에 앉은 지민이 태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태형의 뒤통수에서 미안함이 묻어났다. 지민은 턱을 괴고 앉아 줄곧 태형을 응시했다. 마음만큼은 더 많은 얘기를 해주고 팠다. 그럼에도 꼭꼭 숨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오늘 밤 만큼은 조금 서글프다고 느꼈다. 만일 태형이 임무와는 하등 상관없는 평범한 친구였다면, 제 처지는 물론 경성까지 오게 된 사연을 술술 털어놓았을 텐데.
“태형아.”
“응?”
지민의 부름에 그제야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지민이 지금껏 성을 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기에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영업시간이 끝난 터라 텅빈 카페가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너희 아버지는 어떤 분이야?”
From. 스페스 |
많이 기다리셨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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