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서 왔니? 중국? 일본?"
"그만 해."
"들었어? 노란피부 주제에 그만하라고 했어!"
노란 피부가 말을 했어! 그 아이들은 광현을 그렇게 놀리곤 했다. 그의 말투를 따라하고, 그의 행동을 따라하며, 때리고 발로 차고. 그들에게서 광현은 장난감과 같았다. 소중한 그런 장난감이 아닌, 심심할 때 놀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그런 장난감. 광현은 그 사실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울었다. 그들이 피부색으로만 차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 학교에는 몇 없지만 적응한 동양인들이 있었고, 그 동양인들 중 이러한 폭력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광현이 유일했다.
"내가 온 곳은 한국이야!"
한국이래. 한국. 광현보다 두 뼘은 커 보이는 아이들은 광현의 앞에 서 놀리곤 했다. 광현은 소리에 집중해 있었다. 작은 소리 하나에 놀랐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 한발자국 뒤로 향했다. 광현은 알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차별을 당했으며,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러고 있는지. 말로 듣자하니, 피부의 색이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광현은 그 말 또한 알아듣지 못했다.
근데, 한국은 여주가 온 곳 아니야? 순간적으로 조용해졌고, 광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건 그 아이들이 아니다.
"네 이름은 뭐니?"
"… …"
"나는 여주야."
광현의 앞에 서 있는 건 여주였다. 확실했다. 그녀는 한국어로 말해 왔으며, 이 학교의 한국인은 자신이 알기론 여주와 자신 밖에 없었으며, 그녀가 자신을 여주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꽤나 여주를 좋아하곤 했다. 그는 학교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공부를 잘했으며, 타고나기를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 아이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순식간에 자신 앞에 있는 피아노로 따라 쳤다. 또한, 성격까지도 흠이 없었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빙빙 말하는 모습이나, 모두에게 헤픈 웃음을 지어주는 여주를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다. 광현은 여주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광현은 잘하는 것 하나 없었으며, 사람들은 광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광현은 눈물을 터뜨렸다. 내 이름은 광현인데…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요. 내 이름은 놀림거리일 뿐이에요. 내 이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 광현을 여주는 가만히 보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웃었다.
"Andrew. 어때? 네 이름이야."
"무슨 뜻이죠?"
"강한 남자라는 뜻이야."
이 이름이면 너를 아무도 괴롭히지 못 할 거야. 그 말에 광현은 웃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고마움과 슬픔, 기쁨이 다 밀려들어 오는 그런 감정. 그러자 여주는 광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울지 마. 앤드류. 나는 네가 우는 걸 바라지 않았어."
"… …"
"적어도 난 그래. 광현아."
"보이지 않지만,"
"… …"
"당신은 아름다울 것 같아요."
흐림 넷, 맑음하나
"세운."
백인의 남성이 세운을 보며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는 들어와, 세운을 부른다. 그 옆에는 술잔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세운과 백인 남성만이 있었다. 백인의 남성의 명찰에는 폴, 이라고 써져있다. 이 가게의 사장. 폴은 검붉은 조명과, 어둡게 앉아있는 세운을 계속해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세운의 이름을 말했을 때에는 세운이 입을 열었다.
"그 이름 부르지 말아 줄래? 그딴 이름 때문에 화가 나니까."
"언제는 그 이름을 불러달라며.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그 이름을 예쁘게 부른다며 오글거리는 말로 나를 토하게 만들었을 때는 언제고?"
"그건 그때고."
막무가내다. 그는 폴의 옆에서는 항상 작아보였다. 작은 덩치는 아니었음에도, 아니 폴보다 운동을 했던 탓에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한 없이 작은 아이 같았다. 때를 쓰는 아이처럼 세운은 화가 난다며 막무가내로 말을 했다. 그 말에 폴은 참나. 어이가 없어. 라며 세운의 옆에 앉았다.
세운은 자신의 이름, 세운이라는 두 글자에 토가 나올 듯 했다.
그때의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이게 자신의 이름 탓이 아니다. 그래 그 정도는 세운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임영민. 벌써 이름 석자가 머리에 크게 박혀 있었다. 지워보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여주의 연인의 이름인데. 계속 지워 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 저는 임영민이라고 합니다.
― 정세운, 당신을 만나 기뻐요.
세운을 보며 사람 좋게 인사하던 영민이 떠올랐다. 나는 그 시간마저 여주를 보며, 곤두서 한마디 한마디를 뱉었는데 그는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자신이 지는 것만 같아서 더 기분이 나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졌다. 여주 그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졌다. 여주 옆에서 웃던 영민은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 같았다.
자신의 책을 건네며, 그렇게도 까칠하게 대했는데 영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까지 했다. 그러니 세운의 신경을 긁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세운은 아까처럼 이성을 잡지 못하고 개처럼 달려든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포커스를 유지했는데. 이게 다 여주 때문이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 핑계였다. 자신이 이성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까의 모습에 술기운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졌다.
말투, 웃음,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말 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좋은 사람 같았으니까.
"왜? 잘 안되기라도 한 거야? 이런 상황에 위안이 될 지 모르겠지만, 에드문드 세상에 여자는 많아!"
"기분 안 좋은 데 그런 이야기 하면 네 얼굴에 토 할 거야."
에드문드, 세운의 필명이자 그의 친구들이 종종 부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이 이름을 폴은 부른 적 없었다. 바로 세운이 마음에 품었던 여성 때문이었는데, 이런 세운의 행동에 폴은 다 알겠다는 듯 세운의 어깨만 두드려 주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잘 안된 모양이군. 그런 말을 하면서.
그러자 세운은 헛웃음을 지으며 폴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애인이 있더라고."
"오 미쳤군. 어째 당신은 그런 사람을 좋아한 거지? 아니, 그걸 넌 몰랐던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근데 남자친구한테 내 책을 건넸어."
"너 같이 미친놈을 내가 본적이 없어. 에드문드."
폴은 진심이었다. 세운의 책의 의도와, 그의 책의 내용 마지막으로 세운이 그 책을 어떻게 써내려 갔는지 폴은 알았기 때문에 세운을 미친놈이라 칭했다. 평생 로맨스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좌절하던 날들의 세운과, 그녀를 만난 후의 세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래. 그 책은 그녀를 위한 책이었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그렇지만 폴은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는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술을 혼자 따르고 마시기를 반복하다 잔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까지도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에, 그의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세운의 모든 날들을 같이 있었던 폴이다. 그렇기에 그런 도덕적이지 못하다와 같은 말들은 그에게 도움이 될게 없어 보였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하고, 누구보다 이상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몇 년간 봐왔던 세운은 항상 옳다는 말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그는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까. 이해하기로 했다.
― 내 책이 나와, 폴! 이번에 책이 나오면 바로 그녀에게 전해 줄 거라고. 몇 년 만에 로맨스 소설이야!
― 내 소설을 그녀도 좋아할게 분명해! 그녀를 위한 책이라고!
그녀가 좋아해줄 거라는 말로 행복하던 그였는데, 그런 말들은 그에게 필요 없음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런 이성적인 말들보다 감정적인 위로가 훨씬 나아보였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뭐라 했는지 알아?"
"뭐, 다 괜찮아. 네가 해봤자 심한 말이야 했겠어? 내가 당신 여자 친구를 보고 쓴 책이에요 ―이런 거만 아니라면 괜찮겠지."
"오. 정답이야."
웃으면서 장난치던 폴의 얼굴에 놀람이 떠 있었다. 오 신이시여… 당신 정말 미친 거야? 네가 여자한테 단단히 미쳤구나. 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말이지 세운은 이성을 잃고 말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평판 또한 자자했다. 따뜻한 감정으로 말해주는 듯 했으나, 이성은 잃지 않는. 그런 그가 이성을 잃고서 개처럼 물었다니?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길래 이렇게나 세운이 미쳐있던 건지 폴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세운의 자아가 2개여서, 한명이 빙의되었다고 하는 편이 믿기 쉬웠다. 그정도로 믿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도대체 네 머리에 뭐가 든거지? 그래서 이 많은 술들을 네 혼자 마신거야?"
"아쉽게도 나는 술을 단 한잔도 마시지 않았어. 난 맨정신이라고."
"그럼 네가 이 술을 마신 사람을 당장 데려와. 돈을 지불하라 해야겠으니. 지금 내가 많이 화가 났으니, 빨리 오라는 말도 잊지 말고."
"그래. 내가 마셨어."
"그래.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농담은 아니지. 너도 알잖아? 세운 아니, 에드문드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예정이지? 그녀를 말이야! 내가 만약 그녀의 남자친구였다면 당신의 얼굴은 이미 피범벅이었을 거야. 그 말에 그는 참은 거야?"
"폴. 너는 싸움을 못하잖아? 나는 너한테 맞을 정도는 아니야."
"하여튼 말이지."
그 말에 폴은 고개를 잠시 끄덕였다가, 또 고개를 저었다. 내 말들은 그게 아닌거 알잖아. 세운은 시답잖은 농담들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평소 같이 진중해 보이던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그게 그 여자로 인한 것인지, 이 많은 술로 인한 것인지. 아마 전자일 거다. 세운이 술을 들이킨 이유도 그 여자로 인한 것이고, 그 술로 인해 지금 미쳐가는 것이니.
폴은 그 여자가 누군지 몰라도 엄청난 매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엄청난 외모의 소유자 일 것을 예상했다. 세운이 여자로 인해 이러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애초에 세운, 그리고 여자. 이 말들은 서로 너무 사이가 멀었다. 세운과 여자라니 너무나 안 어울려.
"그래야만 했어. 근데, 너도 그녀의 표정을 봤으면, 내 반응이 이해가 갈 거야. 그녀는 나에게 항상 다정했고, 사랑한다는 눈빛을 보냈지."
"그렇지만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는걸. 네 감정에 그 여자의 눈빛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라고."
"그리고, 날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어."
"… …"
"그럴 리 없는 데도 말이지."
난 그렇게 느껴지는걸. 세운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세운의 술잔에 얼음들이 달그락, 하고 움직였다. 그러자 밖에서 쏴아아 ―하며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에 비라니. 당신과 너무 잘 어울려 세운. 폴에 그 말에 끝나게 무섭게 세운은 고개를 들더니 비가 내린다고? 라며 일어나 물어왔다.
빗소리는 크게 나고 있는데, 저 소리를 못 듣는다니. 폴은 고개를 저었다. 세운이 단단히 취한게 분명하다. 몇년간 그를 알아오면서, 이렇게 취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창 밖 빗소리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집에 가야겠다."
"뭐? 이 상태로 집에 간다고? 너 술을 마셨어. 생각 좀 해! 세운!!"
"아… 나 술 마셨지."
"그래. 나는 네가 또 미친 줄 알았어."
"그렇지만 비가 오는 걸."
그게 뭐? 신경질 적으로 폴이 대응했지만 세운은 빗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세운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미친 게 분명했다. 세운이 살다 살다가 여자 때문에 미쳐서 말을 하는 구나. 미쳐버린 세운은 입을 열어서는 이상한 말을 뱉었다. 술주정이라고 생각했다.
"비 오네. 비가 와. 폴 어떡해? 비가 와. 비가 온다고."
"알겠어! 그 비 온다는 소리 좀 그만해. 나도 한번 들으면 이해 할 수 있는 귀와 머리가 있어!"
"큰일이다.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아 제발."
"그녀는 비를 싫어해.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이면 눈이 퉁퉁 부어서는 내게 힘없이 인사를 하곤 했거든. 큰일이다…."
"여주는 비를 싫어하는데…."
그 말을 하고는 세운은 책상 위로 엎어졌다. 그녀의 이름이 여주인가 보군. 폴은 세운의 등을 토닥였다.
있지, 여주. 난 당신과 함께인 날들을 추억이라고 가득히 쌓아올리곤 해. 당신은 아닐 수 도 있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웃었던 날들이 모두 행복했거든. 그래서 더 깊게 베인 것 같아. 이 상처가 너무 깊어서 흉터가 생길 것만 같아. 당신은 나의 도발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우리 영원히 같이 못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 너무 두려워. 근데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데,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잖아. 나한테 뭐라도 걸린 듯 그렇게 서 있는데 내가 거기서 지나칠 수 없었잖아. 그런 핑계를 늘어놓곤 해.
무서워 나는. 이미 너는 내게 점점 커져버려 자리 잡고는 세상이 모두 너라고 인사하는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이미 너는 내 전부인데 너에게서 내 자리는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는 것이. 이 작은 비 하나로 너는 내 세상이 되어 나를 흔들어 놓는데, 너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어떻게 안 무서울 수가 있어. 근데 혹시 말이야. 캐서린, 여주야. 어디부터 잘못이었는지 안다면, 알려주지 않을래. 이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씩 천천히 알려줘. 네가 나에게 사랑을 알려줬던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 하면 너를 사랑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네가 내 세상에서 나갈 수 있는지. 알려줘. 내게는 너무 어려워. 하나만 알려줘. 내 세상에서 네가 나갈 수 있게 도와줄게.
내 세상을 열어줄게.
이제 나가줘. 캐서린, 여주야.
-
어릴 적부터 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오래 알고 있었던 친구가 내게 그랬던 적이 있었다. 너는 나에게 진실 된 적이 있었니?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당연하다고 대답했는데, 그 아이는 결국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나는 무엇이 잘못 된지 모르고 눈만 끔뻑거리며 시선을 그 아이에게 고정 시켰는데, 그 아이는 결국 주저앉았다.
― 너는 남을 상처주지 않으려 항상 거짓으로 나를 대해.
― 나는 그게 제일 상처야.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 상처가 되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 일들이 생기려 할 때 마다 나는 내가 잘못했다며 숙이고 들어갔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은 나랑 친하게 지내려 했다. 근데 그 아이는 달랐다. 종종 친구들이 내가 거절하지 못해 거절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며 대신 거절하고 나에게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너에게 난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 침대에 몸을 맡겼다. 하얀 이불에 몸을 둘둘 말려고 했으나, 너무 더워 포기했다. 아,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 가장 좋아하지 않던 계절이었다. 사람들이 왜냐고 물으면 덥기 때문이라 말했던 그 지독한 여름. 곧 장마가 시작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자려고 했다. 타이밍도 거지같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지, 비가 툭, 툭하고 비가 내린다.
지독한 여름의 시작을 알려주는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렇지만, 이런 내가 우습기라도 한 듯 모든 기억들이, 모든 악몽들이 내 머리에 찾아와 되새김질 하고 간다.
―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힘들 일은 없었다고!
― 잘못 했어요….
― 죽어. 차라리 이렇게 살 거면 죽으란 말이야!!
―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또 베게에 눈물 자국이 남겨져 있다. 베게에 비가 온 것처럼, 젖어 있었다.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던 기억들이다. 스스로도 생각하지 말자고 했던 날들이다. 지나간 모든 기억들은 추억이 된다지만 나에게 그 날들은 악몽이다. 좋지 못한 기억들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를 뒤집어 놓는다. 멀쩡하던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만든다. 그래서 비가 싫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싫다.
더워서 싫은 게 아니었다. 나는 더위를 잘 타지 않았으니까. 여름의 장마가 나의 기억을 꺼내는 게 싫었던 거다. 잘 묻었던 기억들이 날씨 하나로 다시 꺼내진다는 게 너무나 고통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날들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기억들이 하나둘씩 올라올 때면 나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울어야 했으니까. 내 가장 큰 상처. 깊게 파져 흉이 진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내 상처. 누구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아빠는 몰랐을까. 알았겠지. 누구보다 이기적이었던 사람이니까.
발길질 하나가 큰 상처가 되어, 비가 올 때 마다 생각이 나고, 다시 묻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거 하나가 무서워서 거절도 해본 적 없다. 그렇게 계속 살아왔다. 그게 모두 그 때의 일이 만든 결과인데, 다 묻고 참고 살다가도 이런 비 하나로 나를 뒤집어 놓았다.
― 네 엄마가 죽은 꼴 보니까 어때 여주야.
"여주야. 안에 있어? 여주야."
문을 크게 두들기는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 임영민, 그래 너의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땅까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하루 종일 꺼 놓았는데, 어쩌면 연인이란 이름 아래에 당연한 일인데도 당연 할 수 없었다. 이런 날들의 불청객은 나에게 무서웠다.
"있어 여주야?"
"들어오지 마."
"울어?"
그 작은 비 하나가 절대 믿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널, 이런 날 목소리 하나 들었다고 믿어야 될 것처럼 만드는 게 그게 무서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누구에게 기대려하고, 안기려 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든 게 예상하지 못한 한가지의 변수 때문에 무너지는 기분. 그래. 어쩌면 비 탓이 아니었다. 비가 그 날의 기억들을 불러온 게 아니었다. 그 날들이, 비가 올 때면 같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날들은 내게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었다
얌전히 있던 사람을 아주 미쳐버리게 만들면서, 믿지 않을 사람을 믿어버리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게 싫어.
"문 좀 열어줘. 여주야."
"제발… 나 좀 그만 내버려 둬."
"기다릴게."
눈물을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손 틈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흐르고, 또 흘렀다. 지금 너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은 가장 약할 때에 손을 거부하지 못한다. 가장 약할 때에 나를 세우려는 손을 쳐내지 못한다.
임영민 너도 그랬듯,
나도.
"언제 열어줘도 좋으니까."
"… …"
"울지만 마."
침대에서 일어나, 어지러워 휘청거리는 다리를 뒤로한 채 문으로 향했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 문을 열어주면, 나는 너에게 모든 걸 열어줘야 할 것 같아.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이 문 하나가 뭐 길래. 나한테 그 날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떠오르고, 너는 왜 나에게 온 건지.
왜 나는 너의 손을 잡았을까.
왜 너는 내 손을 잡으려 할까.
잡아도 되는 걸까.
한걸음마다 든 생각이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난 모든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너는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그저 너에게 안겨 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엄마…, 떠나지 마요."
"괜찮아. 다 괜찮아. 그래…."
"떠나지 마요…."
"안 떠나. 안 떠나 여주야. 네 옆에 있을게."
"제발…"
네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카락에 감긴다.
"다 떠나도 내가 너 옆에 있을게."
"… …"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줘."
가만히 있던 나를 그 작은 비가 뒤집어 놓았다.
-
한발자국 다가가면 너는 한발자국 멀어졌다. 멀어지고 싶지 않아.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너에게 더 다가갔다. 제발, 잡혀라. 제발 멀어지지 마라.
"문 좀 열어줘. 여주야."
"제발… 나 좀 그만 내버려 둬."
"기다릴게."
네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는 이미 예상했던 전개였다. 이 문을 열지 않는다. 너에게 이 문을 열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정리했다. 문을 친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거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너는 나에게 마음을 줄 수 없는지. 오늘 하루 연락을 너는 다 받지 않았다. 평소에도 연락에 바로 답하지 않았지만, 나를 피하는 듯한 너에 태도에 찾아왔는데.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를 피하지 말라고 전하려 했는데. 너의 떨리는 목소리에 모든 걸 잊은 듯 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버렸다.
네가 힘들 때 옆에 있고 싶다.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네 옆에 있고 싶어. 여주야.
"언제 열어줘도 좋으니까."
"… …"
"울지만 마."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오늘이 아니어도 좋아. 내일이어도, 내년이여도. 네가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나는 네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는데. 내가 여기서 지킬게. 언제가 되었든 좋으니 내 진심을 알아준다면 문을 열어줘. 다른 남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너의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그니까 울지만 마. 다른 사람이 닦지 못하게.
네가 슬픈 게 싫어.
근데, 다른 사람이 네 옆에 있는 게 더 싫어.
나를 피하지마.
다른 사람 손을 잡지 마.
내가 위로해줄게.
순간 열리는 문에 나는 이성적 판단 없이 들어가 너를 안았다. 너는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누군가의 눈물과 닮았다. 여주야 나는 그 아이를 지키지 않았어. 내가 울게 만들었지. 근데, 나는 너를 지킬 거야. 다시는 이렇게 울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아니, 울 때 내가 너의 옆을 지킬 거야. 나는 내 것을 정말 잘 지켜.
누구도 너의 옆을 못 지킬 때 내가 너의 옆을 지킬게.
"괜찮아. 다 괜찮아. 그래…."
"떠나지 마요…."
"안 떠나. 안 떠나 여주야. 네 옆에 있을게."
"제발…"
나는 안 떠나 여주야.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내 방식으로 너를 지킬게. 아니, 너의 옆을 지킬게.
"다 떠나도 내가 너 옆에 있을게."
"… …"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줘."
내 품 안에서 우는 너를, 남에게 보낼 수 없어. 다 너를 떠나도, 내가 너의 옆에 있을 거야. 내 심장을 걸고 약속할게. 모든 걸 다 줄게. 제발 네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줘.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줘.
― 왜 저에요? 왜 저냐고요!! 사람 다리 하나 박살내서, 사람 꿈 망치니까 좋아요?
― 동현아.
― 형 자리를 지키고 싶었어요 그렇게? 그렇게라도 해서 형 자리를 지키고 싶었냐고요!! 나는 진짜, 이제 못 걸을 수도 있어요. 형 때문에 평생 못 걸을 수도 있다고요.
― 내 자리야.
― 난 형이 실패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렇게 무너졌던 것처럼 형도 무너졌으면 좋겠어요.
내 방식으로 널 지킬게.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자리를 지키려 했던 것처럼. 네가 내 옆에 있을 수 있게. 남이 다 떠나도 나만은 너를 안으며 위로 할 수 있게. 너를 지키고 싶어. 이게 내 사랑이야.
제발 나에게 잡혀라. 나에게 잡혀라 했는데. 정말 잡혔어. 꿈이 너무 커져.
이제는 나한테만 잡혔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게 해줘.
-
「 내 세상은 너로 인해 열렸고 네가 들어온 순간 닫혔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네가 있고, 새가 우는 소리는 네 노랫소리 같으며, 비가 내리면 울고 있을 너를 달래주고 싶고, 꽃이 피면 웃고 있을 네 옆에서 손을 잡고 싶다. 남들은 이걸 사랑이라고 한다. 나는 내가 무슨 사랑이냐며, 그들의 말에 헛웃음 쳤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말에 동의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감정은 사랑이다. 그리고 너도 만약 나와 같은 감정이라면,
나는 우리가 좀 더 우리의 감정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내 전부 내 세상
사랑하는 그대에게. 」
내 세상에게 中, Edmund
내 세상을 열어줄게.
이제 나가줘. 캐서린, 여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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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안녕하세요 느림이에요! 일단 초록글에 감사드리며 인사 드립니다. 너무 늦게 왔죠...? 8ㅅ8 늦게 오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1화를 수정하게 되면서 2화 내용이 빠지고 너무 늦어버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ㅅㅠ 아! 지난화에 제가 예상하지도 못한 수준으로 많은 분들이 댓글 달아주셔서 많이 놀랐어요! 아마 이게 영동포팡의 인기 아닐까... (짝짝) 어디서 보고 오시는 거지? 했는데 독방에 제 글이 좋다고 말이 있대서 후다닥 달려가 모든 글을 확인해 봤습니다. 진짜 너무 기뻐서 거의 반쯤 울었어요 ㅠ.ㅠ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제 이야기 나오면 보려구 키알도 했어요. (수줍) 아, 그리고 독자님들이 암호닉 주신다면 저는 다 받고 있습니다. 모든 반응에 감사드리며, 이번 화도 잘 봐주셨으면 정말 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