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이라니.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었다. 그리고 지금 내 두 귀를 의심했다. 그저 대비마마와 친분이 좀 있는 사이 정도겠지 했는데, 후궁이라니. 심지어 그 여자의 어투나 표정으로 봐서는, 이미 다 얘기를 끝낸 것 같았다. 그래도, 차라리 내 귀를 의심하자 해서, 웃으며 다시 물었는데,
"네? 지금 뭐라 말씀하신 ㄱ…"
후ㄱ…"
"들었지 않으셨습니까 중전. 후궁 첩지를 받을 한家의 여식이라 하였습니다."
그 여인에게 물었건만, 대답은 대비마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대체됐다. 후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존재였다.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국왕이 그런 '후궁' 같은 존재를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자라나던 그에 대한 믿음이 꽤 컸기 때문이 아닐까.
"전하와 말씀이 다 끝난 얘기입니까."
"그럼요."
"……"
"전하와,"
그래도 이번에도. 전에 내가 간택됐던 것처럼 대비마마 혼자 꾸미신 일일 줄 알았는데
"이미 몇주 전에 결정 된 일인데, 소개가 많이 늦었네요."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니. 힐끗 앞에 앉은 여인의 얼굴을 보니, 말갛다. 나보다 나이도 어리게생긴 것 같다.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된 것 같이 생긴 아이를 데리고 후궁이라니. 사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돼. 조금 충격적이야. 그런 꼬투리. 내가 이 여인을 후궁으로서 반갑게 맞아 줄 수 없는 그런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생긋 웃어보이는 '한家'의 그 여인과 대비마마를 앞에 두고, 인사도 잊은 채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가는 핑계거리를 머릿속으로 만들어냈다.
지금 내가 강녕전을 박차고 나가는 이유는, 이따 눈이 올 것만 같아서. 그래서 교태전으로 옮겨 가기 힘들 것 같아서지
절대 그에게 서운하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고. 그렇게 합리화시켰다.
*
어젯 밤에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평소에 잘 하지도 못했던 대자로 누워 맨바닥에 누워 있는 행동을 하다 결국 잠이 든 것 같은데, 어영이의 행동인지 눈을 떴을 땐, 이불 위에 누워져 있었다.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로.
사실 울었다. 조금.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나왔다. 2주 전이라고 했다. 분명 2주 전에 그와 끝난 얘기라고 했다. 이미 머릿속에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행동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와 내가 함께 했던 행동. 그리고 한가지가 떠올랐다.
'눈꽃축제'
그가 날 데려간 이유. 곧 닥칠 상황이 미안해서였을까. 상황이 이런지라,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내게 말 한마디 없이, 그것도 본인이 직접 말한 게 아닌 대비마마와 그 여인을 통해 듣게 했어야만 했냐고.
그 상황에 그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으며, 그동안 내게 왜 말하지 못했냐 따지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보고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싶긴 하지만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제 곧 후궁을 맞이해야 하는 그를 질타하며 서운함을 표출할 것 같았으니까.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 전부터 늘 후회했던 것이었다. 찌질하게 굴고 후회하는 것. 이제는, 그리고 지금은 그래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아침 일찍 강녕전을 찾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침도 먹지 않았다. 그냥 먹기 싫었다.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하루가 이렇게 길고 답답한가 싶었지만 아직 오전도 다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지금 곁에 없는 이민형과 이태용이 보고싶었다. 그들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괜한 그리움에 그가 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민형, 언제 와. 보고싶어.
*
궁에 후궁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침부터 우물쭈물하다 내게 걸린 어영이가 실토해낸 것이다. 그러며 내게 물었다. 사실이냐고.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 말에 할 수 있는 내 반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어서 한심했다.
점심까지 거른 채, 그저 넓은 교태전에 앉아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멍하니 있었다. 오늘따라 쓸쓸한 교태전이 더 넓고 황량했다. 그 때였다.
"마마, 앞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영이가 문을 열고 내게 속삭였다. 온 것 만으로도 기뻤었는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 그 상황이 지금인가. 그가 매일 찾아왔던 것이 늘 감사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왜 이렇게 늦게 왔나 싶다. 늘 오전에 , 그것도 아침 일찍. 해가 뜨자마자 나를 기다렸던 사람인데.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났고 오후 늦게서야 찾아온 그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냥 돌아가시라고 전해줘."
"…예 마마."
참 나도 간이 크다. 이곳에서 국왕을 말 한마디로 저렇게 돌려보낼 수 있는, 아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무례한 걸 알지만 그래도 보고싶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갈 뻔 했다. 그를 보면 표정관리가 안 될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에.
어영이는 알겠다며 문을 다시 열고 나갔고,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 ……"
"아프다고 해. 아, 그렇다고 의원을 부를 정도는 아니라고도 전해드리고."
"예, 마마."
분명 그는 내 아프다는 말에 의원을 부를 게 뻔했다. 그래서 뒤에 의원을 부를 정도는 아니니 그러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어영이는, 다시 한 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국왕이 돌아갔다는 말과 함께.
나는 뭘 바란 걸까 대체 그에게. 아프다고 하면 돌아가기를 바란 것 아닐까.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말이었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내 감정이. 기분이. 그가 돌아갔다면 당연하다고 느꼈어야 됐는데, 괜히 또 서운한 내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아프다는 내 말을 듣고도 날 밖에서 기다리기를 바랐던 걸까.
참, 모순적이다. 모순적이야.
*
결국 저녁도 먹지 않았다. 하루를 쭉 굶은 것이다. 그냥 배에서는 밥을 달라고 소리를 치는데, 몸은 밥상이 들어오는 족족 거절했다. 어차피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먹으면 체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싶었다.
"어영아, 나가자."
어영이는 짧은 대답을 마친 뒤 내게 털옷을 입혔고, 그걸 대충 걸치고 나니 . 괜히 혼인 후 초반에 그가 주었던 장갑과 담요가 눈에 밟혔다. 물론 그것들을 안에 둔 채 겉옷만 대충 걸치고 밖에 나왔지만.
밖은 꽤 밝았다. 겨울이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덕에 달빛으로 궐 안이 밝게 빛났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무가 보였다. 겉옷을 입었는데도, 겨울바람은 이기지 못 하는 듯, 쌀쌀한 어깨와 팔을 매만졌다.
"…중전."
그 때였다. 교태전 계단을 내려와 땅에 발이 닿았을 때. 교태전 앞에 놓여져 있는 작은 벤치가 눈에 띄였다. 전에 그가 늘 나를 기다릴 때 힘드니 오지 말라는 내 말에, 그러면 조금 편하게 기다리겠다며 마련한 2인용 의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의자에 앉은 국왕이 눈에 보였다. 그 의자에 앉아 꽤 오래 기다린 것인지 귀가 빨개져 있음을 난 봤음에도 불구하고
"……"
뒤돌아 교태전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정말 바깥 공기 한 번 들이마신 후 다시 들어온 격이 됐다. 교태전 안으로 들어와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뒤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얘기 좀 해요."
그가 들어왔다.
"아픕니다."
"거짓이라는 걸 아까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알기에 기다렸어."
"할 얘기 없습니다."
"내가 있으니, 듣기만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미웠다. 미웠기 때문에 쫓아내고 싶었다. 정말 온 몸에 있는 미움과 서운함이 전부 그를 향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에.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빨간 귀와 굳게 쥔 주먹이, 얼마나 그가 오랜 시간 내가 밖에 나오길 기다렸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에.
"……앉으세요."
"부인도 앉으시지요.""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 전엔 앉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을 뿐. 본래 왕이 더 높은 곳에 앉는 것이라, 당연히 내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빨간 용포를 입은 그는 내 앞에 쓰러지듯 앉으며 내게 내 본래의 자리에 앉으라 했다.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렸다. 고요함과 침묵. 그게 다였다. 할 말이 있다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씀 있으시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
"할 말씀이 없으시다ㅁ……"
"미안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한마디. 그 말은, 매한가지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색해 땅만 보며 말을 건넨 내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보게 했다.
"예…?"
"미안합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할까 예상도 하지 않았던 나지만, 왜 그랬냐는 말 대신에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는, 그를 응시하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땅만 보며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서툴러서 그랬습니다. 미안해요.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
"부인께 막상 말을 꺼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였어요."
그리고 그는, 땅만 보던 그 시선을 올려 내게 두었다. 나를, 보고 말을 이어나갔다.
"환국이 일어났습니다."
*환국 :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뀜.
"……네?"
"정말 의도치 않았지만, 정치가 많이 바뀌었어요. 그 때문에 궐 안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세력들이 대부분 교체됐다는 말입니다."
"…그럼 제 아버지는……"
"국구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약간의 걱정이 되긴 했지만, 크게 상관 없었다. 애초부터 정치보다는 국구, 부원군이라는 그 직위에 올라서려 나를 이곳으로 보냈던 분이시니까. 그리고 그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2주쯤 전, 어마마마께서 절 찾아오셨습니다. 환국이 되니, 바뀐 세력 쪽의 여인을 한 명 후궁으로 맞는 게 편할 거라고."
"……"
"그래야, 그 세력들이 바뀌기 전의 세력의 사람. 중전을 덜 경계할 것 같다는 말을 하시러 절 찾아오셨어요."
"……"
"미리 말 못 한 거 미안해요."
"……말씀. 끝나셨어요?"
그래. 화가 나고 흥분해서 내 생각이 짧았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후궁을 맞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하나도 몰랐던지라 지금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지했던 날 탓할 수밖에.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던 그에게, 말씀 끝나셨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였다.
"몇 가지 물어도 돼요?"
"돼요. 질문 많이 하세요."
"후궁이 될 여자, 누군지는 아십니까."
"어제서야 안면을 마주했습니다."
그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아니, 아까 뱉어낸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안심이 됐다. 그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나랏일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해.
그래도 어제 처음 얼굴을 봤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나처럼 그가 찾았다던 그 사람도 아니었고, 그가 부정을 무릅쓰며 혼인한 사람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제일 물어보고 싶었던 거.
"……눈꽃축제."
"네?"
"미안해서 저 데려간 거세요?"
"그게 무슨 ……"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쌀을 찌푸리며 그가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곧 맞을 후궁의 존재에, …제게 미안해서 그 곳에 데려간 거예요?"
그는 내 질문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고개를 휘저어가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라고. 절대, 전혀 아니라고.
"후궁의 첩지만, 그 직위만 내려질 뿐, 저는 아무 감정 없습니다."
"……"
"제가 부인을 향해 느끼는 감정,"
"변하지 않아요."
"여전히 사모합니다."
이제서야 마음이 확 놓였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부끄러웠다. 오늘만큼은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그가 고마웠다. 좋았다. 다행이었다.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 정사를 볼 일이 있어 아침 일찍부터 나갔습니다."
"……"
"……기다리ㅅ…"
"네. 기다렸어요. 엄청 기다렸습니다. 제가 전하를 돌려 보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전하는 아십니까. 모르실 겁니다."
"……"
"늦게와서 미운데, 와 준 것에 또 감사하고. 그러면서도 괜히 돌아가시라 말했습니다."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답을 들었을 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터져 하고싶었던 말을 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나. 의심도 잠시, 그는 내 왼쪽으로 와 앉더니, 내 오른쪽 손목을 확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내가 들어가도록 했다.
"후궁이 생겨도, 다를 게 없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진짜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세 손가락을 펴 내보였다. 그리고 그가 내민 손에, 내 손을 끼웠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렸다. 약속하신 거예요..
웃어보이던 그가 나를 다시 품에 넣고선 말했다. 그리고, 나를 꼭 안았다.
"부인께서 늘 웃으시는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
"울지 마세요."
이젠, 겨울 바람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다.
! 작가의 말 ! |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 니퍼입니다 !! (뻔뻔) 네.. 먼저 사과드릴 것 두 가지나 있어요ㅠㅠㅠ.. 이번 역시 댓글을 못 달아드렸다는 점과, 암호닉 정리를 안 해온 점.. 진짜 죄송해요. 늘 게으른 니퍼 글 읽어 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T^T...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정말 글 쓸 시간밖에 없었어요 엉엉.. 그래도, 늘 좋아해 주시고 애몽 끝까지 가 주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사랑드립니다 ㅠㅠㅠ.. ♥ 늘 부족한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