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2차전
Round 3.
"다들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 드려요"
처음 마주하게 된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밤새 머리가 터질 듯 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미팅 날 당일이었고 나는 지금 다니엘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새롭게 시작할 프로젝트의 얘기만 나누고 있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연락을
마치자마자 곧장 프로필 사진도 바꾸고 기록도 깔끔하게 삭제 했다. 괜한 의심만 살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보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회의 하는 내내 다니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무슨 말을 뱉었는지,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기록 해 놓은 노트를 보며 이런 얘기들을 나눴구나 하고 알아챌 뿐.
[괜찮으면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할래요?]
생각보다 미팅이 일찍 끝나 오랜만에 이른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참에 오랜만에 도담이랑 데이트나 할까 하며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마침 울리는 알림음, 뭔가 싶어
확인 해 보니 생각지 못한 발신자로부터의 카톡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져 있는 상대를 바라보니 핸드폰을 두어 번 흔들고선 다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싫으면 말구요. 어째 달가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네요]
[오늘만 기회인 건 아니니까. 그래도 승낙인지 거절인지 답장은 해 줘요]
새삼스런 존댓말이 낯설고 간지러웠다. 사귀는 내내 자긴 애인한테 존댓말 안 한다는 걸 이유로 말을 놓은 게 몇 년, 그 뒤로 2년간의 공백까지. 대충 어림잡아 5,6년 만에
강다니엘에게서 들은 존댓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은 것보단 본 것에 가깝지만 어찌 되었든.
언젠가 한 번은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오늘은 아니라는 거다. 오늘 내 시간은 소중한 우리 딸한테 쓰고
싶으니까, 흔치 않은 기회를 야무지게 챙겨줘야 사랑 받는 예쁜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딸한테 예쁘게 보이기가 얼마나 힘든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시간 나면 그 때 마시자]
[요]
어찌 보면 이젠 완벽한 남남이니까 존댓말을 해야 하나 다니엘이 먼저 편하게 다가 왔으니 나도 그에 응해줘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답장을 보냈다.
타이밍 맞춰 핸드폰 화면을 보고 웃는 걸 보니 100% 확실하다, 쟤 지금 내 꺼 보고 웃는 거야.
[아쉽네요. 그래, 그럼 그러자요]
이거 봐, 맞다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잘 사는 모습, 당당하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뭐야, 부끄럽게. 아, 짜증나. 이럴 때는 도담이가 아직 말이 서툰 게 참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뭣도 모르는 애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잖아. 엄마가 하소연 하는 거 알아듣고 괜차나 괜차나 하면 그게 더 부끄러울 거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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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아~ 김도담~"
"엄마~"
"잘 놀고 있었어요? 오늘은 엄마가 좀 일찍 왔지"
선생님께 오늘은 좀 일찍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다고 미리 연락을 드렸더니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쪼르르 달려와 품 안에 쏙 안긴다. 부러 내 성을
따른 데에는, 그냥. 내가 찬 주제에 다니엘의 성을 붙이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고 양심도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이유 하나였지만 나름대로 가장 큰 이유였다.
말이 트이려는지 뭔가를 한참 재잘대며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도담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꼭 한 번 언젠가 도담이와 함께 가고픈 식당이 회사 근처에 있었던 터라 차는 회사 주차장에 둔 뒤 걸어갔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뤘던 터라 이렇게 손을 잡고 산책하듯
걸어 다니는 게 얼마만인지. 도담이도 꽤 들뜬 모양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이것저것 가리키며 물어오는 아이에게 대답 해 주면서 음식을 기다렸다.
“기분 좋아? 응? 오랜만에 엄마랑 데이트해서 그러지”
“아이고, 예쁜 내 새끼. 그래도 입술은 나랑 똑 닮았네. 그거면 됐지, 뭐”
방금 누굴 보고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아이에게서 그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날이 갈수록 웃는 게 제 아빠를 더 닮아가는 것 같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어쩜 저렇지, 아무리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지만 이건 좀 너무 할 정도로 한 쪽에 유전자가 쏠린 거 아닐까. 배 아프고 고생한 건 나인데 어째 날 닮은 구석은 찾기가 힘드냐. 괜히 얄미워 양 볼을 꾹
눌렀더니 놀아주는 줄 알고 입을 쭉 내밀어 뿌우뿌우 물고기 흉내를 낸다. 귀엽다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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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이 맛있게 먹었어요? 배불러?”
“아이고, 배 빵빵한 것 봐. 뚱뚱이네, 뚱뚱이”
“그치, 너 졸리지? 그럴 줄 알았어. 얼른 코 하자”
제 몫으로 나온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음식 식히는 그 잠깐을 못 참고 칭얼대기에 준 내 몫의 빵까지 야무지게 먹은 데다 선선한 날씨에 산책도 했으니 눈꺼풀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품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이를 안아 들고 차가 있을 회사로 향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히 시트에 앉히고 주차장을 벗어날
무렵,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깜짝 놀라 발신자를 확인할 새도 없이 얼른 전화를 받아버렸다. 친구면 욕을 잔뜩 부어줄 생각으로
“여보세요. 저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다니엘인데요.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받았어요? 어쩐지 엄청 빨리 받더라”
“아, 어. 아니, 그, 네.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시죠?”
“그냥 편하게 해요. 듣는 나까지 불편한 것 같네”
“왜 전화 했어요? 제가 지금 길게 통화를 못 해서요”
“편하게 하라니까. 아까 선약 있다던 게 데이트였어요? 지금 남자친구 분이랑 같이 있는 건가?”
“아직 말 놓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로 왜 전화했어요. 공적인 거 아니면 사적인 거?”
“그럼 다행이고. 딱 보면 몰라요? 완전 사적인 거. 일 얘기였으면 진작 하고 끝냈지”
어째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보니 도담이가 깰 것처럼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잠결에 뒤척이는 걸지라도 엄마 마음은 또 그렇지 않은 터라 통화에 집중하려다가도 계속 뒷자리가 신경 쓰였다. 결국 조금 있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저를 놀리는 건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는 깨지 않고 잘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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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잘 자. 우리 도담이 꿈 속에 예쁜 것들만 찾아오게 해 주세요"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며 얼른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뒤 침대에 뉘이고 토닥이자 금세 다시 잠에 들었다. 분명 오늘 이른 퇴근을 했고 여유롭게 밥도 먹고 산책도 하는 완벽한
데이트 코스였는데 몸은 왜 이리 피곤한지 아이를 재우다 깜빡 잠이 들었었다. 나도 이제 늙은건가 생각하며 볼을 몇 번 때리고선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주말이었으면 좋겠다. 진짜...”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화장실로 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래도 씻고 나니 개운해진 기분에 냉장고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맥주와 과자를 들고 거실에 앉았다. 아, 맞다. 다시
전화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2년 사이에 좀 잘생겨지긴 했더라. 마지막 기억이 졸업과 취업을 준비하느라 바쁘던, 그래서 조금 자유분방했던 모습이라 그런지 머리도
단정하게 염색하고 수트까지 갖춰 입은 모습을 보니 새삼 내가 저런 괜찮은 남자랑 연애를 했구나 싶어 뿌듯해지기도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깐 차 안이기도 하고 좀 바빠서요. 무슨 일로 전화했었어요?”
“아니, 사실 난 좀 반가웠거든요. 이런 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
“나도 좀 신기하긴 했어요. 세상 참 좁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근데 진짜 그 존댓말은 계속 할 거에요? 좀 간지러운데?"
“아마 계속 할 것 같아요. 근데 진짜 계속 이런 말 할 거면 나 끊어도 돼요?”
“아니요, 안 돼요. 내가 왜 전화 했냐면 우리 언제 만날까요? 생각 해 봤는데 내가 선약이 되면 까일 일이 없겠더라고요.”
얘는 내가 불편하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린 헤어진 연인이었고 그 끝이 그다지 아름답지도 못 했는데, 시간이 약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뒤끝 없이
깔끔해 질 수 있는 일이었나. 그렇다고 이제는 마냥 불편한 사이로 남아 계속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 때문에 자주 마주치게 될 테고 찝찝함을 남겨 봤자 좋을 거 하나
없고 서로 힘들어지기만 할 테니까. 허심탄회하게 푸는 날이 필요하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쟤를 데려갈 수도 없는 거잖아, 언제 깰지도 모를 아이를 재워두고 집을 나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
“그래요, 그럼. 만나서 할 얘기가 많을 거잖아요, 우리”
“언제쯤 시간 괜찮을 거 같아요? 혹시 다음 주 쯤에 시간 괜찮아요? 이번 주는 이래저래 바쁠 것 같아서”
“잠깐만요, 확인 좀 해 보고. 네, 괜찮아요. 그럼 그 주 금요일? 아, 친구 만나야 하려나, 그럼 목요일 저녁?”
“아무리 불금이어도 이게 먼저니까 그런 걱정 말고 골라요. 편한 쪽으로 맞출 테니까”
“그럼 금요일 저녁. 나도 불금 못 즐긴지 오래 돼서 간만에 좀 마실까봐요.”
“어, 난 많이 마실 생각 없었는데. 그래요, 정확한 시간은 다음 주에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합시다”
“알았어요, 그럼 오늘 나한테 전화 한 용건은 끝인거죠? 이만 끊을게요”
"그래요. 잘 자고, 회의 있으면 그 날보고 없으면 금요일에 만나요. 안녕"
‘다음 주 금요일 엄마한테 잠깐 도담이 부탁하기. 잊으면 김여주 바보’를 핸드폰에 메모한 뒤 그새 조금 미지근해져버린 맥주를 마셨다. 시간이 지나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이 여전했다. 회의할 때엔 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더니 방금 전까지 수화기 넘어 들려오던 건 해맑고 개구진, 예전의 그 목소리였다.
얼굴 한 번 봤다고 이렇게 머리 복잡해지면 안 되는데. 결국 냉장고로 가 맥주 몇 캔을 더 꺼내 마시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라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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