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가 맡은 여자 아이돌의 데뷔 일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고 지호는 더욱더 바빠졌다. 경이는 2주 동안 단 한 번도 지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호와 제가 권태기라는 상황 하에 이어지는 고민들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감당 안 되게 커져만 갔다. 심지어 상상으로는 벌써 헤어진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경이 저도 느끼는 거였지만 아주 가관이었다. 답이 없는 저의 상상에 경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에서 혼자 뒹굴 거리며 2주일을 보내는 내내 경이는 우울한 생각만 해서 제가 이러다 우울증에 걸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게 쌓여갔지만 풀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을 불러 이야기를 하거나 놀아야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친구들도 우지호의 질투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져갔고 어쩌다가 커밍아웃을 하게 돼서 제 곁을 떠나간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학창시절에 밝은 성격과 귀여워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로 변해버렸는지. 생각 없이 모든 것을 지호에게 맞추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 4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야 후회가 밀려왔다. 우리가 언제까지 연애할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까. 제가 너무 지조 없게 연애했다고 경이는 생각했다. 연애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며 했어야 했는데 눈이 멀어 간이고 쓸게고 다 빼주고 본래의 ‘박 경’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지호의 애인인 ‘박 경’만이 존재하고 있다. 경이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슬픈 상념을 방해하는 TV를 껐다.
그래서 우지호에게 초점이 맞춰진 제 삶의 주인이 다시 되어보고자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경이는 제가 얼른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호가 집에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으니 지호는 정말 제가 무슨 집 지키는 개나 가정주부로 알고 있는 거 같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사나이로서, 이렇게 맨날 놀고먹고 뒹굴 거리는 것은 남자의 수치다!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것은 너무 심심했다. 게다가 권태기를 까닥하다가 잘못 넘기면 이별을 맞이할 수 있는데, ……아니 정말 최악의 상황 말이다. 경이도 상상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생각해야 했다. 사람의 일이란 게 어떻게 될 줄 모르는데!……물, 물론 그럴 일 없겠지만. 그래, 그럴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별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호와 나 사이에 거리를 두어 다시 연애 초창기처럼 못 만나서 안달 나고 애틋한 사이로 만들어야겠어. 경이는 굳게 다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튼 또다시 지호가 제가 돈 버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물으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 다다익선을 들먹이며 대응해야겠다. 이 사소한 결심을 무려 일주일 내내 고민하다가 내렸다. 우지호 그 자식이 함부로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쉬웠던 결정이 아니었단 말이다! 이 나이에 취업 잘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오죽했으면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겠어, 응?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우지호와 대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경이는 심하게 몰입이 돼 혼자 씩씩댔다. 기필코 우지호를 이겨서 취업하고 만다, 내가.
오후 4시. 과연 지금 이 시간이 제가 마음먹은 결심을 지호에게 통보하는 데 적절한 시간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곡 작업하느라 바빠 언제 카톡을 볼지 몰라 지금 보내야겠다. 경이는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천천히 자판을 누르고 지호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일할 거야]
“야, 박 경!”
2주일 동안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더니 제가 일하고 말 거라는 카톡 하나를 보내자 결국 이렇게 집까지 뛰어왔다. 이쯤 되자 지호가 얼마나 제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서 경이는 미간을 깊게 좁히고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보던 신문의 구인광고 면을 곱게 뒤집었다. 신발장 앞에 우뚝 서 있는 지호는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훅훅 내뱉으며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뛰어와서 그런가 지호의 얼굴이 어째 붉으락푸르락 한 것 같다. 절대 화가 난 건 아니겠지. 경이는 마른 침을 삼키고 힘없이 제 앞에 털썩 주저앉는 지호에 상체를 일으키고 바로 앉았다.
“왜 무슨 일이야. 왜 또 일하겠다는 건데?”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대한민국 국민이면 노동의 의무를 가지고 있어!”
“내가 벌어다준 돈으로 뭐 맛있는 거 사 먹지도 않고 옷도 안 사면서 무슨 돈일 필요하다고 일을 하겠다는 거야.”
“씨이…….”
너 같으면 혼자 쇼핑가고 혼자 밥 사 먹는 게 재밌겠냐? 태일이 형은 표지훈인가 뭔가 하는 놈과 매일 데이트 하러 다녀서 나에게 관심도 없고 너 때문에 친구들 몇 명이 떨어져 나갔는데. 있는 친구라고 하는 여자애 한 명은 게이라고 하면 환장하는 여자애라 무섭단 말이야. 그러니깐 내가 너 때문에 이 모양 요 꼴로 있는 건데. 서러움이 울컥 터져 나오려 했다.
“심심해서 일 할 거야.”
“심심해? TV 보잖아.”
“매일 TV 보는 것도 고문이야! 그리고 너 때문에 내 친구들도 다 떠나가서 같이 놀아줄 친구도 없고 너는 매일 녹음실에 있고! 하루 종일, 아니 몇 날 며칠을 오지도 않을 너 기다리면서 시간 죽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모르지? 내가 네 해바라기냐, 개새끼야?!”
경이가 생각해도 제가 한 말 중에서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일 년에 욕을 한 번 쓸까 말까 하는 경이가 말하는 도중에 감정이 격해져 욕을 썼을 정도면 얼마나 진심 담긴 말인지 지호는 알 거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지호를 보며 경이는 속으로 제발, 제발을 간절하게 외치며 지호가 허락해주기를 기다렸다. 다시 한 번 욕 해볼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왜 안 되는데!”
“네가 지금 취업해서 사회생활에 뛰어들면 얼마나 힘든데. 회사 들어간다고 해도 야근이 있고 알바해도 늦게까지 하면 밤길도 위험하고 또…….”
“허, 나도 사회생활 해 봤거든? 누굴 온실 속의 화초로 아냐? 봐, 나 남자라고! 밤길이 뭐가 무서워. 그리고 너는 새벽 3시에도 잘만 다니잖아!”
“아, 아 젠장……야,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매일 너 기다려도 집에 오질 않잖아! 이게 혼자 자취하는 거지 뭐야? 너도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왜 나는 못하게 해?”
“정 그러면 내 보조로 일해.”
“그러면서 나 녹음실에 가만히 세워둘 거잖아. 내가 너를 모르겠냐?”
“……일거리 주면 되잖아.”
“제대로 안 해오면 또 뭐라고 하면서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거잖아!”
“…….”
실로 오랜만에 지호랑 싸우는 거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웬만해선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도 안 하고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지 뻔히 보여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둘은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며 살아 마찰 같은 건 둘의 사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는데. 물론 매일 티격태격은 했지만, 장난이다.
그리고 몇 개월 만에 터진 이 전쟁의 승리자는 왠지 제가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경이는 슬슬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일부러 내려트리려고 해서 고생을 조금 했다.
“경아, 진짜 그냥 집에서 지내면 안 돼?”
“안 돼! 내가 왜 널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싫어, 나도 일 할 거야!”
“내가 녹음작업으로 녹초가 돼서 집에 왔는데 네가 없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겠어, 경아.”
“집에 오자마자 바로 자면서 무슨 내 얼굴을 봐.”
“…….”
“할 말 없지? 나 지금 바로 여기에 일자리 보고 연락했다고 전화한다?”
“야야야!”
“왜! 일 할 거야, 할거라고!”
“너 그러다 일하는 곳에서 딴 여자나 놈이랑 눈 맞으면!”
“너는 그럼 지금 같이 일하는 그 불여시 중 하나랑 사귀고 있겠지.”
“…….”
“여보세요? 저 신문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일자리 구하신다고……아, 네!”
“으아아악!!!”
지호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효를 했고 경이는 이제 아예 히쭉히쭉 웃고 있는 제 입을 지호가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가렸다. 지호의 짜증 섞인 괴음을 무시하고 열심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한순간에 핸드폰이 사라졌다. 경이의 핸드폰을 뺏은 지호는 단번에 전화를 끊었고 경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광경을 벙찐 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뭐해?”
“야, 경아. 이건 아닌 것 같아.”
“헐. 너 이유도 없이 지금 그러는 거잖아!”
“몰라, 너 없는 집은 상상할 수 없다고!”
“이제 익숙해지면 돼. 파이팅.”
“아, 경아. 내가 잘못했어. 이제 항상 주말에 집에 있고 한 달에 한 가수랑만 작업할 게.”
“그러면 우리 돈이 금세 바닥나잖아. 그래서 내가 일을 하겠다고.”
“경아, 사랑해. 우리 인간적으로 이러지 말자.”
“인간적으로 내 일할 권리를 침해하지 마.”
일하지 말라고 땡깡 부리는 지호의 말을 깡그리 다 무시하고 핸드폰을 달라 해도 지호는 저의 큰 키를 이용해 핸드폰을 쥔 손을 높이 들며 잡아보라고 경이를 약 올렸다. 경이는 한참을 핸드폰을 잡기 위해 방방 뛰다가 결국 지쳐 풀썩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 포기하고 열심히 우리의 집을 가꾸고 사랑하 - .”
“노트북으로 알아볼 거야.”
지호는 끝내 경이의 노트북까지 뺏어갔다. 결국 경이가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호는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경이의 취업을 허락해야만 했다.
§
일을 구하려 인터넷이며 신문지며 다 뒤져보고 여기저기에 연락을 넣어봤지만 죄다 거절, 거절, 거절이다. 제가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25살이면 괜찮은데. 경이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박박 긁더니 노트북을 껐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지호가 또 거절당했냐고 물어봤다. 경이는 인상을 팍 쓰며 지호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깐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나랑 놀자니깐?”
“시끄러워. 꼭 내가 일자리 구하고 만다.”
“포기해. 너 나이면 어디 갈 때도 없어.”
“조용히 안 해?”
정말 이대로 포기할 까, 싶었지만 우지호의 저 비아냥거림 때문에라도 내가 있는 오기 없는 오기 다 모아 꼭 일을 구하고 만다. ……는 무슨. 이제 인터넷이나 신문지에서 뒤질 일자리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경이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생각하는 것도 금세 관두었다. 그러다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동네 상가들에 아, 짧게 탄성을 내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노트북을 붙잡고 앉아있었던 터라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경이는 허리를 두드리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 후드집업을 꺼내 입었다. 저를 따라 안방에 들어온 지호가 나갈 채비를 하는 경이를 보고 물었다.
“어디 가?”
“일 구하러.”
“응?”
“정 안 되면 근처 편의점이라도 알아봐야지.”
“나갈 거야 그래서?”
“응.”
“같이 가! 잠깐 기다려.”
“싫어, 오면 방해할 거잖아.”
기다리라는 지호의 외침에도 경이는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
“언제까지 쫓아올 거야?”
“뭐.”
“티 나게 쫓아오지를 말던가.”
저의 일자리 구하기 대작전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지 조용히 제 뒤를 졸졸 쫓아오는데 그게 더 은근히 거슬려 그만하라고 말하려 뒤를 딱 돌면 따라오지 않는 척 딴 곳을 보기도 하고 뒤돌아 가는 척을 하는 지호였다. 뭐하자는 거야, 에휴. 경이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식당 3곳이나 가봤지만 알바생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 경이는 제 앞에 있는 편의점을 보다가 정 안 되면 편의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알바 구하냐고 물어보려 편의점의 유리문을 살짝 열던 참이었다.
“야, 편의점 위험해. 안 돼.”
언제 경이의 옆으로 왔는지 지호는 편의점에 들어가려는 경이의 팔목을 붙잡고 뒤로 이끌었다. 덕분에 경이는 편의점 문을 열다 말고 뒤로 물러나 편의점 알바생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다. 뭐하는 거냐고 신경질을 내며 지호를 바라보자 지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술 취한 어떤 남성이 흉기 휘둘러서 알바생 다친 거 뉴스 못 봤어?”
“모든 편의점에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편의점은 절대 안 돼.”
“내가 일하는 거거든? 네가 엄마도 아니고 왜 자꾸 그래.”
“네 애인이잖아. 그럴 권리 있어.”
“아, 정말…….”
눈을 부릅뜨며 내가 너의 연인이니 이럴 권리가 있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지호를 뒤로하고 경이는 다시 길을 따라 걸으며 어디 일할 데 없나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지호의 방해 때문에 정말 이러다가 일자리 하나 못 구하게 생겼다. 이렇게 우지호의 작전에 말려들면 안 되는데. 저 약삭빠른 녀석을 어떻게 이겨 먹을까 생각하며 걷는 데 눈앞에 커다란 핑크색 간판이 보였다.
“아, 여기서 일할까?”
“팬시점? 안 돼. 여자 많아.”
“……남자 많이 오는데서 일할 거야.”
“야야!”
“시끄러우니깐 조용히 좀 해!”
“헉, 경아. 이거 귀엽다.”
팬시점 안에 전시되어 있는 커다란 인형을 보고 생긴 것과 안 맞게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지호는 팔짝 뛰며 좋아했다. 다 큰 어른이 저러고 있다. 밉지만 아주 조금 귀엽게 말이다.
“경아 이거 사줄까?”
“그렇게 큰 인형 들고 집까지 가자고? 쪽팔려.”
“아, 배고프다. 경아 너 배 안 고파?”
“고파.”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나 일 구해야 하는데…….”
“먹고 같이 찾으러 다니면 되지. 부대찌개 먹을래?”
어째 알바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데이트하러 온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지호와 함께 데이트 비스무리 한 것을 해서 기분은 좋았다. 지호는 얼른 팔짱을 껴보라는 시늉으로 허리에 손을 떡하니 올렸고 경이는 조금 망설이더니 지호에게 팔짱을 꼈다.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일 구하기 전부터 이러는 걸 보니 좀 더 일찍 일 구한다고 선언할걸, 하고 후회하는 경이었다. 이제 4년 만에 다시 닭살 커플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다.
“지호야, 내가 돈도 벌고 너랑 이렇게 데이트도 하면 좋겠지?”
“아니, 전혀.”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제가 일하는 것이 못마땅하나 보다. 이 철없는 애인을 어찌해야 할까.
“애 같아…….”
“뭐? 뭐라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어서 부대찌개 먹자!”
경이는 계속 뭐라고 했냐고 캐묻는 지호의 질문을 뒤로하고 부대찌개 가게로 먼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