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가."
이게 전정국의 프로포즈 아닌 프로포즈 였다.
해는 이미 진 지 오래였고, 우리 둘은 언제나 그랬듯 함께 교복을 입고 하교하던 중이었다.
그냥 그 날따라 달이 참 밝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긴하다.
누군가 우리의 결혼이 자의냐고 타의냐고 물어본다면 우리 둘은 반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둘의 결혼은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결정 된 일이었고, 우리 둘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약혼자라고 배워오며 자라왔다.
누군가에게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듯이 우리는 그냥 서로에게 미래의 배우자 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존재가 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의 '세뇌'라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딱히 단 한번도 서로를 부정하고 싫어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우리 둘은 생각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의 약혼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인해 나라를 움직이는 두 기업이 힘을 합치게 되었고,
우리 둘의 약혼 안에는 어른들과 수많은 기업들의 우글우글한 관계들이 얽혀있다는 것을.
굳이 약혼과 결혼을 깸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귀찮게 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20대 중반 쯤으로 예정되있던 결혼이 전정국의 한 마디로 인해 19살로 앞당겨졌을 뿐이고,
두 기업은 우리 둘의 결혼을 핑계로 더 빨리 더 완벽한 동맹을 맺게 된 것이었다.
"야 이불 갯어?"
"아, 깜빡했다."
"빨리 지금 개라, 안그럼 아침밥없다."
이른 아침 교복을 입은 나는 토스트를 입에 문 채 식탁에 앉아 전정국에게 명령했고,
막 넥타이를 매고 있던 전정국은 내 말에 침대로 가 이불을 갰다.
그제서야 나는 대충 만든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슥 내밀었다.
식을 올리지 않고 급하게 한 혼인신고 뒤 우리 둘은 바로 동거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결혼을 빨리 하길 바랬던 어른들은 어쩔 수 없어 하는 분위기로 동거를 허락했다.
지긋지긋한 집에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던 우리였고, 그게 우리가 결혼을 자발적으로 앞당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른들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가정부아주머니를 고용하길 바랬지만,
그 아주머니를 정보원으로 이용해 우리를 감시하려 하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둘은 여러 핑계들로 거절했다.
하지만 역시 고딩 둘이 집안일을 다 감당하기엔 벅찬 감이 없지 않아있었고, 부부싸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야 전정국, 그리고 너 학교에서 나 아는 척하지마."
"왜?"
"인정하긴 싫은 데, 너 생각보다 인기 많더라고. 괜히 엮여서 여자애들한테 미움받기 싫어."
식탁 맞은 편에 앉은 전정국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내 무시하고 토스트를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
꺄아! 정국오빠!!
와- 진짜 멋있다.
진짜 못하는 게 뭘까?
나 한 번만 쳐다봐주면 소원이 없겠다ㅠㅠ
주위에서 들려오는 전정국 찬양소리에 당장 그 자리에서 소멸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자리였고, 난 결국 귀를 막고 눈을 감기로 했다.
하지만 곧 "야 야 진짜 멋있지? 그치?" 하며 나를 흔들어 대는 친구들때문에 다시 열심히 축구를 즐기고 계시는 전정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겉모습만 보고 저렇게 찬양하는 전정국이 집안일 안하겠다고 그렇게 뺀질대는 남편인 걸 알면 이렇게 좋아할까? 란 생각이 들었다.
"쟤가 대체 왜 좋냐? 진짜 별론데"
"야 김탄소 너 눈 얼마나 높은거냐?! 저 얼굴, 키, 몸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어. 얼굴, 키, 몸 다 완전 별로야."
"미친년. 꺄아악 정국이 골 너었다!!"
난 다시 귀를 막았다.
내 눈에는 좋다고 활짝 웃으며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전정국과 그 뒤에서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애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정국이 더운지 잠바를 하나 벗었고, 이에 여자애들은 자기들이 그 잠바를 맡고있겠다고 달려들었다.
참 새삼스럽게도 전정국이 내 남편이란 게 참 신기한 일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눈이 마주친 전정국을 보면서 한 1초정도 잘생겼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1초 뒤 나를 향해 걸어오는 전정국을 보면서 내가 잘못본거겠지 라는 생각을 수십번 했다.
하지만 눈을 계속해서 끔뻑끔뻑 해본 결과 내 앞에 서있는 게 진짜 전정국이란 걸 바로 깨달았다.
"너가 맡아줘"
모든 여자애들이 원했던 그 잠바를 난 얼떨떨하게 받아들었고
순식간에 이 넓은 운동장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음에 굉장히 당황하였다.
그런 나를 본 전정국은 갑자기 푸흐흐 하며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
"이따보자."
내가 전정국을 봐온 19년동안 가장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그렇게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간 전정국과 전정국의 잠바와 함께 남겨진 나였다.
동시에 나는 이 곳에 모든 여학생이 나를 향해 수근대며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은 집안일 도우라고 매일 빽빽되는 아내에 대한 전정국의 복수임을 한 순간에 깨달았다.
분하게도 악마같은 전정국은 항상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애써 다시 눈과 귀를 막고 속으로 생각했다.
집가서 보자. 썩을 전정국아.
*
안녕하세요 달감입니다!
읽어주신 분들, 신알람해주신 분들, 댓글해주신 분들 모두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
더 열심히 쓰겠어요!!
이따 밤에 한 번 더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