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W. 달감
05
*
"야야야 기사 뜬 거 봤냐?"
"JK그룹 아들이랑 탄탄그룹 딸 결혼한거?"
"어, 완전 대박이지 않냐? 식도 안올리고 혼인신고부터 했대. 말로는 자기들이 좋아서 했대지만 빼박 정략결혼아니냐?"
"맞아, 그 두 회사가 불법으로 자원이랑 돈 공유하는 게 사돈지간 되면 합법된다며. 그 이익이 엄청나서 옛날부터 둘이 결혼할거란 핑계로 엄청 해먹었대."
"근데 걔네 둘 우리랑 동갑이라며?"
"헐 대박 19살에 불쌍하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도 못하고."
아침에 학교에 가자마자 들리는 이야기에 찌푸둥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가 떴단 건 전해들었지만, 이렇게 인기가 있을 만한 이야기인지는 몰랐다.
각 집안에서 막아 우리의 신상이나 얼굴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꾀나 흥미로운 이야기인 듯 했다.
"김탄소 나와봐."
그렇게 책상에 엎드려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지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는데, 박지민이 나를 찾아왔다.
"학교오니깐 사람들이 니 얘기만 하더라. 괜찮냐?"
박지민은 내 친구 중 유일하게 나의 사정을 모두 알고있는 친구였다.
이 고등학교에 와서 제일 먼저 친해진 지민이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그냥 다 털어놓게 되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비밀을 지켜주며 내편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힘들고 아픈 이야기라 할지라도, 예쁜 말들로 포장해 나를 위로해주었다.
"어때~ 다 사실인데"
"별로 신경 안쓸 것 같더라. 다른 사람들 말 하나하나에 얽매이는 애 아니잖아."
지민이는 웃으며 내게 캔커피를 건냈고, 나도 웃으며 받아 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학교 옥상 벤치에 걸터 앉았다.
"그럼 하나 더 괜찮냐고 물어봐도 되냐?"
"뭔데?"
"저거."
지민이가 가리킨 곳에는 어떤 여자애와 하하호호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전정국이 있었다.
저번에 본 여자애가 아니었다.
또 바꼈군. 싶었다.
"딱히 별 느낌 안나는데?"
"질투라던지 그런거 없어?"
"그걸 왜 느껴야 하는데?"
"너네 부부잖아."
박지민의 말에 나는 한 3초간 멍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맞다, 쟤랑 나랑 부부지. 싶었다.
"부부면 질투를 느껴야하나?"
"당연하지."
"전정국이랑 나는 그런 거 없어. 솔직히 부부보단 남매에 더 가깝지."
"그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뭘?"
"사랑"
박지민의 예쁜 음색으로 들려오는 '사랑'이란 단어가 갑자기 내 마음을 한 번 '쿵'하고 두드리는 것같았다.
너무 오랜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진짜 '사랑' 이란 단어였다.
나에게 '사랑' 이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금기된 것이었다.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도 원해본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내 옆엔 전정국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여러 생각들이 머릿 속을 마구 스쳐지나갔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런거 내 인생에서 위험해."
내 말에 박지민이 한 번 미소짓더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은 말없이 계속 파란 하늘을 바라봤고, 이상하게 내 마음은 조금 시렸다.
*
오늘은 전정국이 야자를 하지 않고 집에가서 혼자 하교했다.
문을 벌컥 열고 집에 들어섰는데, 전정국이 상의를 탈의한 채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전정국의 잔근육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왜, 왜 옷을 벗고 있냐?"
"방금 샤워했으니깐."
"옷.. 옷 입지?"
"왜저래"
전정국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상의 정도는 거의 매일 벗고 있었는 데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땐 알몸도 봤었고, 같이 목욕도 했었다.
근데 왜 갑자기 내가 전정국이 옷 벗은 것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먼저 쟤를 남자로 인식하는 것 같아서 확 짜증이 났다.
그러다 갑자기 저번에 영화볼 때 전정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미쳤다고너한테키스하냐? 그니깐 응큼하게 쓸데없는 걱정하지마.'
그 땐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 데 생각해보니 자존심상한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여잔데 내가 그렇게 여자로써 매력이 없는건가?
아까 옥상에서 본 그 여자애보다 내가 훨씬 예쁜 것 같은데.
딱히 전정국한테 여자로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거 생각할 수록 굉장히 자존심상하는 일이었다.
잘 준비를 한 뒤 괜히 방문을 크게 열고 닫아 침대방으로 들어갔다.
전정국은 이미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득 또 첫날 이 집에 왔던 게 생각났다.
'니가 작은 방에서 자!'
'싫어. 니가 작은 방에서 자'
'내가 왜 너보다 작은 방에서 자?!'
'그럼 걍 같이 주무시던가'
'그래! 누가 못할 줄 알아?'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된 동기도 정말 무드하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녀가 매일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인데 우리는 정말 아무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19년동안 남매처럼 지내왔기 때문에 이렇게 무드하나 없는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알수없는 기분에 신경질 내며 이불을 크게 들추고 쿵하고 전정국 옆자리에 누웠다.
"무거운 몸으로 푸드덕 되지마라. 침대 무너진다."
"닥쳐."
자는 줄 알았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전정국 쪽을 바라보았다.
전정국은 반대편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생각해보니 마주보고 잔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야 전정국."
"왜"
"너 여자친구 있냐?"
"어."
너무나도 당연한 등뒤로 들리는 소리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살짝 화가 날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화 낼 일이 아니었다.
전정국이랑 같은 유치원,초,중,고를 나왔지만 전정국의 옆에는 항상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나도 꾀나 인기가 많은 편이었지만, 남자에는 딱히 관심이 없던 터라 한 두번 정도 사겨본 것 같긴한데 전정국이 뭐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서로 남녀관계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었는 데, 이제와서 화내는 것도 좀 웃길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이과건물앞에서 너 졸졸 따라다니던 애?"
"걔는 걍 나 쫓아다니는 애고."
"그럼 저번에 그 복도에서 만났던 애?"
"걔는 걍 빵 잘 사주는 애고."
난 기가 차서 옆으로 돌아누워 계속 전정국의 등을 바라본 채 말했다.
"넌 사랑이란 거 해본 적 있냐?"
이번에는 빨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정적에 나는 계속 전정국의 등만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몇 초후 전정국이 내 쪽을 향해 뒤돌았다.
그 덕에 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로 마주보게 되었다.
항상 함께 누워있던 침대였는 데 이렇게 마주보고 누우니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거 우리 인생에서 위험해."
전정국의 맑은 눈동자 속에서 내 모습이 비춰졌다.
지민이가 나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한 답과 같은 대답이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고 싶어?"
전정국이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가까운 얼굴에 닿는 숨결에 살짝 간지러움을 느꼈다.
나는 잠시 그런 전정국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의 많은 생각이 나듯 나지 않았고, 전정국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그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우리 인생에서 위험하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있어."
"뭔데?"
"너랑 나랑 사랑하는 거."
전정국의 말에 갑작스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아무말이 나오지 않았는 데 전정국은 다시 한번 씩 웃어보이곤 뒤돌아 누웠다.
내 두 눈에는 전정국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 뒷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더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도 뒤돌아 누워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그날 뒤척이느라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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