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안에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쭉 펴며 깊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뭔가 달라, 한국 공기랑은.
어느덧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해 혼자 생활을 한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학교에 복학도 했고, 학교에 있는 시간 이외에는 아르바이트나 공부로 시간을 보냈다. 혹시나 학교로 누가 찾아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1년간 매우 평범한 학생으로 지냈다.
그리고 1년간 열심히 한 결과 4학년이 된 나는 기획팀에서 인턴으로 몇번 일했던 경험을 살려 촬영을 담당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화보나, 뮤직비디오나, 광고 이런일일 진행할 때 컨셉을 짜는 일을 담당하는 회사였다. 그 일을 하게됨으로써 내가 떠나온 사람들을 만나게 될게 뻔하니까, 어떡해야할지 고민도 많이 했는데 그사람들이랑 만난다는게 정해진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싶은일이니까, 또 내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취업을 앞두고 일본으로 첫 해외여행을 왔다. 늘 영어공부만 해서 영어는 좀 자신있었는데 막상 일본은 우리가 쓰는 영어랑은 좀 달라서 무용지물이었고 결국 나는 스마트폰 번역기에 의지해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개처럼 일한거, 개처럼 쓰자! 라는 생각으로 도쿄 시내 위치한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사진으로 보던것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게 그동안 고생해서 일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래, 이맛에 돈 버는거지.
안내 데스크에서 체크인수속을 밟았고 숙소로 올라가기전에 화려한 호텔내부를 좀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가 호텔식당이구나, 일본에 오면 현지식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오늘 저녁을 저기서 먹어보는것도 괜찮겠다. 언제 이런 호텔에서 저녁을 먹어보겠어.
그렇게 앞도 보지않고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며 너무 열심히 봐서 였을까, 옆으로 달려가는 한 여자와 부딪혀버렸다.
“스,스미마셍.”
그나마 평소 알고있던 단어로 사과했지만 그여자는 나를 보지도않고 떨어졌던 플랭카드를 주워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그여자가 달려간 곳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연예인이 이곳에 묶는것 같았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릴것 같아서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안으로 들어갔다. 방안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텐을 열면 발밑으로 도쿄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다 보였다. 나중에 밤에 보면 야경이 아주 끝내줄것 같았다.
여유있게 여행하고 싶어서 여행기간을 길게 잡았기때문에 먼저 짐을 좀 풀어놓고 화장도 한번 고쳤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셀카도 여러장 남겼다. 비싼 호텔이라 그런지 화장실 안까지도 럭셔리했다. 그리고 내 로망이었던 호텔가운도 걸려있었다. 실크소재의 여리여리한 그런 가운을 꿈꿔왔지만 일본특유의 유카타같은 가운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온 느낌이 제대로 나는것같아서 나쁘지않았다.
“가운이 예쁘면 뭘하나, 보여줄 사람이 없는데.”
***
가장 먼저 간 곳은 츠키지 수산시장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조금 가다보면 나오는 곳이었는데 먹을게 정말 많았다. 이곳에서 스시로 점심을 때우고 나중에 숙소에서 먹을 딸기찹쌀떡도 샀다. 여행의 출발이 나쁘지않았다.
다음은 지브라미술관이었는데, 평소 재밌게 봐왔던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귀여운 인형들도 너무 많았다. 모두 나의 구매욕구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쁜 쓰레기다, 예쁜 쓰레기. 하며 겨우겨우 잠재웠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전혀 가는 줄 몰랐고 이대로 호텔에 가면 저녁시간때를 놓칠것 같아서 일본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신주쿠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토록 바랬던 일본라멘도 먹고 카페의 창가에 앉아 일본의 저녁을 감상했다. 우리나라처럼 퇴근하고 집에가는사람, 나처럼 여행온 관광객 등등 다양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일상에서 벗어나니 정말 여행을 온것 같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다시 호텔안으로 들어왔다. 여행 첫날이니 체력을 비축해두는게 좋을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입구는 또 수많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있었다. 아마, 낮에 그 연예인을 보려고 기다리는것 같았다. 결국 입에 스미마셍, 스미마셍을 반복하며 한명한명을 지나 숙소안으로 들어가야했다.
“오빠!!!!”
갑자기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잘 들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명의 오빠를 찾고 있었다. 오빠라고 하는거 보니까 한국 연예인인가?
“째아오뺘!!!”
째아?쩨아? 우리나라에 그런연예인이 있던가. 하긴, 연예계에 일부러 관심을 가지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으니까 모를만도 했다. 겨우겨우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고 호텔안으로 들어서자 더이상의 팬들은 없었다. 대신 수많은 경호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걸로 봐선 방금 그 연예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호텔앞에 많이 있었구나. 하여간 김여주, 타이밍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의 로망인 가운을 입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맥주캔을 뜯었다. 뻥-하고 따지는 소리가 오늘 하루 피로를 날려주는 느낌이었다. 한손엔 맥주를 들고 편안하게 침대에 앉아서 내려보는 도쿄의 야경이라니, 야경을 보러 돈주고 타워에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순탄했던 나의 여행 첫날을 마무리 했다.
둘째날의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여행의 설렘이 이런건가 보다. 오늘은 컨셉은 먹방이었다. 여러군데를 다니면서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리고 밤에 호텔에서 먹을것까지 준비했다. 돈까스, 함바그, 타코야키, 파르페 등등을 배에 다 집어넣었고 너무 배가 부를 때면 쇼핑을 하며 소화를 시켰다. 덕분에 양손가득 채워서 호텔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서 샤워까지 끝 마쳤지만 막상 호텔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니 격식을 차려야할것같은 느낌이라 다시 화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옷들중 가장 불편한, 다르게 해석하면 나름 고급스럽게 예쁜 옷을 골라입었다. 분위기내려고 호텔 식당에서 먹는건데 이왕이면 제대로 내야지.
식당 내부는 혼자 온게 민망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여기저기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흘러나오는 음악이 너 지금 호강한다.하고 말해주고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길 잘했어.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메뉴는 뭘까 열심히 고민하다가 결국 웨이터를 불러 혼자 먹을만한 요리를 추천받고 1인코스를 시켰다.
처음에는 간단한 에피타이저로 이름 모를 요리들이 자그만하게 나왔다. 물론 너무 자그만해서 나오자마자 다 먹어치워 다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7시가 되니 식당에 사람들이 더 가득찼다. 홀로 큰 테이블에 앉아 분위기있게 와인 한모금을 넘기며 사람구경을 하는것도 재밌었다.
그러다가 또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어, 나 이거 안시켰는데?”
웨이터가 가져다 준 음식은 갈릭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내가 시킨 코스에는 스테이크가 없었고 이걸 몰래 먹어? 고민하다 혹시 나중에 내가 이돈 까지 다 내야하는 상황이 생길까봐 웨이터를 급하게 불렀다. 아, 이거 안시켰어요가 일본어로 뭐야..
“これの注文をしなくました”
결국 또 번역기에 ‘이거 주문 안했어요.’라고 검색해 그대로 음성재생을 눌렀다. 이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 종업원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내가 일본어를 쓰지못하는걸 아는지 특별히 영어로 대답해주셨다.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해준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누가 혼자 여행하는 내가 불쌍해서 주문해줬나?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일본인 한 남자가 한국어를 쓰며 내앞에 앉았다.
“한국사람이죠?”
“....네, 누구세요?”
“이 호텔에서 묶는데, 너무 예쁘셔서요. 제 스타일이에요.”
“아... 한국어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
“이 스테이크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죄송하지만,”
“자기야, 많이 기다렸어?”
나의 말을 끊고,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리며 웃어오는 황민현이었다. 너무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당황스러워서 멍하니 오빠만 바라봤다.
오빠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일본어로 이야기했고 그 일본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어버린 내 앞자리에 다시 민현오빠가 앉았다.
“음... 잘지냈어?”
혼자 지내면서 민현오빠를 만난다면, 이런 상상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럴때마다 나오던 눈물도 나오지않고 , 홀로 생각해왔던 말들도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앞에 믿기지않는 이 사람을 멍하게 바라봤다. 내손에 있던 포크가 나의 멍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는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던 포크를 내앞에 다시 세팅해주었다.
“여긴 어쩐일이야? 여행?”
“........”
“나는 일본 촬영왔어. 어제 여기 숙소 도착했는데 언제왔어?”
아마 나를 방해했던 그 연예인이 뉴이스트였나보다. 째아라는 연예인도 JR이었던거구나. 이런게 운명인가 싶다가도 막상 오빠를 마주하니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않자 오빠는 머쓱하게 웃었고 그사이 웨이터가 또다른 스테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오빠는 “이건 내가 주문했어! 이거 주문하고 너한테 멋있게 등장하려했는데, 앞에 남자가 선수쳐버린거 있지.” 그러면서 그 남자가 주문한 손도 데이지않은 갈릭스테이크를 종업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식당 자리잡으려고 혼자 먼저 내려왔는데, 네가 보이는거야. 내가 미쳤나싶어서 다시 보고 또 봐도 여주 너더라. 그래서 멤버들 식당오지말라고 했어. 음, 우린 해야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
“다 썰었다. 아-“
오빠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서 내 입앞에 내밀었다. 스테이크보다 해맑게 스테이크를 내미는 오빠의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잘생긴 얼굴, 해맑은 눈웃음, 달콤한 눈빛까지 모든게 여전했다.
“어,어? 울려하지말고 얼른 먹어. 일부러 기분좋은 만남으로 하고 싶어서 맛있는거 주문한건데.”
바보. 내가 우울하거나 기분이 안좋을 때면 맛있는거 먹자고 늘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1년만의 만남에서도 그 예전 시간을 잊지않고 있었다. 천천히 입을 열어 스테이크를 한입 받아먹었다. 그러자 오빠는 또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당연히 맛 따윈 느껴지지않았다. 자꾸만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차오르려 했지만 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서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예쁘다.”
오빠의 따뜻한 손길이 내 머리에 닿았고 민현오빠는 큰손으로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는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어색한 분위기 대신 여행에 대해 질문했다. 언제왔어? 오늘은 어디갔었어? 나도 가보고싶다. 막상 일본에 많이 왔어도 관광은 제대로 해본적이 없어. 등등의 질문으로 어색해야할 우리의 사이에 대화들이 오고갔다. 일부러 옛날이야기나, 감정적인 이야기를 피하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기를 썰어 내입에 넣어주던 손은 쉬질않았다.
“제가 무슨 아기새도 아니고. 오빠도 드세요.”
“아기새? 너무 귀엽다. 아기새같아 정말.”
아니,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닐텐데.. 결국 오빠는 끝까지 스테이크를 나에게 다 먹였고 그릇이 비자 입을 닦을 티슈까지 챙겨준 뒤 함께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오빠는 긴 다리로 먼저 걸어서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었다.
“제껀데 제가 계산할게요.”
“나 때문에 편하게 먹지도 못했을거아니야.”
물론 사실이지만 그래도 오빠는 한입도 안먹었고 다 내가 먹었으니 내가 내는게 맞는것 같았다. 내 성격특유의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한몫했다.
“내가 계산해야 다음에 또 만날 명분이 생기지. 오늘 밥값으로 내일 더 맛있는 음식 먹어.”
오빠는 카드를 내미는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고 다른 한손으로 계산을 했다.
오빠가 입고있는 하얀 셔츠는 오빠의 하얀피부와 잘 어우러졌고, 안본사이 오빠의 피지컬이 더 좋아진것 같았다. 오빠특유의 섬유유연제같은 포근한 향이 나자 이제야 내앞에 황민현이 있는게 맞구나 실감이 났다.
“마음은 급한데 오늘은 이쯤에서 들여보내줄게. 내일은 뭐해?”
“음, 내일은 사실 쉬어가는 시간이라 그냥 시부야나, 앞에 공원이나 아무곳이나 가보려구요. 오빠는요?”
“나 내일 도쿄돔에서 콘서트있어. 혹시 시간괜찮으면 올래?”
음, 이렇게 당장 오빠와 가까워져도 될지 고민이되서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오빠는 이런 내 말성임까지도 이해한다는듯 표정이 아무렇지않았다.
“생각해보고 괜찮다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자리만들어 줄게.”
그 말을 끝내자마자 오빠는 “아!”하고 외치더니 손에 들린 나의 휴대폰을 가져가서 휴대폰을 두드렸다.
“됐다. 우리 밀린 이야기는 다음에 천천히 하자.”
그 말을 끝으로 오빠는 나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일본에서의 밤이었다.
***
어젯밤 뒤숭숭한 마음에 맥주를 먹다 잠이들어서 그런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아무리 몸이 안좋아도 여행에서의 시간은 아까운 법이니까. 세수를 하면 좀 나아질까 화장실로 향하는길에 현관문 밑으로 삐져나와있는 하얀 봉투가 보였다. 봉투를 꺼내어보면 안에는 콘서트티켓과 정갈한 오빠의 글씨가 담긴 쪽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먼저 연락하긴 힘들것 같아서.’
어젯밤 싱숭생숭한 마음에 인터넷에 뉴이스트 일본콘서트 라고 검색해보았고 그를 통해 이미 1분도 아닌 몇초만에 매진된 콘서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콘서트의 표를 이렇게 준다는것이 쉬운일이 아닌것을 알기에, 내 스스로 그런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결국 콘서트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도쿄돔이 보이기 시작할 때 부터 팬들의 줄이 이어졌다. 새삼 오빠들의 인기가 대단함임을 느꼈고 오빠를 보냈던 마지막날, 수많은 팬들 속 아무것도 아니였던 내 자신이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콘서트는 사실 알아듣기 힘들었다. 워낙 뉴이스트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일본활동을 해와서 일본어를 다 잘썼기때문에 모든 멘트들이 일본말이었고 노래또한 그랬다. 그래서 나는 무슨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웃으면 하하 따라웃고 그러다 그냥 편하게 좌석에 앉아 무대를 감상했다.
늘 가까이에 있던 민현오빠가 이렇게 큰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대에 서있는 모습이 새로웠고 그래서 가장 멋있어보였으며 행복해보였다. 그 행복한 모습은 보는사람들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했다.
길었던 대기시간이 무색하게 본공연은 빨리 끝이나버렸고 팬들은 앵콜을 외치기시작했다. 사실 콘서트는 앵콜부터가 시작이니까. 모든팬들이 한마음으로 앵콜을 외치자 그에 응답하듯 오빠들은 능청스럽게 아직안갔냐며 다시 무대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2층과 좌석에 앉은 팬들을 위해 리프트를 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팬들을 위한 이벤트인건지 오빠들의 손에는 장미바구니가 들려져있었다.
사실 다른 멤버오빠들 모두 민현오빠와 나의 관계를 알았던 사람들이라 이곳에서 만나면 서로가 멋쩍을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지나가라, 제발 그냥 가라.
리프트를 탄 오빠들이 점점 다가오는지 팬들의 함성소리가 더 커졌고 나는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발끝만 바라보던 내 눈앞으로 하얀손과 함께 빨간장미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면 손에는 장미를 내게 내밀며 가장 빛나는곳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오빠가 있었다.
‘고마워’
오빠는 앞에서 터지는 카메라플래쉬와 팬들의 함성에도 꿋꿋히 나에게 장미를 전해주곤 고마워라는 입모양으로 말을 남기고 리프트가 이동하는길에 따라 옆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다른 멤버오빠들은 한손엔 장미바구니를 들고 팬들에게 장미를 나누어주고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준 그 장미안에는 꼬깃꼬깃접어 테이프로 곱게 붙여논 쪽지가 있었다.
‘다시 내앞에 와줘서 고마워. 그치만 이제는 못보내.’
짧은 두 문장에 오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입모양으로 전한 고마워도 이런 뜻이었을까.
어느새 리프트가 이 큰 콘서트장을 다 돌고 오빠들은 리프트에서 내려 다시 1층 무대에 서있었다.
“여러분, 이거 민현이가 준비한건데 어때요?”
준비했던 멘트가 아닌 앵콜무대이기때문에 오빠들도 미리 공부한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이야기했고 통역사분이 옆에서 열심히 일본어로 통역을 해주고 있었다. 그 말이 통역되자 팬분들은 환호를 보냈고 오빠는 부끄럽다는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오늘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마운 사람이 공연을 보러 와줘서 준비했어요. “
“뭐야,뭐야? 누구에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비밀이에요.”
그 대화를 듣고있다 깜짝 놀라 저절로 눈이 커졌다. 무대에서나 활동할 때에 있어서 누구보다 철저하고 완벽하며 그만큼 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저런말을 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누구보다 무대가 간절했고 그 멤버들 모두가 그랬음을 잘 아는 사람인데 오빠가 저렇게 가볍게 이야기할리 없었다.
“민현씨, 누구에요? 알려줘요!”
“그건......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오빠는 능청스럽게 대답한건지 처음부터 그럴려고 했던건지 모르겠지만, 오빠의 대답에 또 한번 설레임가득한 함성이 콘서트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몇곡이 더 지나간 뒤 콘서트는 끝이났다. 팬들은 여전히 앵콜을 외쳤지만 더이상의 앵콜무대는 없었고 콘서트장 안의 불이 환하게 켜지자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갔다. 지옥철이란 서울에만 있는건 줄 알았는데 집앞 역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더한 지옥철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콘서트 공연을 한것도아니고, 스탠딩석에도 본것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공연을 관람한게 다인데 괜히 온몸에 기운이 빠져서 저녁 대신 가볍게 편의점에서 또 맥주를 샀다. 일본을 온 3일 내내 맥주는 먹는것 같은 기분은 분명 기분탓 일거다.
***
호텔에 있는 온천에서 온몸을 따뜻하게 씻어내고 위로 올라와 먹는 맥주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온몸이 노곤노곤한데 시원한 맥주가 들어가자 갈증이 해소되면서도 와, 이대로 정말 누워서 눈만 감으면 꿈나라로 갈것 같았다.
똑똑-
“여주야.”
이 목소리,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딱 한명. 민현오빠 뿐이었다.
“왜 먼저 갔어. 사람 많아서 힘들었을텐데.”
“뒷정리하고 마무리하려면 바쁠거잖아요.”
“나 사실, 힘들다고 전체 회식도 얼굴만 비추고 왔어.”
“많이 힘들었어요?”
“아니, 나는 가봤자 늘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는걸. 거기다가 더 보고싶은 사람이 있기도 하고.”
오빠의 그 말에 오빠를 바라보던 눈이 저절로 땅으로 향했다. 일본 호텔은 아무리 비싸거나 좋아도 일본정서의 특성상 방을 크게 사용하는 편이 아니라서 딱히 앉을만한 공간이 없어 창밖 야경을 바라보며 둘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분위기가 더 진지해졌다.
“여주야, 나 안 미워?”
“오빠 이야기 다니엘한테 다 들었어요.”
오빠 덕분에 오랜만에 내 입에서 강다니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도 다니엘한테 들었어. 그치만 내가 널 떠난건 사실이잖아. 너의 감정에 상관없이 내가 추측해서 혼자 떠나버린거잖아.”
“떠나려는 오빠 마음이 더 아팠을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미워해요?”
내 대답에 오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앞에는 예쁜 야경, 오랜만에 만난 우리, 이 분위기 모두가 내 속마음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해외투어 간다고 오빠 떠나던 날, 공항에 갔었어요. 그날 다니엘한테 들었거든요. 오빠는 저기 내 눈앞에 있는데, 나는 오빠옆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아무리 오빠를 불러봐도 내 외침은 거기 있는 모든사람들이 외치는 말이랑 다른게 없는거 있죠?”
“........”
“그리고 오빠가 나한테서 연락을 끊으니까 나는 오빠 집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더라구요. 그냥 연예인과 일반인 딱 그정도 거리였어요. 그래서 후회했어요, 엄청 많이. 나는 오빠에 대해서 하나도 노력하지 않은것 같았거든요.”
“.........”
“그래서 혼자 많이 생각했어요. 나는 오빠한테 이렇게 나쁜사람이었는데 과연 그런 내 옆에 있었던 오빠는 행복했을까?”
“그랬구나.”
오빠는 큰 손으로 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마치 오빠가 하는 말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오빠 마음이 다 느껴졌다. 천천히 오빠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자 오빠는 뒤에서 팔로 감싸안듯 나를 쓰다듬었고 덕분에 오빠와의 거리가 더욱더 가까워졌다. 쿵쿵 오빠의 심장박동소리가 귓가에 울려왔다.
“행복했어, 너무. 그 짧은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싶었어. 근데 그런 생각이 자꾸 주위사람을 보게 만들더라. 나 때문에 모두들 힘들어하는것 같아 보였고 그게 내가 행복하기 때문인 것 같았어. 그래서 그랬나봐, 그리고 무엇보다 여주 니가 내옆 보다는 다른사람 옆에 있는게 행복할 것 같았거든.”
귓가에서 부드러운 목소기로 조곤조곤 읊듯이 말하는 오빠덕에 스스륵 잠이 몰려왔다. 그리고 오빠의 대답이 정말 황민현 스러워서 오빠의 눈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사이의 거리는 꽤나 가까웠다. 오빠는 공연이 끝나고 바로 달려온건지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았고 그 덕에 나를 내려다보는 오빠의 눈빛이... 그래, 섹시했다.
쿵쿵대는 심장소리는 더 빨라지는것 같고, 우리의 눈빛은 더 끈적해지는것 같았다. 이쯤 되자 내 머릿속의 비상벨이 삐용삐용 울리는것 같았다.
오빠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손은 내 어깨에 얹어짐과 동시에 오빠의 고개는 창밖을 향해 돌아갔다. 오빠는 가운을 입고 움직여서 어깨가 살짝 들어난 내 옷을 끌어당겨주었다. 오빠의 예상치 못한 손길에 나도 깜짝 놀라 옷을 정리했다.
“내가 아무리 황민현이라도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어깨에 기대어있던 우리의 거리는 어느새 침대 끝과 끝에 위치했다. 그 끈적했던 분위기만큼 몇 배로 어색한 분위기가 이 방안에 가득찼다.
“내,내일은 어디가?”
“디즈니랜드 가보려구요.”
이 분위기를 깨트리려 걸어온 질문에 오빠는 내 답을 듣더니 갑자기 눈빛이 바뀌며 바라는게 있는 강아지같은 눈빛을 했다. 마치 뒤에 꼬리를 달고 살랑살랑 움직일 것 같았다.
“나도 가면 안돼?”
“조,좋아요!”
생각도 안하고 나온 내 대답에 민현오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박수를 칠 정도로 좋아했고 “뭐가 필요하지? 내일 몇시에 나가? 여기서 어떻게 가?”와 같은 폭풍질문을 던졌다.
그 궁금증이 다 해결되자 오빤 정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많이 보고싶고, 그리웠어 여주야.”
“.....저두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오빠는 천천히 걸어와 나를 품에 안았다. 씻지도 못했을텐데 여전히 그리웠던 섬유유연제향이 풍겨왔다.
“오늘도 예쁜꿈 꿔.”
———Behind
이제는 반갑지도 않은 해외활동이었다. 그동안 해외투어로 아시아를 다 돌아다녔고 모든 멤버들이 지쳐하면서 한국에 와서 쉬웠다가 투어를 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해외투어기간이 더 길어지긴 했지만. 그리고 그 마지막곳이 일본 도쿄돔 공연이었다.
오사카를 비롯한 다른지역에서 이미 몇차례 공연을 하다가 왔기 때문에 도쿄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는 없었다. 호텔까지 반겨주는 팬들이 너무 감사했지만 이제는 좀 지쳤다.
“종현아, 내가 드디어 미쳤나봐.”
“응?”
“방금 여주를 봤어. 귀신인가.”
“쯧쯧,”
이제는 하다하다 그리움에 파묻혀 귀신을 보는건지, 여자를 보고 그냥 여주라고 생각하고 싶은건지. 한번도 팔목에서 벗어난적 없는 니가 준 팔찌를 매만지며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방안에 들어와 시체처럼 누워 시간을 보내다, 꼬르륵 배시계가 울려 배가 고프지 않다는 종현이를 억지로 끌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화장실에 간 종현이의 빈자리 너머로 또 너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냉수로 정신을 차려봐도 분명히 여주의 얼굴이 보였다.
신이 주신 마지막기회라는게 이런걸까, 그동안 착하게 살아오길 잘했던걸까. 마법처럼 너는 내앞에 있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니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내 마음처럼 당장 달려가서 너를 안아버리기엔 우린 너무 먼 사이가 되었으니까.
결국 종업원을 불러 네가 좋아하던 야채와 치즈가 들어있는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면 너의 앞에가서 뭐라고 하지. 잘 지냈어? 보고싶었어? 앞에 놓인 종현이의 빈 물잔을 바라보며 멋진등장을 연습했다.
“어, 나 이거 안시켰는데?”
안그래도 잘들릴 너의 목소리가 수많은 일본말들 사이에서 또렷히 들려왔다. 곧이어 한 일본남자가 너의 앞자리에 앉았다. 뭐야 저새끼는.
걱정과 달리 너의 얼굴엔 당황함이 가득했다. 너를 보낼때 다짐했어. 언젠가 니가 돌아오면 절대 너를
보내지 않아. 손에 들린 물잔을 쾅-내려놓고 종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중요한일이 생겨서 밥 안먹는다.’
심호흡을 크게 두번, 그리고 보고싶었던 너에게 향했다. 너의 앞에 앉아 느끼한 웃음을 흘리는 저 남자를 처리해야했다.
“자기야, 많이 기다렸어?”
***
멤버들은 갑자기 이상해진 민현이 낯설었다. 모두가 피곤과 빡빡한 일정에 지쳐갈 때 , 그 누구보다 힘들어하던 민현이 갑자기 어제 밤부터 생글생글 얼굴에 생기가 도는게 아닌가. 늘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있던 민현이 이불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거리니, 귀신이 보인다더니 진짜 미쳐가는건가 싶을정도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공연전에는 한번더 안무와 동선을 체크하는 완벽주의자 황민현이 대기실에도 보이지않았다. 모두가 열심히 민현을 찾고 있을때, 민현은 웃으며 꽃 한바구니를 들고 등장했다.
“야, 이거 뭐야?”
“장미꽃!”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갑자기 꽃을 한가득 들고 등장한 황민현이라니. 민현은 스태프들과 멤버들에게 앵콜때 리프트를 타고 꽃을 나누어주는 이벤트를 제안했다. 아무리 팬들을 아껴도 이렇게 직접 꽃을 사와서 준비할 애는 아닌데, 아무튼 좋은 생각이였으니 모두들 꽃 몇송이를 손에 쥐었다.
아무도 없는 빈 대기실로 들어간 민현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어 흰 종이에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리고 그 종이를 꼬깃꼬깃접어 테이프로 동동감아 자신이 가져온, 그중에서 가장 예쁜 꽃에 정성스럽게 붙였다. 꽤나 만족스러운지 꽃향기를 맡으며 대기실 밖으로 나가는 민현이었다.
본 무대가 끝나고 앵콜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무대 뒷편으로 내려온 멤버들은 민현의 아이디어대로 꽃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다시 팬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리프트에 올라탔다.
“야, 황민현. 너 왜 꽃이 한송이뿐이야?”
“난 딱 얘 하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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