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카미시라이시 모네 - 366일
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W. 달감
33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기사 아저씨의 도착했다는 말에 난 다시 한 번 하얀 원피스를 정돈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차 문을 열었고 하얀 구두를 차 밖으로 내디뎠다.
염색한 갈색 머리가 어색해서 쓸어내리다가 날 마주하고 있는 하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변함없이 참 웅장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한숨이 아닌 각오와 다짐의 숨이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나도 이제 많이 컸으니 이 집에 잡아먹히지 말자.
마음속으로 되뇌자마자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여자가 등장했고 위풍당당하게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어릴 때는 이 집에 올 때마다 이 집에 잡아먹힐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려서 잘못 생각했을 뿐 다시 생각해보면 날 잡아먹는 건 이 집이 아니라 저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되뇌었다.
나도 이제 많이 컸으니 어머님한테 잡아먹히지 말자!
"싸구려구나."
"네?"
"니 옷 말이다."
잘지냈니? 오랜만이구나. 따위의 안부 인사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며느리에게 건넨 첫마디가 싸구려라니.
그 싸구려가 나를 말하는 건지 옷을 말하는 건지 조금 헷갈렸지만 나는 애써 상한 마음을 숨기지 않기 위해서 입꼬리를 올렸다.
"JK그룹 며느리라고 얼굴까지 알려졌는데 그딴 옷 입고 다니지 마라.
특히 우리집에 드나들 때는 말이다. 옷부터 갈아입고 내려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찮게 바라보던 어머님은 뒤돌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나름 이 집에 처음 들어오는 날이니 고민하다가 고른 옷이었는데, 어머님의 한마디에 나의 노력은 와장창 무너졌다.
비싼 브랜드의 옷이 아니긴 했지만 디자인만큼은 예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옷이었다.
하지만 온몸에 몇백만 원의 비단을 걸친 어머님 눈에 가장 중요한 건 옷의 출처와 가격표였다.
나는 그런 어머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곳은 어머님의 집이고 어머님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많은 짐들을 트렁크에서 꺼내 날 따랐다.
어릴 적부터 내 집만큼이나 많이 드나든 전정국의 집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이 집에서 사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방금 꺾인 기세를 살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머님에 대한 나쁜 기억만큼이나 전정국과 함께한 좋은 추억들도 많이 담긴 집이다.
이제 그 좋은 기억들을 더 키우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오늘 아침 전정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같이 못 가줘서 미안해."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말고 회사 가서 잘해."
"우리 엄마가 뭐라고 한다고 절대 기죽지말고.
원래 말도 안 되는 거 가지고 갈구는 사람인 거 알지? 그냥 무시해.
아니다, 못 참겠다싶으면 그냥 나 믿고 대들어."
내 어깨를 꽉 붙잡고 진지하게 말하는 전정국에 나는 그냥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늘은 전정국한테도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은 10대에 대부분의 경영 공부를 끝마쳤다.
오늘부터 결혼식 전까지 약 2주 정도 회사에 임시 출근하며 테스트를 받고, 그 테스트를 통과한 후에 정식 직원으로서 출근할 수 있게 된다.
회장의 외동아들인 전정국이 JK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테스트의 결과는 당연히 통과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통과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전정국이 단순한 회장 아들이라는 편견을 깨는 것이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전정국이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 사람, 믿고 회사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번 일을 잘 해내야지 전정국을 견제하려 하는 회사 내 경쟁 부류에게도 꼬투리 잡힐 일이 적어질 것이고,
직원들뿐만 아니라 전정국을 지지해줄 고위층 임원들과의 신뢰 또한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매우 중요한 기간인 걸 알고 있는데도 자기 걱정보다 내 걱정만 주구장창하고 있는 전정국이었다.
"넌 엄마가 쏘아 붙이면 그냥 굳어버리잖아. 이제 그러지말고 이번엔 진짜 나 믿고 확 대들어버려 꼭."
"전정국!! 나 진짜 괜찮다니깐? 오늘은 너한테도 중요한 날이니깐 너 걱정도 하자, 전정국 화이팅!"
내가 넥타이를 잡아당겨 뽀뽀를 쪽 하고 나서야 전정국은 좁혔던 미간을 풀고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넥타이를 제자리에 두고 옷깃과 넥타이를 조심히 어루만지며 정리해주었다.
전정국이 그런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많이 벌어올게."
전정국이 구두를 신고 현관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검은색 양복과 갈색 구두가 주인을 만난 것처럼 전정국과 잘 어울렸다.
곧 성인이 되기에 앳된 19살 회사원 전정국의 모습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싶어서 그 모습을 눈에 열심히 담았다.
이렇게 정식으로 아침에 출근하는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괜히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전정국이 마지막으로 뽀뽀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가 뒤돌아 나를 보고 말했다.
"엄마가 너 그렇게 많이 괴롭히시진 못할 거야."
"응?"
"내가 그렇게 못하도록 장치를 설치해놨거든."
웃으며 회사로 떠난 전정국의 말이 나는 장난으로 스치듯 한 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장치는 정말로 설치되어있었다.
"이야~~ 역시 이 집은 밥이 맛있다니깐~~"
옷장에 준비되어있던 명품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식탁에 앉아있는 김석진에 깜짝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김석진을 바라보았다.
"제수씨!!! 오랜만이야!!!"
"김석진....아니... 아주버님이 왜 여기에...?"
"헿 너랑 정국이 결혼식 전까지 나도 여기서 머물기로 했어."
"그니깐 왜?"
"정국이 자식이 얼마나 나한테 간곡히 부탁하던지~"
입안에 파스타를 가득 넣은 채로 스테이크를 쓱싹쓱싹 쓸고 있는 김석진을 보고 있자 전정국의 '장치'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 그 장치가 '김석진' 이었구나.
낮 시간은 전정국이 출근을 하기 때문에 어머님과 단둘이 있어야 할 것이고,
단둘이 있을수록 나에 대한 어머님의 구박은 심해질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전정국은 그 낮 시간 동안 전정국 대신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김석진은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고, 이 집에 머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그 사람으로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들의 눈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어머님이기에 보는 눈이 많을수록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실 것이다.
적어도 날 싫어하는 티는 계속 내시겠지만, 조카 앞에서 며느리한테 폭언이나 폭력은 함부로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김석진도 어렸을 때 내가 어느 정도 구박받고 사는 걸 지켜본 터라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일부로 이 집에 와준 김석진도 고마웠고, 이렇게 미리 조치를 다 취해놓은 전정국한테도 너무 고마웠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내가 미소 지어 보이자 김석진도 방실방실 웃어 보였다.
웃고 있는 입꼬리 쪽 두 불에 가득 든 음식 때문에 햄스터처럼 보이긴 했지만.
"공짜는 아니었어. 조건이 있었다고."
"뭔데?"
"내가 이 집에서 너랑 같이 있어주는 대신에 내가 너희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로 전정국과 약속했거든"
"축가?! 설마 아직도 댄스가수 꿈 안 접었어? 그때 고모님한테 잡혀가고 정신 차린 거 아니었어?"
"너희 부부가 그 날 그렇게 날 배신했는데, 내가 오기로라도 안 접을거야."
날 찌릿하며 노려보는 김석진이었지만, 그날 잡혀가던 김석진의 모습이 떠올라 푸흡 하고 웃어버렸다.
이렇게 김석진과 마주 보고 식사를 하다 보니 이곳에서 전정국,김석진과 셋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 집에 내 편이 한 명이라도 더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렇게 김석진과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있던 중 어머님이 내려오셨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참 시끄럽게도 먹는구나. 이제 수업 가야 하니 일어나거라."
"외숙모~ 아직 저희 식사 다 안 했는데요오? 탄소 지금 막 내려왔어요!"
"아니에요!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김석진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했다.
식사는 이따가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어머님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석진도 그걸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어머님에게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수저를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수업 가는 건 나인데 자신의 수저를 내려놓는 김석진에 나와 어머님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석진이 너는 왜 일어선 거니?"
"저도 수업 같이 들으려고요!"
"석진아, 이건 결혼식 신부 입장 수업이란다. 너도 결혼할 거니?"
"아... 그런 거였어요? 뭐 미래의 제 신부를 위해서 미리 들어놓죠~"
어머님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김석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냥 수업 장소로 이동하셨다.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김석진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옆에 있어주겠다는 김석진에 나도 모르게 큰 안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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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작은 분수대가 있는 실내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하얀 대리석 위에는 결혼식 날 '신부입장!' 소리와 함께 밟고 걸어갈 길을 대신한 긴 레드 카펫이 깔려있었다.
5명의 전문가들과 어머님이 그 카펫 위를 걸어가는 날 뚫어지게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내가 이 카펫 위를 가다가 꼬꾸라진다면 그건 저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다섯 번 정도 왔다 갔다 했을까 내 움직임을 보고 무언가 열심히 적어내려가던 전문가 선생님들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고개는 어느 정도로 들어야 하며, 허리는 어떻게 세워야 하며, 팔은 어떻게 고정해야하며, 보폭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며 등등
그 많은 내용을 기억해서 내 몸 한 부분 한 부분에 적용시켜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고작 일분 정도의 신부 입장을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나한테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건 표정이야. 어차피 이 결혼은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 알지?
넌 그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여야 하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해.
기자들이 너의 얼굴을 잔뜩 찍을 거고 그 얼굴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될거니깐.
자 한 번 웃어봐."
하나뿐인 결혼식에 가득 찬 기자들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내가 그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되라는 건지 어이가 없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내 얼굴을 주시하는 전문가들과 그 가운데에 서서 내 얼굴을 노려보는 시어머님 때문에
나는 숨을 들이쉬고 '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야'라고 생각한 뒤 눈꼬리는 접고 입꼬리를 가득 올려보았다.
"푸흐흡"
표정을 짓자마자 눈이 마주친 김석진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고
나를 포함한 방 안 모든 사람이 놀라서 김석진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이 얼마나 웃겼던 건지 김석진은 모두 자신을 바라보든 말던 배꼽을 잡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외숙모 저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인데요ㅋㅋㅋㅋㅋㅋㅋ"
"크흠 석진아, 수업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하거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라니. 나는 김석진을 잠시 노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문가들과 어머님이 모두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상의를 하고 있었다.
김석진과 다시 눈을 마주치자 여전히 웃고 있는 김석진이 '거울 봐'라고 입모양으로 말했고
난 거울을 들어 아까 지었던 표정을 다시 지어보았다.
난 거울 속 나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거울을 바로 내려버렸고, 김석진이 그런 날 보고 또 끅끅거리며 웃었다.
억지로 웃으려니 웃음이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부자연스러운 결혼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여러 명한테 붙잡혀서 몇십 분동안 입꼬리를 좀 더 올리세요! 눈에 힘을 푸세요! 광대 내리세요! 등의 잔소리를 듣고 나서도
"오늘은 포기하죠, 내일은 더 나아지겠죠?"라는 김빠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표정연습을 끝낼 수 있었다.
억지로 짓고 있던 표정들 때문에 얼굴 근육들이 아파졌지만 쉴 틈도 없이 다시 자세연습을 하였다.
머리에 책 몇 권을 올리고 긴 카펫을 또 몇십 번 왔다갔다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마지막이라는 희망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실전처럼 연습해보자며 앉아서 계속 날 지켜보고 있던 김석진을 불렀다.
"석진아, 마지막이니 너가 아버지 역할 한 번만 해주겠니?"
어머님의 말에 김석진이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고, 나는 김석진에게 팔짱을 꼈다.
'우리 아빠 어깨 이렇게 안 넓은데' 하고 농담을 하자 김석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농담도 잠시 마지막이기에 더 집중된 전문가들과 어머님의 시선에 나는 잔뜩 긴장했다.
오늘 하루 종일 연습했던 자세를 유지하려 온몸에 힘을 주며 한발자국씩 내디뎠다.
그때 옆에서 내 발걸음에 맞춰 걸어주던 김석진이 앞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보여주기 위한 결혼식이라더라도 어쨌든 니 결혼식이잖아."
"..."
"어쨌든 전정국은 니 옆에 있는거라구. 그니깐 넌 니 옆에 있는 전정국만 생각해."
김석진의 작은 속삭임에 나는 순간 내 옆에 서있을 멋진 슈트를 빼입은 전정국을 떠올렸다.
동시에 지금 앞으로 내딛는 이 걸음 옆 내가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이 전정국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얼굴에 예쁜 미소가 퍼져갔다.
"아가씨! 지금 그 표정 너무 좋아요! 자세도 지금까지 하신 것 중에 가장 자연스러워요!"
한 전문가 선생님이 외치셨고,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김석진 덕분에 얻어낸 결과에 난 기분이 좋아져 그를 바라보았고, 김석진은 윙크를 한 번 날려주셨다.
수업을 내일 계속하자며 인사를 한 뒤 모든 전문가 선생님들이 나가셨다.
나도 김석진과 저녁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뒤에서 어머님의 목소리가 이 공간을 울렸다.
"쪽팔린다."
"..."
"어쩜 그렇게 못하니?"
나는 어머님의 가시 박힌 목소리에 놀라서 온몸을 굳혔다.
어머님은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내게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난 어머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그 빨간 구두만 바라보았다.
그 구두조차도 나한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난 나가서 오늘 오셨던 전문가분들께 식사를 대접할 거야.
왜? 너가 너~무 못했으니깐.
저 사람들이 나가서 JK 그룹 며느리가 정말 형편없다, 최악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다닐게 뻔하니 입막음해야 하지 않겠니?
니 능력부족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야되겠니?"
나도 하루종일 이어진 수업에 지쳐있었고, 잘하진 못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기에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 앞에서는 한 마디 꺼내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어머님의 목소리는 내게 무기였고, 어머님의 날카로운 한 마디 한 마디는 내 가슴에 꽂혔다.
어머님은 항상 이런식으로 내 마음을 공격해 다치고 쓰러지게 만들었다.
"너가 JK그룹 며느리라는게 정말 정말 쪽팔려!"
"...죄송합니다.."
"이게 다 너가 너희 엄마 닮..."
"외숙모."
"..."
"제가 배가 너무 고파서요, 이쯤에서 그만해주실래요?"
김석진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님을 마주했다.
나도 어머님도 이 방에 김석진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기에 조금 놀랐다.
어머님은 그런 김석진을 보고 한숨을 작게 내쉰 뒤 날 한 번 더 째려보고 또각또각 이 방을 나가셨다.
분명 날 향한 질타가 오래될 것이 분명했는데 김석진이 끼어들어준 덕분에 이쯤에서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상한 마음을 정리하다가 김석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김석진이 눈을 마주치자 손키스를 날렸다.
저놈의 손키스는 어디서 배워와서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왜 내가 너무 잘생겨서 웃음이 막 나와?"
"맘대로 생각해라... 아주버님이랑 싸울 힘도 안 남아있다...."
"에? 힘이 안 남아 있어? 그럼 내가 특별히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필살기를 보여줄게."
"필살기?"
"응. 이거 곧 있을 오디션에서 하려고 연습한 춤인데, 이거 하면 백 퍼센트 합격할걸?"
김석진이 벌떡 일어나서 내 앞에 섰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어때?!"
저걸 오디션 가서 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한다고?
처음엔 그 춤이라고 하기엔 난해한 몸 움직임에 충격을 받아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진지하게 날 내려다보며 어떠냐고 묻는 김석진에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춤사위가 너무 웃겼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김석진의 태도도 웃겼다.
계속 생각할수록 웃음이 멈추지 않아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임마!!!! 아주버님이 널 위해서 이렇게 춤을 쳐줬는데 왜 웃어?!!"
"아아하핰ㅋㅋㅋㅋㅋ 진짴ㅋㅋㅋ 그게 춤이야 교통정리야? ㅋㅋㅋㅋㅋ"
"넌 내 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
김석진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다가 웃겨서 흘린 눈물을 닦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 임마, 그냥 그렇게 웃고 살아. 풀 죽어있는 것보다 그렇게 활짝 웃는 게 너한테 훨씬 어울려."
나에게 이렇게 웃음을 선물하는 방법은 딱 감석진다운 위로였다.
항상 철없고, 장난꾸러기 같았지만 깊은 마음속에 숨겨놓은 맏형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 마음이 고맙고 따듯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내 김석진이 배가 너무 고프다며 징징거렸고 우리는 웃으며 함께 밥을 먹으러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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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은 후 결혼식과 관련된 몇 가지 일정을 끝마치고, 회사 경영 공부까지 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전정국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버텨보았지만 나도 오늘 바쁜 하루를 보냈기에 몰려오는 잠기운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새벽이 가까워지도록 오지 않는 걸 보니 전정국도 많이 바쁜 게 분명했다.
어머님께서 이 집에 있는 동안은 각방을 쓰라고 해서 전정국과 나는 다른 방을 쓰게 되었다.
며느리인 내가 조금이라도 자기 아들과 붙어있는 게 싫은 게 분명했다.
이 방은 우리 신혼집의 방보다 훨씬 넓고, 잘 꾸며져있고, 부족한 게 없는데도
전정국이 없다는 이유로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추웠다.
그래서 이불을 꽁꽁 감싸고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이불 속 내 허리를 감싸며 뒤에서 날 가득 끌어안는 누군가에 내 추위가 달아났다.
잠결에도 날 감싸는 그 향기가 익숙하고도 너무 좋아서 누군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늦었네?"
"미안, 깨웠어?"
"잠들랑 말랑 하고 있었어"
전정국이 내 귀에 작게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하마터면 날 다시 재울 뻔했다.
잠들려던 참이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잠에서 깨서라도 전정국을 보고 싶은 마음에 잠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피부에 닿는 빳빳한 옷감이 전정국이 아침에 입고 나갔던 양복 차림인 걸 알게 해주었다.
이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내 방으로 온 게 분명했다.
"어머님이 우리 각방쓰래. 너 방 여기 아니야."
"알아, 근데 가기 싫어."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는 전정국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난 뒤돌아 누워 전정국의 품에 안겼고, 그 품은 날 더 따듯하게 만들었다.
날 더 꽉 끌어안는 전정국을 보니 전정국도 오늘 하루가 꽤나 힘들었던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돼서 물었다.
"오늘 어땠어?"
"힘들었어. 그래서 더 보고싶었어."
하루 종일 회사 직원들과 임원들의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전정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언제나 완벽해야 한다는 전정국의 부담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난 전정국을 끌어안은 손으로 전정국의 등을 토닥토닥해주었고, 전정국은 그 손이 좋은지 어린아이처럼 예쁘게 미소 지었다.
"너도 힘들었지?"
"너가 설치해준 장치 덕분에 괜찮았어."
"푸흐- 다행이야.
우리 같이 힘내자. 같이 힘내서 다 잘 해내자."
같이 힘내서 같이 해내자는 말이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서로를 응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결혼식 준비로, 전정국은 입사 준비로 갑자기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우리는 각자 주어진 일들을 해내며 바쁜 하루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밤 다시 만나 서로의 오늘 하루를 위로하고, 내일 있을 하루를 응원해줄 것이다.
그 매일 밤은 우리가 고된 나날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자, 하루를 견뎌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둘이 함께라면 어떤 하루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옷갈아입고 씻고 자."
"너 잠드는 거 보고 갈래."
전정국이 피곤할까 봐 빨리 가서 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머리랑 다르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전정국의 품은 오늘 있었던 모든 힘든 일들을 잊게 해 날 치유해주었다.
난 더 치유받기 위해서 그리고 전정국의 힘든 일들을 치유해주기 위해서 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 따듯한 온기가 날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꿈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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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어있을 줄 알았던 내 옆자리엔 전정국이 누워있었다.
어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잠들고 자기 방으로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내 방으로 와서 잔 모양이었다.
1인용 침대라서 둘이 같이 누우면 불편할 텐데 내 옆에서 자겠다는 의지로 침대에 몸을 밀어 넣었을 전정국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각방 쓰라고 해서 시무룩하게 만들었던 어머님의 명령은 전정국 덕분에 아무 소용이 없게 돼버렸다.
피곤했는지 아기처럼 푹 잠든 전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전정국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잘잤어?"
"웅.... 아침밥... 해줘..."
"여기선 요리사 분들이 다 해주시잖아."
"싫어.... 너가 만든 거 먹을거야...."
내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었는지 일어나자마자 잠꼬대로 아침밥 타령을 하는 전정국이었다.
잠에서 덜 깨서 아기처럼 웅얼거리는 전정국이 너무 귀여웠다.
이 귀여운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당장 아침밥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잠 깨고 나오라고 전정국을 몇 번 토닥거리고 나서 씻은 뒤 부엌으로 내려왔다.
내가 내려오자 부엌에 계시는 요리사분들이 '식사 드릴까요?' 하고 물어봤지만
내가 해맑게 '아침밥 제가 만들려고요!' 하고 대답하자 요리사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내가 식탁에 열심히 만든 샌드위치와 수프를 올려놓았을 때 딱 맞춰 전정국이 씻은 머리를 털며 내려왔다.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 샌드위치를 하나씩 입에 물고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얼굴이 퉁퉁 부은 김석진이 잠옷 차림으로 터벅터벅 걸어와서 전정국 옆자리에 앉았다.
김석진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내가 만든 샌드위치에 손을 뻗었고, 내가 필사적으로 접시를 뺐어들었다.
"이거 전정국꺼거든?! 딱 2인분만 만들었단 말이야!!"
"임마 치사하게!!"
"맞아 나 치사하다. 그니깐 아주버님은 저기 요리사분들한테 만들어달라고 해"
"참나 됐어~ 나도 안먹고 싶거든?!
저기 요리사분들 전부 유학파 출신에 엄청난 엘리트 급 쉐프들이셔!!
그런 분들 냅두고 내가 너가 만든 음식을 먹을 것 같아?!
정국아, 너도 이런 초짜 음식 먹지 말고 저런 고급요리 먹어!!"
"난 이게 훨씬 좋은데"
야골리듯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말하는 전정국에 김석진이 쳇 하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입을 내밀고 관심 없는 척 하다가 또 후다닥 샌드위치 접시에 손을 잽싸게 뻗는 김석진이었고,
난 깜짝 놀라서 재빠르게 다시 접시를 낚아챘다.
1초 전까지 자기 입으로 초짜 음식이라고 말해놓고 내 샌드위치에 욕심을 부리는 김석진이 어이가 없었다.
또 한 번 접시 뺏기에 실패하자 김석진이 손을 들고 쩌렁쩌렁 큰소리로 외쳤다.
"쉐에프!! 여기 아침으로 만찬을 차려주세요!!! 스테이크!! 스파게티!! 전부다!!"
김석진은 또 삐져서 입을 삐쭉삐쭉 거렸고, 그런 김석진이 너무 웃겨서 나와 전정국은 한참을 웃었다.
김석진 덕분에 오늘 하루를 웃으며 시작할 수 있었다. 김석진과 함께라면 매일매일이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석진이 주문한 거창한 요리들이 나왔고, 아침부터 저런 엄청난 양을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김돼진이라는 별명답게 김석진은 보란 듯이 전부 해치웠다.
나와 전정국이 박수를 쳤고 김석진은 자랑스럽게 손키스를 날렸다.
그러다가 김석진이 아 맞다, 하며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아 맞다, 나 오늘 오디션 보러가."
"응? 그럼 오늘 집에 같이 못있어?"
"응. 오늘은 잠깐 나갔다와야할 것 같아."
"형이 계속 탄소랑 집에 있어준다고 약속했잖아."
"걱정하지마. 내가 내 대타 장치를 구해놨으니깐~"
걱정하지 말라는 김석진에 나와 전정국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전정국도 출근 준비를 해야했고, 나도 수업 들을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식탁에서 일어났다.
전정국이 김석진이 없을 이 집에서의 나를 계속 걱정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그런 전정국을 잘 달래었다.
시간이 돼서 전정국은 양복을 차려입고 출근했고, 김석진도 오디션을 본다고 나가버렸다.
곧 시작될 일정들에, 그리고 곧 마주칠 어머님에 잔뜩 긴장한 채 거실에 앉아있었다.
전정국도 김석진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겐 참 허전하고 공허하게 느껴져 시무룩해있을 때
김석진이 구해놓았다던 대타 장치가 도착했다.
띵동-
갑작스레 울리는 벨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정부 아주머니께서 현관문으로 향했고, 나도 호기심에 따라나섰다.
문이 열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예쁜 음색이 날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탄소 친구 박지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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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감
몇시간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인티가 갑자기 점검중이라고ㅠㅠㅠㅠ
자고 일어나서 올리려고 했는데 잠이 안와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왔습니다!!
이렇게 새벽에 오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주무시나요오?
저번 화에서 질문드렸었던 이유는 누구를 다시 재출현시켜야할지 고민이어서 여쭤봤던건데
독자님들이 모든 등장인물을 좋아해주셔서 혼자 감동받았어요ㅠㅠㅜ♥
그래서 이번화는 석진이와 지민이이 재등장 빠밤
항상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