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왜요.”
“꽃 볼래?”
숙소 건물 앞 훈련장에서 선수와 선수 간의 훈련, 코치와 선수 간의 훈련이 개인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을 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인 훈련 시에는 거의 짝이 되어 함께 훈련하는 오세훈과 가볍게 뛰며 구장을 돌고 있던 와중에 오세훈은 구장 옆 주차장 입구 쪽에 무수히 피어난 코스모스 쪽으로 이탈했다. 구장과 주차장 입구가 거의 붙어있어 이탈한 모양새가 크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진 않았지만 오세훈은 굳이 나와 함께 코스모스에게 다가갔다. 옅은 바람에 여유로이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다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오세훈의 등판을 보며 꺾지 마, 말하려는 참에 오세훈은 기어코 수많은 코스모스 사이에서 제 눈에 보이는 나름 가장 예쁘게 생긴 하얀 코스모스를 꺾어버렸다.
“야, 빨리 끝내. 감독님이 보신다.”
“기다려봐.”
오세훈은 그 뒤로도 신중히 코스모스 서너 송이를 크기별로 골라 대충 한 손으로 잡아채듯 꺾은 뒤 무릎을 펴 일어나서는 내게 건넸다.
“가져?”
나는 그것을 마냥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은 조금 구겨진 채.
“그럼.”
“왜 쓸데없이 꺾고 그래.”
훈련을 어지간히 하기 싫었나 보다, 생각한 내가 헛웃음을 치며 오세훈에게서 등을 돌리자 오세훈은 내 뒤에서 급히 내 오른손에 코스모스 송이들을 쥐여주었다. 그 손길에 다시 구장으로 향하던 내가 고개를 돌려 어느새 제 옆으로 온 오세훈과 눈을 마주하며 다시 가져가, 말했을 때 오세훈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누나 말고 하늘이 누나한테 전해주라고,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참다못해 코웃음을 쳤다. 꺾여진 코스모스 줄기들이 힘을 주는 내 손안에서 더욱 밀착했다. 그리고 오세훈은 고강도의 훈련을 진행했다. 갑자기 훈련의 강도가 올라간 것에 대해 나는 절대 코스모스 때문이 아닌 우연이라 말했고, 또 그렇게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웬 꽃?”
훈련 뒤 내 방 앞 복도에서 하늘은 내가 건넨 코스모스를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도저히 손으로 받을 생각을 않는 하늘에게 나는 괜히 코스모스를 한 번 더 들이밀었다.
“오세훈이 너 가지래.”
그럼 받을게. 꽃 선물을 받으면 일단은 좋아하고 보는 전형적인 여자답게 하늘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코스모스 여러 송이를 가져가려 할 참이었다. 샤워를 마친 뒤 말리다 만 머리에, 목에 대충 두른 수건에, 슬리퍼는 질질 끌며 걷다시피 뛰어온 오세훈은 곧 하늘에게로 갈 내 손의 코스모스 송이들을 확 잡아챘다. 뭐야, 내 한마디와 함께 하늘과 나의 시선은 동시에 오세훈을 향했다.
“이걸 또 주고 있어요.”
“전해달라며.”
그냥 누나 놀린 거잖아.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헝클이며 말한 오세훈은 상황 파악을 못해 연신 눈만 껌벅이는 하늘에게 쏘리, 말하며 눈웃음을 살짝 쳐주고는 숙소 복도에 하늘을 그대로 버려둔 채 나를 데리고는 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야, 여기 내 방이야. 놀란 눈으로 말하는 내게 오세훈은 제 손에 쥐고 있던 코스모스 송이들을 다시 건넸다.
“방 존나 칙칙해.”
이럴 줄 알았어, 꽃 필요할 줄 알았다고. 내가 존나 예쁜 것만 골랐다니까. 잔소리하듯 내게 말한 뒤 내 화장대 위에 코스모스를 던지듯 올려놓은 오세훈은 가요, 하며 간단히 덧붙이고는 곧장 내 방에서 빠르게 나갔다.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온 것도 아니고, 나 그런 거 안 좋아해, 하며 후에 식당에서 만난 오세훈에게 말했을 때 오세훈은 그럼 다시 주던가,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이미 버렸다고 답했지만 코스모스 송이들은 내 방 화장대 위 급히 가로로 자른 뒤 물로 채운 투명한 페트병 안에 들어가 있었다. 금방 시들어버릴 코스모스는 잠시 내게 머무는 것이었다. 그래서 출국 당일 짐을 빼기 직전 확인 차 또다시 내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방문한 오세훈은 내게 잠시 머물렀던 코스모스를 볼 수 없었다.
여코치 신드롬
3차전
* * *
결혼은 어떤 여자와.
착하고 솔직한 여자. 미래 아내에겐 비즈니스도 뭣도 아닌 내가 최우선이었음 한다.
월간 잡지 SUPERB 13' 5月. p58, 김종인.
A팀과 B팀은 같은 연합팀 소속이기에 출정식을 함께 치렀다. 우선 A팀이 소개되고, 그다음 B팀이 소개되었으며 경기장 내부 사회자에 의해 A팀과 B팀의 감독만이 간단한 포부를 밝혔다. 선수들과 감독 그리고 대표 코치진이 잔디 위에 둥글게 서 있었으며 경기장의 하나뿐인 조명은 그들만을 비췄다. 대표 코치진으로 잔디 위에 서 있던 내가 컴컴한 관중석을 바라보면 보이는 건 오로지 간간이 터지는 플래시 뿐이었다. 더군다나 길어지는 축사에 슬슬 정신이 몽롱하여 피곤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닌 내 옆의 우이판과 김종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서로를 깨우려 대놓고 서로의 몸에 터치를 하다간 언론이 무슨 장난을 칠지 모르기에 발이나 팔의 미동으로 우연히 옆 사람을 터치한 것처럼 굴곤 했다. 그리도 지루하던 축사가 끝난 뒤에는 유명 걸그룹의 축하 공연과 대형 태극기를 선수단과 코치진이 함께 들고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출정식이 마무리되었다. 출정식이 끝나고 회식 장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선수들은 밀려오는 노곤함에 아무런 말도 없이 짧은 잠에 빠졌다.
답이 꽤 구체적이다.
깊이 만난 사람이 있었다.
월간 잡지 SUPERB 13' 5月. p58, 김종인.
나를 제외한 코치진의 걱정과는 달리 출정식 뒤 A팀과 B팀이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도 두 팀 선수들 사이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A팀과 B팀 선수들이 대화조차 하지 못하도록 제지해왔던 코치진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회식 뒤 숙소로 복귀하여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먹은 건지 눈치를 먹은 건지 모르겠다며 내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다른 코치진에게는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에게만 투덜거렸다.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면 나는 그러한 선수들의 불만에 적극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깊었다면 미련이 많았겠다.
물론.
월간 잡지 SUPERB 13' 5月. p58, 김종인.
출정식까지, 출국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의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대표팀이 해야 할 남은 일은 고강도 훈련뿐이었다. 소집도 한 달이 다 되어가고, 그 시간 동안 숙소에서의 무단이탈은 금지되었기에 지칠 대로 지친 선수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일대일 상담을 준비했지만 문제는 선수들의 심신을 달래줄 상담자가 굳이 나인 것이었다. 선수들과 코치진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내가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다고 했다. 결국 강제로 내가 준비한 상담은 상담이 아닌 사담에 불과했지만 그 덕에 나는 선수들과 더 큰 친밀감과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불과 소집 초기에는 이것저것 불만이 가득했던 내가 되려 다른 코치진에게 상담을 맡게 해주어 고맙다는 뜻을 표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월간 잡지 SUPERB 13' 5月. p58, 김종인.
김종인과의 상담도 거뜬히 끝낼 수 있는 면역력을 가졌다는 것도 그간 발생한 나의 변화로 볼 수 있겠다. 김종인에게 다른 선수들을 대하는 것과 완전히 동등하게 대할 순 없지만 적어도 김종인을 특별한 존재로 보진 않는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내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제발 그러지 말자고 내 나름의 성찰을 겪은 매일 밤도 내가 김종인을 보편화시킬 수 있었던 동기에 영향을 끼쳤다. 자신을 피해 다니지 않으며 어떠한 질문도 덤덤하게 받아치는 내 모습에 김종인은 의문을 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싫을 것은 없었으니까.
지금 굉장히 솔직하다.
거짓말은 정말 싫어한다.
월간 잡지 SUPERB 13' 5月. p58, 김종인.
* * *
프랑스는 최종 훈련지 및 대회 개최지. 그곳으로 향하기 전 연합팀 코치진이 선택한 전지 훈련지는 단연 스페인이었다. 출국을 위해 도착한 공항에는 소집 첫날과 다를 바 없는 인파가 몰렸는데, 그래도 다를 바가 있었다면 그보다 더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선수들과 감독 및 코치진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는 것뿐이었다. 엄청난 양의 짐을 등록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이었음 좋았을 텐데, 연합팀 이동의 공식 절차라도 되는 양 출국 전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소집 첫날 기자회견, 대회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며 숙소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끝도 없이 인터뷰를 포함해 숙소 생활을 촬영했던 방송국 처자들, 경기장 조명 아래 짧게 인터뷰를 진행한 출정식……. 허구한 날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각오를 밝힌 것을 취재진은 그날그날 기억에서 삭제한 것처럼 언제나 연합팀을 따라와 각오를 묻는 인터뷰를 청하곤 했다.
“저희는 목표가 있으니까. 힘차게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공항 한쪽에 마련된 단상에는 선수단과 감독이 두어 줄로 정렬된 의자에 앉아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코치진과 지원스태프들은 모두 단상 옆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자꾸만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며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 문 코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나를 단상 위에서 맨 뒷줄, 그리고 가장 끝 부분에 앉은 김종대가 팔을 내려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터지는 플래시 속 김종대가 작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는데, 그 손길에 조심스레 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더니 김종대는 그 와중에 자신의 입술이 건조하다며 내게 입술 보호제를 달라 부탁했다. 한 손엔 커피, 한 손엔 선수들이 제게 맡긴 재킷을 쥐고 있어 스스로 주머니에 있는 입술 보호제를 꺼낼 수 없던 나는 김종대에게 직접 꺼내 가라 말했다. 김종대는 아무렇지 않게 내 주머니로 팔을 뻗어 입술 보호제를 손에 쥐었지만 내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명색이 기자회견인데, 아무리 빛도 없는 뒷자리라지만 조금 불안을 느낀 내가 김종대에게 아직도 못 찾았냐며, 손이 너무 오래 있는 것 같다 말했을 때 김종대는 날이 추워서 손이 시리다며 이제 막 가을을 맞이하는 날씨와는 맞지 않는 대답을 했다.
“스페인에서 에이팀, 비팀 간 미니게임 같은 것도 진행한다 들었어요. 각오 한마디만.”
기자회견도 끝나고, 공항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끝에 드디어 출국을 위해 안내판을 보며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빠르게 옮기면 기자들은 그새 따라와 코치진과 선수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중에서도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던 기자에 나는 게이트로 들어가기 직전 자리에 멈춰 서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인터뷰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약 하더라도 특유의 까칠한 투가 나와버릴 게 뻔한 내가, 마지막 발버둥이라 생각하며 비행기 시간 늦어서요, 말했을 때 기자는 아직 시간 남은 거 알아요, 하며 차분히 내 발버둥을 무시했다.
“첫 경기 선발팀 결정에 중요한 요소가 될 확률이 크기 때문에, 가서도 훈련 열심히 하고…… 네.”
짧게 얼버무리며 대답하고는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는 내 발목을 또 다른 기자가 다가와 잡았다. 남자 대표팀 생활이 불편할 텐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는 기자의 말에 대답한 뒤 게이트로 들어가려 하면, 또 다른 기자가 와서 내게 다른 질문을 던졌고, 그것에 또 대답하면 또 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지는 식을 반복하여 졸지에 내 주위로 기자들이 전부 몰렸다. 심지어 카메라까지 등장해 기어이 내 입안의 침을 마르게 했고, 내 두 손을 단정히 겹쳐 배꼽 위로 올려두게 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무엇부터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서 있었고, 게이트 앞으로 다가온 선수들은 내가 이런 상태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인터뷰 하나보다, 생각하고는 제각각 게이트로 들어갔다.
“저희 늦었습니다. 가볼게요.” 한 사람만 빼고.
게이트 앞으로 다가와 환히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단호한 말로 인터뷰를 중지시키고는 기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변백현은 등을 돌려 배꼽 부근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내 두 손을 보고 살짝 비웃는 것을 빠뜨리지 않고 내 두 손을 한 손으로 잡아 게이트 안으로 나를 친히 모셔왔다. 진심 바보 같다, 말하는 변백현의 등을 토닥이는 손과는 달리 사색이 된 얼굴로 땡큐, 말한 나는 터덜터덜 겉옷을 벗으며 검색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독일 생활 괜찮아요?
괜찮아요. 언어만 어떻게 좀 하면 될 것 같아요.
12' 10月. C사 특집 다큐《Rookie of the Freiburg, ○○○》中
김종인이 분데스리가, 즉 독일리그로 이적한 것은 2년 전.
내가 독일리그로 이적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파워풀한 스트라이커, 게다가 화려한 테크닉의 소유자로서 국내리그를 휩쓴 그는 수시로 대표팀에 발탁되어 국민 스트라이커로 거듭났고, 그 실력을 인정한 다양한 해외리그로부터 엄청난 러브콜이 쏟아졌다. 국내뿐만이 아닌 외신들조차 김종인의 행보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김종인은 결국 분데스리가를 택했고, 그중에서도 하노버 96을 택했다. 계약 조건이 가장 만족스럽고, 출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합이나 훈련 없을 때 뭐해요?
언니들이랑 구경 나가고 그래요. 개인적으로 운동하거나.
12' 10月. C사 특집 다큐《Rookie of the Freiburg, ○○○》中
하지만 내가 독일리그로 이적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종인의 독일행은 과연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뛰는 남자 한국 선수들 꽤 있는데. 안 만나요?
거리가 멀어서 거의 못 만나요. 시즌 끝나면 자주 만나기로 했어요.
12' 10月. ‘C’ 사 특집 다큐《Rookie of the Freiburg, ○○○》中
아무도 나와 김종인의 사이를 몰랐다.
각각 선수들 어때요?
아직 독일에서 만나본 선수가 종인이밖에 없어서. 평소 선수들은 그냥…… 다들 성격도 유쾌하고 또 열심히 하고. 좋아요.
12' 10月. C사 특집 다큐《Rookie of the Freiburg, ○○○》中
한국에서 독일까지. 길고 드넓은 사랑을 이어가던 나와 김종인은 주로 마슈공원을 찾았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하노버까지. 내가 김종인에게 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걷는 것을 참 좋아해서 손을 맞잡는 시간이 많았지만, 손이 떨어지면 다시 맞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것은 주로 리그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였지만, 나와 김종인이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리그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손을 놓은 것이 아니었고,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나도 김종인도 기다리지 않았다. 2013년 3월. 내가 김종인을 불편하게 여길 나날들의 시작이었다.
* * *
스페인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사흘째. 저녁 훈련 시간에는 A팀과 B팀 간의 작은 경기를 펼쳤다. 허나 B팀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무서운 기세를 몰아 A팀을 벼랑 끝까지 밀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B팀 선수들과는 달리 A팀 선수들은 적응을 못한 건지 대부분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스페인에서의 훈련은 줄곧 너무나도 힘들어서, 한국에서 꽤 괜찮았던 팀 분위기는 타지에서 비참하게 망가지고야 말았다. 선수들과 코치진이 모두 속에 화를 쌓아가며 인내하고 있었지만 결국 터져버린 것은 바로 이때. B팀에게 A팀이 크게 패했을 때였다. 비참하기 그지없는 패배를 안고 미리 버스 안에 앉아 기다리던 선수들. 그동안 갖가지 장비를 다 챙긴 뒤 버스 밑에서 나를 포함한 코치진과 감독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컨디션 조절 하나 못하는 새끼들이 어딜 나가보겠다고 기어들어와.”
그리고 버스에 올라탔을 때. 숙소로 향할 준비가 모두 끝났음에도 A팀이 탑승한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다. B팀의 신이 난 버스는 떠난 지 오래, 훈련장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A팀 버스 안에서 감독의 언성이 높아진 지도 오래였다. 초기의 감독은 분명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아마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그러했을 것이다.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 스스로 자신에게 답답한 것이 분명하다. 기가 죽어있는 선수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머리를 넘기며 자리에 착석한 감독의 행동을 끝으로, 버스는 그제야 출발했다. 한국에서 한 달간의 상담을 맡아왔던 여파인지, 나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보는 창밖이 어지러워 눈을 감고 머리를 굴리며 이 끔찍한 상황의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다녔다.
「 얘기할 애들. 씻고 미팅 방. 」
pm 10:22, 스페인
발신 문자입니다.
그리하여 찾은 조그마한 해결책으로 나는 숙소에 도착해 한 명도 빠짐없는 선수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장이씽에게 되도 않는 핑계들을 읊어가며 미팅용 객실 카드를 받아 미팅 방에 먼저 가서는 불을 켜놓은 채 올지 안 올지 모를 선수들을 기다리며 나는 나 스스로 이러한 자발적인 행동까지 취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참 웃겼다. 예상치 못한 제의가 들어왔을 때의 당황스러운 마음과, 김종인을 절대 견디지 못할 거라는 두려운 마음, 누군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성향에 맞지 않는 의무, 그래서 애초에 챙겨 오지 않았던 의욕까지. 이때의 내가 지금까지 줄곧 갖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코치가 아닌 나를 다 버렸다.
“감독님이 그렇게, 말을 막, 그렇게 하신 적이 처음이니까.”
“니들도 이런 적 처음이잖아.”
몇몇 선수들이 미팅용 객실로 족족 모여들었다. 워낙 빡빡한 일정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내 문자를 받았어도 마냥 오진 않을 것 같았던 선수들이 미팅 방을 채우자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여섯 명의 선수들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차분한 투로─선수들에겐 냉정한 투였지만 내 나름─선수들을 달래고 있었다. 제발 휴식 시간에는 게임을 하는 것보단─축구 시뮬레이션 게임 제외─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독서 시간을 가지라 얘기했고, 훈련 시간에 잔디 밖 코스모스를 꺾는다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제발 접으라 말했으며─유독 오세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인터넷을 연결해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는 일은 특히나 없도록 하라 이야기했다.
“언니. 큰일 났어.”
잔잔한 전등 빛에, 피곤한 선수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나른하고 다정한 내 목소리─나만 내 목소리를 이리 표현했다─가 더해져 한창 미팅 방의 분위기가 훈훈해졌을 때 하늘이 미팅용 객실의 문을 급히 열며 나를 불렀다. 선수들의 시선이 하늘에게 몰리고, 왜? 고개를 돌려 묻는 내게 하늘은 울상을 짓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하늘은 엘리베이터도 아닌 비상계단을 이용해 빠르게 내려갔고 나 역시 하늘을 따라 일단 따라가곤 했는데, 그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던 건 미팅 방에 함께 있던 선수들도 모두 나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쟤네 뭐야?”
지나가다가 싸움 붙었나 봐. 하늘의 말에 나는 서로의 멱살을 쥐고 우리 지금 싸워요, 자랑하듯 조용한 호텔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선수 두 명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봐서는 그 두 명이 누군지 신원 파악이 안 됐지만 그들 주위에 B팀 선수들과 A팀 선수들이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A팀 선수 한 명과 B팀 선수 한 명이라 짐작했다. 하늘은 나를 따라오며 자신이 이 상황의 최초 목격자라 설명했다. 둘은 복도에서 마주쳤고, 오늘 경기에서 이긴 B팀 선수가 A팀 선수와 지나치다 갑작스레 호텔 복도가 떠나가라 크게 웃어 재꼈다고 했다. 누가 봐도 자신의 팀을 무시하는 행위에 화가 치밀어 오른 A팀 선수는 B팀 선수를 잡아 B팀을 깎아내렸고, A팀 선수의 말에 B팀 선수마저 화가 올라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비켜봐.”
시비가 붙은 두 선수를 보기 위해 두 선수를 둘러싼 다른 선수들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치며 지나쳤을 때 B팀 선수는 누군지 몰라도 A팀 선수는 김준면임을 확인했다. 나는 선수들에게 비키라 손짓하고는 눈에서 불이 타오를 정도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선수에게 다가가 두 선수의 어깨를 양 사이드로 밀어내었다─잘 안 밀려나서 발로 다리를 밀어낸 것이 사실이다─온갖 얼굴을 굳힌 채 김준면에게 미쳤냐는 말을 시작으로 온갖 욕을 내뱉자 그것을 지켜보던 B팀 선수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비웃었다. 꽤 컸던 그 웃음소리에 나는 눈만 돌려 B팀 선수를 바라봤다.
“야, 준면아. 니 의리는 쩔어도 니 코치는 그게 아닌가 봐, 어?”
그때 비꼬아 내뱉은 B팀 선수의 말에 나는 우연히 손에 들고 있던 ‘컨디션 조절용’ 책, 그니까, 미팅 방에서 선수들에게 나눠주던 책으로 B팀 선수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니 컨디션은 쩔어도 도저히 조절이 안 되는 니 입은 그게 아닌가 보다, 새끼야. 살살 들어가라.”
선수들이 오, 하며 웃었지만 정작 B팀 선수는 안 가고 버티다 니네 팀 감독님 어디 계시냐, 묻는 내 말에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겨 이 난리 난 복도를 벗어났다. 구경나왔던 B팀 선수들마저 각자의 방으로 해산하고, 나는 B팀 선수의 머리를 내리친 책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둥글게 문질러 닦았다. 티 내진 않았지만 기분 참 드럽고 찝찝했다. 남은 A팀 선수들은 코치님 쩐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과는 일맥상통하지 않는 그 손길에 표정을 굳혔더니 죄다 손을 내리고는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제 방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나를 쳐다보던 김종인도 바람 빠진 웃음을 짓다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까딱이며 선수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헛기침을 연신 내뱉으며 서 있던 김준면은, 내가 미팅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하여 물오른 내 설교에 한창이나 미팅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 * *
“김종인 되냐고, 안 되냐고.”
“종인이 무릎 안 될 것 같아요. 종인이 훈련 빠집니다.”
피지컬 코치가 두 팔을 교차시켜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자 훈련장 위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훈련장 구석에 드러누운 김종인은 눈을 감아 이마에 팔을 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릎에 얼음팩을 두르는 코치의 손길이 간간이 무릎을 자극할 때마다 김종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신음을 내뱉었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선수들에게 형광색 조끼를 나눠주는 손과는 달리 내 시선은 김종인에게로 향했다. 테이핑을 끝으로 얼음팩 고정이 끝나자 김종인은 두 명의 스태프에게 부축을 받으며 급히 훈련장을 벗어나 먼저 숙소로 출발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종인에게 향하던 내 시선이 갈 곳 잃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른 선수들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그냥 미약한 거니까, 하루 정도면 낫는 거고.”
“심한 건 아니네.”
“쌓이면 심해진다. 종인, 다리 스트레칭 알지.”
예. 조심하라 경고하는 피지컬 코치의 말에 김종인은 피곤한 얼굴로 제 방 침대 위에 누워 다리를 들어 무릎을 굽히고 펴길 반복하며 대답했다. 그것을 잡아 도와주던 피지컬 코치는 얼떨결에 이곳까지 따라오게 된 내게 그 자리를 넘겨주며 김종인의 방을 벗어났다. 그 자리에서 말없이 김종인의 오른쪽 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 무릎의 운동을 도와주던 내게 김종인은 안 가냐 물었다. 아까부터 김종인은 안 가냐는 말을 내게 했다. 피지컬 코치가 나갈 때 함께 나가려던 나는 그럴 때마다 김종인에게 갈 거라고, 말하고는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내게 김종인의 무릎을 맡기고 떠난 피지컬 코치를 따라 나설 수가 없게 된 나는 내게 묻는 그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무릎으로 눈길을 돌려 계속해서 성심성의껏 김종인의 무릎 재활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김종인은 또다시 내게 물어왔다.
“안 가냐고.”
“가길 바라는 것 같다.”
“요즘은 잘 안 피하길래.”
“불편한 건 똑같아.”
예쁜 것도 똑같고. 김종인의 말에 나는 결국 김종인의 무릎을 천천히 내려놓은 뒤 의자 등받이에 걸쳐있던 재킷을 손에 쥔 채로 조금만 움직이다 곧장 자, 김종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말한 뒤 스탠드만 켜놓고는 스위치를 눌러 방 불을 껐다. 밝았던 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듯 스위치를 누른 내 손을 순식간에 잡아챈 김종인은 나를 제게 가까이 당겼다. 그 완력에 지지 않으려 바닥에 두 발을 붙이고 버텼던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 나는 김종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모양이 되어버렸다. 스탠드도 꺼둘 걸. 방이야 어둡지만 김종인을 비추는 스탠드 빛은 나와 김종인의 사이에서 유난히도 밝았다. 내려놔. 밝게 비추어진 피곤한 얼굴의 김종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내가 태연히 말했다. 김종인은 내 손을 조심스레 내려두고는 제 눈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나만 태연한 것인지, 김종인이 태연한 것인지 아님 둘 다 태연하지 못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나 김종인은 곧이어 태연하게 내게 말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자꾸 안 가냐고 물어본 건.”
“…….”
“자꾸 키스하고 싶어서 그랬어.”
“…….”
“키스하자.”
(나름 일찍 온 거)
지난 1~2 재업편에 찾아와주신
아이폰 / 뚜시뚜시 / 둠칫 / 바베큐 / 준짱맨 / 비타민 / 둉글둉글 / 하하핳 / 호두 / 오레오 / 칸쵸 / 치아 / 눈두덩 / 츄파츕스 / 하트 / 냐냐 / 우리쪼꼬미 / 쮸쀼쮸쀼 / 하이 / 요징 / 사댱님 / 크림치즈 / 북극곰 / 뱀 / 길라잡이 / 핫초코 / 복숭 / 이리오세훈 / 치즈 / 웨하스 / 인수니 님! 감사드립니다♡
암호닉은 코디 때 썼던 암호닉 그대로 사용하셔도 되고 그 외 독자님들께서는 새로 신청하셔도 되어요!
여러분 저는
고집이 강하며 섬세해요
게다가 숨겨놓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지문이 길다 보니 여러분이 놓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요
최대한 쉽게 쓰도록 노력할 테니
차근차근 읽어주세요 ㅠ.ㅠ!
그리고 저는 댓글 등수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요!!!! 와주시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두어요
정 신경 쓰인다면 선댓해 주셔도 괜찮아요ㅎㅅㅎ
오늘도 기다려주신 여러분께 여러모로 감사드리며 오늘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