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지민아?"
국가의 가장 큰 골칫거리, 암살자assassin의 상징인 검정 복면과 흔하지 않은 검정 가죽 옷을 입은 남자와
"‥경어 좀 써. 일단은 나 왕족이거든?"
이 나라의 왕의 형의 아들이자 '피의 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남자가 왜, 같이 있는 거지?
제 1화 황녀의 시녀, 황녀가 되다.
남자 둘은 뒤따라 들어오려는 복면 쓴 남자들을 내보냈다. 닫히기 직전 본 문틈 사이에는 나무를 하러 갔던 기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암살자들의 압승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남자 둘과 나, 그리고 황녀의 시체만이 공간에 자리했다. 왕족의 상징이라는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남자가 내게 물었다. 너, 뭐야? 아니, 김태형 네가 꽂아둔 애 아니지?
복면 쓴 남자의 이름은 김태형인듯 했다. 남자는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댄 내 모습을 위 아래로 훑었다.
"설마, 내가 꽂아둔 애가 날 보고 목에서 단검을 박으려는 시늉도 하면 안 되지. 다시 돌아오면 죽기 직전까지 맞을 텐데. 근데 진짜 이상하네, 너 얘 왜 죽였냐?"
"어차피 당신들도 이 년 죽이러 온 거잖아. 내가 대신 죽여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왕족이 뒤로 몸을 눕히며 웃었다. 태형아, 얘 봐. 황녀 보고 이 년이래. 얘 진짜 뭐 될 거 같아. 사람을 죽여본 것도 처음, 암살자를 만나는 것도 처음, 왕족을 만나는 것만이 익숙했다. 하지만 이 왕족은 달랐다. 내가 아는, 그 사람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왕족. 내가 가장 싫어하는 왕족의 느낌이 가득했다.
암살자는 왕족의 말을 무시하고 내게 다가와 단숨에 단검을 빼앗았다. 야, 이런 걸 함부로 다루면 안돼. 덕분에 지금 네 인생 제대로 꼬였어. 알아? 그리고 네가 잘못 아는 게 있는데.
"우린 이 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청혼하러 온 거야. 지금 너 때문에 다 망한 거고. 알겠어?"
분명 외부에 황녀가 살아있다는 말은 소문으로도 돌지 않았을 터.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황녀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고개만 갸웃거리자 왕족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왕이 죽었어. 나는 왕위 쟁탈전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 직계 자손이 아니니까. 이미 3명의 왕자 만으로도 혈투가 벌어질 게 뻔한데 자격도 없는 내가 쟁탈전에 참여 했다가는 바로 숙청 당할 게 뻔하지. 하지만 내가 황녀와 결혼 한다면?"
등 뒤로 벼락이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그는 황녀와 결혼함으로써 왕위 쟁탈전에 참여할 권한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왕이 되기 위해서. 그는 조용히 내 눈을 바라봤다. 왕족의 혈통 답게 그는 사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예전에 아직 우리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을 때 왕족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제 1왕자 김석진은 똑똑하고 현명하기가 왕과 가장 흡사하나 그는 사람을 볼 줄 모르며 야망도 없고, 무엇보다 왕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흑발이며.
제 2왕자 민윤기는 왕족의 상징인 금발을 물려 받을 뿐 아니라 꾀가 많고 용맹하나 어릴 적 황제로부터 버려진 탓에 황제에 대한 반발이 커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야생마 와도 같고
제 3왕자 전정국은 금발도, 흑발도 아닌 머리 색을 가졌지만 제 1왕자, 제 2왕자와는 다르게 가장 왕을 잘 따랐으며 무엇보다 야망이 가장 크다고.
그리고 마지막, 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윤기와 같은 금발을 가졌으며 만약 지금의 왕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면 필시 왕세자로 단숨에 책봉되었을 거라는
박지민. 왕세자가 되어 왕위에 무사히 올랐다면 천하를 쥘 인물이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불운한 운명이라는 남자.
박지민은 내 머리에 자리한 모자를 벗기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궁에서 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다. 어떡할래, 네가 황녀가 되어 나와 결혼 할래?
황녀는 민윤기와 박지민과 같은 금발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도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