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원 x 장동우 뱀파이어 x 뱀파이어 내 연인이 더는 힘들지 않기를 바라며_
그대로 흘려 보내기에는 아까운 시간, 사내 점심시간은 사내에서 유일하게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호원과 동우를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둔다. 제 집 개한테 일러주듯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 따위의 인사를 던지던 팀장 덕에 신경이 바짝 예민해진 호원이 자리에 앉은 그대로 서류철을 펼쳐 자료들을 훑었다. 남들 다 식사하러 간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봐야 한다니. 좀, 불공평한거 아닌가.
“요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평소답지 않게 축 늘어지는 몸이 동우는 달갑지 않았다. 아까 그 한대리 때문에 제 상태가 이런건가. 제 어깨를 뭉근하게 주무르다 무심결에 내다 본 바깥 하늘이 우중충했다. 어둡다. 그대로 시선을 옮겨 시간을 확인 해봤지만 역시나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점심타임이다. 햇볕이 잘 들던 창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11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심 풍경이 동우를 반긴다.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 사이에 끼워진 도로.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내달리는 자동차들. 벌써 몇 년째 보는 풍경이지만 이상하리만치 낯설다. 전쟁이 끝나고 잠들어 있던 50년 동안 고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감성적인 제 모습을 떨쳐보고자 큰 숨을 들이켜보지만 꽉 막힌 가슴속이 숨을 받아 들이질 않는다. 숨이 들어가질 않으니 번들거리는 입술 안쪽도 말라붙지 않고 여전하다. 동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드나드는 길이 좁아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슴속이 조여지는 듯한 갑갑함이 생각을 잃게 만들었다. 제 가슴깨를 쥔 동우가 또 한 번 숨을 머금자 그제서야 숨길이 탁 트였다. 동우의 머릿속이 돌연 무거워졌다. 찰나였지만 제 안에 머물러있던 그 느낌은 아직도 선명하다. 두 번은 겪기 싫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몸에 이상이 있나…, 나중에 연구소에 가서 검사해볼까. 동우가 고개를 돌려 호원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호원은 당장 뭐라도 씹어먹을 듯한 얼굴로 서류만 뚫어져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진 동우가 호원의 자리 옆까지 종종 걸어왔지만 어쩐지 호원은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호야!”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호원의 책상에 턱을 괸 채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동우가 살살 채근했다. 점심시간이야. 일은 그만하구… 응?
“아까 우리가 자리 비우는 바람에 일 밀렸어요.”
“호야.”
“야근 안 하려면 빨리 끝내야지.”
“…자기야.”
“나도 놀아주고 싶어요.”
“여보….”
호원이 순간적으로 들고 있던 펜과 서류철을 놓더니 그대로 동우의 뒷통수를 부드럽게 움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까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니, 리드하는 호원 쪽은 꾹꾹 눌러 담아왔던 무언가를 쏟아내듯 굉장히 성급해보이긴 했어도 맞물린 입술은 늘상 그래왔듯이 달콤했다. 서로를 집어삼킬 듯 짓이겨지는 말캉한 것들. 쪽, 하는 자극적인 소리를 내며 떨어진 두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불순한 생각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동우의 아랫입술을 티슈로 살짝 눌러 닦아내던 호원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요.” “……?”
“넌 진짜 여우야.”
“…어, 어…?”
“자기야, 하는거 간신히 참았더니 여보라고 해?”
“히….”
“사무실이고 뭐고 그대로 바닥에 눕혀버릴 뻔 했어요.”
“그랬어? …잘 참았어!”
세상 만사 제쳐둔 듯 편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동우를 보던 호원의 잇새에서도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요? 호원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니가 좋아서. 깜짝할 새에 지나간 동우의 말 때문인지 입가에 기분좋은 웃음이 걸린 호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바로 옆자리 동우의 의자를 제 옆자리까지 끌고 온 호원은 의자 위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여기 앉아 있어요. 거기 그렇게 쪼그려 앉아 있지 말고.
Vampire City “형이 오늘 기운없어 보이는 게 설마 한대리 때문인가?” “응?”
“뭐… 어찌 됐건…, 사람들한테 너무 마음 주지 마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덮여버린 파일더미가 입이 벌어질 만큼의 두께를 자랑했고, 곧 그것은 호원으로 인해 옆 테이블로 옮겨졌다. 다시금 동우를 향해 돌아선 호원의 눈빛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저 마음 여린 장동우가 혹여나 한대리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호원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아무리 괘씸했어도 동우 앞에서 보란듯이 한대리에게 그런 얘기를 꺼내는게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한대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 호원은 제 연인인 동우까지 깎아내린 셈이었다. 적어도 동우는 한대리를 신뢰하고 따랐으니까 말이다. 제가 동우를 정말로 위하고 생각했다면, 참아야 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빌지 않으면 안된다. 동우는 마음에 있어선 누구보다 약한 사람이기에 당부해둬야 한다.
“경계심 낮추면 잡아 먹히는 세상인거 알잖아요.”
“…….”
“조금 전에 나한테도 먹힐 뻔 했고.”
“…야…!”
“너무 착하게만 구니까 밑보이고 표적이 되죠. 게다가 형은 생전 거절하는 법도 모르니까….”
“알았으니까 자기 하던 일 마저 해.”
그 이상은 더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 말꼬리를 싹둑 잘라 먹은 동우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두 번째 파일 뭉치를 제 책상에 가져온 호원이 그런 동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목에 걸려있던 말을 끄집어냈다.
“약 말이에요… 새로 처방 받아올까? 아니, 차라리 연구소에서 형한테 딱 맞는 약을 따로 개발해달라고 하자. 형은 엘리트니까 가능할거야. 정부에서 지원도 해줄테고.”
“…갑자기 약은 왜 새로 받으려고 그래?”
“형은 피에 반응하는 게 남들과는 확실히 달라요. 핀트가 아예 나가버리는 경우도 그렇고… 그 상태에서 약 먹어봤자 별 효과도 안 나타나니까….”
“음, 그건 내 탓이지 약 탓은 아니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 동우를 더 설득하려는 건지 호원은 동우 앞으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그렇죠, 약 탓은 아니죠.
“내 말은, 형한테 맞는 약을 찾자 이거에요. 다른 뱀파이어들은 그 약 먹으면 몇 시간도 버티는데 형은 그게 아니잖아요. 이름만 약이지 완전 무용지물인데….”
“그런데 약이 왜 나한테만 안 듣는걸까?”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던가, 약의 통제를 벗어났다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형이 자제력 잃으면 워낙 세잖아요.”
점점 차가워지는 제 손끝을 어루만지던 동우의 기억이 호원에 의해 또 한 번 깨어났다. 동우가 전쟁터에 다녀오기만 하면 베이스캠프에 머물러있던 사병들은 동우를 추앙하고 반겨왔다. 호원이 들려준 바로는 동우가 전쟁터에서 날마다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데, 정작 당사자인 동우는 본인이 전쟁터에서 무슨 짓을 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군대 안에서의 대우가 싫지는 않았지만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동우는 걸핏하면 이성이 나가버리는 저 자신이 두려웠다. 전쟁터에서 피냄새만 맡으면 속에 있는 무언가가 각성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정신을 차리면 제 입 안을 감도는 진하고 비릿한 피냄새가 늘 기다리고 있었다.
호원이는 봤겠지,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호야, 내가 그렇게 잘 싸웠어?”
“나 참… 당사자가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 그래도 살짝은…!”
“5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이 잘….”
“아아…….”
“잘 싸우기도 했지만…….”
“…….”
“…한 번 문 목덜미는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안 놓더라구요.”
“…내가?”
“네, 근데 난 그게 싫었어요. 장동우같지가 않았거든. 눈살은 잔뜩 찌푸리고 이까지 버득버득 갈면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미친 듯이 물고 다니잖아.”
오늘따라 핏기 없어 보이는 동우의 뺨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여차해서 깨어버릴까 차가운 손끝이 지나는 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굳은 듯한 동우의 입술을 제 입술로 지그시 머금고 떨어진 호원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내가 사랑하던 장동우가 아닌 것 같아서, 전쟁터인 것도 잊고 넋놓고 쳐다보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
“나는 그냥, 형이 더 이상 피냄새 맡고 미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건….”
“그러니까 나랑 연구소 가자.”
“…….”
“…약으로라도 버텨서 사람처럼 살자.”
지금. 우리 동우 약 지으러 갑니다. ... 근데 동우 어디 아픈가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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