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 누나랑 이렇게 나오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 같아요
탄소: 그랬나? (하품) 아, 실례... 잠이 덜 깼어...
태형: ...많이 피곤해요? 사실 어제 그거 아직도 안 괜찮은건데 나 때문에 괜히,
탄소: 어, 아냐 아냐~! 우리 태형이랑 신나고 즐겁게 보낼 오늘을 너무 기대하다가 잠을 설쳐서 그래, 어젠 아주 잠깐 현기증이 일어났을 뿐이야 공연 끝나고 긴장이 탁 풀려서, 뭔지 알지? 약간 그런 거 (이해 강요)
태형: 알긴 하는데...
탄소: 그리고 저녁을 먹기 전이라 배고파서 정신줄을 놓은 거지 그렇게 심각한 이유는 아니었어 언니랑 오빠랑 아주 비싼 밥 먹고 와서 이렇게 쌩쌩해진 거 보면 딱 알 수 있지 않아?
태형: 밥 한 끼 안 먹었다고 쓰러지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탄소: 미안 내가 좀 예외적인 사람이라서... 잠깐이라도 굶으면 쓰러지는 몸을 갖고 있어...
설과 민현이 데려가기 전만 해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탄소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오히려 팔팔해진 모습으로 내일 누나랑 나가자, 약속하니 마냥 받아들이면서도 내심 신경이 쓰이던 태형. 탄소가 그런 태형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죠. 맞잡은 손을 살짝 풀고 깍지를 끼며 앞장서니 금방 따라오는 걸음에 마냥 웃어줍니다.
되도록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벅찬가봐. 전엔 잘만 숨겼는데 이번엔 왜 흔들렸을까. 이제 한계가 오는 걸까. 언니가 제때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네 앞에서 어떤 모습까지 보이게 됐을까. 앞으로의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쓰러지는 걸 보는 사람이 너희는 아니길 바라. 결국 미쳐버린 정신에 모든 걸 놓아버려도 너희에게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주고 싶진 않아.
탄소: 그나저나 태형이가 통바지를 안 입으면 무척 특별한 날이라면서요?
태형: ...대체 누가 그래요 진짜 아까부터 지민이랑 계속 내 바지 얘기만 하고
탄소: 전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야
태형: (마른 세수)
탄소: 갑자기 들이댄 약속을 이만큼 소중하게 여겨주다니 너무 기뻐
태형: 당연히 소중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한 말인데
태형은 누나가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동시에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안 괜찮은 거냐 물었을 때 그렇다고 말해주면 제게 바로 들통나는 허술한 거짓말로 선을 긋지 않았다며 안심했을 테지만, 그 대신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다는 반응을 해야 했을 테니까요. 괜찮다는 거짓말을 하는 누나에게 쉽게 안심하지 못하면서도 일부러 엉뚱하게 전환되는 대화 주제에 끌려간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단순히 손깍지를 껴줬다고 앞장 서는 걸음에 맞춰준 이유가 그 말고 달리 있을까요.
걱정스럽지만 돌아가면 제 앞이 아닌, 제 곁이 아닌 형의 앞에서 또는 그 곁에서 쉬고 싶어 할 누나인걸요. 아무리 불안한 마음을 내비쳐도 그럴 수록 안된다며 밀어낼 누나의 행동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선을 긋고 벽을 세우겠죠. 얼굴엔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어 더더욱 부자연스러운, 그 표정이 가면임을 알아채게 될 자신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태형: 누가 한 약속이래도 소중하지만 누나는 그 의미가 더 커요
탄소: 왜?
태형: 너무 바쁜 사람이니까
탄소: 그런 말은 적어도 일주일 이상 못본 사이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태형: 그치만 진짜잖아요 누나는 항상 뭔갈 하고 있거나 누가 옆에 있고, 그래서 내가 다가갈 틈이 없는 걸 어떡해요 누나가 먼저 와주길 기다리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어
가면을 깨트리기엔 용기가 부족해, 힘없이 돌아설 자신이 보이네요. 등을 돌린 제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다 형을 발견하곤 달려가 안기는 누나도요. 가면을 깨트리고 말 것도 없이 알아서 견고하게 묶인 매듭을 풀어내린 누나는 형에게 가면이 아닌 진짜 얼굴을 보여주겠죠. 스스로 벗은 가면의 아래에서 누나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지만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누나의 민낯은 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거니까, 그 사람이 아닌 자신은 그저 모르는 상태로 지내는 거죠.
누나의 유일이 되지 못해 그어지는 선을 넘어갈 명분 또한 갖지 못한 서러움. 기다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저 적당한 관계. 걱정하는 티를 내면 오히려 부담을 주게 되어 심리적으로 한 걸음 멀어지는 아이러니.
태형: 형들은 시간 지나면서 누나랑 가까워졌다는데 난 모르겠어요, 오히려 멀어진 기분이던데
탄소: ...
태형: 지민이랑 정국이도 처음에야 어색했지 지금은 아니라면서 그냥 웃어요
나만 멀어졌나봐. 모두와 가까워질 수는 없어서, 나하고 멀어지는 대신 다른 멤버들한테 가까워졌나봐.
태형은 그냥 웃는다는 말로 문장을 끝냈습니다. 뒷말을 이으면 누나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기 어렵거든요. 항상 선을 넘지 못했고, 넘지 않으려 했으니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면 안되잖아요.
태형: 내가 누나랑 너무 일찍 친해진 건가 싶어요
탄소: ...
태형: 다른 멤버들하고 비슷한 시기에 친해진 거였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싶고
탄소가 우뚝 멈춰섭니다. 지나가던 택시 한 대를 잡네요. 고개를 갸웃한 태형이 어디로 가는 거냐 물을 잠깐의 여유도 없이 빠르게 목적지를 알리고 출발해달라 말하는 탄소. 달리는 택시 안은 상당히 조용합니다. 차를 타는 동안마저 놓지 않은 두 손만 서로를 잡고 있을 뿐이죠.
탄소: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태형: 누나
탄소: 왜, 실수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놓치는 게 생기는 건지 모르겠어
택시에서 내린 곳은 어느 한적한 골목의 수공예점. 문을 열고 들어간 탄소는 뒤를 돌아서며 그제야 얼굴을 보여줍니다.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닫히네요. 이끄는 손길에 따라 들어온 태형은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를 듣지만 그보다 앞에 선 누나의 그늘진 표정이 당황스럽습니다. 선을 넘으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까, 일부러 넘어가지 않은 적도 많다 여겼는데 처음으로 그 적정선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요.
탄소가 손을 뒤로 빼자 그만큼 당겨진 태형은 보폭이 큰 한 걸음을 다가왔습니다. 밖으로 나온 후부터 줄곧 놓지 않고 있던 손을 빼는 누나로부터 허전해지는 마음에 다시 잡고 싶었지만 그보다 양 어깨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이는 탄소의 움직임이 빠르네요. 어느 부분에서 어긋났던 건지 슬픈 표정을 짓는 만큼 숨이 짙어진 목소리가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태형은 어정쩡한 두 손을 간신히 탄소의 등과 허리에 두르는 것에 성공하고 누나를 불러보지만 이미 눈을 감은 탄소에겐 들리지 않죠.
탄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감춰야 너를 지킬 수 있고 어느 지점부터 솔직해져야 서운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태형: ... ...
탄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면 함부로 짐작할 수가 없잖아
아무리 괜찮다 말해도 마냥 어려보이는 네게 무얼 고백할 수 있을까. 나 사실 우울증 환자야. 무리한 몸은 자꾸 고장이 나려고 의식을 잃어. 부모님과의 문제도 복잡해. 지한이는 정말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다시 연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우울증 때문인지 뭔지 혼자 있는 방 안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단 착각을 해. 무심코 돌아본 시선이 누군가의 카메라에 찍히는 상상으로 이어져.
진심으로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원해본 적이 없는데, 부모님은 내가 처음으로 화를 낸 누군가가 되었고 원망하는 대상이 되었어. 스스로도 무서울 만큼 순수한 원한을 가졌는데 그 방향이 제 가족에게로 돌아간 심정은 암담해. 물론 가족이라 실감하는 건 지한이 하나지만, 그래도 날 낳아준 건 맞잖아. 가능하단 희망을 품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가족으로 지낼 수 있진 않을까 싶었던, 결국 어린 나를 현실로 깨우친.
그 즈음에 나는 김석진을 잃었어. 진심으로 좋아하고 바라던 사람을 할퀴면서 상처냈어. 내가 참으면 괜찮게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며 비뚤어진 생각을 시작하게 한 부모님을 미워하고,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에게 이해 받지 못하면서 분한 마음에 더 화를 냈지. 너까지 날 몰아가지마. 그렇게 서러워서, 악을 질렀어. 그리고 같은 시간에 지한이가 사고를 당했어. 수술실 앞에서 의식을 잃은 건 남준이가 바로 구해줘서 일찍 깨어날 수 있던 거래. 그걸 걔가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희망을 갖지 않기로 했어. 화해를 했어도 때론 거리감이 멀게 느껴지는 김석진을 보면서 결국 타인이란 실감을 하니까. 나의 유일이자 처음이어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 언제라도 남이 될 수 있더라. 눈 깜박인 사이에 헤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다시 연애하잔 말은 못하고 있어. 차라리 그보다 못한 관계로 이어지는 게 낫더라고. 그럼 ...처음부터 돌아설 끝이 걱정되진 않으니까. 문제는 거기서부터 나왔어. 가장 가깝게 여기는 김석진마저 멀어질 사이로 느끼니까, 그러니까 너희들한테 겁을 먹게 돼.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게 다시 무서워졌고 상처 받기 싫어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내가 한심하지만, 그래.
당장 떠오르는 고민이 이렇지만 안타깝게도 더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 여린 네 마음에 독이 될 법한 것들만 가지고 있어.
탄소: 내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마다, 다른 의미로 네게 닿을 때마다 모르겠어
설마 내 자체로 너에겐 독이 되었던 걸까.
탄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태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면 모르잖아요 말만 하지 않은 거면 또 모를까, 날 두고 가잖아요
탄소: 널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태형: 말해주지 않으면 내 탓인줄 알고 생각하는데 왜 그것마저 안 알려줘요
탄소: 내가 부족해서 그랬어, 다른 걸, ...널 돌아볼 여유가 부족했어
태형: 가지 않는다고 약속해도 다시 사라졌잖아 그건 뭔데요 항상 여유가 없었다는 말로 날 잊은 핑계를 대잖아요
표현 적은 윤기도 장문의 문자를 통해 사랑한다 말해주는데 정작 탄소에게선 들어보지 못했던 그 말.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해준 적은 없어 그게 설마,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잡아도 이어진 엇갈림에 무너지는 확신. 항상 말 없이 사라지는 게 꼭 바람 같아서. 가까워지려 손가락을 내밀고 닿고 싶어 걸음을 딛으면 톡, 소리 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아서. 멀리서봐야 오래토록 볼 수 있나, 그건 또 아닌지라.
가만히 지켜봐도 눈 깜박이는 사이에 없어지는 비눗방울. 결국 만질 수 없는 환상. 다시 나타나도, 언제 사라질까 두려운 기쁨.
태형: 왜 누나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누나가 정해줄 부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탄소: 짐이 되기 싫었어
태형: 누나가 해준 말이면 다 믿고, 아무 말 없어도 그냥 믿고 ...그러고 싶다고요
탄소: 혹시라도 내가 널 실망시킬까봐,
태형: 실망하는 건 내 몫이지 누나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잖아요!
내가 보는 건 오늘이지 내일이 아니에요. 내일을 벌써 예상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하면 오늘 보낸 시간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태형: 내일을 이미 알고 있다면 오늘은 어제가 되었을 거에요 내가 누나한테 실망할지 안할지 그걸 오늘은 모른다고요
탄소: ... ...
태형: 내가 누나의 예상보다 누나를 더 좋아하니까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단 말은 대체 왜 해요? 누나는 형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만 형을 좋아해요? 그렇게 계산적으로 좋아하냐고요 머리 쓰면서 이거 재고 저거 재면서!
난 그냥 누나가 좋은 것뿐이에요.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기대하는 것도 없어요. 그냥 누나가 누나면 그만이에요. 그게 지금껏 내가 봐온 모습이든, 정반대이든 상관 없어요. 그렇다고 누나가 다른 사람이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누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름이 바뀌지도, 성별이 엎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태형: 조각상이 있으면 그게 앞모습만 보는 게 아니잖아요 뒷모습도 볼 수 있고 옆모습도 보고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앞면이라고 뒷면까지 아름다울 필요는 없어요. 장미 한 송이도 부드러운 꽃잎 아래에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어요. 귀여운 아이도 제 필요에 따라 영악하게 굴 줄 알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그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란 소리 아니에요?
태형: 사람 취향에 맞춰 만들어진 인형도 삐걱대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여요
탄소: ...나는,
태형: 누나는 인형이 아니에요 강철로 만들어진 기계도 아니고요
무리하게 움직이면 인형도 부서지는데 누나가 괜찮을 리 없어요. 괜찮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태형: 난 누나가 적어도 내 앞에선...
어깨가 살짝 젖는 느낌이 든다, 싶기 무섭게 몸이 굳었습니다. 누나가 울고 있다는 거니까요.
탄소: 그랬다가 너마저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반복하고 싶지 않았어
머리 쓰지 않고 다가간 결과로 민윤기는 박지민의 감정을 억지로 들어냈고 덕분에 박지민은 내게 안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정호석은 결국 내가 아닌,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멤버들의 손을 들었어. 앓던 우울에 겹쳐 더 날을 세운 내게 비난을 했고 김석진마저 지친다고 했어. 난 아직도 그걸 떠올리며 몸을 움츠려.
김남준도, 전정국도, 너도 내게서 한번쯤 돌아설까. 그건 언제일까 날짜를 세고 수를 헤아려. 이제 그만 아프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 거야.
탄소: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머리 쓰지 않으려 노력하던 나를 너무 후회스럽게 만든 기억이 있어서... 네가 선을 긋지 말라고 해도 쉽지가 않아, 미안해, 미안해 태형아 넌 아닐 거라 믿고 싶은데 ...항상 그 끝이 안 좋았어 이런 기억만 안고 있어서 미안해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거니. 다음엔 어쩔 수 없구나. 그 다음으로 넘어오자 실망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낸 용기는 가장 각별하게 여긴 이에 대한 배신감. 4번의 사이 처음으로 돌아간 저의 마음. 저들이 가진 끄나풀을 정리해주면서도 이전만큼의 애정은 갖지 못하게 된 허무함. 결국 다 똑같다는 일반화의 성립.
일반화의 오류를 믿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는 나를, 내가 잘못 안 거라 믿고 싶은 날 미워하지 말아줘. 나는 너를 애정하기 때문에 선을 긋는 거야. 널 잃고 싶지 않아서 솔직할 수 없는 거야. 사랑한다 말하면 후에 상처로 돌아올까 말하지 못하는 거야.
탄소: 나를 좋아한 널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내가 싫어서, 더 이상 잃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태형: 잃기 싫다고 먼저 잃게 만드는 게 어딨어요
탄소를 더 꽉 안아주며 아까와는 달리 누나를 오히려 토닥이는 태형. 누나가 그렇다면 굳이 내 앞에서 솔직해지길 강요하지 않을게요.
태형: 대신 사랑한다는 말만 제대로 전해주세요 그럼 그거 하나만 믿고 기다릴게요
말 없이 사라진 누나를 기다려도 된다고, 허락해주세요. 그럴 자격만 주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릴 수 있어요. 그만큼의 관계가 된다는 생각으로 얌전히.
뒷말은 묻어두고 탄소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짝 이마를 부딪친 태형. 서운함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지만 누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어느 정도 묻어갈 자신이 생기네요. 얼마 전만 해도 누나의 품에 안길 수 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지금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단단해진 만큼, 누나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남을 지키기는 커녕,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었을 사람인데 왜 그땐 몰랐을까. 팀내에서나 저의 도움을 받았지, 밖에서는 오히려 멤버들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던 게 탄소죠. 방송국 관계자들의 질 나쁜 농담을 웃으면서 받아치는 한편, 제 능력을 활용해 멤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정리하고 어처구니 없는 소문을 묻었습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누나는 무슨 일이 닥쳐도 이겨낼 거인으로 보였어요.
그건 모두 꾸며진 모습이었음을 지금에 와서야 알아봅니다. 자라난 만큼 누나를 안아줄 수 있는 품이 생겼거든요. 차라리 그때 누나에게서 완전한 어리광을 독차지 하지 않아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아직까지도 고등학생 취급 받는 정국과 같은 역할이 되어 이런 식으로 누나를 안아줄 수 없었겠죠. 우는 모습을 보여줄 리도 없고요.
태형: 누나는 모르겠지만 내가 진형이랑 지한이를 질투해요
형은 누나랑 결혼할 사이라는 말을 하면서 지내고, 지한이는 누나 친동생이니까. 그리고 그렇잖아요, 전에 일 크게 있었을 때. 내가 누나한테 가지 말랬을 때. 지한이가 그랬어요. 자기 누나라고. 거기에 대고 할 말이 없었어요. 맞는 말이니까. 내가 아무리 우리 누나, 우리 누나해도 진짜 가족은 지한이니까.
근데 오늘을 통해서는 이제 내가 나라서 다행이란 마음이 생길 것 같아요.
태형: 내가 형이었으면 누나한테 더 많은 걸 기대했을지도 모르고, 더 쉽게 실망했을지도 모르는 걸요 지한이었으면 누나가 이런 내색조차 안하고요
나는 누나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그게 이성 간의 마음은 아니니까 이별이니 어쩌니하는 거랑 관계 없이 그냥 오래 오래 지낼 수 있어요. 어린 동생이지만 결국 남이기 때문에 한편으론 모든 걸 위해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때로 쌍방통행이 될 수 있고.
태형: 형처럼 멀어질까 겁먹을 필요 없어요, 지한이처럼 신경 많이 써줄 필요도 없고
탄소: ... ...
태형: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나랑 비교하고 대어보면서 가늠할 필요 없이 그냥 누나 마음 가는 대로 대해주면 돼요
형도 아니고 지한이도 아니지만 그게 당연하죠. 난 태형인걸요.
이마를 맞대고 가까이서 미약한 미소를 짓는 태형에게 그저 시선을 떨구고 울던 탄소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별안간 주저앉습니다. 놀란 마음에 누나를 따라 쭈그려 앉은 태형이 일으켜세우려 손을 뻗자 먼저 선수치는 탄소의 행동.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파묻네요.
태형: 누나?
탄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결국 너라고 다른 결말은 없다 해도 오늘을 잊지 않을게
어느 순간이 찾아와도 지금의 순간을 왜곡된 기억으로 떠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이건 약속이 아니라, 그저 진심이야. 네가 날 만난 걸 원망하고 밀어내도 그날이 아닌 오늘의 넌, 이렇게 나를 좋아했다고. 잊지 않을게.
탄소: 그만큼 너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태형아
태형: ... ...
다른 누구에게 질투할 필요도 없이 너는 내게 너무 애틋하고, 절절해. 너는 너 자체로 특별한 나의 누군가였고, 유일이야.
탄소: 가장 힘든 상황이 나에게 닥쳤을 때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너와의 약속만은 절대 버리지 않을게 더 이상 널 혼자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남에게 제가 힘든 사실을, 스트레스 받고 있단 자체를 알리기 싫다던 태형. 얼핏 닮은 구석이 있죠, 탄소와. 사람들 앞에서 잘 울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서로에게 꺼낸 진심을 들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참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 탄소는 가게의 안쪽으로 태형을 이끌었고, 따라간 앞에 놓인 문을 열자 의외의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탄소: 사람이 많은 건 피하고 싶었어
태형: 이게 다 뭐예요?
탄소: 한국이면 그래도 아는 곳이 좀 있는데 여긴 외국이라 급하게 찾을 곳도 없고
태형: 누나가 준비했어요?
탄소: 그래서 원래라면 네 생일에 보여주고 싶었지만 갈 곳이 정말 마땅하지 않길래
태형: ... ...
탄소: ...혼자 준비한 건 아니야
살짝 어둡던 가게와 달리 그보다 안쪽으로 자리한 내부는 환한 조명과 함께 모든 공간이 화려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거든요. 태형이 탄소에게 누나가 준비한거냐 물은 건 문을 여는 동시에 보인 커다란 액자 때문인데요.
언젠가 탄소의 휴대폰으로 찍어둔 풍경 사진을 그려낸 유화입니다.
탄소: 내 휴대폰 어디 갔어
남준: 태형이가 가져가던데요, 기깔난 사진 한 장 남겨준다고
탄소: ...신에게는 아직 삼성의 노트가 남아있사옵니다
남준: ?! 뭐야, 휴대폰을 몇 개나 들고 다니는 건데요 (황당)
탄소: 응당지기 사람이라면 이 정도를,
태형: 누나! 이 사진 봐봐여 완전 멋있져!!!
탄소: (숨긴다)
남준: ㅎ...
태형: ? 뭐야 다들 왜 그래요
탄소: 아냐, 아무것도
태형: 그래요? 그럼 이거 봐줘요 엄청 잘 찍혔어!!
탄소: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감탄한다)
남준: (절레절레)
탄소: 어떤 의도로 촬영된 사진인지 한 말씀 남겨주시져, 김작가님
태형: 네에, 이제 이거는 해가 지는 도중을 찍은 건데여 약간 어떤 순간이라도 기억해두고 싶은, 그런 때가 있잖아요? 잘 기억해뒀다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싶은 그런 거!
탄소: 아앗 그런 깊은 뜻이!
남준: 태형이 말 덜 끝났는데요
탄소: ... ...
태형: ...너무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면 빛 바랜 추억이 영원해지고, 글로 남기면 문장으로 살아남아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기억이 된다. 함께 한 찰나를 나눠갖고 싶은 마음에 상대방의 기록장을 빌리면 그는 당신의 앨범 한 켠을 채울 무언이 되고 그 무언을 다시 공유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그 시간을 각별히 여긴 흔적이 남는다.
태형: 밑에 적힌 글은 누가 쓴 거예요?
탄소: 그림을 부탁하는 이유를 물어보길래 화가한테 적어준 거였어
그 흔적 속에서 나는 네가 보여준 세상을 다시 너에게로 돌려줄 수 있으니 마냥 기쁠까. 너는 나에게 노을 지는 하늘색이 무엇인지 알려준 최초의 사람이다.
탄소: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태형: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누나의 유일이었네요
서운할 것도 없이, 그냥 말을 안해서 몰랐을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