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끌려 나온 거리는 한산했다. 원래 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한창 학교에 있을 시간인 지금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학연은 옆에서 팥죽을 먹고 싶다며 떼를 써대는 상혁을 여전히 어벙하게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때 아닌 음식이었다. 더운 날에 갑자기 웬 팥죽이야.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계속 두리번거리기만 한다. 이 날씨에 팥죽을 팔기 위해 열린 가게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학연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그저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저기다.” 그러던 와중, 상혁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정말로 있다. 작고 낡았지만 온정 만큼은 더없이 넘쳐보이는 소담스런 가게. 창살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팥죽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작고 소박했다. 상혁은 아이처럼 웃으며 달렸다. 문제는 학연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는 거다. 학연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망할 얼굴 때문에. 가게의 문이 상혁의 손길로 인해 투박하게 열렸다. 온통 깜깜했다. 음식을 파는 가게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학연은 상혁의 단단한 팔을 쿡, 찌르며 물었다. 잘못 찾아온 거 아냐? 눈알을 데룩 굴리며 소근히 묻는 학연에게 여유로이 웃어보인 상혁은 보란 듯이 소리쳤다. 할머니, 팥죽 먹고 싶어요, 라고. 그러나 소리침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멀뚱히 상혁의 눈치를 보며 섰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이 꽤나 천진해보인다. 정말, 그 시절의 어린 아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오 분 가량이 더 지났다.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얼굴에 주름이 자근히 진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하게 뜨이는 눈꺼풀. 느릿한 움직임. 모든 것이 나이에 걸맞게 느린 노파였다. 그녀는 굽은 허리를 연신 움직이며 다가왔다. “상혁이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한데도, 그녀는 상혁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역시 내 목소리 아직 기억하고 계시네.” “…자주 들리지 그랬냐. 이 늙은이가 허리는 굽었어도, 팥죽 만드는 손은 여즉 안 죽었어.” “알아요.” 이야기가 다정다감하게 옮겨졌다. 흡사 조모와 손자의 사이처럼 보임에 학연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아직 상혁을 잘 모르지만,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때는 오직 지금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와 포옹을 하며 애교를 부리던 상혁이 문득 학연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학연이 눈짓으로 뭐냐는 듯 묻기도 전에 팔을 잡아 끌었다. 그에 학연은 순식간에 노파 앞으로 대령되었다. “할머니. 얘 좀 봐요.” 얘라니. 그래도 형인데. 외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여.” “불 안 켜져요?” “전기 끊은 지 오래됐다. 피차 손님도 없고. 늙은이 사는데 불 없어도 그다지 지장없어.” “그래도 불을 키고 사셔야죠. 시력도 좋지 않으시면서… 암튼 봐요. 되게 귀엽게 생겼죠?” 능청맞은 목소리에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지금 할머니께 무슨 소리를 지껄여대는 건지. 야, 뭐해. 어금니를 깨물고 따지듯 물어오는 학연을 가볍게 무시한 상혁이 노파의 대답을 종용했다. 노파는 학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디밀고 관찰한다. 꼭 제 가게처럼 오밀조밀하고 소담스러운 이목구비였지만, 눈동자 하나 만큼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상혁이 너 만큼은 아니어도 꽤 봐줄 만 하구먼.” “그쵸? 아. 역시 할머니도 보는 눈이 있다니까.” 봤지? 자랑스레 물어온다. 칭찬을 기다리는 커다란 진돗개 마냥 꼬리를 흔들어오는 모습에 기가 찼다. 한 살 어린 놈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는 걸 좋다고 여겨야 할 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노파는 자리를 떴다. 아마도 팥죽을 만들기 위함인 것 같았다. 아궁이에 불을 때우자 굴뚝에는 연기가 피워졌다.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굽은 등 마저 따스해보였다. 어머니 없이 일생을 자랐기 때문일까. 상혁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래도 좋은 인연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구나. 너는. “내가 팥죽을 좋아하는 이유. 알려줄까.” “…….” “안 궁금해?”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정말로 알려주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한 수 져주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궁금해. “우리 어머니가 가장 잘 만드시는 요리였어.” 아궁이의 불빛에 언뜻 비치는 한상혁의 얼굴이 무척, 서글퍼보였던 것은 그저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 가게에 자주 들러서 할머니께 배운 모양이더라고. 늘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거라고는 팥죽 밖에 없었는데도, 난 그렇게 좋았어.” “…그랬구나.” “어머니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달까. 죄책감이 들면서도. 두려우면서도.” 나도 그랬던가.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느꼈었던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 모멸감이나, 미칠 듯한 살의를 느낀 적은 있었어도.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부모에 대해 연민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뿐만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자식인 차학연까지 벼랑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한상혁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끓여준 팥죽을 먹고 있는데 방 안에서 뭔가가 새더라. 아주 지독하게. “어머니가 우셨어.” “…….” “악다구니를 써 대더라. 당신이 아들 놈이랑 섹스해대는 소리를 들었어, 라고 말이야!” 한상혁은 울며 웃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묘연의 확신이 들었다. 머뭇거림을 멈추고서 오른손을 들었다. 저보다도 큰 등허리를 천천히, 도닥였다. 이 행동이 동정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내친김에 말까지 덧붙였다. 네 삶, 불쌍했구나. 한상혁은 싸구려 동정표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싸구려 동정에 기분 나빠할 수 없었다. 한상혁과 차학연의 삶은 그보다 더 싸구려 같았으니까. - 와 나 웬 일로 폭풍 연재!!?!? 감사합니당. 룰루 랄라 룰루 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