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추적한 비가 내렸다. 습기 찬 눅눅한 공기는 썩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학연은 끌어 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향에 취해, 온도에 취해, 아무렇게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행아가 되어버린 지금의 제 모습이 추잡했다. 온통 깜깜했다. 그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씨는, 누군가의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금 담배 냄새가 났다.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더라. 머리 맞은 거.”
“…봤어?”
“응. 널 안고 있을 때 봤어.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는 척 하면서.”
여전히 장난꾸러기같은 웃음이다. 머리카락도 개구쟁이 마냥 이리저리 망가져 있다. 요령 좋게 박아댔는지 처음 치고 허리의 통증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헛웃음이 튀어 나올 것 같아 학연은 입매에 힘을 주었다. 진저리가 났다. 포옹 한 번이면 처음 보는 새끼에게도 아랫입을 서슴없이 대어주는 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 힘없이 실소를 자아내는 학연의 모습을, 상혁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혁은 담배를 지져 껐다. 비가 와서 그런가. 불씨가 영 아니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교복이 더러워진 것은 피차 마찬가지인데, 한상혁은 그마저도 참 잘 어울렸다.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 학연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몇 살이야?”
결국 입에서 튀어 나온 건 실없기 짝이 없는 간단명료한 질문이었다. 상혁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건 웃을 때와 확연히 달라서, 학연은 살짝 겁을 집어 먹고 말았다.
“열 여덟.”
열 아홉인 저보다 한 살 어렸다.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동갑일 줄 알았는데. 왠지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상혁은 목소리를 긁듯이 뱉어냈다. 내가 관계성 따지는 거 다음으로 싫어하는 건데. 그거.
“너보다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
“…….”
“아. 넌 안 그러겠지. 왜냐하면 귀여우니까.”
쓰잘데기 없는 이유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는데도 학연은 괜히, 붉어진 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습관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상혁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는 게.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으니 어쩌면 좋을까. 상처에 닿는 빗물 만큼 쓰라린 것은 또 없을 텐데. 이어지는 걱정에 반해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더욱 매서워졌다.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던 온도가 식어갔다. 시린 손끝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끌어 안는 것만이 학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공사장의 무너진 벽에 걸터 앉아있던 상혁이 별안간 일어나 다가왔다.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바스락거리는 소리 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추워?”
“아니.”
“떨고 있잖아.”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주었다. 너도 많이 추울 텐데. 혓바닥 아래에서 맴돌던 말은 가까운 거리에 긴장해 내뱉어지지 못한다. 상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서 곁에 자리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비가 오는 날씨는 괜스레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학연은 물을 싫어했다. 어릴 적의 학대 때문이었다. 숨 막히던 그 감촉을 잊을 수 없어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았다. 눈을 감으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학연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중얼댔다.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었어.”
“그렇구나.”
“머리채를 잡아 끌고서는, 내 얼굴을 커다란 대야에 받아진 물 속으로 처박았어.”
“응.”
“숨이 막히는데 비명이 나오질 않았어.”
담담하게 대답을 잇는 상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평범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이야기임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하물며 동정도 표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런 학연을 느낀 상혁은 고개를 두어 번 주억이며 흘리듯 속삭였다. 나도 이야깃거리 하나 가지고 있는데.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서 멈추었던 말을 잇는다. 나도 아버지 이야기야.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어.”
시체 마냥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낸다. 학연은 커다래진 눈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자고 있을 때 그 옆에서 말이야. 상상이 가? 삐그덕, 하고 침대 소리가 울리는 것만큼 두려운 건 없었는데.”
상혁은 입술을 짓씹었다. 잘근거리며 씹히는 입술의 살점이 금방이라도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학연은 상혁과 달랐다. 그의 이야기에 덤덤하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상상이 가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상상할 수 없다.
짧은 이야기를 끝으로 정적이 이어졌다.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빗소리만이 고름이 썩어 드는 두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상혁은 교복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갑을 찾아냈다. 속이 텅 비어있다. 아까가 마지막이었나보네.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갈까.”
비가 온다.
“응.”
변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 단 하나. 변한 것이 있다. 이제는 두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처음 본 사이 주제에 몸을 섞고 가슴 속에 묻고 있던 가장 큰 비밀을 서로에게 고한, 쓸쓸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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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은 꿈 속에서 환상처럼 흩어졌다. 학연은 방 구석에 웅크렸던 제 몸을 일으켰다. 갈증이 일었다.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뜨거운 무언가를 공유했던 한 사람.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 주위를 맴도는 담배 냄새. 그런 제 머리맡으로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했다.
새벽 동이 튼 창살 새로 희미한 음영이 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아버지를, 학연은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술자욱이 채 지워지지 않은 얼룩은 그의 얼굴께에도, 옷자락에도 스며있다. 더는 다가가지 않고 책가방을 들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텁텁한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큰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잉태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지만 끝내 변하는 것은 없었다.
녹이 슬어버린 철문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 좁은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나온 학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주변을 살폈다. 일말의 기대감이 바닥으로 꺼지는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간악한 기대를 했던 것이다.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업시간 엎드려 잠을 청하는 것 대신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굳었다.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내비치지 않았다. 학연은 자신에게 반문했다. 그를 기다리는 저의가 뭘까. 한상혁을 봐서 대체 뭘 하려고? 몸을 한 번 섞었다고, 제가 가진 가장 큰 비밀을 내어주었다고 해서 가까이 있어 달라는 것 따위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냥 다시 한 번 가까이에서. 더 가까이. 좀 더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학연은 조용히 실소를 터뜨렸다. 열두 살 난 계집애처럼 변이하는 제 마음을 돌이킬 방도가 없다. 이것은 아마도, 늦은 사춘기일까.
-
어항 속처럼 느물거리는 배경의 꿈이었다. 지독히도 현실성 없는 감각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아우성이 들린다. 정적 속의 들리지 않는 아우성.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머리가 아팠다. 더이상 손가락을 꾸물거릴 수도 없게끔. 그러자 서서히 고함 섞인 비명은 멈춘다. 학연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어렵사리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단 하나…
그러나 얼굴을 채 담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꿈은 깨어지고 만다.
잠에서 깨어난 학연은 느릿하게 시계를 보았다. 점심 시간이었다. 주변이 조용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조금은 완화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습관대로 아무도 없는 창밖을 보았다.
어릴 적 늘 같은 꿈을 꿨다. 방문 너머로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아끼는 꽃병일 것이다. 자주 물을 주고, 보듬었었는데. 아깝기도 해라. 어린 학연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침대 위에서 바르작댔다. 왠지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방문을 꼭 잠그고 있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도 괜찮았다. 심지어 죽여도. 왜냐하면 문을 잠그고 있는 자신은 끔찍하게 죽은 어머니의 시신을 보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꼼짝없이 갇혀서 말이다.
어린 아이에게도 이기심은 있다. 더러운 것을 보기 꺼려하고,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하며 무리에서 소외되면 울어버린다. 크지 않은 몸과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본능에 충실한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한 편으로는 두렵다가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저 아픈 조각이 내 머리에 닿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멍한 얼굴.”
“…아. 깜짝이야.”
“내 생각했지.”
놀랐다. 말 그대로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 찾고 찾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야말로 숨결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학연은 답지 않게 당황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상혁은 그에 배를 잡고서 킬킬댔다.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웃는 모습에 학연은 놀란 심정을 가라앉히고서 입을 비죽댔다. 눈을 휘어접으며 웃는 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왜 남의 교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자기 혼자 쓰는 교실인가. 뭐.”
“뭐라고?”
“미안해. 불안했어?”
마치 아이를 어르듯. 연인을 달래듯 나긋한 음성이었다. 학연은 소리치고 싶었다. 너와 내가 서로 없으면 불안할 사이냐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상혁의 입에서, 불안할 사이 맞지. 왜냐하면 우리는 비밀을 나눈 친구나 마찬가지니까, 라는 대답이라도 튀어나올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친구’라는 것이. 학연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참을 옆에서 손장난만 치던 상혁이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장난기 서린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어온다.
“팥죽 먹고 싶어.”
“팥죽?”
“응. 나 팥죽 제일 좋아해.”
뜬금없는 소리였다. 상혁은 어벙벙한 반응의 학연임에도 아랑곳 않고 손을 잡고서 이끌었다. 상혁은 불가항력과도 같았다.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산, 함께 살아야 할 가족보다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