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8.
“으이구, 등신.”
“…….”
“꼴좋다.”
세훈이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현관 앞에 선 내 얼굴을 보곤 한마디 했다. 물론,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내 행색을 위 아래로 훑으며 손에 사들고 온 약봉지를 쥐어주는 녀석이 내 걱정에 골머리를 앓았을 걸 알아서 말없이 조금 웃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와?”
“…….”
“…….”
“…미안.”
“미안한 줄은 알고?”
“…고마워.”
“왜 이래. 소름 돋게. 야, 넌 목소리가 그게 뭐냐? 듣기 싫으니까 한 마디도 하지 말고 입 다물고 누워 있어. 일단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약 먹고 다 나으면 그때 제대로 좀 보자. 알았냐?”
고맙다는 내 말이 민망한 듯 말을 돌린다. 멋쩍은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내 팔을 잡아 끌고 다시 자리에 앉히며 세훈이 덧붙인다. 그나저나, 밥은 먹고 다니냐? 꼴이 그게 뭐냐 대체. 안 그래도 못생긴 게 더 못생겨져서 이젠 못 봐주겠다. 그 말에 또 웃었더니 대답은 않고 웃는다며 머리를 한 대 때린다. 아프진 않았지만 골이 조금 울려서 머리를 감싸 쥐었더니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오세훈이 나를 살피다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다.
“엄살떨지 마라.”
“…진짜 머리 울렸거든?”
“손가락으로 살짝 머리 친 거 가지고, 거 되게 그러네.”
“…….”
“야, 그리고 니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
“너, 너무 시끄러. 자꾸 말하니까 또 머리 울리잖아….”
“됐고, 밥은 먹었냐?”
“…….”
“…….”
“…어.”
손에 쥐어진 약봉지를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자, 집으로 들어설때부터 표정이 안좋던 세훈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되묻는다.
“너 진짜 밥 먹었어?”
사실은, 눈을 뜬 이후로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감기 때문인지 입맛이 없었던 것도 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차려먹을 힘이 없었기도 하고…. 녀석이 오기 전까지 내내 누워있었다. 대담이 없는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라이, 인간아.”
“…먹었다니까.”
“먹긴 뭘 먹어.”
“…….”
“네가 뭘 먹었는데. 어?”
“…배가 안고파서 그랬어. 배가 안고파서….”
“이거 가만 보면 진짜 손 많이 간다니까?”
세훈이 쯧쯧, 짧게 혀를 차며 신발을 꿰어 신는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으니 죽 사러 간다. 너 쳐먹일 죽 사러! 빽 소리를 지르며 대답하기에 괜찮다고, 배 안 고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현관에 서서 나를 가만히 보던 녀석이 말한다.
“약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되는 거 모르냐.”
내내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 깜빡 잊고 있던 약 봉지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넌 다 나으면 그땐 진짜 뒤졌어.”
…그래도 내 걱정해주는 건 오세훈이 제일이구나.
툴툴거리면서도 알고 보면 가장 속정이 깊은 놈이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아무 말도 못하고 괜히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누워서 잠이나 자고 있어라. 알겠냐?”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확인한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집을 나선다.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세훈이 말 대로 잠자코 누워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개지 않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정말로 푹 쉬고, 빨리 나아서 오세훈한테 싹싹 빌어야겠다. 고맙고, 또 미안하니까 그동안 쌓인 잔소리가 폭발해도 다 참고 들어줘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있어서인지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또렷해진다. 포근한 이불에 파묻혀 억지로 잠을 청해 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녀석이 나간 집이 휑하게 느껴졌다. 요 며칠, 형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형이 나가고 나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침묵에 익숙할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형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눈 뜨자마자 연락하라던 문자를 보고서 깜빡 잊고 있었다. 베개 밑에 넣어둔 핸드폰을 찾았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혹시나 수업시간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문자를 남겼다. 일어났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형에게 보낼 문자를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괜히 메시지 함을 뒤적였다. 아무것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애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프다는 문자를 보내면 나에게 달려와 줄까.
아프다는 핑계로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다. 그 순간,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액정에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뭐가 두려운 건지, 차마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을 멍하니 들고만 있었다. 그 애가 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떡하지. 만약에 전화를 받으면, 그때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화도, 문자도, 당연했던 사이였으니까.
사실은 종인이가 보고 싶었다. 아픈 걸 핑계로 연락을 하고 싶을 만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그때는 그 애를 정말로 놓아줘야할 것 같아서.
느즈막히 눈을 떴을 때, 핸드폰에 와 있던 메시지가 세훈이도, 준면이 형도 아닌 너였으면 했다. 내가 전화를 걸어 아프다고 투정부릴 수 있는 게 세훈이가 아니라 너였으면 했다. 내 전화를 받고 달려와 약을 챙겨주고, 죽을 챙겨주는 게 세훈이가 아니라…
…김종인.
너였으면 했다.
몸이 아파서일까, 괜시리 더 감성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몸이 아파서 네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고, 네 얼굴이 더 보고 싶어진다. 몸이 아파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애가 없어도 괜찮은 척하며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마음이 터진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내며 생각했다.. 잠을 자야겠다. 잠시만이라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세훈이가 아닌,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一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 쿵쾅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쾅쾅 세게 내리치는 소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울린다. 죽을 사 오겠다던 세훈이 녀석인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때 문을 잠그고 나갔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세훈?”
현관으로 다가서며 묻자 더 이상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서서 문을 보니 잠겨있지도 않았다. 세훈이냐고 몇 번을 물어도 답이 없기에, 혹시 준면이 형인가 싶어서 형? 하고 목소리를 내었다.
“…….”
“…….”
그래도 대답이 없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작정 문을 열어젖혔다.
“…….”
“…….”
문을 열자, 그 곳에는 김종인이 서 있었다. 꿈인가 싶어서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떠 봐도 눈앞에 있는 그 애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한 번 눈을 비볐다. 너무 세게 비볐던 걸까…. 눈을 가린 손바닥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고 일어나면 네가 내 눈앞에 있어주길 바랐다. 정말로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눈물 때문인지 눈앞이 흐릿하게 비춰진다. 그러는 와중에도, 너는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너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말랐더라는 백현이의 말처럼 너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인지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가 보였다. 너 역시도 나를 앞에 두고 울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네가 손을 뻗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많이 아파?”
그토록 그리던 목소리가 귓가로 전해져온다.
“경수야….”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바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어디가 아파.”
“…….”
“아프지 마….”
“…….”
“아프지 마, 경수야….”
그 애의 품에 안겨있는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그동안의 원망도 깊이 묻어두고 녀석의 마른 등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
“…미안해.”
너는 그렇게 나를 끌어 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一
종인이는 현관 앞에 놓인 죽을 들고 들어왔다. 내 옆에 앉아서는 한 숟갈, 한 숟갈 뜨거울까 후후 불어가며 손수 내 입에 죽을 넣어주었다. 그동안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무 말 않고 그 애가 주는 걸 받아먹었다. 죽을 다 먹은 후에는 세훈이에게 받은 약까지 챙겨 먹였다. 그나저나 오세훈은 어떻게 알았는지 죽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웠다. 고작 감기일 뿐인데,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내게서 물 컵을 받아들고 싱크대로 향하는 종인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조금 마른 것만 빼면 내가 아는 김종인 모습 그대로인데도 며칠간의 공백 때문인지 네가 낯설게 느껴졌다. 괜히 어색해져서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억지로 쥐어짜냈다.
“괜찮아?”
내 기침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살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아….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랬는데. 요즘 따라 만날 운다.
“왜 그래, 경수야. 많이 아파?”
“…….”
“아파서 우는 거야?”
컵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우는 내 모습에 깜짝 놀라서 달려오는 네가 너무 좋으면서도 미웠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나는 이렇게나 네가 좋은데 나를 두고 가버리면 어떡하나 싶어서.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안아 토닥이며 울지 말라고 말하는 너를 보내주기가 싫다.
‘아, 너 몰랐나보네.’
‘…….’
‘김종인 여자 생긴 거.’
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반복하며 소리쳤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막아버렸다. 아닐 거라고, 누나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애써 부정하면서 종인이의 팔을 꼭 잡았다.
“종인아.”
“응.”
내 등을 토닥이는 네 손길에 더 눈물이 났다. 너는 그대로인데. 누나는 왜…. 지금 당장이라도 그게 사실이냐고 묻고 싶으면서도 그 애가 말하기 전까진 끝까지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어디 안 갈 거지?”
“…응.”
“나 여기 있는데.”
“…….”
“아무데도 안 갈 거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종인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응. 아무데도 안 가. 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애의 품에 파고들었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모든 걸 묻어두고 싶었다. 그냥 지금처럼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어. 나는 괜찮아. 억지로 나를 위로했다.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종인이가 품에서 나를 떼어놓으며 내 얼굴을 붙잡고 묻는다.
“불안해?”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애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물음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작게 한숨을 내쉰다.
“미안해.”
“…….”
“다 나 때문이야.”
“뭐가….”
“내가 혼자 다 이겨내려다가, 괜히 너만 힘들게 했어.”
그 말에 의아한 눈빛으로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종인이가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나를 끌어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종인이에게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하나씩 하나씩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 애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의심하고, 원망 했어….
“말 못한 게 아니야…. 네가 신경쓸까봐 말 안했어.”
“…응.”
“좀 힘들었어.”
“…….”
“다른 사람들한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더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어. 그런 일로 네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고.”
“…….”
“너를 위해 숨겼는데, 그것 때문에 네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
“…….”
“미안해….”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녀석을 힘주어 껴안았다. 네가 뭐가 미안해. 괜히 의심해서 내가 더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많이 힘들었지? 내 말에 종인이는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누나가 오해 했던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자 생겼다는 말에, 앞뒤 잴 것 없이 원망만 했던 내가 되려 원망스러웠다. 종인이를 믿지 못하고 의심부터 했던 내가 너무 못나보여서.
“누나?”
“응, 혜인누나.”
혜인누나의 이름에, 종인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너한테 누나가 뭐라고 했어?”
“아, 응….”
“뭐라고 했는데?”
“너,”
“…….”
“여자 생겼다고….”
내 입에서 나온 말에 그 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금 화난 눈으로 나를 품에서 떼어놓은 그 애가 긴 한숨을 내쉰다. 혜인누나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내 말에도 대수롭지 않게 누나가 오해한 거라며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건 나였다. 생각이 많은 듯 복잡한 눈을 한 종인이가 나를 바라본다. 혹시나, 또 숨기고 혼자서 감당할까봐 그 애의 팔을 붙잡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 누나랑 무슨 일 있어?”
“…….”
“무슨 일…있지.”
“…….”
“나한테 말 해주면 안 돼?”
“…….”
“말, 안 해줄 거야?”
“…….”
“같이 하기로 했잖아….”
내 말에 고개를 그 애가 끄덕인다. 그래도 말하기가 꺼려지는 듯,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녀석에게 다가가 괜찮으니까 말해달라며 그 애를 안심시켰다.
“응, 같이 할 거야. 근데, 경수야. 놀라면 안 돼….”
“…알았어.”
그 애가 결심한 듯이 내 손을 꼭 잡아왔다. 그에, 나도 그 손을 꼬옥 맞잡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누나가,”
“…….”
“우리…헤어지래….”
***
얘드라 남의 집에서 그러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