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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jang 전체글ll조회 1249l 1


*
이미 완결 난 글이고
다른 사이트에서 선연재 되었습니다
0~10, 10~16(번외1,2) 이렇게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빙의글입니다





[블락비/태일] 돌고 돌아서, 다시 출발선을 향해 0~10 | 인스티즈












1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고, 얇지 않은 우정이었지만.




내 모든 신뢰와 애정은 부풀어오른 네 바지춤을 두 눈으로 목격한 뒤로 산산조각나 버렸다. …뭐야? 당황한 내 물음에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얼버무리는 네 모습이 낯설거니와 알몸을 들킨 것처럼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더이상 오랜 친구가 아닌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가 되어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어렴풋하게 짐작하고만 있던 너의 변화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보드랍던 뺨에 까슬하게 돋은 그 이질적인 수염이, 한 팔로 끌어안기엔 너무나 넓어진 네 어깨가, 남자가 되어가는 네가, 변하는 세상이. 그리고 그런 너를 친한 친구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기적인 나 자신이.





열 일곱이 되던 해, 그 해 여름에 나는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네 생각을 하면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빨간 꽃이 피고 17년의 긴 시간동안 잠자던 감각들이 움텄다. 나는 '생리냐?' 하고 묻는 너의 사소한 물음에도 부끄러워했다. 그맘 때 즈음에 처음으로 생리통을 겪었다. 초경은 6학년 때 일찌감치 했지만. 그땐 그게 그리 창피한 일인지도 모르고 커다란 자랑거리가 생긴 것처럼 들떠 얘기했었다. 나, 피났어. 어디에? 음…거기. 여자의 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네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그런 네가 웃겼고, 네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여자는 어른이 되면, 그러니까 엄마가 될 준비가 되면 거기서 피가 난대. 너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나의 그 곳을 봤다. 여자가 된 나를 봤다.




열일곱의 생리통은 생각보다 더 심했다. 나는 청승맞게 울었다. 아랫배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네 조각, 여덟 조각, 열 여섯 조각, 서른 두 조각으로 끊임없이 나뉘어졌다. 너를 보는 나의 시선도 함께 갈라졌다. 네가 여자가 된 나를 봤던 그 날처럼, 피가 잔뜩 묻은 침대 시트를 목격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그 날처럼 나는 이제서야 남자가 된 너를 본 것이다. 어떤 일정한 부피로, 분명한 그 존재로 자신을 알리는 그것. 너의 그 것.






너는 마치 긴 세월동안 멀어져갔던 대륙처럼, 내게서 서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시시때때로 느껴지는 우리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큰 눈금을 향해갈수록 나는 무기력해졌다. 너를 향해 달렸어야 했다. 네가 멀어지는 걸음의 두 배를 뛰어가 단단한 네 등허리에 얼굴을 묻고 이렇게 소리쳤어야 했다. 

나 아파, 생리통 때문에 너무 아파. 





여자가 되는 나를 인정하고 남자가 된 너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야 말았다. 네 삶의 중심이 나인 것도 아니었고, 네가 나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만큼 세심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미련하게. 흘러오는 것들은 품고, 흘러나가는 것들은 내버려 두는 너의 그 무심한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내심 나를 잡아줬으면 했다. 이 열병에서 나를 구원해 줬으면 하고 여러 밤동안 바랬다. 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서로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등하굣길에 항상 나란히 서 있는 우리를 일컫는 말은 '노부부'나 '공식커플'같은 장난스러운 것들이었지만, 근래에 나는 네가 무척 어색하고 멀게 느껴졌으므로 그런 반응들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이들의 희롱하는 말투에 머리끝까지 벌게진 내가 손사래를 치고 있노라면 너는 언제나처럼 곤란한 표정을 짓고 아직은 어린 소년같은 목소리로 웃기만 했다. 그게 날 더 아프게 했다.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멀어져가는 느낌이 싫었다. 우리를 묶어주던 '소꿉친구'라는 끈이 어느 순간에 끊어진 것 같았다. 오며가며 걷는 것 외엔 대화도 별로 없었다. 엄마가 오늘은 우리집 와서 밥 먹으래, 하는 시덥잖은 것들이 전부였다. 서로가 같을 수 없다는 걸 느낀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갈림길로 접어든 채 끊없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너는 그대로인데 나 혼자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복잡했다. 마음이,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수없는 갈림길이, 네가 서 있는 길이.





















2









꿈을 꿨다.



기억날 리가 없는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언제나처럼 네가 있었고, 덧셈도 제대로 못 했던 시절.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네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그마한 손에 흙이 잔뜩 묻은 더러운 곰인형을 꼭 쥐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얼굴로. 엄마는 한참 울던 나를 당신에게서 떼어 놓고는 너의 이름을 부른다. 지은아, 태일이가 너 줄 거 있대. 가 봐. 눈물을 흘리느라 목이 메이는지 너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이거…너. 니 꺼. 네가 내민 그 곰인형에서 모래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네게서 인형을 낚아채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보드라운 턱에 더러운 흙이 잔뜩 묻어도 아랑곳않고, 엉엉. 그 때 네가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찾아 줄게, 나만 믿어.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렀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금세 열일곱이 되어 있었다. 아직 앳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웬일인지 교복을 다 차려입은 네가 빵 조각을 입에 물고 이제 막 잠에서 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일어나. 이불을 벗겨내자 티셔츠가 가슴께까지 말려올라가 있었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너는 못본 체 했다. 그리고는 말도 없이 방 문을 닫고 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3





네 자그마한 귀에 박힌 까만 귀걸이를 발견했다. 내가 물었다.






"너 귀에 그거 안 걸리냐."
"얼려."






무슨 말이야. 입에 토스트를 문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너는 가방을 고쳐메고 다시 답했다. 걸린다고. 






"너 또 벌점받으면 위험하잖아."
"그렇지."
"…비싼거?"
"별로 비싸진 않아."






너는 다시 토스트를 입에 물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한다. 나는 그걸 더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입을 다물었다. 네 귓볼에 박힌 까만 동그라미가 유독 크게 보인다. 너는 무슨 베짱인지 별 걱정 없어 보이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 보았다. 네가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짙게 쌍커풀진 눈이 다시 가늘고 길게 변했다. 






"아 깜짝이야."
"뭘 그리 놀래."
"벌레인 줄 알았잖아."
"병신."






너는 머쓱한지 귓볼을 만지작거리며 교문을 넘었다. 저 멀리 학주선생님의 높게 솟은 스포츠머리가 시야에 들어오지만 너는 아직도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그리고 익숙한 손짓. "오셨는가, 우리 패션왕 이태일 군." 학주선생님은 눈도 참 밝다. 네 귓불에 박힌 까만 점이 햇살 아래서 수박씨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가오는 선생님. 너는 매직으로 삐뚤빼뚤하게 '사랑의 매'라고 쓰인 몽둥이와 함께 저 편으로 사라진다. 학주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과 즐거운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님이 소리쳤다.






"여친 너도 따라와라!"






저 여자친구 아닌데요!

의아한 시선으로 지나치는 다른반 아이를 곁눈질하며 나는 너와 학주선생님의 뒤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달음박질쳤다. 모든 건 너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도, 내가 갑자기 열일곱이 된 것도, 한여름에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게 된 것도.




















5






네 방에 프린트를 가지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우연히 탁자를 봤다. 아침에 네가 빼앗겼던 것과는 조금 다른, 광택이 있는 까만 귀걸이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한참동안 매만졌다. 네 통통한 귓볼이 손 끝에 닿는 것 같았다. 





















6








방학이 왔다. 너는 우리반 남자아이들을 모아 계곡에 놀러 가기로 했다며 즐거운 표정으로 짐을 쌌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룻밤 자고 올 테니 물고기들 밥좀 꼭 챙겨달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이 쿵 닫혔다. 나는 인터넷을 하다가 말고 네가 나간 자리에 가라앉는 먼지를 주시했다.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작은 수족관에도 눈길을 주었다. 물고기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유없이 우울했다.

그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생리통 때문에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오늘 아침의 너는 과자 사는김에 샀다며 내게 초콜렛을 한웅큼 던져 주었다. 생리통 심하다며, 단거 먹으면 좀 괜찮대. 나는 그런 너의 호의에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바라는 거 있냐? 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짜증 좀 그만 내라고. 심하면 약 먹던가."



네가 사라지자 집이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심해로 침전한다. 그러다가 문득 네가 내 생리 주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땅히 해야할 일도, 하고싶은 일도 생각나지 않으니 괜한 생각만 한다. 내 주기가 그렇게 규칙적인 편도 아닌데. 나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나 지대했던가, 아니면 내가 너무 티가 나게 인상쓰고 다녔나. 아무렴 너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 눌러붙은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걸어갔다. 네가 준 초콜렛을 먹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콜릿을 하나 먹었다. 더럽게 달았다. 다른 건 더럽게 썼다. 양치하는 것마저 귀찮아서 그냥 누워 버렸다. 네게선 몇시간째 연락이 없었다. 재밌게 놀고 있다고 한 마디라도 해 주지. 나는 괜히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저 그런 오후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는 이미 여덟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저녁먹기는 글렀다 싶어서 그냥 남은 초콜릿 몇 개를 더 먹고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너였다.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이유없이 네가 괘씸해져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문자도 없었다. "이 끈기없는 새끼." 괜히 너를 탓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네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헛기침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참 나답지 않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너 뭐하냐."
"뭐하기는, 집에 있지."
"배는 괜찮고?"
"어. 약 먹었어."
"약 계속 먹으면 내성 생겨. 웬만하면 먹지 마."
"아깐 먹으라며."
"정 아프면 먹으라고. 물고기 잘 있냐?"
"너 물고기 때문에 전화했지, 나쁜 놈아."
"들켰네."







그게 참 무슨 별일이라고. 생리 때문에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수화기 너머의 너에게 투정을 부렸다. 누군가가 너를 부르는지 커다란 목소리가 저편에서 아득하게 이태일! 하고 소리쳤다. 너는 대충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다시 수화기 앞으로 돌아와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일던 사막에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공기도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대답했다. 응. 







"너 내 물고기 죽이면 너도 죽는거야."
"알았다고, 새끼야."
"그럼 잘 지내고. 내일 갈게."
"너 없다고 내가 밥도 못 챙겨먹는 바본 줄 아냐."
"아줌마도 부부모임 가시고 안 계시잖아. 너 저녁은 먹었냐?"
"…아니."
"거 봐라, 뭘 시키든지 해서 좀 먹고 살라고. 평소엔 없어서 못 먹는 애가 생리만 하면 거식증이냐?"
"살 뺄 거거든. 옘병이다. 끊어!"







그러고 나서 나는 네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네가 즐거운지 깔깔 웃었다. 그 앳된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너는 한참 웃더니 뭐가 그리 즐겁냐는 친구의 물음에 응? 하고 되물었다. 내가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하나보다. "누군데 그렇게 통화를 오래 해?" "아, 안지은." "니네 진짜 사귀냐?" "뭔 개소리야." "아님 말고." 그런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네 생각이 났다.


네가 없는 순간은 참 많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많은 기억이 떠오른다. 네가 어디 먼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고 죽으러 간 것도 아닌데. 파노라마처럼 몇년간의 잔상이 머리를 스친다.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이를 테면 주말 아침에 머리를 긁으며 일어나는 모습이라던가, 요리를 하다가 냄비를 잔뜩 태워먹고 혼나는 모습이라던가.

문득 밥을 챙겨 먹으라는 네 말이 생각나서 나는 거실로 나갔다. 한참 고민하다가 족을 시켰다. 혼자 먹기에는 과분하고 더없이 외로운 메뉴지만 먹고 싶었다.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주말 일과는 언제나 저녁을 먹으며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는 것이었으므로. 네 집엔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너는 틈만 나면 우리집에 놀러 오곤 했다. 토요일 저녁이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있었다. 저녁은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7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너는 학기중에는 다니지 못했던 보컬학원을 다시 등록했다. 나는 자율학습을 했다. 6시에 가도 됐지만 괜히 오기를 부려 10시까지 남아 있게 됐다. 너는 집에 부모님도 잘 안 계시는 데다 나가서 밥 사먹는 돈도 아깝다며 급식비만 내고 저녁 시간엔 학교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열시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안 됐기 때문에 나는 너와 단 둘이 밥을 먹었다. 아이들 눈치를 보느라고 학교에서는 별 대화도 하지 않는 사이인지라 나는 너와 마주앉아 급식을 먹는 게 낯설었다. 하지만 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실 나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또 '너네 사귀냐?'하는 질문을 받을까봐. 반면에 너는 지나치게 무심했다. 






"노래는 잘 돼?"






네가 국을 입에 밀어 넣다가 내 말에 시선을 들어올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노래?






"보컬학원 잘 다니냐고."
"내가 누군데, 천하의 이태일이야."
"근데 어쩌라고."
"니가 이 오빠의 노래를 들으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릴거다."
"지랄도 병이라는데."






너는 그냥  픽 웃고 만다. 얼마나 늘었나 싶어서 노래방이라도 가자고 운 띄워 본 건데, 눈치라고는 밥풀만큼도 없는 너는 오늘도 나를 비껴간다. 나는 국을 먹느라 수그려진 네 정수리에 대고 주먹질 하는 시늉을 했다. 네가 미워서. 반들반들한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밥 맛없냐? 표정 똥 씹었네. 네가 나를 숟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조온나 맛있거든. 내가 대꾸한다.






"너 또 생리하냐? 요새 무슨 말만 하면 태클이야?"






생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네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툭 튀어나온 이질적인 단어가 이유도 없이 내 마음을 긁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감고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냐. 한달에 두 번 생리하게?"
"그럼 왜자꾸 심통이야."
"몰라."
"뭐야, 너도 여자다 이거야?"
"그래 나쁜 새끼야. 나도 여자라서 그런다 왜!"






나는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너에게 미안할 정도로 나는 제멋대로다. 나도 네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요새 자꾸 투정만 부려 네 신경을 잔뜩 긁어놓았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나는 이유없이 서러워져 네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가 어렵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은 급식을 전부 버렸다. 몇 입 먹지도 않은 돈까스를 버렸으니 네가 놀랄 만 했다. 나는 정말 왜 이럴까. 네가 낯설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너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가 없다. 남매처럼 자랐던 우리 사이엔 높고 두꺼운 유리벽이 생겼다. 그건 나 혼자만 느끼는 벽이다. 그래서 나는 더 고독하고 어지럽다. 내게 끝없이 다가오는 너와 너에게 더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는 나.

분명히 후회할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짐짓 당당한 걸음으로 급식소를 나섰다. 눈물이 났다. 미처 다 먹지 못한 돈까스 때문에,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내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너 때문에.
네가 내린다. 마른 하늘에 소나기가 내린다.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 그런 소나기가 내린다. 나에게만 내린다. 내 뒤로 네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나온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네 팔이 나를 가둬올린다. 나는 덫에 갇힌 토끼가 되어 발버둥친다. 대체 왜 그러는데! 네가 소리친다. 네 예쁜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지마, 달래려고 하지 마.
나는 네가 밉다.

















8






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지독한 감기가 찾아왔다. 너 대신 감기가 내 방문을 두드리고, 내 이불을 걷어내고, 내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던져 주었다. 너는 연락도 없었다. 항상 싸우고 나면 며칠 안 돼서 평소처럼 문자를 하곤 했던 네가 주말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엄마는 "태일이하고 싸웠니? 안 오네." 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이름을 들으니 기침이 났다. 아니 기침이 나는 순간에 네 이름을 들었다. 나는 성대를 뱉어낼 것처럼 격렬하게 기침했다. 목이 따끔했다.

교실에 먼저 도착해 있던 너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뭔가를 듣고 있었다. 나는 너를 힐끔거리며 가까이 가 볼까 했다가 다시 돌아앉고 말았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화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실낱같이 남은 오기와 너에 대한 원망이 발목을 틀어쥐었다. 나는 체념하고 문제집을 꺼냈다. 문제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씨가 제멋대로 튀어나와 춤을 추고 뒤섞였다. 그것들은 다시 흩어져 몇 방울의 잉크가 되고, 다시 모여 어떤 글자를 만들어냈다. 미안해. 글씨가 전부 그렇게만 보였다.

나는 너와 싸운게 아니었다. 나는 너를 멀리 밀어내고야 말았다. 이기적인 내 마음이 착한 너를 도려냈다.
너는 내가 싫어진건지, 우는 날 보고서 질린건지, 아니면 그저 내가 불안해 보였던건지 수업이 끝나고 자습이 시작될 때까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선 조금 서먹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런 우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만 태평양 한 가운데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지난주와 다름없는 시끌벅적한 교실 한 가운데서 나만 너를 향해 끊임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나를 애써 외면하며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자마자 바람같이 뛰쳐나갔다. 나는 너를 붙잡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네가 나간 뒷문만 빤히 봤다. 내일 풀면 되겠지, 생각은 했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일도 어쩌면 모레도 너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단지 예감이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길한 생각도 했다.

나는 그날 자습을 했다. 너는 저녁을 먹을 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급식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파게티가 나왔다. 네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혼자 먹기 창피한 마음보다 네가 빠져나간 웅덩이가 너무 깊은 탓이 컸다.
























9








일주일이 지나고 장마철이 찾아왔다. 어저껜 아파트 어귀에 있던 가느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채 뽑혔다. 엄청난 위력의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들려왔다. 학교 가는 길에 본 그 나무는 생명을 잃은 채 앙상한 시쳇가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뿌리가 있었던 자리엔 흙이 움푹 패여 있었다. 마치 네가 빠져나간 내 일상처럼. 나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산을 고쳐 썼다.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놓고 가기가 일쑤인 너는 매년 이맘때 즈음이 되면 내 우산으로 뛰어들오곤 했다.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털어내며 내 우산을 낚아채 들고서. 어깨가 다 젖게 생겼다며 투덜대는 나를 향해 잇몸이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고 말했다. "더 붙어." 네 팔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큰 키도 아닌 네가 그렇게 커 보이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우산 아래서 혼자가 되었다. 내 우산속의 작은 하늘 뿐만 아니라 소낙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 넓은 세상에서도, 나는 혼자가 되었다. 너는 네 우산을 들고 등교했다. 혹시 우산이 없는 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할까봐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말도 사양하고 너를 기다렸다. 너는 현관 앞에 서 있던 나를 봤다. 네가 우산을 펼쳤다. 내 우산으로 뛰어들어오는 대신 자신의 우산을 펼치고 나서 나를 힐끗 돌아봤다. 네 시선이 빗줄기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너는 내게 아무말도 않고 뒤돌아 갔다. 웅덩이를 첨벙거리며 걸어가는 네 뒷모습에 나는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단지 그날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을거다. 너는 그 날ㅡ네가 물건을 세우고 내가 그걸 우연히 목격했던 그 날ㅡ을 기점으로 부쩍 예민해진 나를 알았을 것이다. 너는 구태여 누군가와 싸울 일을 만드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십칠년 동안 잔잔한 물결로 이어져오던 우리 사이를 그런 식으로 단숨에 끝내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만 너를 봤던 게 아니었다. 너 또한 여자가 된 나를 봤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걸 모른 체 했다. 나는 그랬다. 너도 그랬다. 가느다란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던 내가 너를 밀어내 버렸다. 균형은 깨지고 우리는 틀어졌다. 너는 나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하기는 할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지자 불규칙적인 빗소리가 나를 쿵, 쿵, 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네 뒷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발목께에 빗방울이 튀어 양말이 축축해 지도록 걸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숨쉬고 있을 네가 어느 누구보다도 멀리 느껴졌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는 나를 지독하게 쫓아다녔고 엄마는 안 되겠다며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네가 전처럼 감기약이라도, 하다못해 죽이라도 한 그릇 사다 주기를 기대하며 버텼다. 일주일이 더 지나고, 내가 엄마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동네 어귀의 병원으로 끌려갈 때까지도 너는 나를 모른 체 했다. 너와 나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내게 왜 너와 등하교를 같이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싸웠냐는 물음에도 그냥, 이라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너는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빛나는 별만큼이나 멀었다. 그마저도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별빛을 눈에 담으려고 고개를 치켜들면 따가운 빗방울이 나를 때렸다. 


















10







"딸, 엄마 없어도 잘 할 수 있지?"





  

엄마는 내게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현관 구석에 짐가방이 가득 쌓여 있다. 아빠는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 가면 안 돼?'
"미안해. 할머니 많이 아프시대."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할머니한테 빨리 나으시라고 전해 드리고. 잘 갔다와."
"그래. 일주일만 집 잘 지키고 있어. 이상한 사람한테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할머니가 몸이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하고 거듭 묻는다. 







"정 그러면 태일이한테 밥 해달라고 하고."
"…어, 응."
"너 진짜 태일이랑 싸운거 아니지? 요새 너희들 내외하니?"
"그런거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태일이한테 잘 해주고. 둘이 알아서 할 나이라고 믿는다, 엄마는. 잘있어 딸!"







아빠가 화이팅 하는 시늉을 해 보이고,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벽을 따라 죽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평소같았더라면 당장에 널 불러서 맛있는거 해 달라고 졸랐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기분이 이상하다. 집이 텅 빈 기분이었다. 창밖엔 겨우 비가 그쳤다. 나는 오랜만에 마른 하늘을 보다가, 얼마 안 지나서 다시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에 허둥지둥 뒷베란다에 쟁여 놓았던 쓰레기 봉투를 꺼냈다. 오랜 장마에 잔뜩 물기를 머금은 쓰레기에서 눅눅한 냄새가 났다. 무게 때문에 빨리 뛰지도 못하고 뒤뚱뒤뚱 걸어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관이었다. 자다 일어나 잔뜩 뻗친 앞머리에 뺨에 돋은 여드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분리수거장엔 네가 있었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상자를 재활용 수거함에 던져넣던 네가 말없이 다가와 선 나를 발견하곤 잠시 동작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몇초간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상자 더미에 손을 집어넣는다. 이 시간이 가면 너에게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너는 네가 가져온 쓰레기를 다 정리하고 돌아서려는 듯 하더니 다시 양 손에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든 나를 본다. 상자를 밟고 올라서 있는 네가 무척 커다랗게 보였다. 너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반팔 티셔츠 사이로 네 하얀 팔뚝이 보였다. 어릴적에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단단하고 남자다워 보였다. 너 참 많이 변했구나. 나는 너를 쳐다봤다.

너는 물끄러미 허공만 보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양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를 낚아채 수거함에 던졌다. 바람이 불었다. 너는 마치 절벽위에 선 한 마리의 살쾡이 같았다. 나는 주춤주춤, 너에게 다가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너는 그런 나를 뒤에서 멀뚱히 보기만 했다. 네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내 뒤통수를 꾹꾹 찔렀다. 무슨 심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지는 모를 일이었다. 카드를 넣어주십시오, 낯선 기계음이 말했다. 카드를 넣자 덜컹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역한 음식물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쓰레기를 재빨리 털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내가 카드를 빼고 뒤돌아서는 순간까지도 너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현관 쪽으로 돌아가려는 내 뒤를 따라 너도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그런 네가 어색해 견딜수 없었다. 나는 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집은 15층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계단으로 간다면 내가 널 피하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가 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우리는 정적 속에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몇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같은 숨을 공유하며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이 숨막히도록 갑갑했다. 나는 너와 뭘 화해하고 싶은 걸까. 뭐가 미안한걸까. 한없이 생각했다.

15층입니다. 친절한 엘리베이터가 말했다. 우리는 옆집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내렸다. 집 비밀번호를 누르는 내 뒤로 네가 말했다. 여전히 하이톤이지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밥 굶지 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삑,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재빠르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에 기대어 네가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11







나는 문득 기억했다. 남자가 된 너를 처음 봤던 그 날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네가 괘씸해서 나는 침대위로 올라가 네 허리께에 앉았다. 내가 그때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괜찮았을까. 눈을 뜬 네 앞엔 내가 있었다. 짧은 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넌 항상 조그맣고 장난스러운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아주 당연하게도 네가 어른이 되지 않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너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린아이의 허물을 벗고 어엿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아주 분명한 존재감으로 부풀어오르는 네 바지춤이었다. "미친."너는 내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황해 황급히 너에게서 떨어졌다. 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나 앉았다. 나는 도망쳤다. 네게서, 이 현실에서.






몇 분 뒤의 날씨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이곳은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이다. 나는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지만. 더듬어 보기라도 한다. 암흑을.

너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은 너를 위해 어디가서 멍청이 소리 안 들으려면 교양 지식이라도 쌓아야 한다고, 읽었던 책의 줄거리를 종종 말해주곤 했다. 귀를 틀어막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너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경청하고 있다는 듯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에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몇달전에 슈뢰딩거의 양자물리학에 대한 책을 봤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침대 아래에 기대어 앉아 있는 네게 그게 어떤 이론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너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난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너를 위해 책에 실려 있는 실험에 대해 말해 주었다.






"상자 속에 고양이가 들어있는 거야. 그리고 상자엔 독가스를 분사하는 장치가 있고. 이 독가스를 맞으면 반드시 죽어. 독가스는 한시간 후에 분사돼. 그런데 이 독가스가 분사될 확률은 50퍼센트야. 분사가 됐을지 안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한시간 뒤에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고양이 불쌍해."

"상상속의 실험이야, 병신아."

"그래도 왜 멀쩡한 고양이를 죽여."

"말을 말자. 하여튼 이걸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대. 고양이가 반쯤 죽을 수는 없으니 죽거나 살아있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는 거지."

"그걸 누가 몰라? 싱겁네."

"사실 나도 이 책 이해 안돼. 막 철학도 나오고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곘어."

"모르면서 아는 척 쩐다."

"지랄. 아예 안 읽은 너보단 낫거든?"







너는 깔깔 웃었다. 벌써 몇달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실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알 수 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고양이가 죽었을지 살았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 너와 나 또한 상자를 열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 
미래는 불투명한 게 아니라 온통 검고 깊었다. 혹은 너무 투명해 들여다 본다한들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내가 남자가 될 너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다. 어둠 속에서.























12









열 시가 넘은 늦은 시각에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처럼 밤이 어두운 날에는 네 생각이 났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별이 많았다. 도시의 하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티없이 깨끗한 청남색의 구와 군데군데 박힌 작은 불빛. 한참 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씻겨내려 가 버렸나 보다. 이곳은 태초의 우주가 되었다.




터덜터덜 골목을 따라 걸어내려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힐끗 뒤돌아보니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다. 설마. 내게 그럴 일이 벌어질 리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염두해두는 나로서는 여간 켕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천천히 걸어 보았다. 남자가 나를 앞질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남자는 느릿느릿한 걸음 그대로 나를 따랐다. 마치 내 뒤를 밟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대개는 내가 김칫국을 마신 걸로 사건이 마무리되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도 내가 안전할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너를 떠올렸다. 같이 가기만 했더라면 별 일 없었을텐데. 괜히 네가 미워졌다. 머릿속이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찼다.

섣불리 큰길로 뛰어가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그랬다가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면 이만저만 창피한 일이 아니므로. 가슴이 세게 뛰었다. 손이 휴대폰에 가까이 갔다. 하지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은 시골로 떠나신지 오래고, 섣불리 경찰에 연락했다가는 괜히 일만 복잡해질 수 있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전화해볼까 했지만 다들 나랑 집 방향도 다른데다가 과외가 있다며 급하게 뛰어가지 않았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부만 넘겨보다가 문득 생각난 건, 다름아닌 너였다.

엄지손가락이 통화버튼 위에서 맴돈다. 남자는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고, 그가 범죄자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너에게 전화를 건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네가 나를 위해 마중을 나와줄지도 모르겠고, 설령 나와 준다 하더라도 나는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하며 돌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너를 마주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네 얼굴만 봐도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하루종일 떠들곤 했는데.

나는 어둠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금방이라도 나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는 그 몇초간의 공백을 몇 시간씩이나 되는 것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끼며 네가 제발 전화기를 두고 가지는 않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여보세요."
"아……."







나는 대답대신, 멍청한 감탄사만 흘렸다. 변함없는 네 목소리는 사뭇 진지하지만 내가 알던 그대로, 앳된 소년의 것이었다. 네가 수화기 너머로 나를 불렀다. 나는 전화기를 고쳐 들었다.







"…왜."
"아, 아니. 너 집이야?"
"어. 무슨 일 있어?"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냥…바빠?"
"안 바빠."
"있잖아, 진짜 미안한데… 잠시만 나와줄 수 있어?"
"왜."
"별 건 아니고. 너무 어두워서…어두워서……."







목소리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내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르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흔들리는 목소리만 나왔다. 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대답이 없더니 지금 어디야? 하고 물어 온다. 







"집앞에 골목."
"나갈게. 기다려."







나는 잰걸음으로 걸었다. 남자는 집이 이 근처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목표이기라도 한 건지 끊임없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네가 빨리 와 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수도없이 되뇌었다. 나와 남자는 정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젠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내 이름을 외치며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너와 서먹했던 기억이 잠시 사라지고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너는 추리닝 차림으로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내 앞에 다가와 섰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네 얼굴이 나는 가슴이 메일 정도로 그리웠다.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원래 가던 길을 간 것인지, 아니면 나를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안도감에 힘이 풀려 네 팔을 부여잡고 잠시 휘청였다. 







"나 왜 불렀어."
"미안, 이상한 사람이 자꾸 따라와서…근데 전화할 사람이 없었어."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너에게서 달아나려고 해도 이미 내가 너무 깊은 늪에 발을 들였다는 걸 알았다. 너무 당연해서 깨닫지 못했던 너였다. 너는 내게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네가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맑았다. 너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걸 받아들고 껍질을 깠다. 내가 좋아하는 초코맛 사탕. 사탕을 좋아하는 너는 항상 네가 먹을것을 사면서 내것도 조금씩 챙겨오곤 했다. 너는 이미 사탕을 입에 물고, 하얀 막대기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도시의 하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하늘이었다. 나는 네 얼굴도 보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너도 그랬다. 우리는 끊임없이 걷고 있었다. 다시 출발선을 향해.
정적을 깨고 네가 물었다.






"…아줌마 시골 내려가셨다며."
"응."
"언제."
"어제 갔어."
"집에 혼자야?"
"…어."







점멸하는 가로등불 아래서 누런 빛으로 깜빡이는 네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만 했다. 네 질문엔 목적이 없다. 그래서 너도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했다.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골목을 따라 올라서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목에 간간히 또르륵, 또르륵 하는 소리만 들렸다. 네가 입에 물고 있는 사탕과 이빨이 맞부딪혀 나는 소리였다. 졸린지 눈꺼풀을 비비는 네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이태일."
"왜."
"너 왜 요새 저녁 안 먹냐."
"…귀찮아서."
"말이 되냐?"
"걍. 가기 싫었다."
"그러니까 왜."
"그냥 그렇다니까."







너는 대답을 피한다. 내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겠지. 곤란하다는 듯이 목덜미를 긁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너는 밥 먹냐? 네가 물었다. 니가 굶지 말라며. 아 그랬지. 너는 또 머쓱해 한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한다.







"밥 먹자."
"어?"
"학교 다시 오라고. 나 밥 혼자 먹어."
"……."
"올거지?"
"…야, 너는 무슨 애가!"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울컥, 말을 뱉으려다가 만 네가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네가 하려던 말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항상 제멋대로인 나와 어쩔 수 없이 지고야 마는 너. 괜히 따져봤자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 너는 그저 답답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기보기만 한다. "아…아니다." 너는 그러고 말았다. 우리가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게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 기분만 내세워 잔뜩 짜증을 낸 나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남자가 된 너를 보기가 힘들어 그랬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다. 그저 네가 내 마음을 깨닫고 물 흘러가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화해를 청해줬으면 하고 바라기만 한다.  







"미안."







내가 말했다.








"…뭐가."
"그냥, 다. 미안."
"……."
"이제 너 밥 먹으러 오는거지?"







내 물음에 너는 한숨을 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너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가 말고 다시 나를 쳐다본다. 말하지 마. 네 떨리는 잇새로 새어나올 추궁의 말들이 두렵다. 너는 체념한 표정으로 부스스해진 내 머리칼에 손을 올려놓았다. 가볍게 머리를 스쳤다가 떨어지는 네 손바닥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크다. 







"야."
"왜임마."
"생리할 땐 니가 참아라."
"생리 안 할때도 성격 그지같은게."
"아 시발, 반박할 수가 없다."







나는 킥킥 웃으며 네 옆구리에 주먹을 지르는 시늉을 한다. 기집애가 욕 좀 하지 말래니까. 너는 내게 그리 말하면서도 작게 웃는다.
우리는 그리도 먼 골목을 돌았다. 나는 여자가 되고, 너는 남자가 되어.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열일곱의, 여름.










13






며칠이 지났다. 너는 약속대로 저녁을 먹으러 꼬박꼬박 등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다시 노부부의 재결합이라며 우리를 놀려대기 시작했고, 너는 예전처럼 웃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전보다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너는 멀찍이 떨어진 네 자리에서 가끔씩 뒤돌아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씩 웃었다. 같이 웃어 주었다. 까맣고 동그란 네 뒤통수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























14





막 집에 들어와 씻고 나오려는데 거실에 네가 앉아 있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 했다가 겨우 너라는 걸 알아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는 쉰 냄새가 나는 반찬통 몇 개를 흔들며 말했다. "미역, 무말랭이, 장조림." 아줌마가 반찬을 해 주신 모양이었다. 

덜 마른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얇은 티셔츠에 퍼지는 물기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비비면서 다가갔다. 너는 가만히 서 있다. 문득 올려다본 네 시선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저 우리집을 한바퀴 둘러보는 것처럼 초점없는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해가 떠오르고 지듯이 옮겨간다.







"어. 땡큐. 아줌마한테 잘먹겠다고 전해드려."







네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 온다. 수건과 젖은 머리칼로 가려진 시야로 네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뭘 보냐."
"너 끈 꼬였어."
"뭐?"







설마 하며 어깨를 내려다봤다.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급하게 입은 브레지어 끈이 구불구불하게 꼬여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짐짓 태연한 체 하며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한참동안 꼬인 끈을 풀지 않고 있었다.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끈을 풀며 문득 생각했다. 너에게 나는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달려가고 있었다. 내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15









내가 열일곱이던 그 해의 여름은 가공할만한 무더위를 자랑했다. 커다란 너의 그늘도 나를 녹여버릴 듯 쬐이는 햇빛을 다 가리지 못했다. 나와 너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방학 같지도 않은 방학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차피 학교에 열 몇 시간씩 앉아있게 할거면 방학이라고 하지를 말던가. 입이 툭 튀어나온 내가 불평하자 너는 사탕 막대기를 뱉어내고 웃기만 한다. 간간히 높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네 콧노래는 진짜 가수가 부르는 것처럼 편안하고 세련됐다. 너는 점점 꿈에 가까워지는구나. 나는 아무렇게나 펼쳐진 문제집을 내려다보며 막연하게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본다.

너는 물고기를 한 마리 샀다. 비싼 돈 주고 고작 산다는 게 물고기야? 나는 물었지만 너는 그게 노래부르는 것 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라고 했다. 네가 작은 수족관 앞에 앉아 그것들을 가만히 관찰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가끔 네가 물고기를 닮았다고 느꼈다. 앳된 웃음으로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다를 헤엄치는 너와 세상. 너는 마치 인어같은 사람이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다가 문득 애완동물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네가 생각나서였다. 나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한참동안 작은 목숨들을 어루만졌다. 네가 왜 작은 것들에 목을 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주홍빛 금붕어 두 마리를 샀다. 투명한 봉투에 위태로이 담겨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는 지느러미가 애처로웠다. 둥그런 어항에 자갈도 조금 깔고, 이것저것 장식도 넣어 주고 금붕어를 부었다. 자유로워진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기도 하고 둥그런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도 한다. 신기했다. 이 어린 목숨들이. 그리고 항상 그런 것들을 지켜보는 네가. 네가 나보다 한참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아는 것도 없고 성적도 훨씬 나쁜 네가 오빠처럼 커다랗게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이태일."
"왜."
"넌 동물이 왜 좋아?"
"귀엽잖아."
"안 귀여워지면? 싫어?"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니지."
"귀여워서 좋다며."
"아 몰라. 뭘 자꾸 따져?"







복잡한 걸 싫어하는 너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크게 하품을 한 번 한다. 그리고 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몰라, 나도."







나는 그런 네가 좋았다. 이유없이 동물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싫어하고, 잡고 놓는 데 분명한 이유와 마음이 있어야 하는 나와는 달리 너는 누군가를 조건이 아닌 사람 그 자체로 대했다. 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좋다고 했다. 그 사람이 똑똑하건 멍청하건 능력이 있건 집이 좋건간에. 아마 그게 우리의 차이고 내가 너를 인정하지 못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16







금요일, 열 시가 넘은 시각에 네가 불금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과자를 잔뜩 사들고 우리집으로 건너왔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심심하다는 핑계로 우리집 마룻바닥에 기댄 채 눌러붙은 너는 텔레비전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부모님이 전부 어디론가 떠난 어느날 밤, 눅눅한 장판에 등을 대고 누운 우리는 소음 가운데 놓인 정적 속에 담겨 있었다. 잘 준비를 하는지 네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가 다시 열리곤 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게스트들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매미소리가 섞여 울렸지만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었다. 과자를 한 조각 입에 물고 네 옆에 베게를 대고 누워 너를 봤다. 들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오르는 가슴팍이 내려갔다가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맴맴.
매미가 울었다.
수컷매미가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우는 거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원래는 낮에 울지만 요새는 밤에도 야간조명이 밝아서 종종 울기도 한다고 했다. 오래 들으니 '맴맴' 보다는 찌르르르, 찌르르 하는 날카로운 울음 같았다.
나는 얇은 이불을 덮고 너를 빤히 보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렴풋이 눈을 뜬 네가 내 쪽으로 돌아 누웠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피했다. 네가 팔을 들어 내 눈을 가리며 웃었다.







"어딜 자꾸 보냐, 변태야."
"씨, 너 안 봤거든?"







퍽이나. 네가 그렇게 말하며 두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네 하얀 팔뚝이 뺨에 닿자 기분이 이상했다. 허여멀건 살이 마냥 물렁물렁하고 보드랍기만 할 것 같았는데, 언뜻 보니 힘줄이 군데군데 비치기도 했다. 느낌이 묘해서 네 팔을 들어 멀리 치웠다. 그리고 짐짓 화난 체 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열대야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끼쳐 왔다. 네가 껍질을 까듯이 이불을 벗겨내고 내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이유도 없이 더웠다. 열대야는 너였나보다. 

너는 내가 간지럼을 잘 탄다는 걸 알고 계속 나를 간지럽혔다. 나는 화장실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네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뭉툭하게 들려왔다. 몸부림치느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찬물로 적셨다. 네가 나오라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엔 네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털어 넘기며, 묽은 눈동자로, 동그란 코를 비비고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네 귓볼에는 여전히 까만 귀고리가 박혀 있었다. 광택이 없는 뿌연 색의 동그라미가 통통한 살을 뚫고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언젠가 네 방에 들어가 몰래 만져 보았던 그것이었다. 손 끝에 닿았던 낯선 플라스틱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너는 남자였다. 나를 보며 웃는 모습도, 아무렇지 않게 장난치는 모습도 전부 십년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나는 전처럼 너를 대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 전부 우리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고 내가 그런 너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네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나서도 나는 한없이 흔들린다. 손 끝에 닿았던 네 귓볼이, 부드러운 살의 감각이 깨어났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자겠다는 말을 남기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너는 더이상 쫓아오지 않고 싱겁게 웃기만 했다. 네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저 오래된 삶의 한 조각일 뿐일까. 네게 특별한 하나의 의미가 되는 나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상하다. 어울리지 않았다.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쳤다. 네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의 너를 상기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훌쩍 커버린 네가 아직 덜 여문 소년의 모습으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너는 열대야처럼 나를 삼켰다. 내가 열일곱이 되던 여름.















17








이상한 꿈을 꿨다. 온통 일그러지고 왜곡된 꿈의 공간에서 너와 나는 한없이 걷고 있었다. 너는 내 손을 잡았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나는 말없이 너를 따라 걸었다. 뒤틀린 세상 속에서 너는 내게 입을 맞췄다. 미친 놈. 놀란 내가 말했지만 너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 어렴풋하게나마 이게 꿈의 한 자락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네 목소리가 들렸다. 아득한 저편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던 그 목소리는 내가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어나!"
"아 시발 깜짝이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벌떡 일어나 앉은 내 눈앞의 너는 덥수룩하게 엉겨붙은 머리를 한 너저분한 모양새였다. 방금 내게 입을 맞췄던 꿈속의 네가 현실의 네 위에 오버랩되며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흐려지던 꿈의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하면서 심장이 세게 뛰었다. 미친, 나 왜 그딴 꿈 꿨지? 진짜 미쳤나봐.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너를 보는 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나는 네 등을 떠밀어 방에서 내보냈다. 영문도 모르고 밀려나는 네가 야! 야! 안지은! 하고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붉어진 뺨을 들키는 게 창피해서. 







"아침 먹으라고! 나 간다!"







그 말과 함께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침대에 미끄러지듯이 누웠다. 침대 옆에 놓인 전신거울에 언뜻 비친 내 얼굴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저분하고 황량하다. 그리고 와중에도 이런 모습을 네게 보이기 싫은 내 자신이 한심하다. 몇 년을 형제처럼 알고 지냈는데 이제와서 부끄러운 소녀 행세라니. 네가 이런 나를 본다면 웃기지도 않는다며 콧방귀를 뀔 지도 모른다. 이 흐릿하고 불투명한 감정을 뭐라고 정의내리면 좋을까. 갈 곳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누운 채 네 생각을 했다.

네가 차려놓고 나간 아침은 가운뎃부분이 시커멓게 탄 빵 몇쪽과 잼, 계란프라이 하나와 너무 빨리 구워 이미 차갑게 식은 베이컨이었다. 삐뚠 글씨로 '빵 탔다. 미안.'이라고 적힌 쪽지가 식탁 끄트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걸 주워들어 한참을 봤다. 제멋대로 뻗은 글씨가 너처럼 삐죽빼죽했다. 

푸석푸석한 빵을 씹으면서 내 방을 둘러 보았다. 어느하나 네가 묻어있지 않은 게 없었다. 네가 떨어뜨려서 목이 날아간 도자기 인형, 초등학교 때 네가 생일선물이랍시고 푼돈을 모아 사준 종합문구세트, 네가 직접 만든 허술한 나무선반, 유명한 가수가 되면 필요할거라며 어느날 잔뜩 가지고 온 네 싸인 등등. 별 희한한 사연과 역사를 가진 것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렇게도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에서부터 출발한 젊은 피가 온 몸을 향해 뻗어나간다. 맥박이 세게 뛰었다. 세상의 모든 붉어지는 것들은 열렬하다. 뺨에 열꽃이 돋았다. 나는 이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내가 착각에 빠져 있는 거라 자위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돌아오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비참하고도 틀림없는 사실이.














18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다시 심심하고 아늑한 삶으로 돌아와 등교와 하교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굳이 네게 여성스럽게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너를 대했고 너는 조금의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태어난 이래로 가장 큰 고민에 빠져 있다. 성적이 떨어졌을 땐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됐고, 돈이 부족할 땐 엄마에게 부탁을 하면 됐다. 하지만 이건 오직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너를 좋아한다고 한들 네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네 얼굴을 보고 걷는 것도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그리고 너를 '좋아한다'는 말 또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이질적이었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무심하고 장난기 많은 너와 예민하고 잘 토라지는 나. 나는 떠올려 보기도 했다, 네가 내 손을 잡고 살가운 말을 속삭이는 광경을. 정말이지 헛구역질이 나도록 이상한 모양새였다.

내가 속으로 앓으며 너를 지켜보는 동안 많은 시간이 지났다. 무더웠던 날씨도 방학의 종료와 함께 뭉근하게 풀려가는 낌새였다. 여름이 수평선 너머로 노을을 뿌리며 저물고 있었다. 










19






"이민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입술을 꼭 깨문 훤칠한 키의 남학생이 전학을 왔다. 개학하자마자 맞는 첫 전학생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게다가 꽤 준수한 외모였던지라 소문은 금세 전교로 퍼졌고 쉬는시간의 복도는 전학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도 얼굴이 궁금해 전학생을 곁눈질했다. 높은 콧대와 큰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잘 생겼다 싶어 한참 넋 놓고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약하게 쳤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한 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올린 네가 있었다.







"사람이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냐."
"못 들었어."
"여섯번 불렀거든."
"진짜? 미안. 왜?"
"너 내방에 이거 놓고 갔더라."







네가 내 책상에 공책을 소리나게 탁 놓았다. 필기노트였다. 아…고마워. 내가 멍청하게 감탄사를 흘리자 너는 혀를 끌끌 찼다. 너는 내 시선이 있던 쪽을 잠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잘생겼다."
"누가."
"전학생."







반했냐? 내가 묻자 너는 무슨 개소리냐며 내 등을 가볍게 때렸다. 전학생은 잠시 우리를 뒤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선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다가가기 쉬울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었다. 어쩐지 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전학생을 둘러쌌던 인파가 다시 흩어졌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내 앞에 앉은 전학생은 어깨도 훤칠하게 넓고 머릿결도 좋았다. 연예인 지망생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게 앉아 있는데 전학생이 갑자기 뒤로 돌아 앉았다. 당황한 내가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자 전학생은 씩 웃으며 말했다.







"지우개 좀 빌려줘."







나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으,응? 하고 바보같이 대답했다. 필통을 더듬어 잡힌 지우개를 그 아이에게 건넸다. 왜 자기 짝한테 안 빌리고 나한테 그러지? 전학생은 고마워, 하고 눈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 앉았다. 

나는 잠시 시선을 거둬 저만치 앞에 앉은 네 뒤통수를 봤다. 네 까맣고 동그란 머리가 졸음에 간간히 흔들렸다. 나는 입술 사이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며 다시 교과서로 얼굴을 돌렸다. 여름과 가을이 뒤섞여 엉킬 무렵이었다.













20








전학생은 때때로 내게 말을 걸어 오기도 했다.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어떤 사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했다. 그 아이는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서 있으면 커다란 나무그늘에 가려진 낙엽이 된 것처럼 스스로가 창피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 너와는 달랐다.

나는 네게 전학생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네 귀에 조용히 "나 쟤 좀 불편해."  하고 속삭이면, 너는 핸드폰 액정 위로 손가락을 바쁘게 놀리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묻는다. 왜? ㅡ그냥 좀. 너무 딴세계 사람 같잖아. 그러면 너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난 그냥 그런데. 나는 괜히 무안해진다. 알고 있었다. 너는 울타리를 쳐서 타인을 막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너는 모두에게 공평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새학기가 시작되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전학생과의 교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볼펜 떨어뜨리면 주워주고, 물건 없으면 빌려주고, 수업에 필요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는 정도였다. 그 아이도 내게 있어서 특별한 전환점은 되지 못했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내 삶에 들어와 놓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일상이 되었고, 여름은 떠날 채비를 하는 듯 했다.



나는 네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시간만 보냈다. 나는 네가 날 알아주길 바래서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이유없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겐 큰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평생 이대로라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21








"아 씨, 음악실 가야 되는데."






선생님이 시킨 심부름 때문에 수업에 늦었다. 교실 문이 잠기지는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복도를 가로질러 뛰었다. 다행히 자물쇠는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가자 뜻밖에도 전학생이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는 잠깐 그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사물함을 열었다. 뒤돌아 앉은 전학생은 내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없는 시선이었으나  괜히 어색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넌 음악실 안 가?"
"쌤이 이거 쓰래서. 음악은 안 가도 된대."







전학생은 대충 서류로 보이는 종이를 팔락거려 보이며 웃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멍청하게 대답하고 그를 지나치려는데 어른처럼 굵직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너 이태일이랑 친하지?"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조금 돌려 보았다. 전학생은 인상좋은 얼굴로 씩 웃었다. "애들이 소꿉친구라길래." "아아." 무슨말을 하려는 걸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기는 했지만 그 질문의 의도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걔 노래 잘해?"
"음… 잘할 걸? 잘하던데. 아마."
"아 그러면 혹시 우리 … 아, 아니다. 내가 직접 말할게."
"아? 응. 알겠어. 이만 가볼게."







궁금했지만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러려니 하며 교실을 나섰다. 음악실로 향하는 길, 산들바람이 불었다.















22







"있잖아, 나 노래하는 거."
"어."
"막 학교에 밴드 같은 거 만들어서 한다는데 나 할까?"
"밴드?"
"락밴드는 아니고, 그냥 보컬 여러명 모여서 노래부르고 그러는 거. 축제때도 나가고, 연습도 같이 하고. 뭐…그런 거."
"…음, 글쎄."







집으로 가는 길목에 강 위를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며 너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아까 전학생이 네게 직접 하겠다고 한 얘기가 이거였나보다. 걔도 노래 부른대? 너는 "춤도 추고 노래도 한다는데." 하고 대답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연예인 같더라니 진짜였구나. 나는 네 얼굴을 한 번 보고 그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나는 네가 좋을 대로 하라는 간략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괜히 물어봤어. 너는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게 아직은 어색하다고 했다. 노래가 좋지만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며 묽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너는 한참 고민하는 듯 하더니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 결연한 의지가 서린 표정으로 나 할거야,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이 우스워서 킁, 하고 웃고야 말았다. 너는 왜 웃냐는 듯 나를 힐끔 쳐다봤다. 기왕 할 거면 잘 하라는 내 말에 오빠 못 믿니, 하는 시덥잖은 농담을 하던 네가 문득 진지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안지은."
"왜."
"넌 꿈이 뭐냐?"
"…글쎄. 글 쓰는 사람?"
"자신 있어?"
"장난하냐. 내가 글 조또 못쓰는 거 알면서 지랄은."
"…난 자신이 없다, 진짜로."







네 얼굴은 어스름한 달빛에 비쳐 우울하게 반짝였다. 나는 문득 네 불그스레한 뺨을 잡고 너를 내 품 안에 끌어들여 힘껏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는 계속 말했다. 중얼거리듯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드문드문하게나마. "난 그냥 되는대로 살았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까 앞날이 막막하기도 하더라. 글쎄, 니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잘 하는 거 보니까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왜 나는 진작 아무것도 안 했을까 싶기도 하고." 네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말을 멈추고 조용히 걸으며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일아."
"응."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불러본 적이 없던 낯선 이름. 너는 의외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순순히 대꾸한다.







"넌 잘 하고 있어."
"……."
"잘 하고 있으니까 그냥 열심히만 해."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도착하고, 우리는 각자 다른 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너는 언제나처럼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내게 짧은 인사를 남긴다. 







"고마워."













23







요즘 너는 점심시간만 되면 사라져 있기가 일쑤다. 심지어는 야자도 빠지고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 지경이다. 말이라도 걸라 치면 너는 이미 없고, 어디 갔냐고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태일? 아까 이민혁이 데려가던데." 하는 심심한 대답 뿐이었다. 음악동아린지 뭔지 한다더니 진짠가보네 싶었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반대편 건물에 있는 음악실 쪽을 쳐다봤다. 커텐이 쳐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하는지 궁금했다. 네가 말을 안 해주니 나는 알 길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너는 뭐가 그리도 더운지 수건으로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날씨도 선선해져가는데 말이다. 내가 물었다.







"너 거기서 뭐하는건데 맨날 밥만 먹고 오면 사라져?"







내 물음에 너는 잠시 대답을 찾는 듯 고개를 들어올린다. 뭐 하긴, 노래 부르지. 별 것 없는 대답이 들렸다.







"노래를 하루에 몇시간씩 불러? 안 피곤해?"
"공부하는 것 보단 나은데."
"하긴, 넌 공부 일찌감치 포기했지."
"넌 공부 재밌냐?"
"미친. 공부 재밌어서 하는 미친놈이 어딨냐. 그냥 하는거지."







네가 부러웠다. 너는 노래부르는 게 좋을 테니까. 좋아하는 일이 미래가 되고 평생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만히 올려다본 너는 보름달에 비친 짙은 푸른색이었다. 섭섭했다. 한참 고개를 수그리고 공부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2분단 두번째 자리에 항상 있던 네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방만 놓인 빈 자리가 주인의 부재를 알렸다. 저녁시간만 지나면 언제나 졸음에 흔들리던 까맣고 찰랑이는 뒷모습이 그리웠다. 그래도 나는 말없이 공부만 했다. 어리광인 걸 알았기 때문에.






"사실 지금도 연습하러 가야 되는데, 그래도 너 데려다 주려고 빨리 나온 거거든." 네 말에 나는 발등에 걸린 돌부리를 멀리 차면서 작게 웃었다. "꼴에 여자라고 걱정해 주는 거야?" "미친, 또 이상한 사람 따라온다고 울면서 전화할까봐 그런다." 나는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귀밑까지 벌개져 도망친다.







"그 얘기 하지 말라고 개놈아!"







네가 낄낄 웃으며 나를 쫓아와 가방끈을 낚아챘다. 운동부족에 허덕이는 내가 남자인 너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려 봐도 몸이 나아가지를 않았다. 너는 잡았던 손을 놓고 내 어깨를 잡아 끌어당긴다. 나는 별 것 아닌 행동에도 시선이 흔들렸다.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하면서 온 세상이 뜨뜻미지근한 빛깔로 변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조금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고 걸었다. 
네가 물었다.







"내일 갈 데 있어? 토요일."
"없는데."
"그럼 나 연습하는데 올래? 이민혁 말고 두명 더 있는데."
"내가?"
"어. 노래 평가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중엔 니가 제일 똑똑하잖아."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들켰네."






네가 햇살처럼 웃었다.






"아 참, 올때 돈줄테니까 점심도 좀 사주라. 점심 먹으러 나갈 시간 없거든."
"뭐 사가라고?"
"뭐든. 아무거나 다 괜찮으니까 장정 네명 먹을 수 있을 만한 걸로."
"알았어. 몇 시?"
"오후 두 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차서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 있었다. 네가 노래부르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빛날 너를 떠올려 보았다. 너는 이미 북극성이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떠 있다. 우리는 몇억 광년 떨어져 있을지라도 나는 언제나 너를 볼 수 있다. 비가 그친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으므로.















24








"딸, 드디어 미쳤어?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오전 열한시 쯤 부스스 일어난 엄마가 무심코 걸어나오다 부엌에 뭔가를 잔뜩 펼쳐놓고 요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한 말이었다. 진심으로 놀란 듯이 둥그레진 엄마의 눈이 감정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칼을 들고 소세지에 칼집을 내다 말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이런 내가 이상한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요리라고는 라면이나 오므라이스, 3분카레, 삼겹살 구워본 게 고작이었던 내가 무슨 오기가 발동해서 그랬는지, 아침일찍 일어나 장을 보고 와서 도시락을 싸는 중이었다. 물론 이태일과 전학생ㅡ이민혁ㅡ을 비롯한 네명의 아이들을 위해서. 한명 먹을 것도 힘든데 네 명 씩이나 챙겨주려니 여간 힘에 부치는 게 아니었지만 정말 신기한 사실은, 그 미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즐겁다는 거였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오글거림을 참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내가 살다살다 남자를 위해서 요리를 할 줄이야. 무리수를 둬도 너무 뒀다 싶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이태일이라니. 분명 너는 아무 생각도 없을 텐데 나혼자 난리치는 게 서럽기는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즐겁긴 했다.

썰고 남은 재료로 아침도 대충 때우고 완성한 사단 도시락은 입이 딱 벌어질만한 규모였다. 답지않은 소녀감성을 발휘해 데코까지 끝내자 온 몸이 물에 담근 휴지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고작 한시간 반, 쉬기는 커녕 준비하고 나가기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나를 보는 엄마의 시선은 마치 동네 미친년을 보는 듯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도 이런 내가 어색하긴 하지만 이토록 간절하게 뭔가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뿌듯한 마음이 크다. 






이중세안과 화장, 옷까지 풀세팅을 마치고 나가는 내 모습은 거울을 통해서 봐도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너는 이런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미쳤다고 하며 비웃을 지도 몰랐다. 맞지 않는 옷에 몸을 억지로 구겨넣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너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풀렸다. 여름 날씨처럼 싱숭생숭한 마음이 요동쳤다. 손아귀를 묵직하게 누르는 도시락통의 무게가 어색했다. 배고프다고, 빨리 오라는 네 문자를 보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네가 맛있게 먹어준다면야, 나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엔 썰렁한 산들바람과 모래만 간간히 섞여 날리고 있었다. 음악실까지 걸어올라가는 길은 또 왜 그렇게 긴지 모르겠다. 네게 가까워질수록 이유없는 불안함에 몸이 떨렸다. 푹신하고 두꺼운 음악실 문 너머로 악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잠깐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바보처럼 문을 두드려 보았다. 들릴 리가 있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조금 열자마자 갑자기 커지는 음악소리가 귓가를 꽝, 꽝 때렸다. 그 중 한 남학생이 나를 발견하고 노래를 끊는 듯 하더니 다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하나 둘 씩 하던 것을 멈췄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고, 이태일이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이태일! 여친 오셨다!"
"여자친구 아니라고!"







그런 소리가 섞여 들리고, 남자들은 뛰쳐나와 나를 반겼다. 너를 제외한 이성과 함께 있는 게 익숙하지가 않은 나는 머쓱하게 하하 웃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는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나를 맞았지만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나는 네 얼굴을 보자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 왔다."
"어. 잘 왔어."







네가 씩 웃었다. 
남자아이들의 고함 사이로 네 앳된 웃음소리가 흘렀다. 네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화장했냐? 괜히 민망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던지듯이 대꾸했다. 왜, 꼬와? 
너는 고개를 저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얼굴이 이상하게 진지해 보여서 하려던 말이 입가에서 덜컥 떨어지고야 말았다. 







"아니, 예뻐."







너는 그렇게 간단히 말하고 돌아섰다. 나는 멈춰선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00~10). 계속 연재.

 

 

 



















[블락비/태일] 돌고 돌아서, 다시 출발선을 향해 0~10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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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혹시 보실까 여기에도 댓글답니다. 보신다면 꼭 쪽지 확인 해주세요 ㅜ
4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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