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캐비넷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정신병원에서 타다놓은 수없이 많은 약들. 리스페달, 발륨, 재넥스?
에라 모르겠다. 난 눈에 보이는 병, 아무거나 꺼내어 입에 털어넣었다. 이게 사람들이 즐긴다는 특효약이라지.
학교를 땡쳤다. 도경수도 함께했다.
"어서 들어가자,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클럽이야."
"야 화요일 밤에 클럽만 세 번째면 좀 과한 거 아냐?"
"아이 왜 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고 있어."
"니가 안 좋아하는 노래도 있었냐? 너 뭐 했어?"
"애더럴, 재낵스, 그리고 발륨, 아 그리고 로보투신.."
"이젠 내가 한 수 배워야 겠다."
"야,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고! 그리고..."
"그리고?"
"울 엄만 병원에서 전기구이 통닭이 되고 계셔."
클럽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우리가 좆고딩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 정신나갔다며 욕하겠지.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누구인지. 시끄럽다. 클럽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서로의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장난 아냐, 두주 동안 매일 그 짓을 한대, 나라면 절대 뇌에 그런 짓을 하게 가만두진 않을 거야."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넌 뭐든지 셀프 서비스니까."
그도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환상. 환상에 취했다. 거기엔, 엄마가 있었다.
"우리 아가, 내 전기장 안에서 뭐하는 거야?"
"엄만 끝까지 다 엄마밖에 몰라, 나 완전 맛 갔어, 내 다리가 안 느껴져"
"넌 제발 마약하지 마라."
"참 말은 잘하셔, 올해의 약쟁이 엄마 상까지 받으신 분이. 지금 환각상태인건 엄마거든."
"난 치료받는 거야. 기적이야, 모든 게 다 달라졌어."
"나도 그 기분 알아 엄마."
그리고 쓰러졌다. 온 몸의 힘이 풀렸다. 희미하게 도경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주야! 김여주! 이런 씨발..."
눈이 번쩍 뜨였다. 집. 다행이다, 죽지는 않았네. 옆을 봤다. 도경수. 날 거의 노려본다.
"이제야 정신이 72% 쯤 돌아온 거 같네. 그래 가도 되겠어."
그가 떠나지 않는다.
"농담 아냐, 이제 곧 아빠가 올 거야. 아침에 엄마 데리러 병원으로 갔어. 너 여기 있다 괜히 피 본다."
"전화 해 줄 거지?"
"그냥 가!"
그가 발걸음을 힘겹게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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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왔다!"
아빠가 엄마를 모시고 도착했다.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엄마아빠에게 다가갔다.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 와.. 되게 좋아 보인다."
"오 그래 고마워, 근데 넌 누구니?"
"누구냐고?"
"여보, 당신 딸이야."
"엄마?"
"어 그래. 그리고 여기가 우리 집?"
"아니...여보, 기.. 기억이 전혀... 안나?"
"기억나야 되는 거지?"
아빠는 엄마앞에 무릎꿇고 손을 꼭 잡았다. 난 그들에게서 한발짝 물러났다. 뭐야, 이거 무서워... 설마,
"여기 이집 모든방에, 지난 크리스마스 기억나?"
"기억하고싶어."
"내가 처음 걸었을 때나 이가 처음 빠졌을 때. 기억 안나?"
"전혀..."
어떡해. 정말 기억을 잃은 거야? 그 부작용으로?
"미첼 박사가 기억을 좀 잃을 수 있다고 했어."
"매든 박사야."
"그거 보라니까."
소름 끼쳐. 역시 그 곰탱이 락스타 정신과 의사 말은 듣는게 아니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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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도경수를 만났다. 둘 다 배낭을 들고 있었다. 난 그를 지나쳐 갔다.
"야."
"어."
"보고 싶었어."
"....."
"전화 기다렸어. 오랜만이다."
"바빴어."
"야, 너 요즘 또 약해? 얼굴이 엉망이야."
"그래, 땡큐."
"하지마."
"와, 너나 잘해!"
"너처럼은 안해. 조절 했어야지."
"지금 충고해?"
"....."
"이젠 좀 그만해, 제발."
"그만이라는 말 하지마."
"....."
"우리 끝난거야?"
"원했던 거 아니야?"
"내가 원한건 예전의 네 모습이야."
난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재수없는 약쟁이의 모습이 또 그려졌다. 미안, 내가 실수했네. 사람 잘못봤어. 잠깐 네게 위로를 받았던 건 착각인가봐. 그에게서 떨어져 몇걸음 걷다 그가 또 내 발걸음을 잡았다.
"야, 저기..."
"......"
"우리 학교 무도회가 열린대. 토요일에."
".......그래서?"
"같이 가. 재밌을거야."
그가 티켓 두장을 내민다.
"난 춤은 안춰."
"제발, 한 번만."
"잘가라. 도경수."
[이렇게 많은 기억이 사라지는 예는 드물지만 몇 몇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으로 보입니다. 정신이 좋지 않은 기억들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기억은 어딘가 남아 있습니다. 급작스럽게 되살아나는 경향이 있죠.]
[두 주가 지났어요.]
[치료로 정신 맑아지고 있죠?]
[어.. 예.]
[먹먹한 기분 좀 나아졌죠?]
[네.]
[머리가 돌로 찬 느낌도 없죠?]
[네.]
[당신도 락스타로 보이지 않네요.]
[아, 네 좋아요.]
[하지만 사라진 기억은 어떡하죠?]
기억은 숨어있다, 옛날 사진들을 찾아서 흩어진 조각을 맞출수 있도록 하라. 매든의 충고였다. 박사라고 말할 가치도 없는 자식. 아빠는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돌보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게 도왔다. 아빠는 옛날 사진들을 모았다. 오빠와 관련된 사진은 모두 제외하고. 내가 중요한 사진들이 빠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아빠는 적당한 때가 되면 하자며 말렸다. 엄마와의 여행, 결혼, 내 어릴적 사진을 보여주며 예쁜 기억만 남기고 아닌건 모두 잊도록. 아빠는 그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빠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그렇게 하면 진정 과거보다 좋은, 과거보다 행복해 질 수 있기는 한걸까.
모든 기억은 좋게 남는다. 분명 과거보다 좋아질거야. 아니, 우선 과거보다 더 나쁠 순 없으니까.
준면은 엄마를 더 자주 찾아왔다. 엄마의 기억속에 살던 자신이 이젠 잊혀졌으니. 살곳을 잃었다. 씨발, 그래서 전기치료 받지 말라고 그렇게 반대를 한건데. 잘 모를 땐 전기로 싹 다 태우시나? 겨우 나 하나 죽인게 의사님의 업적이라니. 비소가 나왔다. 기억에선 지웠지만 난 아직 여기있어, 안죽었어. 살아있다고!!
"나? 여보? 당신 이러고 있는 게 벌써 며칠 째야?"
"뭔가가 빠졌어, 마치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거 같아. 눈앞에 자꾸 아른 거려."
"가서 자자."
"....."
"돌아올 기억이라면 결국... 돌아오겠지"
경수가 찾아왔다. 엄마가 문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숙제 때문에 여주한테 꼭 할 얘기가 있어요."
엄마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늦은 건 압니다. 하지만 도통 연락을 받질... 혹시 무슨 문제라도..."
"경수구나."
"네?"
"넌 꼭 누굴 닮은 것 같구나. 몇 살이니?"
"열일곱살이요. 왜요?"
"나도 몰라, 걔는 방에 있을거야."
방문을 거세게 두드린다. 누군지 느낌이 와서 문도 열지 않았다. 한참이나 두드리더니 그냥 문에 대고 말한다.
"야,"
"어."
"내일 무도회야. 괴롭혀서 미안해. 같이가자."
"꿈 좀 깨."
"다시 시작하자."
"그만해."
"아니, 왜? 기다릴게."
"괜한 힘 빼지마."
"거부하지마. 나 좀 받아줘. 널 지켜줄게. 왜, 왜 날 안받아줘?"
문을 벌컥 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의 야윈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심장이 움푹 패이듯 아팠다.
"야, 너! 닥치고 내말 좀 들어!"
"....."
"널 보고 있으면, 내가 보여...."
"...."
"엉망인."
"그래, 우리 새로 시작하자. 내일 여덟시에 여기서 같이가."
"싫다면?"
"글쎄. 보자!"
"너 참 질기다."
"날 포기 하지마."
그가 입장표를 발 아래 내려두고 등돌렸다.
"잘가, 경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