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비밀결사대 03
written by 스페스
맥이 풀렸다. 당장에 굽 높은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고 싶을 정도였다. 덜컹이는 전차에 간신히 몸을 싣고 맨 뒷 자석에 쓰러질 듯 앉았다. 그간 줄곧 상상했었다. 정국이에게 당당하게 총기 도면을 건네면서 다시는 이런 일에 엮이지 말라고 말하는 모습을. 그러나 부푼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내 실수는 아니라 해도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밤낮 며칠을 긴장했으며, 옷차림은 또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퉁퉁 부은 다리를 매만지다 갑작스레 헛웃음이 났다. 아무리 곱씹어도 그 남자와의 대화는 의문 투성이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방직공장 아들 운운하기에는 설정이 지나쳤고, 그의 연기는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
집 가까운 골목에 익숙한 실루엣 두 개가 집 앞을 서성거렸다. 전정국. 김석진. 두 사람이었다. 코너를 돌자마자 긴 골목 끝에서 나를 알아본 정국이 단번에 코앞까지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멈춰세운 녀석이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한 바퀴 빙 돌렸다.
"옷이 날개다. 솔직히 누나도 비싼 옷 입으니 기분 좋았지?"
"치, 그래 좋았다."
이윽고 내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줘."
주어는 빠져있었다. 그게 사제 총기 도면 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국아 그게."
"아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녀석이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등을 떠밀었다. 녀석과 보폭을 맞추느라 걸음은 더 휘청거렸다. 골목의 끝에는 홀로 선 석진이 있었다. 길을 가로질러 걷는 내내, 석진은 웃으며 우리 둘을 응시했다.
"그게 좀 이상한 사람이 나왔어."
내 말을 들은 정국이와 석진오빠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서로 눈을 맞췄다. 세 사람뿐인 데도 정국의 방이 가득 들어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오긴 나왔어. 오빠가 말한 대로 새하얗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
"뭐? 나왔다고?"
"응."
되묻는 석진오빠와 달리 정국이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도면을 받으려고 청혼서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놓고 온 것 같다잖아. 이상하지? 아니 그걸 놓고 오는 게 말이 돼?"
"응. 말이 돼."
고개숙인 정국이의 등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뭐가 말이 돼? 임무 중이잖아.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놓고 올 게 따로있지. 그걸 왜 놓고 와."
"없으니까."
갑작스레 정국이가 몸을 들썩였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정국이를 툭 치며, 석진오빠마저 끅끅 웃더니 바닥을 연신 두드렸다.
"아 전정국. 왜 벌써 웃어. 재미없게."
"못 참겠는데 어떻게 해요. 형 연기가 너무 어색하잖아요."
"야 뭐가 어색해. 어떻게 이보다 더 자연스러워!"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의아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였다. 웃느라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 정국이가 손으로 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니. 형이 이미 총기 도면 받았대."
"뭐?"
석진은 여전히 웃느라 몸을 들썩였다. 얼굴이 새빨개진 석진이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미 다른 경로로 받았어. 정국이는 오늘 오후에 너 출발하고 나서 알게 됐고. 전정국이 웃지만 않았어도 더 재밌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바들바들 떨다 왔는데 아쉽다는 소리가 나오나? 아니 미리 받았으면 말을 해줘야지."
우리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국이가 당황스러운 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누나. 형은 그래도 누나 이번 기회에 좀 놀다 오라고 그런 거래."
"내가 거기서 얼마나 피 말렸는데! 놀긴 뭘 놀아."
"미안. 싱글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
석진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오빠의 팔을 찰싹 때렸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누나는 대체 누굴 만난 거야? 맞선이었으면, 누나가 만난 남자도 상대를 착각했나 보네."
"아,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건방지고 싸가지 없고. 무슨 방직공장 아들 어쩌고. 독립운동한다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정국이 웃음을 참다가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누나 뭐 걸릴 만한 얘기 한 거 없지?"
갑작스레 눈앞에 허혼서가 스쳤다. 잊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남준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분명 그 재수 없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제 안주머니에 허혼서를 챙겨 넣었다. 허혼서 뒷장에 써놓은 글귀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맥박이 빨라졌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으니, 정국이나 석진오빠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루 종일 일이 꼬였다. 아, 딱 시키는 일만 할 걸.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누나?"
"어. 별일 없었어."
"맞다. 이거."
정국이가 내게 신문 뭉치를 건넸다. 한가운데가 보기 싫게 구겨져 있었다. 매일신보 최신호였다. 편집장 옆에 놓인 세 글자에 시선이 멈췄다. 한자로 적힌 남준의 이름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무지 안 믿겨서 이런 쓰레기를 내 손으로 직접 들고 왔다. 한 번 읽어보려고. 이거 진짜 내가 아는 남준이 형 맞아?"
"나도 아직까지 믿을 수가 없다. 거기에 적힌 이름이 거짓말하지는 않을 테니 너도 이제 그냥 없는 사람 셈 쳐. 속 끓이지 말고."
"제일 속 끓이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근데 이게 정말 말이 돼? 여기 읽어 봐."
정국이가 남준이 쓴 사설을 가리켰다.
볼 가치도 없다고 던져두었던 신문 뭉치를 늦은 밤이 되어서야 펼쳐 들었다. 한 문장씩 읽어내려 갈수록 울화통이 터졌다. 사설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까지 변한 김남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 * *
퇴근 시간의 본정통은 유난히 혼잡했다. 사람들은 보통 여섯시를 기점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삼십분이나 일찍 조선증권 앞에 도착했다. 옷차림은 어제 그대로였다. 평소 옷차림으로 혼마치에 왔다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게 뻔했다. 화려한 차림새가 일상인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조선증권은 조선은행의 자회사나 다름없었다. 회색빛 건물은 서양식과 일본풍을 절충한 웅장한 외양을 과시했다. 퇴근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하나둘 건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증권을 운운하던 말이 거짓일 수도 있고, 껄렁한 인상으로 미루어보아 태업을 일삼아 조퇴를 했을 수도 있다. 몇 가지 가정들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헛다리 짚은 건가. 만일 여기서 남자를 찾지 못하면, 김남준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그때였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그가 나왔다. 표정은 첫인상처럼 냉정해 보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남자를 냅다 붙잡았다.
"저기요."
"어? 어제 그 쌈닭."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기 어제 가지고 간 거 돌려주세요. 내가 사람을 착각했어요."
"뭘?"
"제 허혼서요."
남자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로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순순히 돌려줄 인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놀리는 듯한 말투로 싫다하니 속에서부터 열이났다. 확 짜증 내려던걸 참고 말했다.
"주셔야죠. 그거 민윤기씨꺼 아니잖아요."
"난 받은 건 그냥 안 돌려줘요."
남자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미쓰코시 카페에서 그랬듯 남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게다가 혼서로 위장한 밀서는 더더욱."
젠장. 머리가 띵했다.
"표정이 거짓말을 못하네."
"아니거든요. 줘요. 빨리."
"이렇게 애쓰는 거 보니 맞네. 밀서. "
남자가 삐딱하게 선 채로 나를 보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뱉은 밀서라는 단어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아니라고요. 그럼 그냥 없애줘요. 찝찝하니까."
"그 좋은 걸 왜? 총독부에 가져가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인데."
그가 유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겼다. 다급한 마음에 쫓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가 또 귀찮은 표정으로 내 팔을 떼어내고 있을 때였다.
"썩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네요. 매달리는 여자와 밀어내는 남자."
김남준이었다. 눈은 김남준에게 고정한 채로 슬그머니 남자의 팔에 팔짱을 꼈다. 남자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슬쩍 그를 올려다보다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제발 내치지 마라. 제발. 마주 선 남준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어느새 우리 둘이 맞잡은 팔로 시선을 내렸다. 그 때 남자가 힘을 주어 나를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남준에게 말했다.
"뭘 하든지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고."
"아니 납득이 안돼서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둘 사이에 접점이 없는데,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서."
"기자님이 눈치가 없으시네. 아니면 기억력이 나쁘던가. 어제 말했던걸로 기억하는데요. 대답할 의무 없다고."
껄렁한 남자의 말에 남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준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답했다.
"기자로써 아니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묻는 건데요."
"그럼 더 대답할 일 없고. 가자."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또각거리는 구두가 영 어색했다. 그대로 앞만 보며 걸었다. 괜스레 뒤통수가 뜨거웠다. 붙잡힌 손목을 슬쩍 응시하자 남자가 정면을 보며 말했다.
"일단 가요, 지금도 보고 있을 거야."
* * *
꽤 고풍스러운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도가 낮은 공간에서 서양식 연주 음악이 흘러나왔다. 천장 한가운데서 주황빛을 내뿜는 샹들리에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친구들과 호기심에 두어 번 카페를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그 곳들과는 격이 달랐다.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쪽 벽에 네온사인으로 적힌 글귀가 빛을 발했다. CAFE SPES. 남자가 십분여를 걸어 나를 끌고 간 곳은 카페 스페스였다. 몰래 구매해 읽었던 모던 잡지에도 등장했던 곳이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명소를 소개한 기사는 카페 스페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던의, 모던을 위한, 모던에 의한.
"어? 어?"
주인으로 사료되는 남자가 공간에 들어선 민윤기를 향해 아는 척을 하다가, 그 뒤에 선 나를 보고 동작을 멈췄다. 얼빠진 얼굴이었다. 남자는 전형적인 모던보이였다. 바짝 선 카라 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자가 바에 양손을 짚은 채로 나를 훑어봤다.
"와. 내가 살다 살다 이런 날을 다 보는구나."
그가 홀린 듯 옆으로 나와 우리 앞에 서더니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볼을 꼬집었다.
"나 지금 꿈꾸는 거지?"
"오버하지 마. 정호석. 사정이 있어. 안쪽 자리 비어있냐?"
남자의 말에 주인이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보랏빛 벨벳 천으로 감긴 소파가 양쪽으로 놓인 꽤 널찍한 공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손짓한 그가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 주스를 들고 나타났다.
"숙녀 분한테 묻지도 않고 술 가져다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아, 정호석입니다. 호석 씨. 정사장. 뭐 편하게 부르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목소리가 쾌활했다. 본정통을 주름잡은 카페 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태도였다. 호석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게 맞잡은 손을 풀자, 그가 대뜸 자리에 앉았다.
"정호석 뭐 하냐?"
"이렇게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말이지. 형."
"또 오버한다."
"이야, 이렇게 예쁜 숙녀분 때문에 맞선 나가는 족족 퇴짜를 놨구먼."
"... 어제 그 쌈닭이야."
호석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소매로 입 주변을 닦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러 가지 표정이 담긴 얼굴이었다.
"근데 정호석 바 비워놔도 괜찮냐?"
"아 기다려봐. 지민아, 박지민"
호석이 또 다른 이를 불렀다. 이윽고 이름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노크를 하고선 문을 빼꼼 열었다. 귀엽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남자는 한 눈에도 어려보이는 얼굴이었다. 정국이 또래정도 되려나.
"형, 여기 내가 그때 말했던 신입. 빠릿빠릿 일 잘한다고."
"아, 안녕하세요. 박지민입니다."
문틈에 얼굴을 내밀고 쭈뼛거리던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민윤기가 슬쩍 목례를 했다.
"내가 말했지. 그 한량 같은 형. 농땡이 잘 피운다고."
고갯짓으로 윤기를 가리키며 호석이 말하자 문에 선 남자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씽긋 웃을 때 일자로 접히는 눈매가 꽤 귀여워 보였다.
"지민아 삼십 분만 있다가 퇴근해. 조금 이따 내가 나갈 테니까."
문틈에서 시선을 뗀 호석이 덧붙였다.
"쟤는 부산에서 올라왔대. 뭐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다는데 이유는 모르고. 일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왔길래 반신반의 했는데, 애가 싹싹하고 잘 해.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이걸 찾으러 오셨어."
민윤기가 트렌치코트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분명 내가 보낸 허혼서였다. 편지를 잡아채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가 한발 빨랐다. 편지를 들어 올린 탓에 팔이 공중에서 허우적 거렸다. 민윤기를 흘겨보자 사장이 우릴 보며 피식 웃었다.
"내 놔요."
"어떻게 하는지 봐서."
남자가 편지를 펼치더니, 테이블 위에 종이 뒷장을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하얀 종이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필체를 보니 식은땀이 났다. 읽을래요? 편지를 건네며 남자가 물었다. 고개를 흔들자, 본인 입으로는 싫을 테니 대리낭독 해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남자가 제멋대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제 동생이 더는 이런 일에 엮이지 않길 바랍니다. 계속 연루되었다가는 어머니가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부탁드립니다. 알아 들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남자가 편지를 읽는 동안 호석이 고개를 숙인 채 숨죽였다. 남자가 읊어대는 편지 내용은 누가 들어도 이상했다. 불현듯 카페 안에 앉아는 이들의 차림새가 떠올랐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 멋지게 차려입은 모던보이들. 그중에 친일 인사가 없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일제의 끄나풀과 안면이 있을 카페 주인, 매국 기업인 조선증권의 과장. 두 사람 앞에서 낭독되기에는 충분히 위험한 내용이었다. 편지가 다 읽힌 다음은 뭘까. 남자가 내 팔을 끌고 종로서로 향하거나, 나를 보내고 총독부에 은밀하게 고발하려나. 일단 나는 그렇다 쳐도 편지 내용 때문에 정국이도 연루되어 취조 받을게 분명했다. 정국이를 떠올리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편지를 손에 든 채, 민윤기가 나를 향해 말했다.
"자, 질문 딱 세 개에만 대답해요."
"무슨 답이요."
"이거 도로 가져갈 생각이 없나 보네. 지금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주는 거예요."
남자가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
"답하기 싫으면 그냥 빈손으로 나가면 되고. 출입문은 저기."
남자가 턱짓을 했다.
"뭔데요."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답했다. 남자가 여유 만만한 얼굴로 편지에 적힌 문장을 가리켰다.
"첫 번째. 여기서 이런 일이 뭡니까. 동생이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이런 일."
숨을 깊게 들이켰다. 어떻게든 대답해야 했다. 빠져나갈 구멍이라니.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 그게, 제 동생한테 자꾸 부탁해서 저 보고 싶다고 불러내지 말라고요."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그 옆에 앉은 호석도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나를 향해 엄지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선에 나와야 했을 남자가 그쪽을 쫓아다니셨다? 그것도 남동생을 이용해서 불러냈다?"
"네."
"....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데. 뭐 그건 취향 차이라고 치고."
갑작스레 호석이 끼어들어 윤기를 나무랐다.
"에이, 형. 말이 심하네. 충분히 쫓아다닐 미모이신데, 숙녀분께 예의가 없네."
"이래서 너네 가게가 본정통에서 매출 1위라는 소문이 나는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해서."
"그건 아니지. 카페가 잘 되는 건, 나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감각 때문이고."
호석의 말을 가로막고 윤기가 다시 물었다.
"둘째. 여기 이건? 어머니가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자꾸 남자들이 저한테 추근대면 엄마가 힘들어하신다 이거죠."
남자가 웃다가 종이로 입을 가렸다. 한 번 잘못 뱉은 말 때문에 상황은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둘러댈 거리가 없었다. 차라리 두 사람이 어이가 없는 듯 웃어버리 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진짜 살 구멍을 내줄지도 모르잖아.
"생각보다 뻔뻔하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자꾸 목이 탔다.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호석이 금세 뛰어나가 새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럼 세 번째.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왜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한테 혼서를 달라고 했는지. 이제는 그만 쫓아다녔으면 하는 남자와의 결혼이라.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어... 그게. 그러니까요."
윤기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무덤을 팠다. 그러나 애초에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없었다. 편지 내용 자체가 이미 변명은 통할 리 없는 단단한 올가미였다. 이제 끝은 어디려나. 종로서려나. 숨을 들이켜고 골똘히 생각하는 나를 민윤기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가 나를 응시한 채로 외투 주머니에서 일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라이터 뚜껑을 열자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종이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든 남자의 얼굴이 불빛에 흔들렸다. 종이 끝에 붙은 불길이 한순간에 밀서를 집어삼켰다.
"이제 됐나?"
"세 번째 질문 대답 못 했는데..."
"그 표정으로 이미 답 됐으니까 가."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는 사이, 그가 딸각 라이터 뚜껑을 닫고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팔짱을 낀 채, 소파 뒤에 등을 붙인 남자가 말했다.
"가도 된다고."
* * *
"오메 이게 누구냐, 남준이 아니냐?"
책을 읽던 정국이 마당에서 들린 어머니의 목소리에 방에서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남준. 두 글자에 정국이의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댔다. 공을 차느라 때가 까맣게 묻은 운동화에 대충 발을 구겨 넣고는 휘청이며 뛰어나온 정국의 눈앞에는 실로 남준이 있었다.
"그렇게 반갑냐?"
마당에 우두커니 선 남준이 씩 웃으며 정국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요란한 걸음이 무색하리 만큼 정국은 그저 가만히 서서 남준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국의 표정을 본 그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정국이가 널 엄청 보고 싶어 했다. 남준아. 그나저나 우리 남준이 이제 청년이 다 됐네. 때깔이 좋아졌어. 동경에서 공부는 잘 했냐?"
남준은 정국의 친모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고 살갑게 안부를 묻고는 흘끗 정국의 얼굴을 살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정국이 노골적으로 남준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녁시간이네. 남준이 식사는 했냐?"
"어머니 저 배고파요."
남준의 말에 여인이 급하게 마루와 이어진 주방으로 향했다. 금세 한 상을 뚝딱 차려 나온 여인을 보고 남준이 상을 받아들어 마루로 옮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 된장국, 반찬 몇 개가 놓인 소박한 밥상이었다. 여자는 급하게 내오느라 별거 없다며, 남준을 향해 미안한 얼굴을 했다. 둘러앉은 식탁에는 남준과 여인의 목소리뿐이었다. 남준은 동경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언제 제일 조선이 그리웠는지 구구절절 여자에게 얘기했다. 정국의 친모는 예전부터 그래왔듯, 익숙하게 김치를 찢어 남준의 쌀밥 위에 얹었다. 반면 정국은 상에 머리를 박은 채 아무 말 없이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된장국을 싹 비운 남준이 여인을 보며 자랑하듯 빈 그릇을 내밀었다.
"저 동경에 있을 때 제일 생각나던 게 이거예요. 어머니 된장국."
여자가 웃으며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남준이 배부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인은 웃으며 주전부리를 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걸음 했다. 그제야 남준이 정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서 왜 한 마디도 안 해."
정국이 상 위에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남준을 향하는 정국의 시선이 흔들렸다.
"형."
"..."
"우리 엄마한테 아무렇지 않게 밥 달라고 하는 거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지?"
"뭘?"
이번에는 되묻는 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 매일신보."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니. 여기서 얘기해."
"어머니 계시잖아."
"울 엄마 있음 못할 얘긴가 보네."
정국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떨궜다. 아무 대답도 없는 남준을 보는 정국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원망 어린 시선이 남준에게로 꽂혔다.
"... 왜 아니라고 말 못해."
"전정국."
"아니라고 말 못하면서, 어떻게 여길 왔어."
"... 다들 보고 싶었어. 진심이야."
정국이 상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여인이 광주리에 노릇하게 익은 옥수수를 내왔다. 정국이 광주리를 받아들며 여인에게 말했다.
"엄마, 나 형이랑 할 얘기도 많고 해서, 방에 가서 먹는다."
본래 어미란 존재는 자식의 미묘한 표정 변화도 눈치채는 법이다. 정국은 일부러 활기차게 목소리를 내며 남준을 흘끗 보았다. 남준이 자리를 털며 여인을 향해 웃었다.
"제가 어머니 그리워한 만큼 정국이도 저 엄청 보고 싶었나 봐요."
"그래. 둘이 들어가서 해묵은 회포 좀 풀고 온나."
정국은 방에 뒤따라온 남준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건너편 누이의 방으로 향했다. 제 누이의 책장을 살피던 정국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최남선이니, 김소월이니 하는 작가들의 시집이 책장을 가득 메웠다. 책 더미는 누이의 취미이기도 했지만, 남준의 흔적이기도 했다. 신문을 찾으려고 책장을 훑던 정국의 눈길이 구석에 꽂힌 잡지에 멈췄다. 남준이 동경으로 떠나기 전, 제 누이에게 맡긴 개벽 창간호였다. 총독부에 압수되면서 유통이 금지된 그 잡지의 창간호는 남준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정국은 남준이 개벽을 제 누나에게 건네주던 날을 떠올렸다. 남준이 동경으로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손에 쥔 잡지만큼이나 훌륭한 시를 담은 민족지를 창간할 거라던 다부진 포부를 정국은 잊을 수가 없었다.
책장을 뒤지던 정국이 개벽 바로 옆 칸에 놓인 구겨진 신문을 보고는 헛웃음을 쳤다. 한 손에 잡지와 신문을 챙겨든 정국이 제 방으로 향했을 때에, 남준은 정국의 방을 거닐며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었다.
"정국아, 이거 기억나? 네가 이 팽이 달라고 하면서, 월이가 아끼던 시집 다 나한테 넘기겠다고 들고 왔던 거. 그래서 너 누나한테 된통 혼났잖아."
남준이 책장에 놓인 먼지 덮인 나무팽이를 손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그럼 이것도 기억하겠네."
정국의 목소리에 남준이 뒤를 돌자, 정국이 바닥에 개벽 창간호를 던졌다. 제 발 옆에 떨어진 잡지를 응시하던 남준이 굳은 얼굴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그리고는 뒤이어 손에 든 신문 뭉치를 내던졌다. 남준의 이름이 적힌 매일신보 사설면이었다. 남준이 입술을 물고 있다가 이내 보조개가 패일 정도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전정국. 정국아, 너도 동경으로 유학 갈래? 내가 알아봐 줄까?"
"형."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너도 생각 바뀔 거야."
"... 난 적어도 형이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았어."
정국이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사연이 있을 줄 알았어. 말 못할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남준이 웃으며 바닥에 놓인 매일신보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이 경멸의 눈으로 남준을 쏘아보았다.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오지 마. 제발."
"또 보자."
남준이 방에서 나와 신을 신고는 정국의 친모를 향했다.
"아니 왜 이렇게 일찍 가. 할 얘기 많은 것 같더니."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어머니 솜씨 그대로예요. 저녁 정말 맛있었어요."
"자주 와라. 남준아. 내가 널 보니까 우리 둘째 아들 살아온 것 마냥 기분이 좋다야."
"... 종종 놀러올게요. 어머니."
살갑게 어머니와 껴안고 있는 남준을 바라보던 정국이 신을 신고 나와 남준의 뒤를 따랐다. 삐걱대는 대문을 닫고 어둑한 밤거리를 향해 걸어가는 남준의 뒷모습을, 정국은 한참이나 응시했다. 남준은 단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From. 스페스 |
아마 다들 잊으셨을 법한, 너무 늦은 글을 들고 와서 면목이 없습니다.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께도 죄송한 말씀 전합니다. 너무 느려 답답하시겠지만, 그래도 계속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