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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모의고사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들 집에가면 놀지 말고 공부 좀 하고."
"예에-"
"특히 백현이, 알바도 중요하지만 학생이 공부가 우선이지, 그치?"
"...네."
앞에 3초간의 공백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한거다. 물론 내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당연히 전자가 중요하긴 하지만. 인문계는 이래서 문제다. 장학금이라도 나오면 내가 알바 하나 줄이고 그 시간에 공부하지, 차라리 특성화고를 갈 걸 그랬다. 아 맞다, 이 주변에 고등학교라곤 여기 하나지?
종례 마치자마자 여기저기서 교복입은 용수철 몇 개가 튀어오르더니 미친듯이 교실을 빠져나가기 바쁘다. 나도 오늘은 한가하니까 장보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귀찮지만 집에 가려는데, 사랑의 메신저 김종인이 상콤한 표정으로 그런다.
"변백, 박찬열이 방송실로 오래."
"아 걘 또 왜."
"박찬열이 변백현한테 프로포즈 하려나보다."
"욜, 오늘 변백 머리 올리는 날?"
"아니지 병신아, 프로포즈 받은 날 식 올리는 게 어딨어!!!"
"있지, 속도위반."
개새끼들...가서 남편 안마나 해주라며 끈덕지게 달라붙는 버러지들(선두 오세훈)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씹새...볼일 있으면 지가 올 것이지 왜 나보고 오라가라야, 안 그래도...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요새 박찬열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일쑤였다. PC방에서 신명나게 처맞은 상처도 아직 다 안 아물었는데 머리까지 아프다니, 완벽하게 엿같은 상황이다.
"변백현 좋겠다, 서방님이랑 나란히 학교 다니고."
"올때도 같이 오고, 갈때도 같이 가고."
"변백 너 임신 안하냐? 요즘은 그런 것도 있다던데."
"눈빛섹스?"
저 미친새끼들이!!!!!! 오세훈의 마지막 결정타 한 방에 육성으로 터져 바닥에 주저앉아 미친듯이 처웃고 있는 김종인의 손을 한번 꾹 밟아준 다음 문 쪽으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저새끼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죽이 잘 맞았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것들이. 아, 오세훈은 아닌가.
"...나 일 있어서 먼저 간다그래."
손 밟힌 채로도 계속 웃고있는 김종인과, 그런 김종인의 손을 살펴봐준다는 핑계로 그 손을 주물거리고 있는 오세훈에게 그 말만 남겨놓고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왔다. 저 호로들 처 웃느라 못 들었으면 어쩌지, 아 몰라. 지금 찬열일 만난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 지 나도 예상 못한다. 한 걸음에 두칸씩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는데, 미처 보지 못하고 올라오던 누군가와 세게 부딪치고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앞으로 넘어지다가 그에게 안기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는 키가 매우 컸고 어깨빨도 장난아니었으므로 손쉽게 나를 잡아줄 수 있었다.
근데 그게 누군데, 헉.
"어디가? 오늘도 바빠? 만능소년이네."
잡아준다는 핑계로 허리를 한 손에 감싸안고 주물럭거리는 크리스의 손이 존나 노골적이다. 얼굴을 찡그리며 일단 이거부터 놔주시죠, 라고 말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그 와중에 나는 이게 찬열이가 아닌 크리스여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찬열이가 설마 이런 짓을 할 리는 없지만.
"오늘은 그렇게 바쁘진 않고...."
"거짓말.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바빠보이는구만."
"...그건 그래요."
혹시 도망치는 걸 박찬열이 볼까봐 급하게 뛴 건가, 나도 내가 왜이렇게 미친듯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 안 바쁘댔지? 그럼 오빠랑 동네 다방 가서 따끈따끈한 쌍화차나 한 잔 할까."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요, 오빠는 개뿔. 그리고 쌍화차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뭔소리야."
"들켰네. 아 나 심심하단말이야, 오늘 집에 엄마 올 지도 몰라.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야지."
"불효의 정석이시네, 얼른 집에나 들어가요! 난 오늘 장보러 가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으니까."
"...그걸 왜 니가 해?"
...할 말이 없다. 아 근데 별로 현실성 없는 얘기는 아닌 거 같다. 저 키에 저 덩치에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장바구니 들고 쭐래쭐래 따라다니는 걸 상상하자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 징그러. 그럼 지금까지 저 집은 뭘 먹고 산 거지? 깍두기 형님들이 직접 마트까지 차 몰고 가서 매장 털어오고 그랬나. 문득 도끼형님이 떠올랐다.
"나도 갈래."
"싫어요, 또 가서 무슨 사고 치려고."
"백현 너무해, 내가 언제 사고쳤다고 그래?!! 내가 뭘 했는데!!!"
"내 직감은 틀린 적 없어요, 예비 범죄자 비슷한 거야. 그리고 크리스가 카트 밀면 손잡이 부러질 것 같은데."
"누굴 걸리버로 알아...그래, 백현은 작으니까 내가 봐줘야지."
"먼저 갈게요."
"아아-알았어, 알았으니까 같이 오붓하게 장 보러 가는거야. 콜?"
"...."
하....너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가는 대화를 중재하기도 이젠 지쳤다. 그냥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크리스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든 채 계단을 내려갔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다, 이젠 이딴 게 꽤 익숙해져서 그런지 화내기도 귀찮다. 그렇지만 커다란 손이 슬슬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뒤통수 몇 대 때려줬다. 찬열이 손보다도 훨씬 크고 거친(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가정 환경상 당연한 게 아닐까)손이라 간지럽기보다는 징그러웠거든.
그래, 그냥 조용히 살 것만 사고 나가는거야.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을 저주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꿈꿨으니까.
"이건 어떻게 뽑는거야?"
"...한 번도 안 뽑아봤어요?"
"응."
아, 그냥 뽑으면 되나? 백원짜리 동전을 투입하시라고 친절하게 붙어있건만 크리스는 정말 카트를 그냥 뽑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안된다. 저대로 놔뒀다가 저새끼 진짜로 뽑는다. 온 힘을 다해서 버티는 나를 한손으로 쉽게 끌어 바이크에 태웠던 크리스의 힘을 아는지라 빛의 속도로 동전을 꺼내 집어넣고 카트를 뽑아들었다. 우와, 졸라 신기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한테 억지로 카트를 맡기고 앞장서 걸었다. 난 니가 제일 신기해, 임마.
"근데 백현, 돈 있어?"
그러고보니까 나 백현이 뭔가를 사는 모습을 못 본 거 같아.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크리스의 입에 양말을 쑤셔넣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 어떤 호로자식때문에 알바 잘렸거든요. 퇴직금 들어왔어요! 데헷ㅇㅅㅇ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뭐가 그렇구나야...혀를 끌끌 차며 크리스가 끌고 있는 카트에 한손을 걸친 채 사려고 계획했던 것들을 다시한번 떠올렸다. 컵라면, 컵라면, 컵라면, 라면...썅, 밥솥이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아, 요즘 부업하느라 손가락이 다 까져서 쓰라리니까 손에 감을 붕대도 존나 사둬야지. 사실 그런건 보건실 가서 몇개 뽀려와도 됐었지만 학교 예산이 잘 안 내려오는 바람에 요즘 보건실마저 빈곤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는 지출이다.
"백현 노가다해?"
"손만 쓰는 노가다요."
"왜 그렇게 힘든일 해? 기계처럼 계속 본드로 자석 붙히고, 명찰 끼우고. 내가 일자리 알아봐줄까?"
"...아뇨! 사양할게요!!!!!"
일자리라는 말에 솔깃했지만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도끼형님을 떠올리고 빽 소리질렀다.
사실 도끼형님 말고도 다른 분들 몇 번 본적 있다. 가끔 하교길에 찬열이랑 같이 운동장을 지나고 있으면 말이다, 정문에서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들어오는 예의 그 벤츠라든가 어떤 날은 포르셰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가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차에서 내려 90도 인사를 꾸벅 올리는 크리스의 좌청룡 우백호들.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크리스가 성인이 되면 바로 그 조직을 물려받을 것 같다 이거다. 지금도 사실 뭐 별로 다를 거 없지만.
"백현, 내가 카트 밀어줄까?"
물론 저 하는 꼴을 보면 정신병자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 아 맞다 저새끼 무서운놈이였지 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제가 무슨 미취학 아동인 줄 알ㅇ....아악!!!!!! 제발!!!!!!!!"
"아싸 신난다, 최상의 서비스로 모실게. 꽉 안 잡으면 대가리 날라가용."
그런 상큼한 표정으로!!!!! 그딴 대사 치지 말라고!!!!!!!!!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나를 폴더접듯 접은 다음 카트에 처넣었다. 집어넣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처넣었다. 와, 사람을 물건 대하듯 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거다.
"나랑 밥먹을래 할인매장에 처박힐래!!!!!!"
"뭐라는 거예요??!!!!!"
"나랑 사귈래 저기 처박힐래!!!!!!!"
"둘다 싫어!!!!!"
"나랑 죽을래 아님 저기서 생을 마감할래??!!!!!!"
"그게 그거잖ㅇ....아아아아악!!!!!!!!!!"
터치 다운, 완벽하게 넉아웃. 난 마치 숙련된 볼링선수가 굴리는 공처럼 빠른 속도로 돌진해서 볼링 핀마냥 30%세일이라고 붙어있는 아동용 운동화 매장에 처박혔다. 결과는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스트라이크. 아마 크리스의 집안을 몰랐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볼링선수나 해보세여 우왕굳을 외쳤겠지만 전혀 그럴 필요 없어보여서 관뒀을 뿐이다.
수십개의 운동화가 내 얼굴로 쏟아지고 난 잠깐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크리스가 내 이름을 미친듯이 불러대는 바람에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야 했다.
"백현, 괜찮아? 죽은 거야?!!"
...쟤는...꼭 맨날 지가 일 저질러놓고 나중에 미안해해.......
"눈좀 떠봐!!! 흐윽 죽지마 정신차려!!!!! 수만고등학교 최고의 알바왕이자 근로의 아이콘 2학년 1반 변백현!!!!!!!"
아...그냥 저 입좀 틀어막았으면 좋겠다........
어깨를 짤짤 흔들어대는 통에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난 혼이 나간 얼굴로 크리스의 손에 의해 운동화 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발, 제대로 민폐다. 이게 다 몇 개야...저거 다 정리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데,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장난 아닌거다.
"봤어? 남자 둘이서 장보러 왔다. 그것도 교복."
"게이 아냐? 형제라고 하기엔 너무 안닮았는데. 야 근데 키큰 남자 존나 잘생겼다 내남자 냄새 남."
"니 코가 마비된 게 분명해 친구야."
니년들 눈에 산처럼 쌓인 신발은 안보이고 우리 둘만 보이니...? 대한민국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이기심과 개인주의에 절망한 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신발을 하나하나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시발놈, 이걸 내가 왜 하고있지. 옆에서 멀뚱히 구경하던 크리스가 갑자기 내 어깨를 친다.
"야, 굳이 니가 할 필요 없겠다."
"뭔소리예요."
"날치, 여기다!"
"도련님!!!!!!!!!!"
....?? 순간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미친듯이 달려오고 있는 역시나 정장 차림의 형님 한 분. 도끼형님과는 비교될 정도로 엄청 마른 체구에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열심히도 뛰어온다. 가까이서 보니까 얼굴에도 살이 하나도 없고 존나 불쌍해보이는데, 크리스 옆에 서니까 그 안쓰러움이 배가 된다.
누가봐도 저분이 도련님이고 니가 조직의 일원 같은데....? 물론 얼굴은 반대였지만.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 난 잠깐 놀고 있는데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냐."
...잠깐 노는게 이따위라 이거지...크리스는 널부러져있는 신발을 향해 손을 뻗는 내 뒷목을 붙잡아 일으킨 후 친히 옷을 털어주기까지 한다. 저 눈물나는 친절함. 너무 감동받아서 혀깨물고 죽어버리고 싶다.
"아, 작은 도련님이 여기 계시다고 해서 모시러 왔습니다."
"...걘 또 왜? 카드 잘리고도 정신을 못차렸나."
"도련님도 현재 근신중이셔서 제가 이렇게 모시러 온 겁니다."
"아아, 시끄러. 걔랑 난 엄연히 다르지! 난 장남으로써 그 뭐냐, 독립 경험도 쌓아보고 달동네 체험도 해보고 그런 거야. 걔랑은 전혀 달라."
달동네는 개뿔이, 그 오피스텔 있는 동네 시가가 우리동네 몇십 배는 될거다. 저인간의 뻔뻔함과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린 나는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역시, 형님들의 정보수집능력은 나같은 민간인과 차원이 달랐다.
"현재 거주하고 계신 곳은 다른 동네로 알고 있는데요, 그 지역 시가가....."
"...닥쳐 날치!!!! 어쨌든 걔나 찾아서 빨리 꺼져, 아버지한텐 입도 뻥긋하지 마라 죽여버리겠어. 너 지금 조직에서 발 뺄 생각 아니면 아버지보다는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잘 생각해."
"아...그런데 이 분은....."
한참을 지들끼리 떠들다가 그제서야 내게 시선이 갔는지 나를 멀뚱히 쳐다보길래 당황한 내가 크리스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역시나 우리 크리스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
"친구야."
누가 당신 친구야.
"...도련님이 친구도 키우십니까?"
"뭐, 살다보니 그렇게 되던데."
"친구를 가장한 제 2의 도끼라든가...."
"그런 거 절대!!! 저얼대 아니야, 내가 양심이 있으면 내 키의 반만한 놈 부려먹고 그러겠냐? 도끼는 나보다 크니까 믿고 써먹는 거지."
그래서 내가 네놈한테 육체노동은 잘 안시키잖냐. 날치씨(형님 소리는 잘 안 나올 비주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웃는 크리스의 얼굴은 정말 소름이 끼쳤으나, 날치씨는 수많은 제자들 중 자신만 특별하게 아끼는 공자를 본 듯한 얼굴로 자신이 느낀 황홀함을 표현했다. 근데 크리스는 내가 알기로 언행 불일치의 표본이다.
"근데 날치야, 이거 좀 정리하고 가면 안되냐?"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에게 시키는 육체노동이야."
...그럴 줄 알았어, 썅. 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날치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한두번 시킨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일단 나만 아니면 되니까. 크리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무책임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날치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기계적인 손동작으로 신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근데 백현, 아까 우리 뭐하려고 그랬지?"
"그러게요, 저도 까먹어서."
"내가 청소기 사줄까?"
"됐습니다."
"아님 냉장고...."
"그만 가죠, 살거 다 샀는데."
다음부터 저새끼랑 절대 마트 같이 안 와. 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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