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부부
7
한강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김태형을 기다렸다. 열두 시를 막 넘겼을 때쯤, 후드집업 모자를 눌러쓴 김태형이 나타났다. 그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와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딸기우유 두 개를 집어 계산한 후 내 손을 잡아 끌어 편의점 밖으로 향했다. 늦은 밤의 산책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이었던 집과는 달리 이곳은 편안했다. 마음껏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김태형과 나는 그렇게 침묵을 지켰다. 오고 가지 않는 말로 만들어진 둘 사이의 정적을 잠시 즐겼다. 그러다가 김태형이 딸기우유 하나에 빨대를 꽂아 내게 건넸다. 큰 손으로부터 딸기우유를 건네받았다.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 역시 빨대를 꽂아 입을 갖다댔다.
김태형은 입에서 빨대를 빼내더니 그제야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좀 괜찮아요? 아깐 목소리가, 아주 울더니.’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불만스러운 내 표정을 본 김태형이 얼굴 위로 미소를 올렸다.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보이자 괜히 애써 눈을 피했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꾹꾹 눌렀다. 한 번도 이상할 것 없던 관계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고 지낸 시간은 서너 달이 고작이면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함께하고, 부르는 대로 달려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이. 힘겹게 생각을 떨쳐냈다. 이상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 수 있는 거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지. 민윤기에게 느꼈던 감정과 꼭 다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를 괜히 불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한 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고 설렘을 느낀다. 김태형 역시도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다시 믿고 싶었다. 그러나 김태형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의 목소리가 자못 진지하게 들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저는, 진짜, 확, 죽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칼로 찌르는 상상.”
“되게 무섭네요.”
“그렇게 해서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장이 날 것 같은 거야, 기분이.”
‘그냥, 여주 씨는 이렇게 우울한 날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난 그렇다고요.’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훨씬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긴 했어도 어느 정도는 나 역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와 같이 일 년에 한두 번, 혹은 매일. 아마도 나는 한 달에 이틀 정도를 빼 놓은 날만큼의 시간 동안 그가 말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어두운 내 표정을 살피더니 손을 들어 축 쳐진 내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내 위로 올려진 손이 나를 위로하듯 등 위에서 원을 그렸다. 그의 손길을 그대로 받고 있다가 마음 속에서 무언가 울컥 터져나와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나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민윤기는 곡을 쓰는 사람답게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 기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고, 내가 기분이 상해 있을 때면 무엇이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는지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를 달래고 위로하는 일에는 영 서툰 사람이었다. 분명 그는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 내 등 위에서 나를 토닥이는 손길은 민윤기에게서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좀 더 숙였다. 누군가의 손길이 내 등 위로 닿는 것이 너무 따뜻해서 벅찬 기분이 들었다.
“민윤기랑 저랑 어때 보여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느끼는 대로 말할게요. 억지로 한 집 사는 사이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상황인 것도 알아요. 가만히 딸기우유를 마시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번엔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집요하게는 그의 눈을 쫓지 않았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전정국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이라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 말에 픽 웃었다. 나를 그렇게나 생각하는 전정국이 웬만한 사람 앞에서는 잘 열지 않는 그 무거운 입으로 김태형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전정국은 김태형에게 내 번호를 전해 줄 때부터 내가 김태형에게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지할 데라곤 전정국 하나뿐인 내가 조금 더 가깝고 편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전정국이 만약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나는 지금 정확히 그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민윤기와의 기억이 맘 안쪽 깊은 곳에서 무뎌질수록 김태형에게 더 많이 의지하려 하고 있었다.
눈이 온다. 눈이 오기 시작했다.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와 김태형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한강 쪽을 한 번,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첫눈도 아닌 게 이상하게도 설렘을 가져왔다. 김태형이 내가 입고 있던 패딩에 달린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머리카락 젖으면 기분 안 좋아지잖아요, 하고 그가 웃어 보였다. 그의 손등 위로 하나 둘 떨어지는 눈에 손을 가져다댔다. 눈은 금세 녹아 그 형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새로운 눈이 내렸다. 고개를 위로 하니 코 위로 떨어지는 눈에 기분이 좋아 웃으자 그가 함께 미소 지으며 눈 좋아해요? 하고 물었다.
“눈도 좋아하고, 겨울도 좋아해요.”
“난 눈도 싫고 겨울도 싫어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왜요?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여러 차례 말을 꺼내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를 재촉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바로해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기억하냐는 물음에 12월 30일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일이 겨울이잖아요.’ 알 수 없는 말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손을 올려 그의 등 위로 올렸다. 그 손길을 느낀 김태형이 나를 한 번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위로해 줄 거 없어요. 심각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나보다 더 우울해하고 그래요.그냥 매번 생일 밤 혼자 보내는 게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가족도 못 만나, 같이 있어 줄 친구도 없어. 생일 축하해 주는 사람들은 죄다 별 거 없이 얼굴 몇 번 본 사이고. 그래도 지난 생일은 괜찮았어요. 여주 씨가 만나 줬잖아요, 생일 끝날 때까지. 그래도 아직 겨울은 싫어요. 눈도 싫고. 예전에 그룹으로 데뷔할 뻔했거든요. 그때 데뷔 일정 깨진 것도 눈 오는 날이었고, 이건 좀, 진짜 별 거 아니지만, 정말 좋아했던 친구랑 헤어진 것도 눈 오는 날이었어요. 그냥, 괜히 겨울은 외로운 느낌이라 별로에요.
김태형은 나를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걷는 내내 그는 내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 도착해서야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 역시 힘겹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수줍은 얼굴로 미소 짓자 괜히 마음이 간질거려 발장난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여주 씨. 그가 부르는 소리에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왜요. 그가 큰 손으로 내 어깨를 꼭 잡았다. 그가 내 어깨를 애교스럽게 살살 흔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우리 그래도 잘 맞는 것 같아요.”
그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저절로 웃음이 나 주먹을 쥐고 그의 배를 툭 쳤다. 뭘 웃어요. 나사 빠진 것도 아니고 툭하면 웃어, 자꾸. 그는 배를 움켜쥐고 아픈 척 끙끙거리더니 이내 다시 웃는 얼굴을 하고는 돌아서서 갈 듯 말 듯 머뭇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이 몸을 고정시키고는 후드집업 주머니에서 딸기맛 추파춥스 두 개를 꺼냈다. 말 없이 내 손을 펼쳐 추파춥스 두 개를 쥐어 주고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뜬다. 잘 들어가요, 여주 씨. 다음에 또 봐요. 밝게 웃으며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김태형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김태형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손에 쥐어진 막대사탕을 내려다봤다. 막대사탕은 민윤기가 좋아하는데. 쩝, 입맛을 다시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집 안의 공기는 서늘했다. 굳게 닫힌 민윤기의 방 문을 열었다. 며칠째 사람의 손길이 탄 흔적이 없었다. 그의 책상 쪽으로 가 손에 쥐고 있던 막대사탕 두 개를 올려 놓았다. 민윤기가 쓰던 책상 위에는 수첩 하나와 악보가 그려진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항상 무슨 일이든 꼼꼼히 생기는 그였기에 모든 일을 수첩에 적어놓곤 했었다. 그랬던 민윤기가 수첩까지 그대로 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애써 떨쳐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수첩을 펼쳐 보니 빼곡한 일정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수첩을 도로 닫으려던 때, 종이 두 장 사이의 공간에서 조금 마른 민트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꽃을 주워들었다. 바싹 마른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주워든 민트꽃을 조심스럽게 손에 쥔 채 방을 나왔다. 멍하니 어딘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걷다가 큰 충돌음에 고개를 돌렸다. 내 팔 높이의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스노우볼이 패딩을 걸친 내가 움직임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노우볼을 들어 살피니 금이 가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스노우볼, 금이 간 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민윤기와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원래부터 두 사람 모두 눈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이었던 육 년 전의 늦겨울이 큰 몫을 했다. 3월, 봄에 들어섰음에도 눈이 내리던 겨울날의 생일을 둘 모두 기억해 사 년 전 크리스마스의 민윤기는 나에게 스노우볼을 선물했다. 빨간 모자를 쓴 여자아이는 벤치에 앉아 눈을 맞고 있었다. 받아든 스노우볼을 한참을 살펴보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눈을 왜 혼자 맞고 있어요? 우울해 보이잖아요.’ 그 말에 입을 꾹 다문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남자가 지금 차가 막혀서 못 온대. 폭설이라서 운전이 너무 힘들대. 눈 그칠 때쯤에 올걸, 얘 남자친구. 능청스러운 말투에 눈을 흘기자 그가 내 어깨를 잡아끌어 볼에 연신 입을 맞췄다. 그를 살짝 밀쳐내려 하자 그는 아예 나를 품에 안아 넣었다. 사 년 전의 스노우볼 속의 여자아이는 어쩐지 행복해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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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윤기 부분 쓰면서 혼자 쓰고 혼자 설렜슴다 저러케 막 능글맞게 말하는 남친이란... ( ͡° ͜ʖ ͡°)~~ㅎ 찌통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내오 넘 어려워오 단편인 척하고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이대로 끝내 버리면 스토리 자체가 이상해져서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길어지는 줄거리 ㅎ... 저도 막 상징적 물건 복선 이런 거 만들고 싶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민 점 했습니다 넹... 정성스러운 댓글 달아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해요 이 마음 표현 못 합니다 진짜로ㅠㅠ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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