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일 년에 몇 번쯤은, 혹은 몇 년에 한 번이 됐더라도 끝도 없이 우울한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당장 옆에서 누가 잡아 주지 않는다면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민윤기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지금 나를 꺼내 올려 줄 수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무치는 외로움을 자신의 것처럼 감싸줄 수 있을 것이다.
울음을 겨우 삼킨 채 발게진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망설였다. 민윤기와 알아 온 시간이 자그마치 팔 년이었다. 김태형과는 길어 봐야 반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가 나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할 수는 있는지, 민윤기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지. 모든 것은 미지수였다. 결국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도박이었다.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몇 번 이어지던 신호음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음성을 끌고 왔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사람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통화 버튼에 가져다 대는 손가락이 떨렸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다가 어느 순간에 신호음이 끊겼다. 정적이 흘렀다. 그의 목소리가 그 정적을 비집고 나왔다. -여보세요?- 막을 수도 없이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누르고 그에게 말했다, 시간 돼요?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투와 뜬금없는 말에도 김태형은 모든 말에 정성스레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조금은 확신이 생겼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애써 쳐진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 애쓰며 침대로부터 벗어났다. 김태형에게는 큰 부담을 주기 싫어 모든 스케줄을 끝마친 후에 와 달라 일렀다. 그러나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민윤기의 모든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다가는 김태형을 만나기도 전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쇼윈도 부부
6
스캔들 기사가 터진 이후에는 반은 죽어 있는 사람처럼 지냈다. 민윤기와 함께하는 시간만이 내가 눈을 뜨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민윤기는 온 마음을 다해 나를 보살폈다. 그의 소중한 시간들을 쪼개어 집과 작업실을 들락거리며 나를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교통사고 이후로는 나조차도 나 자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안 되는구나, 이겨내려고 그 큰 마음을 먹어도 안 되는구나, 그 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망가진 생활을 했다. 민윤기 역시 이전보다 더 세게 나를 붙잡는 듯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가 지쳐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더 이상 민윤기와 나 모두를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고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쉽지 않았다. 오랜 연예계 생활로 쌓인 그동안의 피로는 한꺼번에 덮쳐와 내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다리를 펴 일어나려고 용을 써도 힘이 풀렸다. 내 손을 끊임없이 잡아주던 민윤기의 팔에도 힘이 풀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욕조에 물을 틀고 들어가 앉았다. 그대로 입고 있던 옷이 젖어 물에 풀어졌다. 코르크를 따지 않은 와인병을 욕조 위에 올려 놓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잔뜩 지친 얼굴을 한 민윤기가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민윤기의 방까지 가는 길목에 있던 욕실을 지나쳐 가려던 그가 제 눈을 비비며 멈춰섰다. 가만히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 나와 눈을 맞추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가방을 욕조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욕조 앞에 쪼그려 앉았다. 피로가 쌓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집에서 뭐 했어? 다정함 섞인 목소리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고 싶어.”
“이름아.”
“내일 아침까지도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어.”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난 날 아침까지도. 너무 싫어. 내 말에 한숨을 내쉰 민윤기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한참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그의 아래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그는 그렇게 고개를 떨군 채 참던 눈물을 쏟아냈다.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민윤기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널 어떡하면 좋지, 이름아. 나까지도 힘들어지면, 그래서 널 붙잡을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 우린 어떡하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민윤기의 얼굴에 심장이 떨어졌다.
소속사 대표 부인이 자살했대요. 근데 그게 나 때문이래요, 사람들이. 난 그 사람 부인이 누군지도 몰라요.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 대표랑 사적인 얘기 한 번 한 적도 없고요, 아니, 몇 번 만난 적도 없고요. 난 지금 그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한 건, 죽어라 일하면서 버틴 것밖에는 없거든요. 오빠도 알잖아요. 육 년 동안 나 봐 왔잖아요.
민윤기의 손을 꼭 잡았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수가 믿고 있는 거짓은 곧 진실이 된다. 두 사람이 믿고 있던 진실은 다수가 보내는 시선에 몸을 떨고 있었다.
민윤기는 나를 일으켰다. 내 등을 밀어 방으로 들여 보내고는 내가 입을 옷을 꺼내 주었다. 침대 위에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민윤기마저 내 손을 놓아 버린다면, 정말 그때는 어떡하지. 어떻게 이 깊은 곳에서 빠져나가지.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민윤기는 자신의 옷을 챙겨 방을 나갔다.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화장대 위에 놓여진 민윤기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몸을 일으켜 민윤기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잠금을 풀었다. 괜히, 오늘따라 확인하고 싶었다. 어딘가 불안함을 알리는 촉에 그의 휴대폰 이곳저곳을 살폈다. 메신저 아이콘을 눌렀다. 몇 달 전과 달라진 것은 딱 하나, 새로운 이름이 대화 목록에 하나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익숙치 않게 여성스러운 이름에 대화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일까 겁이 났다. 그 지친다는 말이 불러온 현실을 확인하게 될까 겁이 났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이불을 당겨 어깨 위까지 올려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윤기가 내 옆자리로 와 누웠다. 그는 뒤척이는 나를 팔을 뻗어 진정시켰다. 눈을 감고 나를 토닥이는 그의 손길로부터 확인을 받고 싶었다. 그가 영영 내 옆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길 바랐다.
그가 새벽 두 시를 넘기고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뜬눈으로 침대 위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가 잠들지 못하는 나를 꼭 안아 나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들을 속삭여 주길 바랐다. 무릎 굽힌 다리를 끌어당겨 고개를 묻었다.
그 날은 유독 밤이 길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왔다. 불평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민윤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다정하게 나를 안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침이 숫자 5를 가리킬 때쯤, 민윤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천히 걸어나가 그를 맞이했다. 벌건 얼굴의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는 날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올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다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역한 여자 향수 냄새가 났다. 와이셔츠 단추는 두어 개 정도 풀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산발을 해 놓고선 와이셔츠 카라에는 진한 분홍색 립스틱 자국을 묻혀 왔다. 오빠, 어디서 뭐 하다 왔어요? 이 시간까지 어디에 있다 온 거예요? 대답 없는 물음만을 잠든 그에게 던졌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침대 위에 몸을 뻗고 누운 그의 옆에서 다리를 감싸고 앉아 밤을 지새웠다. 오전 여덟 시가 되자 그가 몸을 뒤척였다. 끙끙대는 신음을 내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나를 한 번 보더니 내 등 위로 손을 올렸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언제 일어난 거야?”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거칠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조금은 잠에 취한 얼굴로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윤기가 어젯밤과 그대로인 자신의 차림을 살피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이름아. 대답하지 않았다.
찬 물로 얼굴을 적셨다. 드디어 머릿속도 마음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그의 모습은 강렬하게 남아 나를 깨웠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방으로 돌아갔다. 민윤기는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나를 바라본 민윤기가 입을 열지 않고 흔들리는 눈으로 날 쫓았다. 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래, 조금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민윤기가 나에게서 눈을 떼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쉽사리 단정해지지 않았다.
“누구 만나요?”
“이름아.”
“어제 그 꼴로 들어왔어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고개를 떨궜다. 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히려 확신을 안겨주는 그의 행동이 야속했다. 차라리 뭐가 문제냐며 뻔뻔하게 굴어온다면 맘 편하게 원망이라도 할 수 있을 일을. 차라리 처음부터 날 잡지 않았다면 당연스럽게 받아들였을 수 있을 일을.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을 만들지 않아도 됐을 일을.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굴수록 자괴감은 커져만 갔다.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나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 나를 괴롭혔다.
민윤기는 그 뒤로도 종종 나를 붙잡아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는 더 이상 편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으로 미리 직접 전해 듣지 못했던 그의 다른 누군가와의 만남은 상상력만 자극시킬 뿐이었다. 언제부터 그 누군가와의 만남을 가졌었는지, 그 누군가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그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면. 민윤기도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지쳐 버렸던 것이었을 테다. 이번만큼은 그가 빠른 시간 내에 지치길 바라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서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내가 민윤기의 휴대폰에서 보았던 그 이름이 민윤기가 만남을 가진 상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민윤기에 대한 불신만 키우고 있었을 뿐이다. 몇 주가 지나서는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다. 기획사 대표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이었음은 자연스레 밝혀졌다. 다시 관계자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드라마 대본을 받아 촬영에 참여했다. 생활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민윤기와의 관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딱 그 무엇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함께 인터뷰에 응했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꽤나 진지한 인터뷰 속에서도 우리는 다정한 모습을 연출해 낼 수 있었다. 이전처럼만 행동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예전 같지 못했다.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허울 좋게 부부라는 이름 아래 억지로 손목을 묶어 놓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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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스 만세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 예 윤기 여주 과거는 이게 다예요 끝입니다 ㅎㅎ 한 번 생긴 트러블로 돌아선 걸 여태 못 풀어서 이러고 있는 게 마자요 네 불쌍해졌던 윤기가 이 글로 인해 다시 나쁜 놈이 됐네요 바람은 다메요 이제 둘이 삽질 하는 일만 남았는데 갈등을 키우려면 불맠글을 써야 하는데 거 참 아쉽네요 ㅇㅅa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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