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집을 나선 민윤기의 뒤로 혼자 남겨져 쓸쓸한 공기의 방 안을 조용히 맴돌다가 거실로 나가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리모콘을 들어 텔레비전을 켜니 김석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타나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잘나가는구나, 요새. 가만히 그의 얼굴을 구경하다가 채널을 돌렸다. 몇 채널을 올리니 가요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발랄하게 무대를 소개하던 며칠 전의 김태형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괜히 걸쳐진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고 있자,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더니 진동이 울렸다. 미간을 살짝 좁히며 손가락을 두드려 메신저 창을 확인하려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예고도 없이 그의 얼굴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태형:
김태형: 좋은 아침
김태형: 아침 선물입니다
김태형: vv
쇼윈도 부부
8
갑작스럽게 생긴 김태형과 함께하는 일정에 허겁지겁 욕실로 달려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김태형과의 만남 이후로 집 밖으로 걸음을 떼지 않았던 탓에 꽤 오랜만의 외출이 되었다. 김태형과의 만남은 소박했다.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늦은 시간에 만나 밤이 가기 전까지 길을 걷다가 중간중간 보이는 가게에 들러 군것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는 친구 사이, 딱 급하지도 않은 느긋한 느낌에 매 만남 때마다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얼마 전부터 그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간간이 찾아오는 떨림으로 우리의 관계를 이름 하나 붙여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민윤기와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느긋하게, 이게 정말 맞는 일인지 확인해 가면서. 모든 관계에 정성을 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새 특별한 사람 중 하나가 된 김태형과의 관계에는 온 정성을 쏟고 싶었다. 성급한 사이가 되기는 싫었다.
김태형은 점점 대담해지는 듯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멀쩡하게 걸쳐져 있던 마스크는 가장 최근의 만남에서 어느새 벗겨져 그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고, 오늘의 만남에서는 그 손에 들려져 있던 마스크조차 볼 수 없었다. 한적한 거리만 믿고 패딩만 달랑 걸치고 온 그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가 손목을 잡고 근처에 있던 편의점 쪽으로 끌었다.
“미쳤어요? 어쩌자고 그러고 나와요? 활동 접을 거예요? 벌써 은퇴할 거예요?”
“아니, 어차피 알아볼 사람도 없는데.”
머리를 긁적이다가 나와 눈을 맞추고 강아지처럼 웃었다. 무어라 더 화를 내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했다. 그의 팔을 붙잡은 손이 화끈거려 황급히 그의 몸에서 손을 뗐다. 속도 모르는 김태형은 툭 떨어져 달랑거리는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내 어깨 위로 팔을 걸쳐 내 몸을 감싸고는 편의점을 나선다. 어쩐지 그의 팔이 감긴 어깨가 어색해 그의 팔을 떼어내려 살짝, 소심하게 몸을 비틀자 팔에 더 힘을 줘 내 몸을 감싼다. 어색하고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그게 이상해 안절부절 못하고 그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으니 살짝 입꼬리를 올린 그가 걸음을 조금 바삐 하더니 검은색 차 앞에 멈춰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가만히 입을 연다. ‘차 뽑았어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던 머릿속에 그의 대답은 더 많은 물음표를 심어 주었다. 한 템포 늦게 화들짝 놀라 내 옆으로 붙어 있던 그의 몸을 떼어냈다. 아니, 면허는 있어요? 활동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시점에 차를 사요? 차 보러 다닐 시간은 있었어요? 이어지는 내 물음에 그가 여유로운 말투를 버리지 않고 대답했다. 차 보러 다닌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아는 형이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서, 도움 좀 구했지. 그 형이 대신 알아봐 줬어요. 면허는, 한… 스물세 살쯤에 땄나?
차에 올라타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쩐지 그가 운전대를 잡는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차를 지금 샀다는 건, 몇 년 동안 운전을 안 했었다는 말인데. 어딘가 못미더운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니 그가 나를 안심시킨다. 괜찮아요,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걱정이 많아, 사람이. 그러나 그가 시동을 걸자마자 내 불안함은 배로 커졌다. 기어를 이리저리 옮기며 골똘히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 느꼈다. 어쩌면 이 차가 한강물을 향해서 직진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운전, 꼭 해야 돼요?”
“아, 괜찮다니까. 학원 다닐 때 선생님이 나 소질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면허 따고 나서 차 운전해 본 적은 있어요?”
음, 그게. 어…, 아, 작년에 아는 형이랑 제주도 가서 카트 탔어요. 진짜 괜찮다니까? 그의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눈치를 보며 낑낑대고는 다시 기어와 열심히 사투를 벌인다. 그러다 겨우 사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낸 김태형이 운전을 시작한다. 차가 덜컹거리며 한 번 기울어지더니 출발한다. 이게 덜컹거릴 차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붙잡았다. 땀이 날 지경으로 안전벨트에 내 목숨줄을 걸듯 벨트를 열심히 부여잡고 있는 나를 본 김태형이 꼴에 여유롭게 웃었다. 옆 보지 말고 앞 보라고요, 앞 좀. 자전거 있잖아요. 내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핸들을 돌린 김태형이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다. 만날수록 어디 하나 모자란 아들내미라도 키우는 기분이다. 머리를 부여잡고는 다시 나를 향해 있는 김태형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아 돌려주었다.
내 타박에 풀이 죽어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김태형의 입에 집에서 꺼내 온 초코 마카롱 하나를 물려 주었다. 내 손에 들린 마카롱을 한 입 베어문 김태형이 웃어 보이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운전에 집중한다. 그러다 새삼, 알아챘다. 이 년 전,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낸 뒤로는 한 번도 차에 맘 편히 올라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김태형의 차 조수석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며 밤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변화를 스스로 알아채곤 혼자 놀랐다. 좌석이 푹신한 것도, 김태형의 운전이 부드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딱,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늘 그랬듯 만남은 짧았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짧았던 것 같은 만남에 아쉬움은 더했다. 어느새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다다라 있었고, 시간은 막 자정을 넘긴 상태였다. 차 문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았고, 그 역시 어서 내리라 재촉하지 않았다. 나와 김태형 누구도 서로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김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한 번만. 운을 떼 놓고 뒷말을 잇지 않는 김태형에 겨우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김태형의 얼굴이 달아오른듯 빨갰다. 귀끝에는 빨간 불이라도 들어온듯, 손까지 달달 떨고 있었다. 그 손을 자신의 허벅지로 옮겨 바지에 슥슥 문지르더니 다시 경직된 얼굴을 한다.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나까지 그 상태에 전염이 될 것 같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곧이어 그가 다시 떨리는 입술로 목소리를 냈다. ‘해도 돼요?’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고개를 올려 그를 보니 이번엔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끝이 여전히 빨갰다. 상황 파악을 끝내지 못한 나에게서 대답이 없으니 그가 살짝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봤다.
분명 뭘 해요, 하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입을 채 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내 앞으로 훅 다가왔다. 남자 향수 냄새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사고 회로가 멈춰 버려 침을 꿀꺽 삼켰고, 목구멍 아래로 침을 내려보내자마자 김태형의 코가 내 코에 맞닿아왔다. 포개어진 입술은 부드럽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 올려놓은 채 입술만 포개어 서툴게 입을 맞춰오는 김태형의 느낌은, 이상했다. 달면서도 이상했다. 큰 죄를 짓는 기분에 팔에 약간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 고등학생 같은 예쁜 입맞춤을 끝내지 못했다.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동시에 눈을 떴다. 그의 큰 눈이 나를 담고 있었다. 침을 삼킬 겨를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니 그가 한참 후에야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너무 급했나 보네.
그는 직접 운전석에서 내려 차 문을 열고 내 어깨를 감싸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가 고개를 내 쪽으로 약간 내렸다. 김태형을 따라 빨개진 귀 끝을 들킬까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우물쭈물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나를 보고 한 번 웃은 그가 내 머리칼을 쓸며 인사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다 데려다 줘 놔서 조심할 것도 없겠지만. 손을 흔들었다. 비밀번호를 눌러 공동 현관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그는 운전석 문을 열지 않고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언가 잘못을 하면 누가 먼저 추궁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제 발을 저리는 성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민윤기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소파 위로 몸을 눕혀 삼십 분 동안 멍하니 시간을 셌다. 그러다 혼자 발버둥을 쳤다. 방금 무슨 일을 당하고 온 거지. 당했다고 할 수나 있는 일일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 아닌가. 밀쳐내지도 않았는데. 싫다는 말 한 번 안 했는데. 쿠션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렸다.
그러다 현관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자마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맞이해야만 했다. 큰 배낭을 손에 든 민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없어 그 눈을 피하지 못하고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당황한 듯 멍한 얼굴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내 동시에 눈을 뗐다. 민윤기는 안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는 듯했다.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아까의 일이 생각나 혼자 놀라 퍼덕였다. 다시 고개를 묻었다가 든 생각은, 민윤기가 다시 짐을 싸는 것은 아닐까. 그대로 짐을 싸 다시 나가 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마자 무엇에 홀린듯이 방으로 걸어들어가 바닥에 앉아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는 민윤기를 지켜봤다. 짐을 풀던 민윤기도 그 눈빛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추는 민윤기에 오히려 당황했다. 괜히 눈을 피하고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해 그 자리를 맴돌다가 다시 짐을 푸는 민윤기의 정수리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시 갈 거예요?”
민윤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다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묵묵히 짐을 정리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지려 했다.
“집에서 작업할 거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하는 그의 대답에 약간은,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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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넘 좋내오 어쿠루브 넘 조은...! 앞으로 자주 쓰게 될 것 같은 브금 제가 그 인디음악 성애자임니다 좋은 노래 많이 아시는 분들 저엉말 많이 안 알려진 좋은 노래 추천해 주시면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어제 드디어 쇼윈도 부부 줄거리를 다 짰습니다ㅋㅋㅋㅋㅋ^♥^ 드디어 어떻게 엔딩을 낼지 정했어유 급전개라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막장 드라마 같으면 어떡하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계속 자잘하게 수정은 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말씀드렸던대로 쇼윈도 부부는 정말 대책 없이 첫 글을 올린 글이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고민했슴다 읽어 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려요 정말 왕 많이 그리고 혹시 구독료가 너무 비싸다 싶으면 부담 없이 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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