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김태형의 뒤를 서서히 따라오던 남자는 텅 비어버린 권총의 탄창을 갈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좀비들을 하나씩 쏘아댔다. 권총에서 탄피들이 하나씩 튕겨져 나갔다. 남자가 쏜 총알은 정확히 좀비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하나둘 길바닥에 힘 없이 쓰러지는 좀비들을 지나쳐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숨이 차오르는 것도 모르고 계속 달리니 근 한 달 동안 집 안에만 갇혀있던 게 답답했는지 마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달릴 대로 달린 나와 김태형은 뛰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살펴보면 끝없이 길게 뻗어있는 아스팔트 도로 양쪽에는 초록색으로 무성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또, 그 많던 좀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개미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쉬지도 않고 뛴 탓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던 나와 김태형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한 남자를 보고 살짝 의아했다. 혹시 그 많은 좀비들을 여유롭게 죽이며 걸어온 건 아닌가, 싶어 그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해 뛰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헝클어져 있었다. 곧 큰 손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내 정리했지만 말이다. 그는 어느새 가벼워진 탄창을 또다시 채워놓고 있었다. 빈 탄창이 떨어지며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튕겨져나갔다. 길가에 흔히 버려진 쓰레기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버려졌다.
김태형은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손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김태형의 얼굴을 또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 싫으면 말고. ' 라며 내민 손을 거두려는 김태형이었지만 자신의 손을 급하게 잡아채어 일어난 나를 보고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난 것은. 꽤나 가까운 곳에서 들린 소리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흉측한 몰골의 좀비 한 마리가 달려들어 내 팔을 부여잡았다. 까맣게 썩어들어간 좀비의 팔에서는 좋지 못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물어 뜯으려는 것인지 나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들어 입을 크게 벌리는 좀비였다. 벌린 입 사이로 드러난 썩은 이빨들이 흉측했다. 이 상황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나름대로 버텨냈는데, 악착같이 살아남았는데, 설마 이대로가 끝인가. 하고 눈을 꽉 감았다.
" 김여주!!! "
이때쯤이면 좀비에게 물려 그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야 했다. 날카로운 좀비의 이빨이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 대신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 속 환청처럼 울리는 김태형의 목소리, 그리고 또 다른 둔탁한 소리까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관자놀이에 칼날이 박힌 채 미세하게 그르렁 거리고 있는 좀비가 눈앞에 보였다. 그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두려움에 가득 차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김태형은 그런 나를 뒤에서 양 팔 가득 품으로 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침내 이 공간이 정상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소리조차도 말이다.
나와 김태형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니 좀비는 결국 무릎을 꿇은 상태로 주저앉아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거세게 잡은 내 팔을 놓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리저리 흔들어 보아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좀비의 손을 바라보다 급격히 몰려오는 좀비의 까슬한 살갗 느낌에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나는 김태형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좀비의 관자놀이에 박혀 있는 나이프를 던진 장본인이 저 자신인지 말이다. 남자는 한 손을 쭉 뻗은 자세를 유지하다 이내 팔을 내렸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정확히 나이프를 좀비의 머리에 던져 박아 넣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는 우리에게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곧 내 팔을 붙들고 놓아 줄 생각을 안 하는 좀비의 팔을 거세게 잡아챘다. 내가 떼어내려 안간힘을 쓸 때는 꿈쩍도 않더니, 그가 잡아내니 쉽게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좀비의 손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 보였다. 그 때문에 숙여졌던 좀비의 상체는 높이 딸려 올라왔다. 또다시 흉측한 몰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맨손으로 잡은 좀비의 팔을 한번 쭉 훑었다. 그것을 본 그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 좀비의 팔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는 그에 맞게 좀비의 몸도 힘 없이 움직였다. 곧 감흥을 잃었는지 눈 높이까지 들어 올린 좀비의 팔을 서서히 밑으로 내렸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인지 미세하게 움직이는 좀비의 머리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힘 없이 떨군 머리를, 남자는 발을 들어 올리더니 지근지근 밟아버렸다. 그의 행동에 나는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 ……. "
" ……. "
" 더러워. "
그가 좀비의 머리를 더 세게 밟을수록 그만큼 좀비의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담뱃재를 발로 비벼 끄듯 좀비의 머리통을 짓밟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결과, 뼈가 으스러지며 누렇게 뜬 눈알과 뇌로 추정되는 것들이 검은 피와 함께 터져 나왔다. 김태형은 그것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려 서둘러 큰 손으로 내 눈을 가렸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봐버린 것을. 발로 짓밟는 힘과 팔을 잡고 높이 끌어올리는 그 상반되는 힘으로 인해 좀비의 팔은 몸에서 가볍게 분리되었다. 갑작스레 쑥 뽑히는 좀비의 팔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는 검은색 피가 비 오듯 흩뿌려졌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로 튀긴 그 피가 상당히 불쾌했는지 몸통과 분리되어버린 팔을 저 뒤로 집어던져버렸다. 찌그러진 캔 깡통처럼 납작해진 좀비의 머리통에 깔끔하게 꽂혀있는 나이프를 뽑은 남자는 칼날에 묻어있는 피를 자신의 와이셔츠에 닦아내었다. 그리고 그 머리통을 축구공 차듯 저 멀리 차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좀비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해 팔에 생긴 작은 생채기를 치료해야 한다는 남자의 말에 우리는 약국을 찾으려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을 제대로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남자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나는 내 발에 맞추어 천천히 걷고 있는 김태형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또 어떤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태형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지금 김태형은 딱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김태형의 기분을 풀어주려 평소와 같이 검지를 피고는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러자 금방 반응을 보이며 옆으로 살짝 피하는 김태형이었다.
" 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
" 아무것도 아니야. "
" 너 거짓말하면 금방 티 나는 거 알잖ㅇ… "
" 김여주. "
" ……. "
" 너는 저 사람 수상하지도 않냐? "
" ……. "
나와 발걸음을 맞추던 김태형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표정까지 굳히며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나까지 덩달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 나는 우리 한 번 구해줬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
" 김태형. "
" 너는 왜 애가 낯선 사람한테 경계를 안 하냐? 왜 이렇게 무지해? "
" ……. "
" 나는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집에만 있을 줄 알았어. 근데, "
" ……. "
" …근데 이게 뭐야? "
" 언젠가는 밖으로 나와야, "
" 어차피 밖으로 나와야 했어도!! 나가도 내가 나갔지 너까지 내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어!! "
" ……. "
" 저 새끼 때문에 우린 집도 잃었고, 나는 엄마도 잃ㅇ……아, 아."
김태형은 양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김태형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변해있었다. 붉어진 그의 눈가를 만지려 손을 들어 올렸을 그때였다, 내 손이 허공에서 내쳐진 것은. 다소 거칠었다면 거칠게 내쳐진 내 손이 갈 곳 없이 방황했다. 김태형이 내 손을 내쳐냈다. 평소였다면 자신의 얼굴을 만져주는 나의 손길이 좋다고 내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김태형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화가 무척이나 많이 나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허공에 있는 손을 급히 거두어냈다. 그런 나를 보던 김태형은 한숨을 낮게 쉬더니 곧 남자가 걸어간 방향으로 혼자 나아갔다.
앞서가던 낯선 남자, 김태형, 그리고 나. 서로 간의 간격을 두고 한참을 걷자 곧 익숙한 대형마트 하나가 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사실 이름만 대형마트지 그 크기는 중형마트 정도 되었다. 부모님이 계셨을 때 차를 타고 이곳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엄마가 장을 보고 아빠는 술 종류를 구경할 때 나는 나와 김태형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카트에 가득 담아냈었다. 지금의 공간과 예전 기억 속의 공간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곧 고개를 흔들어 그 기억을 떨쳐내야만 했다.
마트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는 조금 스산했다. 수많은 형광등 중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형광등은 별로 없었다. 그마저도 고장이 났는지 곧 꺼질 듯 깜빡거렸다. 이미 누가 왔다 간 것인지 아니면 습격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인지 진열대들은 대형을 벗어나 있었고 심지어 몇 개는 쓰러져 있었다. 그로 인해 각종 물건들 또한 바닥에 우수수 널브러져 있었다. 권총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재빠르게 내부를 살피는 남자와 반면에, 김태형은 평소 자신이 즐겨 먹던 과자를 들고 성분 표시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훑고 지나다니던 남자는 마트 내부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 진열대에서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그가 양손 가득 들고 온 내용물은 다름 아닌 구급약품들이었다. 소독약, 연고, 반창고, 거즈, 붕대 등 여러 가지를 찾아온 남자는 약품들을 내 손에 하나씩 넘겨주기 시작했다. 그 많은 것들을 다 받아내니 정말 많았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는 편하게 앉아 혼자 치료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는 우악스럽게 내 옷의 목덜미를 잡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힘으로 인해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 진열대 뒤로 숨은 나와 남자는 상당히 가깝게 붙어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고개를 돌리니 그의 새하얀 얼굴이 바로 내 앞에 닿아있었다. 하마터면 입술이 그의 뺨에 스칠뻔하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물어보려던 질문은 새까맣게 잊은 채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 그만 쳐다봐. "
" …네? "
" 뚫려. "
" 아…. "
" ……. "
" …그나저나, 아저씨."
" 아저씨? "
아저씨, 라는 말 한마디에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계속 그 남자, 남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딱딱한 감이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내가 오그라들 것 같고, 삼촌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이상해 차라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생긴 것을 보아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투를 봐서는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까 하려던 질문을 마저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김태형인가 싶어 아까 과자 코너에 있던 김태형을 기억하고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태형도 무언가 느낀 것인지 몸을 낮게 숙이고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는 김태형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고 있으면 얼마 안가 시선이 허공에서 닿았다. 어색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다름 아닌 김태형이었다. 그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여 나도 고개를 돌렸을 때, 그때 한 번 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자국은 한 명이 아니었다. 사람인지 좀비인지 모를 발자국들은 나와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오는 듯했다. 점차 다가오는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아저씨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리곤 입을 달싹거리며 작은 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 하나, 둘, "
딱 둘까지 세니 멈춰버린 발자국 소리였다. 아저씨는 갑자기 진열대에 숨겼던 몸을 재빠르게 일으키더니 무언가에게 권총을 겨눴다.
" 셋. "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셋을 세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마트 내부를 짧게 울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총을 겨눈 채 어떠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 모습에 답답하기만 했다.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아무런 표정 없이 날카로운 눈빛만 내세우고 있었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서서히 총을 내려 보이는 아저씨의 행동에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였다. 그러자 철컥, 하는 소리가 바로 내 귓가 근처에서 울려 퍼졌다. 누군가 나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것이었다. 그 누군가의 행동으로 아저씨는 다시 총을 들어 경계 태세를 보였다.
눈동자를 굴려 내게 총구를 겨눈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그러자 키 큰 남자가 얼핏 보였다. 정면에는 렌치를 들고 서 있는 남자와 그 남자 뒤에 숨어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아저씨가 읊조리던 숫자의 의미가 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발자국 수. 즉, 인원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진열대 사이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맙소사, 김태형이었다. 키 큰 남자가 내게 겨누었던 총구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김태형에게로 향했다. 총구가 옮겨지자 아저씨는 자신의 총구를 여자에게로 돌렸다. 그것을 눈치챈 랜치를 들고 있던 남자는 커다란 렌치를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이 내게 들이대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긴박감이 넘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키 큰 남자는 김태형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아저씨는 무리 중 여자를 위협했다. 아저씨의 행동에 맞서 또 다른 남자는 내게 렌치를 들이밀었다. 넓은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기류가 우리의 주위를 돌고 돌았다.
" 총 내려. "
" 그쪽 먼저 내리시죠. "
" 아니 뭘 그렇게 경계하시나. 보아하니 같은 생존자들 같은데.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내리자고. "
나에게 렌치를 들고 있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 눈치를 보며 ' 하나, 둘, ' 하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까지 외쳤을 때, 다 같이 총기를 내리자는 남자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듯 그 누구 하나 먼저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어떤 쪽에서 누가 먼저 무슨 일을 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 먼저 내려요. "
" 다들 그만해요! "
서로에게 겨눈 총구를 쉽사리 걷어내지 못하고 있을 그때였다.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마트 내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우리의 시선은 모두 여자에게 꽂혔다. 여자는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한번 훑어보더니 손을 쑥 내밀어 남자가 쥐고 있던 렌치를 눌러 밑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상대방이 먼저 경계를 푸는 그 행동에도 아저씨는 여자에게 겨눈 총구를 쉽게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저쪽에서 수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자 아저씨는 겨누었던 권총 역시 거두며 자신의 혁대에 꽃아 넣었다. 여자의 만류로 키 큰 남자부터 시작하여 아저씨, 내게 렌치를 들이밀었던 남자까지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답답한 가슴이 한편 나아졌다. 여자는 앞으로 서서히 나오며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살벌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로잡으려는 여자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에 띄는 것은,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아미에요. "
그 여자의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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