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숲 속을 내달리던 설화는 발목에 닿아오는 차가운 공기와 시린 풀잎의
감촉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금옥의 성화에 급히 나오느라 치맛단이 짧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급했던 상황이라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설화는 신경이 쓰였다.
다 큰 처자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니... 그에게 오해를 살수도 있는 상황이다.
포졸들에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에게 감춰왔던 본모습을 들킬수도 있다는 걱정에 설화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얼마동안 숲 속을 헤매였을까,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형체에 그가 천천히 속도를 낮춰 걸었다.
자욱한 안개와 함께 나타난 허름한 빈 초가집 하나.
그 앞에 다다른 쑨양은 한번도 놓지 않았던 설화의 손을 그제서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낡디 낡아 쓰러질듯한 싸리문 안으로 발을 디딘 그는 아무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설화를 향해 돌아섰다.
"이리로 오십시오. 아무도 없는 듯 하니,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설화는 치마를 몸에 한번 감아 단단히 붙들고 그가 서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손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정리가 되지 않은 집안은 이리저리 거미줄이 쳐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 자리를 잃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문짝과 깨진 항아리들이 즐비한 작은 마당을 휘- 둘러보던 여인은 당장이라도
산짐승이 튀어나올것 같은 어두운 부엌을 발견하고 덜컥 겁이나 쪽마루 앞에 서있는 그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올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자욱한 안개 속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둘러보고 오겠다는 그의 말에 설화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며시 끄덕였다.
혼자 남겨지는게 무서웠지만... 자꾸만 몸에 감기는 불편한 옷을 입고 어두운 길을 따라나서면 그에게 짐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감추고 싶은 치맛자락 때문이라도... 선뜻 그를 따라 나설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과 서늘한 집안 공기에 몸을 가늘게 떠는 여인을 바라보던 쑨양은 두루마기 옷고름을 풀어 벗어내고는
쪽마루에 살며시 걸터 앉아 두 눈만 꿈벅이는 설화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괜찮습니다.. 이걸 주시면 나으리께서는.."
"그대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괴롭습니다."
다정한 표정으로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 쑨양은 여인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가 곧 손을 떼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설화의 대답에 쑨양은 마음이 놓인듯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싸리문을 지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휘이이이-
어깨에 걸쳐진 두루마기 자락을 흐트러뜨리는 스산한 바람에 태환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산속에서 혹, 누군가의 인기척이라도 느껴질까 경계심을 풀지 않은채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에 집중했다.
언제쯤 돌아올까... 싸리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 유일하게 반짝이는 별들로 눈길을 돌렸다.
그동안 사는게 바빠서 하늘 한번 쳐다볼 여유도 없었건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 바라보는 별은
아랫 마을에서 보는것 보다 훨씬 영롱하게 빛이 났다.
쏟아질듯 수많은 별들에 어느새 공포도 잊고 하염없이 까만 밤하늘만 바라만보던 태환은 저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하나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점점 가까워져 오는 불빛 하나.
생각할새도 없이 몸을 일으킨 그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불빛임을 단번에 알아채고 초가집 뒷편으로 내달렸다.
대화방과는 멀리 떨어져있지만 여기까지 수색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급한 걸음을 내딛는 그의 어깨에서 두루마기가 바닥에 떨구어졌지만 태환은 미처 느끼지 못했다.
누구에게든 붙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발에 걸리는 치맛자락을 붙들고 거친 숨을 내쉬며 어두운 숲 길을 내달리는 그의 이마가 어느새 땀으로 젖어든다.
초조한 눈빛으로 흔들리는 호롱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문앞에 드러난 그림자 하나에 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 부름에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온 사내는 허리에 차고 있던 환도를 옆에 내려두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일렁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찌 되었느냐."
"모두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잡히지 않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내의 흔들림없는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찾았던 대화방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김재호는 미처 대화방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춰서야 했다.
수많은 포졸들이 깊은 산 속을 헤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안면있는 이를 하나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니 누군가 포도청으로 이곳의 불법 영업을 고하여 잡으러 온 길이라고 하였다.
그 길로 다시 돌아온 김재호는 사람을 하나 불러 선월의 행방을 찾던 중이었다.
"포도청으로 고한 자는 누구이더냐."
"그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듯 했습니다. 얼굴을 밝히지 않은 자가 서찰로 보낸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거짓일수도 있는데 그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말이냐."
"누구인지는 모르나, 꽤 신뢰가 있는 정보였던 모양입니다."
"하아, 우습군."
어이없다는듯 실소를 터트린 김재호는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살며시 문지르고 사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다. 선월이라는 여인을 찾아오거라."
"예."
"포도청에서 알아서는 안될것이다. 다치지않게 그 여인을 내게 데려오라."
차가운 어조로 명령을 내리는 김재호에게 사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보이고 그대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 뒷 모습을 바라보던 김재호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나서야 분에 못이긴듯 주먹을 들어 서안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요란한 소음을 내며 서안 위의 찻잔이 쓰러져 그의 소매를 천천히 적셔간다.
이대로 선월을 찾지 못한다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그의 얼굴에 짙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너는... 너는 어디로 간 것이냐."
여인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에 시름이 가득해져 어둡게 가라앉는다.
어스름한 새벽의 푸른 빛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올때까지 쑨양은 잠들지 못했다.
전날 밤. 초가집 근처를 둘러보고 돌아오던 길에 횃불 하나를 만들어 온 그는 아무도 없는 빈 초가집을 마주해야했다.
집안을 모두 수색했지만 어디로 사라진건지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된것을 느끼고 급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있던 자신의 두루마기를 주웠다.
천천히 들어올린 두루마기 아래 희미하게 찍힌 발자국.
습한 기운에 흙바닥이 젖어 그 위에 찍혀있는 여인의 발자국을 보고 쑨양은 그 흔적을 따라 한참을 걸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그 앞에서 끊긴 흔적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흔적을 따라 걸어오며 확인한 바, 여인의 발자국 외에 다른 이의 발자국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인기척에 급히 마을로 도망을 간 모양이었다.
여인에게 별일이 없을거라 직감한 그는, 그 길로 대화방으로 돌아가 차마 가져가지 못한 노란 비단 보자기를 챙겨들었다.
혹시나 포도청에서 가져가지 않았을까 걱정하였는데, 다행히도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져 집으로 돌아온 그는 별일이 없을걸 알면서도 여인을 향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어둠속에서 혼자 도망을 가야했던 여인의 모습이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온다.
서안 위에 구겨져 놓인 두루마기에 천천히 손을 뻗은 그는 마치 설화의 온기가 남아있는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디에 계신겁니까."
한숨도 잠들지 못해 잔뜩 가라앉은 쇳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아무 일 없으십니까."
손끝에 매달린 두루마기를 들어 가슴에 품은 그는 짙은 한숨을 내어쉬고 탁하게 가라앉아 쓸쓸한 빛을 띄우는
두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혼자 두어서... 미안합니다.]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는 그의 짙은 눈썹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오늘도 새벽글이네요..요즘 이래저래 낮이나 저녁에는 시간이 안되서..ㅠ
그나저나 불빛의 정체는 쑨양이었건만 태환은 지레 겁먹고 도망갔네요
헐...!
이리저리 자꾸 꼬아서 죄송합니다..;
다음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벌써 15화예요..슬슬 멘붕이ㅋㅋㅋ
예전보다 빠른 연재가 안되고 있습니다ㅠ
뼈대는 완성되었는데 살을 붙이는 과정이 느므느므 어렵네요...
역시 글은 아무나 쓰는게 아닌가봐요..흠~
그럼에도!!! 항상 재밌게 읽어주시고~댓글 달아주시는 많은 분들..
늘 하는 얘기지만... 너무 감사드려요~
좋은 꿈 꾸세요♡
★★★ 내용 중..'얼굴 없는 자' 에서 '얼굴을 밝히지 않은 자' 로 변경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