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석은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카페의 창가를 골랐다. 구석진 곳이라 통행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런것따위 어차피 신경쓰지 않는다. 이자리에서 한발도 나갈일이 없을 테니까.
딱 알맞게 식혀져 있는 아메리카노는 더이상 향기를 내뿜지 않았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치지않아 겹겹히 붙어있는 건물산 너머로 태양이 지는 것이 보였다.
많은 고민, 많은 생각을 했다. 답은 명확했다 -너를 더이상 만나지 않겠어. 충분히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나는 루한 너를 만나지 않겠다.
무슨 말을 뱉든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듣고싶지도. 알고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민석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보지않아도 알수있었다. 익숙한 노을향. 네 향.
"민석"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더 견고히 루한을 보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이 악몽 같았다.
"민석"
"나는"
"...."
"나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했어 루한."
민석은 덜덜 떨리는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손을 꽉 내리눌렀다. 입은 앙다문채였다. 시선은 결코 루한에게 닿는 일이 없었다.
몇일간 집에서 반가사상태로 많은 일들을 했다. 대부분의 일은 루한, 너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과거의 너를 돌아보는일, 니가 내게 했던 많은 짓들.
그래서 너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였는데, 나를 조각조각 찢어버린것은 너였다.
"루한, 나는 니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필요없어. 니가 그냥 없으면 돼. 나한텐."
"...민석 내가 하고싶은 말은,"
"아무것도 필요없어, 사과도, 해명도, 나는 이제와서 왜 니가 내 눈앞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과도, 해명도, 아무것도 아니야."
"..뭐?"
"내가 너한테 할말은 사과도 해명도 나를 대변하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너..."
"사실이야. 단지 사실."
"...."
"사실을 말하고 싶었어. 이대로 널 보지 않아도,"
"....."
"나는 상관 없어."
루한의 마지막 말에 민석의 짧은 숨이 토해내어졌다. 그래. 결국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내쪽이었다. 일년이나 지난 이후에도 과거를 지우지 못해 질질 끌었던 것은 내쪽이었어 김민석.
겉으로는 루한을 밀쳐내는 척 했었다. 하지만 짧게 스쳐지나간 루한의 모습에 숨고싶으면서도 저를 다 드러내고 싶었다.
보라고, 난 이렇게 살고있다고, 나는 너 없어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루한을 보여주기 위한 가짜 삶이었다. 너를 빼고 난 내 일상마저도 너를 위해 돌아가는 내 삶이라면, 난 어떡하지.
그날의 행복했던 루한과 저에게 묻고싶었다. 나는 어떡하냐고, 그렇게 나를 다 줘버리고 버림받으면, 지금 나는 어떡하냐고.
"착각하고 있었네. 미안했어."
"민석."
"그럼 이제 괜찮아. 돌아가."
민석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꺼질것 같은 미소였다. 머물러 있었던, 수많은 고민들이 민석의 뇌속을 간지럽히고 해일처럼 몰려나갔다.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민석아, 내 말을 들어줘."
"괜찮대두. 난 정말 괜찮아. 이제 사실이던 아니던 상관없어."
"...."
"일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니가 알아야해, 말할 기회를 줘. 제발."
"네가 말하는게 사과든, 해명이든, 사실이든, 지금와서 아무 필요없어. 나는 잘 살고 있고, 너도 너대로 잘 살면 되는거고."
"민석!"
"그날을 기점으로 우린 끝난거야. 지금와서 나를 찾는게 이해가 안된다. 사실."
"....."
"잘가. 먼저일어날게."
민석은 커피잔을 들고 일어섰다. 조금 발을 헛디딜뻔했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좁게 놓여진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돌아보니 루한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괜찮아. 잘 행동했다고 생각해, 민석은 자위했다.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런거 별거 아니잖아. 냉정하게 잘 내쳐냈다.
이제 더이상 휘둘리지 않아도 돼. 앞선 자신의 행동에 슬픈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차갑게 대하면 되는거야.
아직까지 앉아있는 루한의 머리위로 노을이 불타듯 비춰졌다. 태양이 지는 시간이었다. 예전 그때보다 더욱 밝아진 루한의 머리에 노을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어깨너머로 본 루한의 모습에 민석은 입을 막았다. 커피향도 노을도 그대로였다. 세상은 저리 같은데 달라진건 우리 둘뿐이었다. 루한.
**
그날은 민석에게 좀 이상한 하루였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루한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원래 먼저 일어나면 깨워주고 아침도 챙겨줬었는데..
루한과 만난지 이년, 민석의 하루는 루한과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맺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루한의 잠자리는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다.
민석은 루한이 뭐라도 사러나갔나 싶어 연락을 해보았지만, 열통이 넘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슬슬 걱정되고 있었다. 오늘 루한 약속있나? 아닌데 루한 약속은 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영어도 익숙해지고, 지리도 잘 알아서 여기저기 쏘다니는 서로였지만, 그래도 저를 이렇게 아무 언질 없이 혼자 남겨둔 적은 없어서 민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민석은 대충 옷을 꿰어입었다. 혼자 나간거야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연락이 안되는 걸 보면 무슨일이 생긴것은 아니야? 민석은 걱정에 빠져있었다.
루한과 제가 자주 가던곳부터 뒤져보았다. 서점, 자주가던 이태리풍 음식점, 어학원밑의 사탕가게, 근처의 식료품점... 그러나 여러곳을 둘러봐도 루한이 보이지않았다.
여차하면 정말 신고라도 해야하나라는 생각에 공원만 마지막으로 둘러보자 싶어 민석은 큰길가를 따라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을 내려가자마자 다행히도 한눈에 밝은 금발색 머리가 보였다. 루한! 드디어 찾았구나, 걱정했잖아, 민석은 멀리서 보이는 루한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민석의 몸은 뚝 하고 멈춰졌다. 분수대 앞, 루한의 옆에 뒷모습마저 예쁜 단발머리 여성이 앉아있던 까닭이었다.
아니야. 친구겠지. 민석은 섣불리 판단하는 법이 없었다. 꽤 나긋한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루한을 전적으로 믿었던 이유였다.
민석은 천천히 루한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단순한 남녀사이치고 꽤 친밀한 스킨십이었다. 루한과 그녀는.
그래도, 그럴수 있다. 민석은 루한을 믿었다. 나중에 언급하면서 조금 추궁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일 가지고 루한과 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아, 그 게이새끼?'
순간 민석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귀를 매만졌다.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나보다 생각했다. 루한과 여자의 언어를 들을수 있는 위치정도까지 다가갔을때 들린 날선 한마디에 민석은 굳었다.
'글쎄, 조금 잘해줬더니 떨어지질않네'
영어를 잘못 배웠나봐. 민석은 그럴리 없다는걸 알면서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잘못배웠나봐. 아니면 내 귀가 이상하나봐.
'만난지 이년쯤 되었나? 이제 천천히 떼어낼때도 되었는데'
루한은 그럴리 없었다. 이 사람은 루한이 아닐거야. 민석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루한인 걸 알고 있었다. 저 동그랗게 울리는 발음, 너무나 익숙한 저 뒷모습.
'친구? 친구라고 하기에 너무 더럽지 않니.'
민석은 분수대 기둥에 몸을 숨겼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루한인지 아닌지 확인만 하자. 루한인지 아닌지만, 제발. 루한.
'게이는 더럽잖아. 싫어. 난 여자가 좋아 너처럼.'
가슴 아프게 꾹꾹 자신을 찌르는 단어들을 뒤로하고 민석이 고개만 빼내었다. 언제봐도 세밀하게 조각되어있는 분수대 옆으로 루한의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하얗게 터지는 저 맑은 웃음,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부슬부슬한 금발, 사슴같은 눈망울, 머리부터 발끝까지 루한이 아닌곳이 하나도 없었다. 저사람은 내 루한이 맞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귀에 중국어로 사랑을 속삭였던 루한이 맞았다. 민석은 눈을 황망히 떴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했다.
민석은 빠른걸음으로 집까지 순식간에 내달렸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편을 끊었다.
민석은 두서없이 짐을 쌌다. 입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루한이 오기전에 어서가야했다.
루한을 믿었던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슬픔을 느낄새도 없었다. 충격이 민석을 겹겹히 감쌌다.
민석은 서랍속에 무음모드로 울리는 루한의 핸드폰을 보았다. 그순간 깨달았다. 루한은 나의 모든 것이었고, 나는 루한의 숨겨진 모든 것이었다.
-
'사실을 말하고 싶었어. 이대로 널 보지 않아도,'
'....'
'상관없어.'
민석은 눈을 감고 저 말을 아프게 되뇌었다. 루한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같았다. 제가 아직까지 빠져사는 것은 루한과 저의 거짓된 날들이었지, 루한의 본모습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아파할 필요없어. 민석은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민석은 밤이 되도록 까페 안쪽에서 나가지 못했다. 루한은 이미 나가 빈자리만 있었지만,
빌어먹을 눈동자가 저곳을 또 아프게 기억했다. 루한을 다시보지 않더라도 저 자리는 눈에 선명할것이 뻔했다.
루한에 관한 일이면, 일년전 그날도, 그 아팠던 날들도 다시 어제처럼 재생할 수 있었다. 민석은 한숨을 내쉬고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다 멈칫했다.
또다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약이라도 주세요]
[저번주에 드려서 더 드시면...]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요]
처참했던 지난 일년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살아도 산것이 아니었다. 약에 의존했던 지난 나날들, 끔찍했던 나날들,
한국으로 돌아와 루한의 과거를 캐내면 캐낼수록 경악했던 모든 것들, 민석은 루한에게 저를 전부 내주었던 지난날을 원망했다. 이제 제발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빌고싶었다.
아직까지 루한에게 얽혀있는 자신을 잘라내고 싶었다. 제가 죽는다고 해도.
[토끼는 단 하나의 세잎클로버를 주었어요. 목숨과 같은 소중한 것이었어요.]
암호닉 ★ 얼룩말님 솜사탕님 으억님 석류님 ☆
루민이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더욱 많습니다 ㅠㅠ 다음편부터 알콩달콩 찬백으로 돌아올게요
간간히 이어지는 루민이들도 사랑해주세요
분위기가 답답하네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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