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슬픔은 가장 찬란한,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다.
찬열은 몇년간 뒤떨어지고 침체된 내 삶에 그래도 나를 돌려놓으려고 애썼던 사람이었다. 나의 가장 힘든 시절을 지켜본 사람으로써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유일하게 내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 이기도 했다. 그래서 찬열을 만날때는 가끔 마음이 불편한것을 느낀다.
찬열은 루한을 만나고 망가진 후 다시 새로워지려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사람이었다. 모든것을 알고있는. 그래서 불편한 것이다. 나의 가장 나약한 곳을 알고 있기에,
"괜찮대두."
나를 안쓰러히 보는 눈빛이 싫다 찬열아. 머뭇거리는 찬열의 등을 떠밀었다. 책망과 연민이 뒤섞인 친구의 눈초리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초라하다.
어째서 나만 그를 더 사랑했을까. 어째서 이년 동안의 시간 동안 나만 행복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상처를 덜 받았을까. 헤어짐이 당연한 결과지만 적어도 루한의 그동안이 진심이었을꺼라 혼자 믿고 지낼 수 있으니까.
"그럼, 간다. 늦게까지 가게 문 열어놓지마."
"알았어.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어서 곧 닫을거야."
찬열이 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구석에서 마지막까지 자리잡고 있는 손님이 나갔다. 이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다. 이미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진 바깥이 보인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두운건 이제 싫었다.
사랑은 너무 쉽게 나를 떠나갔다. 떠난 것을 붙잡는 미련한 짓을 하는건 바보들이나 하는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제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
루한은 확실히 연락이 없었다. 그날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대했는데, 연락이 있을리 만무했다. 제가 테이블을 떠난후에도 루한은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외면했다. 그리고 그 눈부셨던 노을빛이 다 사그라지기도 전에 루한은 가버렸다.
이건 내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겨우 찾은 일상에 루한이 아주 잠깐 등장한 뒤로 미친듯이 무너져가는 나를 나도 알았다. 그래서 루한을 내치지 않았는가. 하긴, 내쳤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루한은 날 붙잡지 않았으므로.
상황은 내가 원했던 대로 완벽하게 돌아갔다. 잠깐이지만 다시 마주친 루한에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뒤, 매정하게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는것, 그리고 두번다시 루한이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것.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 어느 하나 거슬림이 없이 딱딱 맞춰 돌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슬픈가. 왜 더욱더 망가져 가는가. 나는 왜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너를 기다리는가.
손끝이 닳도록 테이블 끝을 매만졌다. 그래. 나를 붙잡는 과거에 얽매여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눈에 계속 밟히는 너의 뒷모습, 노을빛이 쏟아져 내려 비추어졌던 네 얼굴의 역광, 그 것들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도는건 다 과거때문이다.
현재의 나는, 너를 그리워 하지 않아. 네 연락따위 궁금하지 않아. 네가 또 어디로 가버린 건지,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난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발, 민석아. 이제 그만 내려놓자.
***
민석은 공항까지 내달렸다. 허겁지겁 짐을 보내고, 허겁지겁 수속을 밟았다. 무언가 쫓기는 기분이었다. 여권을 몇번 떨어트리고 탑승게이트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민석은 숨을 돌리고 잠깐의 안정을 찾았다. 짐을 꾸리고 공항까지 오는데 짧으면 짧고 길면 긴시간, 민석의 핸드폰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다.
민석은 당연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에 예쁘게 저장한 [루한] 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렇게 헤어진 것에 대해서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감정을 느낄수 없을 정도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에. 이년동안 사랑을 속삭였던 그가 실은 이년동안 나를 속이고 있었다니.
문자와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민석의 머릿속까지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민석은 살며시 폰을 꺼내었다. 민석은 딱 한번만 열어보기로 했다. 딱 한번만 받아보자. 지금쯤 제가 없는 것을 눈치채고 루한이 이렇게 계속 연락하는 거니까. 이년간의 시간동안을 통틀어 루한이 단 한순간만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여보세요?"
"[받았어.]"
아주 잠깐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민석이 잘못들었나 싶어 더욱더 귀를 가까이 대었다.
"여..보세요?"
"[...이 미친 게이새끼가.]"
날카로운 음성의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신랄한 말투였다. 의미를 파악한 민석이 우뚝 섰다. 손이 벌벌 떨렸다. 지금..이게.. 무슨.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끈이 강제로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루한을 믿으려 노력했는데. 충격이 또다시 온몸을 강타했다. 발끝으로 떨어지는 심장을 느꼈다.
루한이 없어진 자신을 찾기위해 전화를 했던 것인 줄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 안일한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애타게 나를 찾던 전화기가 자신에게 침을 뱉기위해 지금까지 울린거였다니.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 잠깐 귀를 스쳐갔던 익숙한 남자 목소리. 그건 루한이었다. 민석은 생각했다. 루한이 여자에게 전화를 바꿔 준 것이다. 그렇게 이유를 알것도 같았다.
루한이 가지고 있던 오물을 자기가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민석이 아직까지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공항 휴지통에 떨어트렸다. 째지는 목소리를 듣기 싫다. 루한과 거짓 사랑을 나누었던 기계였다. 슬픔과 충격에 목이 멜 것 같았지만, 민석은 이제 더이상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잡아주길 바라는 헛된 기대였던 것이다.
민석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루한이 언뜻 보인듯 싶었다. 당연히 그럴리 없었다.
***
찬열이에게 단호하게 얘기한 것과는 다르게 카페의 문은 늦게까지 열려있었다. 민석은 잠깐 눈을 붙인다고 눈을 감았던 것이, 꽤 오래 잠이 들었음을 깨닫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뜨자 몸에서 떨어진 담요가 보였다. 내가 담요를 덮고 잤었나.
정신차려 김민석. 아무리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을 시간이라지만,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이 들다니. 요 몇일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렇게 까지 일상과 멀어지면 안되었다. 민석이 서둘러 가게의 문을 잠그고 나갈채비를 했다. 곁에 떨어진 담요를 잘 개켜놓고.
카페를 나서자마자 불어오는 찬바람에 민석이 몸을 웅크렸다. 정말 한밤이라 그런지 낮보다 날씨가 훨씬 추운 느낌이 든다. 찬열의 말을 들을걸 그랬다. 그냥 일찍 갈걸. 카페나, 집이나, 눈뜨고 감는 순간까지 그 빌어먹을 예전 생각을 할 것이 뻔한데.
민석이 시간을 확인하려 폰을 꺼내었다. 택시타기는 뭣하고, 지금 지하철이 다닐 시간인가 해서. 그리고 아까 잠이 들어 확인하지 못했던 핸드폰을 보았다. 그리고 한통의 문자를 보았다. 순간, 민석은 움츠렸던 몸을 더욱 세게 움츠렸다.
왜 항상 잊으려고 마음먹는 순간에 루한은 손을 내미는 걸까. 민석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문자의 출처는 루한이었다.
[민석아. 내일 만날 수 있니.]
민석의 손에 들린 휴대폰엔 자신을 이지경까지 밀어놓은 루한이 보낸 무책임한 한마디가 있었다.
-
"백현 이번 동화 다 썼어?"
"아니, 왜?"
"결말이 궁금해서.."
"뭐가 궁금해. 애기들 이야기니까 행복하게 끝나겠지. 애냐? 이런거나 읽고 자빠졌게?"
"그러겠지?"
"당연하지. 왜 지랄이야 꺼져."
"아니 그게 만약 현실이면 어떨까 싶어서"
"아오 미친. 나랑 장난하냐 씹쌔야? 말로 해줘야 아냐? 토끼 쟨 말도 붙이기 전에 잡아먹혀 뒤져 병신아."
약속시간에 빠듯할 것 같아서 서둘러 준비하는 백현에게 루한이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화 하나를 쓰는데 꽤 애를 먹는 백현은 갑자기 들려오는 루한의 말이 달갑지 않아 날카롭게 굴었다. 그리고 곧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달리 축 쳐져 보이는 루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웃으면서 베개하나정도는 장난삼아 집어던져야 했을 루한인데, 오늘은 왠일인지 팔을 눈가에 잠깐 얹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왜그러지? 무슨일있나. 갑자기 소심해진 백현이 조용히 물어보았다.
"야아, 어디 아프냐?"
"응, 좀 그렇네..."
"헐 아프다고? 미친. 약 사다줄까?"
"아냐, 그냥 잠깐 머리아픈거야. 근데 늦지 않았어?"
루한의 힘없는 마지막 마디에 백현이 눈을 크게 뜨고 시간을 보았다. 아진짜 어떡해, 이러다 늦겠네, 우리 찬열씨랑 만나야 되는데, 급하게 가방을 메고 신발을 꿰어신은 백현이 요란스럽게 문을 열어 젖혔다. 아프면 병원가! 루한에게 걱정어린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또 거친 입담과는 달리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착한 백현이었다. 루한도 몇달 같이 살다보니 느끼건데,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많이 가는 룸메였지만, 어디서든 꼼꼼하게 자신을 살펴보아 주었다. 루한은 그 점이 꽤 고마웠다.
우당탕거리며 백현이 나갔다. 루한은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오버랩 되듯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말 머리가 아파서 못견디겠다. 오늘은 일방적으로 잡은 약속이 있는 날이였다.
더 들고 오려 했는데, 기다리신 분들이 있으실까봐요 ㅠㅠ 될 수 있으면 내일 한번 더 업뎃할게요!!
항상 댓글달아주시는 비회원분들과 암호닉 분들, 회원분들 감사합니다 ㅠㅠ
암호닉 얼룩말님 으억님 솜사탕님 몽몽님 석류님 곰도리님 두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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