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열은 카페에 앉아 어둑해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모르게 턱 하고 가슴속에 걸린 기분이었다. 손매를 매만지며 앞에 앉아있는 고요한 민석의 눈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눈도 민석처럼 고요할까 싶었다. 사실 자신의 감정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까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듯 했음에도.
친구는 닮아간다는 말이 맞았다. 항상 민석을 보며,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잘 인지하긴하지만 표현해 내는데 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것이 보였는데.
언젠가 살폿히 민석이 내놓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바보같다고 생각하며 제가 더 가슴을 쾅쾅 내쳤었다. 아직도 사랑은 믿지 않지만, 그들의 관계에 제가 더 답답해서.
오늘은 민석에게 미안하지만, 민석의 감정을 들을 마음의 빈곳이 남지 않았다. 고요하지만 깊은 제 감정의 소용돌이에 푹 빠지고 싶었다.
찬열은 백현을 쉽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 잠자리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저돌적이게 다가오는 백현에게 점점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가 다가오면 다가오는 만큼 자신의 멋모를 감정은 더 깊어졌다. 이렇게 쉽게 빠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찬열은 그 흔한 첫사랑의 기억조차 없었다. 관심이라, 관심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깊었다.
그러나 무서웠다. 섹스 한번, 삼주동안의 연락, 단 세번의 만남.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의 깊이가 자신을 이렇게 옭아맬정도라면, 앞으론 정말 어떻하지.
백현은 얕았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눈엔 백현이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더욱더 백현을 거부하고 싶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아깐 내가 미안했어요]
자신도 이렇게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정은 싫었다. 금요일 밤마다 원나잇했던,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싶다.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민석의 기분이 자신에게도 전이 된듯 싶었다. 눈을 올려보자 아직도 생각에 잠긴 민석의 모습이 보였다.
찬열은 큰 눈을 미끄러뜨려 다시 손끝을 바라보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묘한 감정을 집어치워놓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실은, 백현의 팔을 잡아챈 금발의 남자의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찬열은 머리를 감쌌다. 짧은 만남에 휘둘리는 제가 싫었다.
"찬열아"
"...응"
"깊게 생각하지마."
원래 깊게 생각하면 되려는 것도 안되는 법이야. 민석은 웃었다.
"자기 감정에 솔직해 지면 돼"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찬열은 웃음으로 넘겼지만 민석은 입 속에서 계속 저 말을 굴렸다
'깊게 생각하지마'
같은 언어지만 다른 뜻이었다.
***
[호랑이는 토끼풀을 먹지 못했어요. 하지만 토끼는 앞발을 세워 세잎클로버를 건네주었답니다.
이건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너는 착한친구니까 이걸 줄게. 너는 내 친구잖아 그렇지?
호랑이는 토끼를 향해 웃어주었어요. 그리고 세잎클로버를 받았어요.]
민석은 커피를 달게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단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하지만 커피만큼은 깔끔함을즐겼다.
물론 원래부터 커피의 단맛을 기피했던 것은 아니였다. 그냥, 단지. 그때는 설탕을 타지않아도, 시럽을 넣지않아도 달았었다. 커피든, 무엇이든 간에.
[계속 상태가 이상해요. 속이 답답하고, 축축 쳐져요. 그날을 잊을수가 없어요. 난.]
민석의 유학생활은 힘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에 홀몸으로 덜렁 떨어져서 길을 걸을때도, 물건을 살때도, 한끼를 때울때도 덜덜떨었다.
물론 민석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답답함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했다.
이렇게 몇년을 살수 없다는 생각에 어학원을 끊은지 한달, 하지만 느는 것은 제스쳐 뿐이었고, 민석은 아직도 입이 트이지 않아 친구조차 사귀지 못했었다.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거나, 언어에 따른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민석이 항상 조심한 탓이었다. 민석은 그곳에서 한번도 입을 연적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이어폰을 귀에 끼었다. 누군가 말을 붙이지 못하도록. 배움에 대한 필요성은 있었지만 민석에겐 아직도 모든것들이 낯설었었다.
"안녕"
그리고 두달, 항상 비어있던 제 옆자리가 노을향으로 채워진것은, 민석의 유학생활이 딱 두달째 이르렀을 때였다.
"코리안? 한국 사람?"
음악이 나오지 않은 이어폰을 낀 귀에 다소 서툰 한국어가 들렸다. 민석은 이어폰을 빼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흘낏 쳐다보았다.
황금빛의 거친머리카락이 민석쪽으로 다가갔다. 책을 같이 보려 한 탓이었겠지만, 갑자기 너무 가까워져 민석은 얼굴을 제대로 보지못했다.
그때의 진한 커피향이 민석의 코를 간지럽혔다. 민석은 몸을 옆으로 비껴나가게 하며 책상끝쪽으로 몸을 한껏 제꼈다.
"나는 중국사람이야, 나는 엄청 한국어 잘해."
고개를 바로해 마주한 순간,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그때가 오후 다섯시쯤 되었을까, 민석이 남자의 눈부터 턱선까지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진한 노을빛이 창문을 통해 민석과 남자를 덮쳤다.
별것도 아니고, 어쩌면 항상 있어왔던 순간일지도 모르겠는데, 창문을 등진 민석의 눈엔 발광하는 마지막 햇살과 금발의 머리카락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잔상으로 남았다.
첫만남은 그러했다. 한폭의 명화같이 아름다웠던 순간. 민석은 기억했다.
영어가 서투른 민석에게 한국어가 능통한 루한은 꽤 메리트가 되는 친구였다.
루한도 영어는 서툴었지만, 민석은 예전처럼 소심하게 길을 다니지 않았다. 서툴러도 둘이 있으면 왠지 기운이났다.
부끄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손목을 잡아챈 손이 더듬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면 민석은 아무것도 아닌데 즐거웠다. 물건을 사다 계산이 틀려서 서로 킥킥 댈때도.
말이 통하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둘은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서로를 의지했다. 그리고 그만큼 빠른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무상관없었다.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민석은 루한이 찬열보다 더욱 가까워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둘은 항상 같이다녔다. 밥을 먹을때도, 잠을 잘때도, 숙제를 할때도, 쇼핑을 할때도.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서로도 이런 변화를 알지 못했다.
"루한은 커피 좋아해? 뭐먹을래?"
"응응 시럽 많이 많이 넣어서. 단걸로! 아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편이었던 루한과 민석은 브런치를 할때 꼭 커피를 메뉴에 추가시켰다. 항상 루한은 민석과 같은걸로-라며 커피를 시켰고, 루한의 취향을 알았던 민석은 주문할때 늘 달콤한 커피를 시켰다.
그러다 보니 커피는 항상 달았고, 곧 커피뿐만이 아니라 식성도 취향도, 습관마저도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민석이 수업을 빠지면 루한도 수업을 빠졌고, 민석이 달걀토스트를 먹으면 루한도 달걀토스트를 시켰고, 샤워바스는 과일향으로, 액세서리를 거추장스러우니까 목걸이 하나만.
둘은 쌍둥이처럼 닮아가기 시작했고, 항상 같은것을 고집했던 서로는, 이제 어떤것이 자신의 것인지, 누가 처음부터 이것을 좋아했는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친했고, 달콤했던 날들이 시작되었었다.
[아무것도 못먹겠어요. 불안해요. 아무것도 만질수 없어요.]
서로가 서로 같았던 때가 분명, 있었다.
***
"안녕 찬열씨?"
"..너.."
어김없이 금요일날 바를 찾은 찬열은 생각치도 못한 상대에게 당황해 하는 참이었다. 눈꼬리를 싸악 올린 아이라인을 한 백현은 찬열이 앉자마자 곁에 다가가 찬열의 칵테일을 대신 마셔주었다.
찬열의 얼빠진 표정에 백현은 크게 웃고싶은것을 참았다. 저번주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또다시 일주일을 손톱만 물어뜯으며 이를갈았던 백현이었다.
만난이후로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얼굴을 보는것 같은데..그렇지만 특히 저번주는 기다리기가 더 힘들었다. 꼴에 제 자존심때문에 찬열에게 연락을 못한 탓이었다.
기다릴때는 이렇게 기다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참았는데, 막상 금요일이 되니 식혔던 화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찬열씨 나 만난이후로도 금요일마다 여기 왔었나봐?"
"..변백현씨"
"왜?"
어김없이 금요일에 여길오다니 ! 저번보다 더 욱한 화가 백현을 괴롭혔지만 비꼬는 말로 대신했다. 찬열이 누군가와 잠자리를 계속 가졌다는 생각에 관자놀이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꾹 눌러 참았다. 오늘은 담판을 지으러 온것이다. 백현은 눈을 감고 다시 찬열의 칵테일을 대신 쭉 마셨다.
"찬열씨와 못다한 얘기하러 왔어. 오늘 낚을 상대없으면, 나어때? 말상대는 해줄수 있어."
"백현씨 그때는 미안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오늘은 뭐. 나는 할얘기 있어서 왔어."
"...나도 할말 있어요"
할말? 할말이 있다구? 나한테 할말이 있다니. 그런사람이 일주일간 연락이 없어? 백현은 찬열의 얼굴을 마주댄 순간부터 울화통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속이 배배꼬였다. 갈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실은 자신이 모르는 찬열의 금요일의 상대 때문이리라.
백현은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한잔 시켰다. 쏘아붙이고 뺨이라도 한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아직 찬열과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였다.
일주일간 글도 못쓰고 밤을 꼬박 샜다. 찬열의 생각 때문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가 자신을 다 갉아먹고 있었다.
***
설연휴에는 쉬려했는데, 혹시라도 기다리시는 분이 있을까봐 짧게 올려봤어요!!
루민이들의 과거이야기도 풀어야되고
언제 찬열이 철벽도 지우죠?? ㅠㅠ
행복한 명절되세요!!
오타와 지적은 사랑이에요!!
오늘도 많이 짧네요 ㅠㅠ 내일부터는 항상 길게길게 돌아올게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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