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찬열씨?"
"..너.."
어김없이 금요일날 바를 찾은 찬열은 생각치도 못한 상대에게 당황해 하는 참이었다. 눈꼬리를 싸악 올린 아이라인을 한 백현은 찬열이 앉자마자 곁에 다가가 찬열의 칵테일을 대신 마셔주었다.
찬열의 얼빠진 표정에 백현은 크게 웃고싶은것을 참았다. 저번주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또다시 일주일을 손톱만 물어뜯으며 이를갈았던 백현이었다.
만난이후로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얼굴을 보는것 같은데..그렇지만 특히 저번주는 기다리기가 더 힘들었다. 꼴에 제 자존심때문에 찬열에게 연락을 못한 탓이었다.
기다릴때는 이렇게 기다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참았는데, 막상 금요일이 되니 식혔던 화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찬열씨 나 만난이후로도 금요일마다 여기 왔었나봐?"
"..변백현씨"
"왜?"
어김없이 금요일에 여길오다니 ! 저번보다 더 욱한 화가 백현을 괴롭혔지만 비꼬는 말로 대신했다. 찬열이 누군가와 잠자리를 계속 가졌다는 생각에 관자놀이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꾹 눌러 참았다. 오늘은 담판을 지으러 온것이다. 백현은 눈을 감고 찬열의 칵테일을 대신 쭉 마셨다.
"찬열씨와 못다한 얘기하러 왔어. 오늘 낚을 상대없으면, 나어때? 말상대는 해줄수 있어."
"백현씨 그때는 미안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오늘은 뭐. 나는 할얘기 있어서 왔어."
"...나도 할말 있어요"
할말? 할말이 있다구? 나한테 할말이 있다니. 그런사람이 일주일간 연락이 없어? 백현은 찬열의 얼굴을 마주댄 순간부터 울화통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속이 배배꼬였다. 갈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실은 자신이 모르는 찬열의 금요일의 상대 때문이리라.
백현은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한잔 시켰다. 쏘아붙이고 뺨이라도 한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아직 찬열과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였다.
일주일간 글도 못쓰고 밤을 꼬박 샜다. 찬열의 생각 때문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가 자신을 다 갉아먹고 있었다.
"찬열씨가 먼저 얘기해."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닌가봐? 만나니까 이제서야 생각난듯이 굴고. 백현은 입술을 빼쪽이 내밀었다. 어디한번 들어나 봐줄게.
찬열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진중하게 백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조명아래 반짝이는 얼굴이 제눈에 쏙 들어왔다.
찬열의 눈빛이 올곧게 제게 향하자 백현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잔을 굴렸다.
"아냐, 아닌것 같아. 그냥 내가 먼저 말할게. 찬열씨."
"..응 그래요 그럼"
당신 입에서 어떤말이 나올지 내가 어떻게 알고. 백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찬열씨. 난.."
"..."
"당신이 날 가볍게 생각하는게 싫어."
"..그건"
"닥치고 내말 들어"
"..."
"당신과 첫만남이 이런곳이라는게 맘에 들지도 않고,"
"..."
"하지만 그래도 좋아. 어쨌든, 우리는 그럼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
"솔직히 난 당신이랑 계속 얼굴 보고싶거든."
"백현씨"
"그냥 연애나하자고. 가볍게"
난 당신이 아주 맘에 드니까
"아 덥다."
백현은 말을 끝내고 찬열의 눈을 피하며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얼음을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백현씨"
"...말하지마 안들을거야. 니대답 필요없어. 그냥 연애해. 응?"
"백현씨"
"..."
"..백현씨."
"...좋아 좋다고. 말해봐."
"나는 가벼운 남자는 싫어요."
백현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쳐낼줄은 알았지만, 단호박을 먹었나. 왜이렇게 단호해. 아픈부분을 대놓고 긁어서 말하냐.
백현은 눈을 내리깔고 손끝만 내려보았다. 아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매정하면 좀 서러운데... 백현은 말없이 입안에서 얼음을 굴렸다.
"백현씨"
"...아 안들어. 안들을거야...요..."
갑자기 찬열이 멀어진 기분에 백현은 끝에 존대어를 붙였다. 이제 정말 얼굴 볼수 있을까. 서러워진 기분에 백현은 눈물이 모이려는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들어 칵테일을 마셨다.
"백현씨 나봐요"
"..왜...ㅇ.."
백현의 턱이 찬열에 의해 들려졌다. 찬열은 손을 들어 백현의 눈가를 닦았다. 아 저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고여보였나 보다. 고개를 흔들어 찬열의 손길을 거부했다.
동정은 싫었다. 얼굴을 닦는 손이 따뜻했지만, 이제 저사람을 오늘로써 끝내야하나 서글퍼졌다. 백현이 어깨를 틀어 찬열에게 빠져나오려 했다.
찬열은 백현의 어깨를 틀어쥐고 얼굴을 천천히 가까이 했다. 백현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다정스럽게 백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진한 키스는 아니고, 단순한 버드키스, 찬열은 백현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고만 있었다. 계속.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따뜻한 키스였다. 조명은 보랏빛에 또다시 아이라인이 번진 백현의 눈, 바 위에 다른모양으로 줄줄이 놓여있는 빈 칵테일 잔들.
하지만 둘다 어느곳이라도 상관없었다. 서로의 입술, 부드러운 감촉에 흠뻑 젖고있었다.
"백현씨"
찬열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떼고, 백현을 불렀다. 내가 오늘 얼마나 백현씨 이름을 부른줄 알아요? 찬열이 눈을 접고 웃었다.
"가벼운 남자는 싫어요."
"..."
"그러니까 가볍게 말고, 조금 무겁게 연애할까요?"
백현이 몸을 살짝 떨었다. 찬열씨 그거 꽤 괜찮은 대사였어. 백현은 마주 웃으며 찬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찬열의 목에 매달렸다.
잔이 엎어져 찬열의 손과 백현의 손이 찐득해졌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백현은 찬열의 볼에 뽀뽀를 하며 몸을 살짝 떼었다.
아나 좀 행복한거 같아. 백현이 피슬피슬 웃었다. 지금까지 찬열씨 생각때문에 밤잠 설친날들이 얼마였는데, 백현씨만 그런줄 알아요?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뭐 나? 밤마다 나 생각했어? 감동인데?, 백현씨도 나 생각했다며, 나는 잠잘잤어요. 백현씨는 잠 잘 못잤다며,
야 이럴순 없어, 니가 날 더 좋아해야해 빨리
백현씨가 나 더 좋아해요?
아니? 누가그래?
'환상'안에서의 환상. 관계의 연장. 새로운 시작.
***
[야나 찬열씨랑 사귐]
루한은 폰에 반짝거리는 문자를 보고 살짝 웃었다. 결국 들이대더니 그렇게 사귀네. 축하해. 짧은 문자를 보내고 루한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일어나서 거실을 서성대었다.
사실 루한은 안절부절하는 중이었다. 이틀째였다. 문자를 한통 기다리고 있는데, 백현의 문자 말고. 다른 사람.
손에 축축히 땀이 배이도록 핸드폰을 꽉 쥐었다. 연락해야하는데. 이틀째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문자를 못봤을까. 번호가 틀렸을까 싶어 확인하길 수십번. 최근에 까페도 계속 나간다고 했으니까 무슨일이 생기진 않을테니 그건 일단 안심.
일년쯤이면 이제 되었을까 싶어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인사를 하려했지만 살짝 비춘 자신의 모습에 파득거리며 숨는 모습을 보고 루한은 적지않는 충격을 받았다. 내색은 안했지만.
백현의 손목을 잡고 차에 태우는 순간에도 이 손목이 민석의 손목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어깨너머로 카페를 계속 훔쳐보았는데, 머리카락 하나라도 볼까 싶어서.
이젠 연락해야하는데, 해명해야하는데,
많은 오해가 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야하는데.
[민석아]
[나 루한이야]
[문자로 할 얘긴 아닌것 같아]
[나 한국 왔었어]
[우리 만날래?]
내 과거의 사람. 사랑.
**
"루한 오늘은 뭐먹을래?"
"민석이가 만들어준 샌드위치 먹을래. 집가서 먹을까?"
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루한,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외식할까?
그날은 둘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서로 만나게 된지 딱 일년째 되는날. 사귀는 것도, 결혼한 것도 아닌데 민석과 루한은 오늘을 기념하고 싶었다.
서로 만난지 일년째 되는날, 일년동안 서로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내가 네가 되어가고 네가 내가 되어가고.
이렇게 잘 맞는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한번의 걸리적 거림도 없이 매순간마다 서로에게 녹아드는 우리를 보면서.
"아냐, 민석아. 너가 해주는게 제일 맛있어. 그거먹자. 나 그거 먹고싶어. 그럼 샌드위치를 밖에서 먹자!"
루한의 보챔이 시작되었다. 민석은 못이긴척 루한의 말을 들어줄 것이 뻔했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차라리 밖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을바에 루한과 샌드위치와 커피한잔에 이야기를 즐기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래. 알았어. 민석의 승낙이 떨어지자 루한은 해맑게 웃었다. 그래. 그럼 커피는 내가 끓일게 알았지? 샌드위치에 햄 두장 넣어줘.
서로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햇빛이 눈부시게 밝았었다.
-
정교하고 아름다운 분수대였다. 꼬마천사들이 정성스럽게 조각되어져 있는 곳. 싱그럽게 빛나는 봄날의 공원에 민석과 루한은 그곳으로 피크닉 가방을 옮겼다.
민석이 정성스레 만든 샌드위치, 예쁘게 썬 과일들, 루한이 유일하게 내릴줄 아는 아메리카노. 남자 둘이라 조금 새삼스러웠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 햇빛이 밝고 너무 예쁘니까.
루한이 여기가 너무 좋다고 웃었다 그리고 민석이 만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밍석 할말 있어"
다 먹고 말해 바보야. 민석이 살며시 웃으며 루한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이 샌드위치 맛있어 많이."
"알아 누가만든건데"
"나 또 할말있어"
"뭔데?"
"...민석 워 아이니"
동그랗게 발음되어지는 말이 너무도 아름답게 들렸다. 적어도 민석의 귀에는. 중국어에 문외한이어도 저정도 뜻은 알았다. 민석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민석과 루한은 애초부터 서로에게 애틋한 감이있었다. 그래서 루한의 동그란 고백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서로가 이미 연인보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그 고백은 한낮의 태양처럼 뜨거웠지만, 자연스러웠고, 서로가 당연히 여기던것을 뱉은 언어라 사귀고 말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루한 좋아해"
작열하는 태양이 두사람의 머리위에 드리워졌다. 때맞춰 분수대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민석과 루한의 발치에 예쁜 무지개가 피었다. 예쁜 시작이었다. 그랬었다.
-
[하루에 몇번씩 그사람 생각이 나요.]
[그 사람이요?]
[너무 힘들었어요. 힘들어서...그래서...]
[이름이...]
루한. 민석은 혀 안쪽에서 부드럽게 감겨지는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아직도 과거에 잔상에 갇힌 제가 너무 우스웠다. 루한. 루한.
민석은 어두운 적막속에 홀로 앉아있었다. 몇일째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잘 수 없었다. 꿈을 꾸었다. 그 한때 행복했었던 꿈을.
눈의 피로를 풀기위해 눈만 살짝 감았다. 몸은 쇼파에 반쯤 뉘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의지로 누운게 아니므로 뉘어졌다는 말이 맞았다. 손끝하나 힘을 줄 수 없었다.
몸의 고됨이 전신을 짓눌렀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스라히 펼쳐졌다. 그때가.
이제 잘 살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왔어... 응?
민석의 손가락에서 핸드폰이 굴러떨어졌다. 읽지 않은 새메시지가 깜박깜박 빛이 났다.
저번편에 암호닉을 빼먹었네요 ㅠㅠ
얼룩말님 솜사탕님 석류님 으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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