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알다
01
"이게 뭐야..."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길래, 마당에 널어 둔 이불이 비를 맞기 전에 걷으러 나간 것 뿐이었는데. 지금 내 손에는 두툼한 이불이 아니라 핸드폰이 들려있다.
...어째 꽤나 공포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처음 보는 기종에,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니. 우리 집 마당에 누가 일부러 두고 간 건가? 내가 주울 걸 알고? 그렇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이걸 어떻게 주인을 찾아주지... 잠겨 있어서 연락처도 못 보는데. 한참을 고민해도 나오는 답은 '어쩌지' 뿐이었다. 경찰서에 가져다 주려니 막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뚫고 거기까지 가기가 싫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놈이야.
"...모르겠다, 비 그치면 경찰서에 갖다 주든가 해야지."
그래, 핸드폰 분실 사고는 흔한 일이고. 처리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두자, 설마 하루 지났다고 무슨 일 생기겠어?
너를 알다
"아, 누가 아침부터 전화를 이렇게 해대는 거야."
괜히 웹툰 정주행 한다고 난리를 치다 늦게 잠든 참에 아침 일찍부터 드륵드륵 울리는 핸드폰에 짜증이 솟구쳤다. 이런 상태에서 전화 받으면 말 곱게 안 나오는데.
"뭐야, 나 아니잖아."
까만 액정만 보이는 핸드폰에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내 귀를 툭툭 쳤다. 뭐야, 환청인가? 요즘 시끄러운 곳에 자주 가서 이명이라도 생겼나? 그렇지 않고서야 진동 소리가 이렇게 들릴리가...
있구나, 저 핸드폰.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살폈다. '집'. 의심의 여지 없이 핸드폰의 주인인 것 같았다. 핸드폰이 없으니 집 전화로 했겠지.
"여보세요."
"핸드폰 돌려 주세요."
아. 싸가지다.
누가 들어도 내가 핸드폰을 훔쳐간 것 같은 상황에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질 뻔했다.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비 맞을 뻔한 거 주워줬더니 누굴 도둑 취급을 해.
"뻔뻔하네, 누군 줍고 싶어서 주웠나. 그쪽이 남의 집 마당에 핸드폰 버리고 갔잖아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강아지 산책 시키러 갔다가 공원 벤치에 두고 온 건데."
"유감이네요, 저희 집 마당이 그렇게까지 넓진 않은데."
제대로 잘못 걸렸다. 차라리 스토커가 협박 하는게 낫지. 노답도 이런 노답이 없다.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침착하자, 성이름. 또라이를 만나도 정신만 차리면 피할 수 있댔어.
"먼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백화점 앞에 있는 광장에서 2시까지 만나죠. 돌려드릴테니까."
"약속 하고 안 나오시는 건 아니죠?"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습니다."
내가 진짜 살다살다 이런 또라이가 다 꼬이고... 올해 무슨 살이라도 씌인 거 아니야? 굿이라도 하러 가야 되나.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다. 이제 10시인데, 준비하고 나가려면 또 한참 걸리겠네. 물론 대충 나가도 되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겨버렸다. 내가 저 또라이보다는 멀쩡하게 보여야겠다는.
너를 알다
30분. 그래, 벌써 두시 하고도 삼십분이 지났다. 누구보고 나오네 마네 하더니 결국 또라이가 모습을 안 보인다는 거였다. 이거 설마 나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렇다고 하기엔 목소리가 진짜 같았는데. 홀로 광장에 서서 남자가 연기자일 가능성까지 털어보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3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등신같이 여기 서서 뭐하고 있는 거야 나.
세 시. 딱 세 시가 되면 가자. 그 땐 핸드폰이고 나발이고 다 그냥 경찰서에 줘버리고 잊는 거야. 그러니까 성이름. 침착하자, 상대는 또라이야.
틈틈히 시계만 확인하고 있는데 문득 왼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주인 잃은 핸드폰에 '발신자 표시 제한' 이라는 문구가 떴다. 그래, 제 주인 전화인 건 알고 잘도 우는 구나.
"여보세요."
"저랑 장난하세요?"
"뭐요?"
아침의 그 목소리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도, 또라이도. 하다하다 이제 적반하장까지... 답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노답 집합소일 줄이야.
욕을 퍼부을까 싶다가도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자, 진정. 나는 알로에다... 진정의 신이다...
"2시까지 보자고 한 건 그쪽이었잖아요."
"네, 그래서 정확하게 1시 43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제가 1시 30분부터 와서 있었는데 지금까지 여성 분은 한 분도 못 봤거든요. 이제 거짓말까지 하세요?"
"말이 안 통하네. 그쪽이 못 봤겠죠, 제가 89번 버스 정류장 앞에 계속 있었는데요."
"거짓말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89번 버스 노선 바뀐지 3년 됐거든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몇 대가 지나갔는데."
멀쩡하게 다니는 버스를 없앨 정도로 나한테 시비가 걸고 싶은 건가? 아니 늦을 거 같으면 미안하다고 하든지, 무슨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해.
"됐고, 빨리 와서 돌려주세요. 남 핸드폰 필요 없잖아요."
"장난 그만 하세요, 인심 쓰는 건 여기까지니까. 보이는 경찰서 아무 곳이나 두고 나올테니까 그쪽이랑 연락 하시든지."
그리고 고민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굴 호구로 보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사과 한 마디를 안 하네.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
잔뜩 열이 오르는 속에 전화가 끊어져 보이는 잠금 화면 속 시계를 노려보는데,
"왜 이렇게 설정이 돼있지."
2018. 3. 14. 3:08 PM
완연한 봄날씨와 같은 기온에도 급격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등골에 죽 번지는 오한에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오른손에 들린 내 핸드폰을 켜 잠금화면에 크게 달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2015. 3. 14. 3:08 PM
날짜도 1분씩 지나가는 시간도 같았는데 년도가 달랐다. 단순히 설정을 3년 뒤로 해둔 건가? 그게 아니면...
멍하니 두 개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데, 남자의 핸드폰에 '종철' 이라는 이름이 떴다. 웅웅 울려대는 진동에 전화를 받자 들려오는 목소리와 말투가 남자와는 많이 달랐다.
"야, 너는 왜 연락 한 통이 없어? 2018년도 된지 벌써 세 달이나 지났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밤새 웹툰을 너무 많이 봐서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지경이 됐나. 현실도피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이런 식으로 정신병이 오는 건가. 트루먼쇼 주인공이라도 된 거야? 성이름쇼?
'89번 버스 노선 바뀐지 3년 됐거든요.'
'제가 1시 30분부터 와서 있었는데 지금까지 여성 분은 한 분도 못 봤거든요. 이제 거짓말까지 하세요?'
"야, 민현아. 황민현, 내 말 듣고 있어?"
남자의 이름 같은 말을 내뱉던 목소리가 멈추더니 이내 전화가 뚝 끊어졌다. 아마 잘못 받은 경우라고 생각한 듯 싶었다. 전화가 끊어졌음에도 멍청히 핸드폰을 계속 귀에 댄 채 서있었다.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와야 했다. 꿈 같이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핸드폰의 주인인 남자가 필요했다. 다시 전화 해. 다시 전화 해라 제발.
손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핸드폰을 잡고 있는데 정적이 일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짧은 시간 사이에 간절했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민현 씨?"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핸드폰 잠금 푼 건 아니죠?"
"지금 광장에 계세요?"
"네. 그, 큰 나무 앞에 있는데요."
느릿하게 눈을 돌려 가장 큰 나무를 바라봤다. 아직 꽃 필 시기가 아니라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아주 큰 벚나무였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보였지만, 정작 그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하는 추측이 정말이거나, 정말일지도 모르는 일이거나.
그게 아니면 세상 모두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