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알다
03
비밀번호를 알게 된 남자의 핸드폰은 생각처럼 쓸모가 있진 않았다.
핸드폰이 2018년도에서 온 것이라고 해서 연결까지 2018년도와 되어있는 건 아닌지 완전 먹통이었으니까.
남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화도 걸리지 않았다. 오는 전화만 받고 남자가 그간 핸드폰을 활용한 기록 정도 볼 수 있었달까. 그마저도 다른 사람의 핸드폰이니 대놓고 볼 수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 검색해보고 싶었는데. 남자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 왜 일어난 건지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고 해도 알아보고 싶었는데.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가 많이 오는 날을 찾을 뿐.
"이번 주도 맑네..."
아침에 출근하러 나오면서 한 번, 점심에 밥 먹으면서 한 번, 밤에 자기 전에 한 번.
혼자만의 계획으로 세워두곤 날씨를 확인하지만 그래도 불안함 마음을 떨칠 수가 없어 틈틈이 주간 날씨를 확인하곤 했다.
"이름씨, 또 날씨 봐요?"
"음, 네. 내일도 맑아요. 우산 안 챙기셔도 되겠는데요?"
"요즘엔 이름씨 덕에 일기예보 안 보잖아요. 내가."
하며 사람 좋게 웃는 성우 씨에 그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좋겠네요, 다른 동네 살아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말이다.
"날씨는 왜 그렇게 챙겨요?"
"아, 별 건 아니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을 좀 알아야 해서."
"비요?"
"네, 벼락이 떨어질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요."
"그런 날 좋아해요?"
"어... 아니요."
"아니면 비 오는 날이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나?"
라는 말을 들었다. 갑자기 남자 얼굴이 떠오르면서 너무 당황해서 그냥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한참 고민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그 날을 찾는 이유는 뭐지? 정말 단순히 짧게 산 내 인생이 아쉬워서일까? 처음에는 물론 그랬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내가 안쓰러워서.
하지만 지금은... 울리는 핸드폰에 선명히 적힌 '민현'이라는 이름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선 하루 한 번 꼭 전화가 왔다. 그럴 이유가 딱히 없는데도 약속처럼 그랬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탓에 겨우 밤이 돼서야 연락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직장에 다니는 거면 핸드폰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으니 그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었던가.
보통은 10시가 넘어야 연락이 오는데 오늘은 좀 이르다. 아직 8시 반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여보세요."
"여보는 아니구요."
"그 드립 너무 옛날 거 아니에요?"
"15년도면 대충 들어맞을 거 같았는데."
"여기가 무슨 80년대인 줄 아시나, 오늘은 일찍 퇴근했나 봐요?"
"그런 것도 있고, 얼른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남자의 말에 앉아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혹시 뭐라도 찾았을까, 내가 그 운석 같은 번개를 피할 방법을? 핸드폰을 돌려줄 방법을?
내가 아무 말 없이 남자의 말을 기다리자, 별안간 그가 숨을 풀듯 웃는 소리를 냈다. 뭐야, 왜 웃어.
혹여 장난을 치는 걸까 싶어 열이 확 뻗쳤다가도 남자의 웃음소리에 한숨만 내쉬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모를 사람이다.
"미안해요, 기대한 게 여기까지 느껴져서"
"당연히 기대하죠."
"별 거 아니긴 한데, 어쩌면 이름씨가 날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어떻게요?"
"아, 물론 지금의 난 아니고. 15년도의 나를요."
남자의 말에는 생기가 돌았다. 물론 나도. 그토록 궁금하던 남자와 만날 수 있다니. 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근데 분명 다른 나라에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죠, 근데 그 주 금요일에 한국 들어와요."
"그럼 정말로..."
"응, 만날 수 있어요."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남자와의 통화는 늘 그랬다. 다음 날 생각해보면 꿈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어쨌든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과.
"근데 알아볼 수 있겠어요? 아는 건 목소리랑 이름뿐인데."
"그럼요. 찾기만 한다면 바로 알아볼 거예요."
내가 그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너를 알다.
공항은 역시 사람이 많았다. 하긴, 공항인데 사람 없는 게 더 이상하려나.
만나면 바로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면 마주칠 새도 없이 헤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치면 안 된다.
"여기가 맞긴 한데..."
입국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다들 돌아올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이렇게 기다리는 거겠지. 아마 남들이 보기엔 나도 그렇게 보일 거다.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 내가 남자를, 그것도 3년 전의 남자를 만나러 여기까지 와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나에게 매일 꼬박 전화하는 것처럼,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목소리에서 연상 된 남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다 문득 남자의 나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라도 알면 대충 보고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여기서 황민현이라고 부르면 알아듣고 봐줄까.
혼자 멍하니 서 있는데 여기저기서 한 곳으로 손짓하는 게 보였다. 아.
왔구나.
내 또래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를 찾으며 눈을 돌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알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혼자 또 바보 같은 자신감을 가진 꼴밖에 안 됐다. 어쩜 그렇게 당당했냐 나는.
"황민현!"
찾는 걸 포기하려고 할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내가 꺼내고 싶었던 이름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을 확인하자 잔뜩 반가운 얼굴을 한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혹시 그 날 백화점 앞에서 전화했던 그 친구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젠 중요한 것이 달라진다, 포기할 이유도 없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저 남자의 앞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남자를 끌어안은 저 사람. 저 사람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 황민현."
그 사람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서서 그가 친구와 반가움을 털어내는 것만 지켜봤다.
저 사람이구나, 3년 후에서 지금의 날 알아준 사람이. 그 좋은 사람이 저 사람이었구나.
집요한 눈빛에 남자가 문득 내 쪽을 돌아봤다. 일순간 마주친 시선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데 그도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생긋 웃곤 자리를 떴다.
잠시 마주친 시선에도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래, 이제는 좀 확신이 선다.
내가 비 오는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 날을 잘 견뎌서 잊고 싶지 않은 저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되는 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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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가 조금 급한가요? 제가 느린 걸 싫어해서 그래요...
이러다 또 느려지고 그럴 거예요 아마...
암호닉 남겨주신
[뽀뇨] 님, [첫댓] 님, [숨쉬기]님, [청량]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