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알다
02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요."
"네?"
"거기가 지금 몇 년도죠?"
"갑자기 무슨... 지금 2018년도죠, 그게 중요해요?"
인생을 살다보면 상식적으로 이해 못할 일이 많다지만 이건 아니지.
내가 혐생이 너무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도 이건 아니지.
이건 너무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잖아.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잖아.
"아까 경찰서에 두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경찰서에 둬도 못 찾을 거예요 아마."
어떻게 설명해야 도둑이 아니라는걸 알리면서도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남자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남자가 아니라 내가 또라이로 낙인 찍힐 수도 있었다.
아니지, 이건 또라이 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자 수준이다. 어쩌면 신고 당할 수도... 아, 물론 신고 해도 날 만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제법 판타지적 세계관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고, 그에 따라 얼마든지 신기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이 정도 스케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와 더불어 내가 그 어마무시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지. 조연도 아니고 주연이라니.
"침착하고 내 말 잘 들어요, 이건 당신 핸드폰이 걸린 일이니까."
"협박이라도 하실 건 아니죠? 고작 핸드폰 가지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은 2015년이에요."
"...차라리 협박을 해요 그냥."
그래, 이런 말을 단박에 믿을 정도로 또라이는 아니겠지. 나도 말하면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생각을 해보자, 침착하게 생각을 해보는 거야. 여기가 2015년인걸 알릴 방법이 뭐가 있지?
혹시 내가 섣부르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가? 차라리 정신과부터 가보는게 나을까?
온갖 쓸모 없는 생각을 골고루 해가며 남자에게 내 주장을 이해 시킬만한 단서를 찾고 있는데 문득 아까 남자의 말이 생각 났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강아지 산책 시키러 갔다가 공원 벤치에 두고 온 건데.'
왜 공원이 된 거지?
"민현씨, 아까 공원 벤치에 핸드폰 두고 갔다고 했죠?"
"강아지 산책 시키다 두고 왔다니까요. 계속 쓸데 없는 말만 하실 거예요?"
"공원이 있는 자리가 원래는 작은 주택가 아니었어요?"
"어, 네. 원래는 주택가였는데 3년 전에 비 많이 오던 날 그 길에 번개였나, 뭐가 제대로 떨어져서 한쪽 라인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예 밀고 공원으로 만들었잖아요."
비오던 날?
남자의 말대로라면 내 집을 포함한 라인의 집이 번개였는지 뭔지도 모를 것 때문에 전부 날아간다는 거였다.
시에서는 복구 대신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 버린 거고.
남자는 후에 만들어진 공원에 산책을 하러 왔다가 핸드폰을 두고와서 그걸 내가 주운 거...
그럼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난 집에서 살던 나는? 살았나? 남자가 있는 3년 후에 내가 살아있나?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3년 후에 내가 없을 수도 있다니.
나를 이렇게 스펙타클한 영화 주인공으로 만들어놓고 결말을 그렇게 지어버리는 건 아무래도 너무하잖아.
고개를 숙이곤 '여보세요?'를 반복하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었다.
결국 지금 이 순간부터 3년 후의 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날 알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 밖에 없을 수가 있어?
걸음을 옮겨 남자가 서있다는 나무 앞에 섰다. 아마 남자도 지금 이쯤에 서있을 거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남자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고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3년 전과 3년 후의 이 곳에 서있는 거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내 말 좀 믿어줘요."
"설마 아직도 그 2015년 얘기 하고 계신 거예요? 계속 그러시면 저 그냥 신고하는 수 밖에,"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3년 후에도 살아 있다면 목소리로 어떻게든 당신을 찾을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내 말 좀 믿어주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계속,"
"제발요..."
우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다. 특하 남 앞에서 별 것 아닌 걸로 우는 것만큼 짜증나고 내가 싫어지는 일이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그것도 이렇게 꿈 같은 상황에서 저 남자가 말한 거짓일지도 모르는 말 때문에 울 필요는 없는데.
그럼에도 목이 가득 막히는 이유는 왠지, 정말일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정말이 되어버린 것처럼. 남자가 말한 저것도 정말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다.
인생에 여한따위 없으니 힘든 거 다 잊고 그냥 죽어버려도 좋다고 우스갯소리로 떠들어댔지만 제 목숨 아깝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으랴.
나는 그 중에서도 겁쟁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지금."
"내가, 내가 그 이상한 일로 사라진 집에 살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았던 벤치. 거기가 지금은 내 집 마당이란 말이에요. 그쪽이 거기에 핸드폰을 두고가서 내가 마당에서 찾은 거라구요."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당연히 믿기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겠죠. 근데 나는 아니에요, 당신이 말한 그 사고가 만약 정말로 일어난다면 난 지금 거기에 없을 지도 몰라요. 2018년도에는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니까요."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중간중간 한숨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혼자 생각이라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의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저 미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이게 이해가 될까. 하지만 지금은 내 말을 입증할 이렇다 할 증거조차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나를 정신병원이나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내 말을 믿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잠시만요. 이봐요, 민현 씨,"
내 부름이 무색하게도 전화는 뚝 끊어져버렸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자 여전히 2018년 3월 14일로 찍힌 글자가 보였다. 이제 정말 어쩌지.
당장은 남자를 만날 수 없으니 이젠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핸드폰따위는 그냥 아무 곳에나 던져놓고 서둘러 돌아가고 싶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한 순간에 끝없는 우울에 빠진 기분이었다.
너를 알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집에 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괜히 이불과 벽을 한 번씩 만져보며 지금 손에 잡히는 것들이 사라짐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 것도 안 남았다니, 숨 쉬는 것도 허망했다.
아니지, 아닐 수도 있다. 모두에게 큰일날 뻔했다고 연락받을 수도 있잖아. 그냥 다른 집을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괜찮아, 괜찮다.
벌벌 떨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손 옆에 둔 핸드폰을 바라봤다. 시간은 저녁을 훌쩍 넘었는데도 남자에게선 연락이 없다. 그래, 어쩌면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말에 질린 남자가 이미 신고했을 수도 있고, 진절머리가 나 그냥 핸드폰을 바꿔버리기로 마음 먹었을 수도 있지.
머리 속에서 긍정과 부정이 한창 다툴 즈음에 핸드폰이 울렸다. 혹여 배터리가 다 돼 꺼지기라도 할까봐 일찌감치 충전기까지 연결해 놓은 상태였다.
발신자는 '집' 역시나 남자였다.
"여보세요."
"못 찾았어요."
"뭐를요?"
"그 날 있었던 일이 사망자는 몇 명인지, 몇 시에 일어난 건지 찾아봤는데 그런 기록이 아예 없어요. 원래부터 없는 일인 것처럼."
무력감에 앉아있던 몸을 뒤로 눕혔다. 신의 장난도 이렇게까지 지독할 수는 없는데. 결국 날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구나.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늘 미래를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직면해야만 하나. 그렇게 하기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다.
"괜찮아요?"
"왜 내 말을 믿기로 했어요?"
"그렇게까지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오전엔 먼저 돌려주려고 하셨잖아요."
제법 덤덤하게 꺼내는 남자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숨을 쉴 틈은 만들어진 거였다. 3년 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게 되니까.
"만날 방법이 정말 없을까요? 당신이 3년 후의 날 찾을 수는 없지만 내가 3년 전의 당신을 찾을 수는 있잖아요. 민현 씨한테는 3년 전 기억이 있으니까."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요?"
"네, 이름이요."
"아, 이름이요. 성이름."
"이름씨 잘 들어요. 당장은 나랑 못 만나요. 3년 전에 나는 이름 씨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거든요."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그저 입만 꼭 다물고 있었고, 내가 말이 없으니 남자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다. 사실 처음부터 가장 재수 없는 상황에 걸린 건 내가 아니라 전화 너머에 있는 남자인 것 같다.
졸지에 3년 전에 있는 여자에게 핸드폰을 줘버렸으니.
상황이 반대였으면 나는 그의 말을 믿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지금의 남자는, 그러니까 황민현 씨는 내가 존재하는 2015년의 남자는 나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어디든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그게 이 나라가 아니라는 말까지. 그의 말이 일부터 열까지 전부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당장 만날 수 없다.
"미안해요, 도움이 못 돼서."
"아니에요. 덕분에 큰일 날 거 하나 알았는데요 뭐."
"아."
남자가 아. 하고 박터지는 소리를 냈다. 괜히 궁금증이 생겨 소리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맞다, 눈치 보는 중이었다.
"950809."
"네?"
"핸드폰 비밀번호요. 950809에요. 혹시 나한테 전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생년월일이에요?"
"네, 단순하죠. 제가 비밀번호를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그렇게 쉬운 걸로 해야 돼요."
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투나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나보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틈을 타 꽤나 한참을 서로가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가 모르는 2015년의 한국과, 내가 모르는 2018년의 한국.
3년 사이에 뭐가 그렇게 달라졌겠냐만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꺼낸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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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계속 죽어가는 느낌인데...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거였으면... 엉엉
소심한 제가 말 꺼내기도 전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첫댓]님, [뽀뇨]님.
두 분 너무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