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세상은 아직 어두웠다. 눈을 부비며 핸드폰 시계를 보니 오후 두시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성의없이 커튼을 걷어보니 역시나 빗줄기가 맹렬하게 아스팔트 바닥을 때려대고 있었다. 나는 커튼을 다시 닫고 거실에 놓여진 스피커에 핸드폰을 연결했다. 볼륨을 적당한 크기로 조정해놓고 모든 커튼을 전부 쳐버렸다. 어스름이 거실 곳곳을 장악해버린 한 가운데서 나는 몸을 꼭꼭 웅크렸다.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마냥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비가 온다, 그런데 너는 없다. [랍콩] 우산 by. 진라면 홍빈은 라면을 끓이던 손을 멈췄다. 지독하게 내리던 빗소리가 음악을 꿰뚫고 귓전을 울렸고 홍빈은 쿵쿵거리는 음악의 볼륨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거슬렸다, 모든 것이 거슬리고 답답하고 죄여왔다. 홍빈은 보글보글 끓으며 매운 내를 풍기는 라면을 싱크대에 모조리 부어버렸다. 싱크대에 닿으며 볼품없이 흩어져 가닥가닥 흩어진 라면이 꼭 자신같다고 홍빈은 생각했다. 하늘이 나를 놀리려고 그러나, 괜한 생각을 하며 홍빈은 물을 틀어 라면을 전부 쓸어내버렸다. 홍빈은 사랑받고 자란 아이였다. 다정한 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어머니, 쾌활한 누나들. 단란한 가정 속의 막내아들이었던 홍빈은 그래서인지 사랑받지 못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 나는 저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해. 그래서 사랑을 받아야해. 그렇게 발악을 하는 내내 홍빈 자신의 모습은 속으로 꼭꼭 숨어들어갔다. 문을 열고, 열고, 또 열고 들어가 아예 걸어 잠궈버렸다. 그렇게 홍빈은 모든 것을 맞춰주며 24년을 살았다. 완벽한 아이였고 예쁨받는 아이였다. 그것은 홍빈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 맡는 이별에 난파한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깊은 심연, 홍빈은 발목에 커다란 족쇄를 찬 사람처럼 점점 더 깊이 바닷속으로 밀려 들어갔고, 이내 휴학을 해 버렸다. 이것이 늘 바르고 완벽했던 홍빈의 첫 일탈이었다. 홍빈이 원식과 사귀기 시작한 것은 제작년 여름이었다. 그 날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왔었다. 늘 그렇듯 원식의 우산을 같이 쓰고 가던 둘.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젖은 눈을 하던 홍빈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던 원식. 홍빈의 집 앞까지 다다라서 집에 들어서려던 그를 붙잡은 크고 단단했던 손. 아찔했던 입맞춤. 비 오는 날, 또 비 맞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홍빈은 우산이 떨어져 온 몸이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원식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을 입술을 맞대고 더 세게 서로를 끌어안았더란다. 그리고 다음 날 둘은,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댔었더란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2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원식은 지친 표정으로 이별을 고했고 홍빈은 표정변화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니까, 울면 나를 더 미워할 것 같았었다. 그래서 입술을 짓씹어가며 울음을 참았었다. 그런데 너는...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서웠다. 나는,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응? 응? 원식아, 김원식...! 쨍그랑, 홍빈이 집어던진 머그컵과 함께 복잡하게 얽혔던 생각도 깨어졌다. 홍빈은 머리를 감싸쥐고 하염없이 울었다. 빗소리가 정신없이 머리를 헤집었다. 시끄러웠다. 어지럽고 복잡했다. 생목이 올라와 화장실로 뛰어간 홍빈은 몇 번이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우욱, 욱, 수 차례 반복하는 행동에도 나오는 것은 위액뿐이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가글을 해 입 안에 감도는 신내를 씻어낸 홍빈은 화장실 벽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밖에서 내리는 비도, 내 마음에 내리는 비도. 홍빈은 비를 뚫고 편의점으로 향해 캔맥주 세개를 사왔다. 한 캔을 단숨에 비워낸 홍빈은 두번째 캔을 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웃고 떠드는 티비 속 사람들의 모습을 안주삼아 열심히 캔맥주를 비워냈다. 빈 속에 꾹꾹 채워넣고 또 채워넣었다. 프로그램이 바뀌는 텀, 광고를 보며 홍빈은 캔 맥주 하나를 더 땄다. 취기가 묘하게 오른 홍빈이 올려다 본 시계는 열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는 더욱 더 세차게 내리는 듯 했다. 토크쇼가 요란한 환영인사와 함께 시작했다. 원식이 예쁘다고 좋아했던 여배우가 나왔다. 홍빈은 멍하게 풀린 눈으로 그 여배우를 바라봤다. 여배우는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최근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다. 여배우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랬다, 사랑한다면 잡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후회하지 말라고. 멍한 눈, 홍빈은 여전히 멍한 눈. 머리가 여전히 복잡했다. 김원식이 눈 앞에 지나다녔다. 머리를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김원식이 하나, 둘, 셋. 티비 속 남자가 김원식이었다. 쇼파에 김원식이 누워있었다. 홍빈은 몸을 일으켰다.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홍빈은 아무 슬리퍼나 꿰어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온 몸이 젖어들어가고 앞머리가 늘어져 시야를 가렸다. 홍빈은 앞머리를 대충 쓸어넘기고 내달렸다. 슬리퍼 탓에 홍빈의 발끝이 까지고 피가 났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홍빈은 가깝지는 않은 원식의 집을 향해 죽을 힘을 다 해 달리고 또 달렸다.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물기를 달고서 홍빈은 원식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쾅쾅, 쾅. 아담한 주택인 원식의 자취집 앞을 가로막은 철 대문을 두드리는 탓에 홍빈의 손이 까졌다. 아픔따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나오는 원식이 멀리서 보였고, 홍빈은 대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뽀송한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홍빈아?" "나 버리지마, 나 너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나 버리지마. 내가 잘 할게. 나 혼자 있는 것도 싫고 외로운 것도 싫고, 너 없는 건 더더욱 싫어. 비 오는 데 네가 없었어, 그래서 무섭고 두렵고. 눈물나고, 네 생각밖에 안 나서 밥도 못 먹고..." "..." "나 밉지, 그치. 나 이러는 것도 꼴보기 싫고 막 그럴 거 아는데, 너한테 못나보일 거 아는데...! 근데 무서워. 그러니까 다시 와, 너한테 안 맞춰줄거야. 하나도 안 맞춰줄거야. 그러니까 네가 싫어도 다시 와!" "홍빈아." "비 오면 우산이 되어주겠다면서... 나 무서워, 지금 비오잖아. 그러니까 나 좀, 나 좀 꺼내줘." 이 깊은 심연에서, 나를 꺼내고 내 족쇄를 풀어다오. 처음으로 제 앞에서 아이같이 울고불고 떼 쓰고, 두서없이, 계산없이 말을 이어가는 홍빈을 바라보던 원식은 웃었다. 웃으면서 처음 그 날처럼, 우산을 내던졌다. 금새 젖어들어가는 머리칼과 옷. 그렇게 홍빈을 세게 끌어안은 원식은 차게 식은 입술에 제 입술을 맞부딪혔다. 차게 식은 팔을 매만지고, 등을 끌어안으며, 제 체온을 나누기라도 하는 것 마냥 홍빈의 입 안을 헤집고 혀를 섞었다. 빗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 "너 근데 나 왜 찼어?" 기침을 하며 코를 훌쩍거리던 홍빈이 딸기 꼭지를 따서 제 입에 넣어주는 원식을 올려다보았다. 얄밉게 비는 같이 맞아놓고 혼자만 감기에 안 걸려서 계속 홍빈을 놀리고 있는 원식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원식이 홍빈의 입 앞에서 딸기를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제 입 안으로 쏙 넣어버렸다. "내 딸기!" "무서워서." "응?" "네가 매일같이 떠날 사람처럼 완벽하게 굴고 나한테만 맞추는게 무서워서. 아니겠지 아니겠지 했는데 그 며칠 전부터 계속 무서웠어. 그래서 툭 던졌는데 너는 붙잡지도 않고. 아 내가 2년 내내 헛짓거리했구나... 싶었지." "나는 너한테, 예뻐보이려고... 너한테 다 맞춰야, 그래야 사랑해줄까봐." "너 나랑 사업하냐." 웃으면서 글썽글썽한 홍빈의 눈가를 닦아준 원식이 딸기를 홍빈의 입 안에 넣어주며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난 어제같은 게 더 예뻐, 귀엽고."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모바일로 썼더니 두서도 없고 이상하네여ㅠㅠㅠ 싯타 이 글 싯타☆ 올리기 부끄러워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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