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요괴 11
(Say Something)
내가 집주인 방에서 함께한 지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습니다.
제가 앞으로 여기에 남아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며칠이었죠.
하루가 아까워라, 나는 집주인과 밤새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집주인에게 땡깡을 부리는 게 미안했지만
우리가 언제까지고 함께 얘기 나눌 수도 없는 걸요.
나는 '내가 일찍 잠들어버리면 어쩌려고?' 라 말하는 집주인에게
폴짝 달려들어 어깨를 붙잡아 볼따구를 부비었습니다.
집주인 특유의 아카시아 비슷한 향내가 은은히 퍼졌습니다.
향내가 내 검은 머리카락에도 스며들 것만 같았습니다.
피곤하고 고단한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얼마 없는 걸요.
'깨어 있겠다' 말로는 약속해도 결국 잠들어 버릴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 얘기를 듣다 잠들어버려도 괜찮아요.
그때부턴 내가 집주인의 침대 위로 찾아가거든요.
집주인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혼내겠지만, 상관 없어요.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대한 벌칙이에요.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열심히 입을 움직여 말했고
집주인은 내 말에 '응' '응' 만 반복했습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한가봐요. 어제보다 일찍 졸려하는 걸 보니.
집주인은 눈을 감은 채로 자동적인 대답만 하다가
결국 대답이 끊기었고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었습니다.
나는 뚜껑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끝 모서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절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죠.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애초에 대답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나는 바닥으로 착지해 집주인의 침대 위로 살며시 올라갔습니다.
살금살금. 집주인의 베개 쪽으로 향했습니다. 포삭- 포삭- 이불 밟는 소리가 다행히도 작습니다.
이토록 발소리를 죽이는 것은, 집주인에게 혼나지 않으려는 것 뿐만이 아녜요.
고단한 하루 끝의 단잠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합니다.
나는 집주인의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며칠이 남았을까요? 아마 이 밤이 가면 고작 이틀일까요.
나는 집주인의 입술에다 시선을 박았습니다.
도대체가, 저 이쁜 입술에선 상냥한 말이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예쁜 사람이 성격도 좋다는 건 다 왕거짓말이에요.
집주인 귀에 들어가면 큰일날 생각이 떠오르니, 킥킥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음 참는 소리를 들키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위에 올라갔습니다.
약속을 어긴 게 괘씸해서 더 뒹굴거리려고 했지만, 피곤한 거 같으니까 봐주는 거에요.
나는 내 보틀 안으로 들어가 뚜껑지붕을 닫았습니다.
집주인과의 얘기는 내일로 기약하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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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새벽에 잠이 들어선 안돼는 거였습니다. 일찍 잠이 들어선 안돼는 거였어요.
나는 말이죠, 집주인을 봐준답시고 귀여운 척 일찍 물러나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됐었어요.
새벽달이 환합니다. 경황이 없는 지금의 정신상태로 달을 바라보니 아주 해처럼 밝게 느껴지는 군요.
나는 창밖의 달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볼따구의 눈물자국을 눌러 닦으며 시선을 떼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뜨면 집주인의 텅빈 침대와 활짝 열린 방 문이 보일 거에요.
그 자취를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눈을 꼬옥 감아버렸습니다.
불과 20초 전만 해도 나는 주네를 보고있었고 주네 또한 나를 흘끗 바라봤습니다.
눈물이 펑펑 터져나와 뚜렷이 볼 수는 없었으나, 주네의 눈빛이 차가웠다는 건 나도 압니다.
내가 벌벌 떠는 손으로 칼을 집어드려 하자, 주네가 내게 말했었습니다.
'네 주제를 알아. 벌벌벌 떨기만 하는 게 뭘 제대로 하겠다고.'
주네는 이내 방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주인을 뒤쫓으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준회의 뒤를 쫓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말리는 것이죠.
하지만 말이죠, 부끄럽지만 이게 바로 접니다.
발자국 하나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이게 바로 나예요.
아무도 없는 텅빈 방안은 내 한심한 흐느낌으로 서서히 메워집니다.
왜 나는 약한 존재일까요? 왜 나는 친구 하나 자신있게 지킬 수 없나요?
약 3시간 전에 내가 주인에게 속삭였던 말이,
되려 나를 역으로 덮쳐오는 것만 같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무슨 말이라도 해봐.'
무슨 행동이라도 해, 무슨 짓이라도 해봐.
방 밖의 어딘가에서 집주인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다급함이 내게도 그대로 느껴집니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무능력함이 싫어서,
집주인의 외침을 가리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새벽달이 환합니다. 아주 해처럼 밝습니다. 내 초라함을 훤히 들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