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요괴 14
밤새 열이 났다.
누가 열이 났느냐고?
당연지사 내가.
요괴인 동동은 몸이 아플리가 없다.
헌데 찬바람을 쐬었던 탓인지 자꾸 춥다고 하길래,
모셔두기만 하던 양초도 키고 손난로도 내주었다.
나는 서랍 속에 있던 수면양말의 포장을 뜯었다.
이 분홍분홍한 수면양말은 김한빈이 사준 것인데,
내가 핑크색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저 모셔 두고만 있던 거다.
수면 양말을 본 동동이 내게 물었다.
"와아~ 그게 뭐야?"
"이거? 네 망태기. 너 확 보쌈해버려야지."
내가 장난스레 겁을 주는데도 동동은 예전과 달리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기만했다. 이제 안 통한다 이거지?
나는 분홍 수면양말의 목을 두번 접어서 길이를 짧게 만든 후
동동에게 내밀었다. 눈대중으론 제법 동동의 키와 비슷하다.
내가 들어가보라고 하자 동동은 수면양말을 이리저리 살폈다.
엉덩이를 쭉 내밀고 두 팔을 뻗어 보들보들함을 느끼는 모습이 웃기다.
이내 동동은 침낭에 들어가듯이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직 발이 끝까지 닿지 않는 듯 몇번 꼬물꼬물 거리더니
이제는 동동의 정수리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때? 편해? 따뜻하긴 하지?"
억울하게 주택(보틀)을 강제 철거당한 불쌍한 동동을 위해
내가 그나마 정성들여 장만해 줄 수 있는 잠자리였다.
동동은 내 물음에 몸을 꾸물거리며 웅얼웅얼댔다.
복실복실한 분홍색 애벌래 같기도 하다.
나는 꼼지락거리는 동동의 정수리를 두어번 건드렸다.
그러자 동동이 파하- 하고 숨을 뱉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응! 진짜 좋아! 고마워!"
"이제 거기서 자라."
"근데 집주인, 되게 아파 보여. 나보다 집주인이 더 추워 보인다."
"살면서 감기 한번 안 걸리면 그게 사람이냐?"
확실히 몸살 기운이 있기는 했다.
나는 뻐근한 어깨를 소심히 스트레칭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가 '아유유'하며 신음을 내자, 동동이 걱정스레 말했다.
"집주인 바보같아. 나는 아무리 추워도 아프지 않단 말야.
나를 꽁꽁 싸매지 말고 집주인을 꽁꽁 싸맸어야지."
"그럼 아까부터 춥다고 징징대지를 말던가."
"힝..."
동동은 수면양말에 얼굴을 묻으며 삐진척을 했다.
근데 그 모습이 이 상황을 묘하게 즐기는 듯해서 우스웠다.
고개는 토라져있으면서도 희미한 웃음이 느껴졌다.
수면양말에 얼굴을 몇번 부벼대던 동동은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그 소원석 말야, 내가 두 개를 갖고 있었잖아?
사실 두 개 모두 집주인에게 썼어."
갑자기 튀어나온 진지한 고백아닌 고백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보니 동동과의 첫만남 때, 동동은 분명히 두 개를 갖고 있었다.
나는 몸을 완전히 동동 쪽으로 돌려 동동을 바라봤다.
"하나는 아까 비 맞고 가지 말라는 집주인의 소원에다 썼고,"
"또 하나는?"
"또 하나는...."
그때, 갑자기 휴대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튀어오르듯이 고개를 들고 휴대폰을 집었다.
아늑한 촛불만 있던 방 안에 휴대폰 LED가 형형했다.
발신자는 또 김한빈이었는데, 메시지 내용은 아까와 달리 간단했다.
[읽고씹냐]
그래, 읽고 씹었다 시발. 얘가 미쳤나, 지금 밤 12시가 넘었는데.
동동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게 꽤나 괘씸한 지라,
나는 [나지금피곤하니까닥쳐] 를 빛의 속도로 타자해 전송했다.
그리고 그이후로 김한빈은 정말로 입을 닥쳤다.
내 메시지를 읽고서도 아무 답이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아무렇게다 놓고 긴장이 풀려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하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동동에게 말했다.
"그래서, 또 하나를 어디다 썼다고?"
".........."
"동동, 자?"
"아이....부끄러워서 말 못태!"
당황.
"아깐 말하려고 했잖아!"
"갑자기 부끄러워서 말 못하겠어...."
동동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수면양말 안쪽으로 얼굴을 한껏 가렸다.
나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다잡으며 책상 위 동동에게 향했다.
웬 분홍 번데기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동동이 들어가있는 수면양말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어...? 어?"
놀란 동동이 고개를 쏙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나는 내 두 손 위에 동동을 곧게 눕혔다.
내가 제를 들어올린 거란 걸 알게 된 동동은
'헤-'하며 빙구같이 웃었다. 뭘 웃어, 웃기는.
나는 동동을 안고 다시 내 침대에 누웠다.
"나랑 같이 자자. 침대에서."
나는 꼼지락거리는 분홍분홍이를 가슴 위에다 올려놨다.
동동이 고개만 내밀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와아, 나 집주인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게 소원이었는데."
"...말이 많다. 다시 갖다놓을까?"
내 말에 동동은 히히히 웃기만 하더니 이내 얼굴을 감추었다.
이제보니 만만찮은 끼쟁이다.
밤마다 수다쟁이가 되던 동동은 웬일로 일찍이 조용했다.
조용히 꼼짝않고 있는 걸 보니 잠이 들은 것 같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분홍분홍이를 살포시 덮었다.
두꺼운 솜이불을 무겁지 않게 덮어주듯이.
나보다 동동이 먼저 잠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꺼지라고 심한 말 해서 미안."
"......."
"진심 아닌 거 알지?"
내 가슴 위의 동동은 응답없이 새근새근 숨만 뱉었다.
혹여 내 심장 박동 소리 때문에 깰세라,
나는 숨을 가라앉히고 이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