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한양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곳은, 밖에서 보면 일반 기방과 별 다를 점이 없었다. 정말로 기방과 그 형태가 비슷하여 간혹 청렴하지 못한 지방의 사또나 약은 선비들의 오해를 살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별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다. 이 곳이 있는 그대로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코 끝까지 두건을 올려 얼굴을 가린 들개 같은 인상의 남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의 모습을 지그시 쳐다봤다. 주비의 중심인 그는 올 해로 벌써 쉰이 넘었다. 눈은 하나뿐이었고 그 주위엔 깊고 작은 상처들이 많았다. 묘목이었다. 그런 그를 가운데에 두고 주비의 일원들은 하나 같이 표정을 지운 채 소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게 깔린 창의 빛을 붉은 천으로 차단했기에 사방은 캄캄했다.
"본부대로 활을 쐈습니다."
"목이 날아가지는 않았겠지?"
"저를 뭘로 보십니까, 그저 우리의 뜻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그 끝을 살짝 스치게 했을 뿐입니다."
"그가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느냐?"
그 말에 소년은 고갤 저었다.
"그 자도 별 것 없더이다. 그의 자식들 중 가장 민첩성이 좋다기에 바짝 긴장을 하고 갔거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만만하지 않은 게 무슨 소용입니까. 곧 만만한 우리에게 목숨을 빼앗길 터인데."
소년이 태연하게 웃었다. 소년은 장승처럼 커다란 키를 가진 것에 비해 쓰는 말투는 아직 철부지였다. 곱상한 손이 책상 위로 시복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길고, 단단해 보이는 화살이 여럿 들어있었다. 소년은 이내 갑갑한 두건을 목젖 아래로 내렸고 묘목의 옆에 앉았다. 묘목은 잠시 낮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우리의 글자를 읽었느냐."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리던 게, 똑똑히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런데 대장, 소인이 하나 알아낸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그러곤 곧장 묘목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귓속으로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걸 전해들은 묘목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게 정말이냐?"
"확실합니다. 준회가 오늘은 세자의 호위를 맡았다고 하니."
묘목의 시선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는 소년의 언질에 골똘히 생각을 굴리며, 아주 천천히 웃었다.
"과녁이 하나 늘어난다고 해서 손해를 볼 건 없지. 활과 그 끝을 장식할 취세아는 얼마든지 있으니."
"이번에도 그에게 청부를 맡기실 겁니까?"
"네가 직접 죽이고 싶다면 굳이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
빛은 그 곳으로 단 한 번을 들어서지 않았다. 모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두건을 만지작거리며 묘목의 말에 경청 중이었다. 묘목은 작전을 조금 수정했고 그에 반대를 품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속으로 얼마 안 가 이뤄지게 될 조선의 난국을 기대했다. 활을 맞는 건 그렇게 아프지 않다. 정말로 괴롭고 심장이 쑤시는 건, 화염에 몸이 타으르고 그 몸이 재가 되어 남게 되는 일뿐이다.
깃털이 뽑히고, 취세아는 울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심장이 아니라 눈이다. 너희는, 햇볕이 꼭 무른 모래 한 줌처럼 느껴지더라도 방심을 해선 안 된다. 햇볕이 모여서 태양을 만들고 태양이 커져 약자에게 불을 쏘는 것이다. 다들, 무슨 뜻인 줄 알아듣겠느냐? 이 이상은 약자가 되어선 안 된다."
묘목의 불투명한 눈에 살기가 어른했다.
"조선의 햇살에 너희의 눈을 빼앗기지 말거라."
12
동혁과 헤어지고 나는 곤과 함께 별궁으로 갔다. 곤은 준회처럼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는 곤을 붙잡고 대뜸 물었다.
"저기, 준회가 올 해로 몇 살인지 아십니까?"
"준회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저는 제가 가진 사람의 나이도 함부로 묻지 못합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한낱 무사인 그를 궁금해하시는 게 신기하여 그랬습니다. 보통, 양반 댁 따님들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쳐다도 보질 않으시는데……. 세자빈은 마음이 참 따뜻하신 것 같습니다. 미천한 저에게 친히 눈 맞춤을 하시면서, 말을 높여주시는 분은 궁에서 그대가 처음입니다."
곤은 그 말을 하면서 약간 멋쩍게 웃었다. 그의 미소가 터무니 없이 가벼웠음에도 나는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없었다. 곤이 하는 말이 마치 커다란 장벽처럼 느껴졌다. 준회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내게서 너무 먼 곳에 있다. 어떤 날에도 그는 내게 말을 놓으며 친근히 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나를 모시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상하게 몸 속 어딘가가 저렸다.
별궁 앞을 막 다다르면서 곤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려는 말에 막중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그는 능숙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 애의 나이는 누구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확실히 준회가 노색이 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곤의 얼굴은 이런 농담 따위를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부모가 같은 날에 죽게 되면, 남겨진 자식들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각자 가지고 있는 나이의 몇 등분을 나눠준 다음에야 안심을 하고 하늘에 올라간다는 유명한 속설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
"매일 얼굴을 부비고 사는 사이인 저도, 준회가 짊어지고 있는 나이는 영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같은 날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더딘 목소리였다. 곤은 말을 마치고 뚫어져라 내 얼굴을 응시했다. 준회는 고아다. 가족이 없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내 주위에도, 우리 반에도 피가 나눠진 가족이 혼자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가 가족을 잃고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마음에 물결이 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 준회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의 가정사는 본질적으로 충격이지는 않았지만 그 주인공이 준회라는 것에서, 단지 그 점에서 나는 조금 이상한 여파를 받았다.
"세자빈,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평생을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들보다 자존심이 월등히 센 아이니, 제가 뒤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크게 실망할 겁니다. 저에게도, 그대에게도."
곤은 내게서 침묵의 약속을 받아내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무심코 별궁의 계단을 오르다가 시선을 바꾸자 준회가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그는 곧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두 계단 정도를 다시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이윽고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인 뒤 곤과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나는 거기서 조금 멍청하게 서 있었다.
"지금 바로 자선당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나 대신 곤이 되물었다. 나는 자선당이 뭘 하는 곳인 줄도 몰랐고 정확히 어디 쯤에 위치한 곳인 줄도 몰랐다. 그저 속으로 세자가 지내는 곳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저하의 부르심이 있었다. 곧장 세자빈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다. 경비가 삼엄해졌다고 하니 부디 몸 조심해라."
"그래, 잘 알았다. 알려줘서 고맙다."
"아, 그리고 들리는 항간엔 계방에 충당되는 사람이 바로 너라던데."
"뭐? 그게 정말이냐? 세자익위사에 내가?"
준회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곤은 얼떨떨한 얼굴로 약간 들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계방은 뭐고, 익위사는 또 뭐고. 죄다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마치 번역되지 않은 타국의 원서를 그대로 읽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계속 이렇게 하는 것 없이 서 있자니 기분이 뻘줌해졌다.
그 후로도 둘은 몇 번 더 말을 주고 받았다. 예정된 업무에 관한 매우 형식적인 내용의 대화였다. 곤은 내게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이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는 그 직전에, 잠시였지만 내 호위를 맡게 되어 영광이었다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넸다. 오늘 처음 나를 만나 건넸던 인사와 같은 식의 말이었다. 나는 그가 참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준회 말고도, 이 곳에서 의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준회의 눈은 다를 것 없이 사나웠다. 늑대 종류의 짐승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었다. 그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다가, 나는 고개를 돌려 등 뒤의 별궁을 한 번 쳐다보았다. 준회의 말을 따르면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곳에 정이 들어버린 내가 우스워 나는 잠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고작 며칠을 지냈다고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이 곳을 찾아 나를 가르쳤던 동혁이 생각났다. 그럼, 이젠 그와도 영영 이별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성대가 조금 시큰해졌다.
"곤이 그대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전혀! 오히려 너보다 훨씬 재밌게 해주던데."
"다행입니다."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준회는 하나도 재밌어하지 않았다. 아아, 준회는 다 좋은데 눈치가 조금 부족하다. 항상 조금도 틀에서 엇나가지 않는 그의 태도가 야속해서 나는 잠시 밉지 않게 준회를 째려봤다. 그런데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가시죠. 그저 그 한 마디만 하고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을 뿐이다. 기가 찼다. 귀여운 구석이라곤 단 조금도 없었다.
별궁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나는 준회를 따라갔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까 곤이 한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여태 준회가 내게 보여준 모습은 온통 강하고 굳센 것뿐이라 그에게 가족이 없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가족이 없어서 이렇게나 딱딱하게 변화된 건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래서 그런 것이라면 나는 준회가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서 사람 대할 줄을 모르는 그가 딱하고 안타까웠다.
준회가 말한 자선당이란 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무수한 궁들을 지나치며 나는 속으로 의문했다.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를 알면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서 나는 그저 막연한 상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준회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옆선은 언제 봐도 날카로웠다. 뼈를 깎아 조각을 한 것처럼 정교한 생김새였다. 나는 그의 코 끝부터 턱선 아래를 모두 가려버린 두건의 정체가 궁금했다. 곤을 비롯한 궁의 호위무사들은 다들 얼굴을 내놓고 다니던데 어째서 준회 혼자만 이렇게 모든 것을 가리고 다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온전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참기로 했다. 내가 그에게 말을 놓았다고는 해도 아직 그의 얼굴을 만질 수 있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준회야, 있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예."
"……넌 몇 살이야?"
조금 뜸을 들인 물음에 준회는 흘긋 나를 한 번 내려다봤다. 왜인지 사나움이 더해져 있었다.
"소인이 저번에 알려드린 적이 있는데요.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 때도 이렇게 직접 물으셨었는데."
"……."
"…저에 대한 건 다 기억하고 계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그렇게 말 끝을 흐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분명 얼굴이 당황에 젖어 붉어졌을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지금 내 감정을 그대로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곧장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준회가 제 나이를 알려줬던 상대는 내가 아닌 '세자빈'이다.
"……다 기억하고 있어!"
"……."
"다 기억하고 있지. 전부 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말투를 느리게 바꾸면서 태연한 척을 했다. 준회의 눈이 반사적으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의미 없이 웃으면서 그의 앞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래도 정말로 다 기억하고 있으면 재미 없으니까, 네 나이 정도는 내가 깜빡……."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평생 재미가 없는 삶을 살아도 좋습니다."
"……."
"그러니 단 조금도, 저를 남김 없이 기억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준회는 더 이상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두건 안으로 입술을 깨물어버리는 게 눈으로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아팠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전에 준회가 팔을 펼쳐 내 위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지원도 언제 한 번 이런 식으로 내게 따가운 햇살을 가려준 적이 있었다. 준회는 꽤 오랫동안 미동도 않고 그 팔을 치켜세우고 있었고 나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준회. 고아. 맹세. 기억. 그 무질서한 현실이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궁의 바깥 테두리를 한 바퀴 빙 돌아 도착한 곳에는 별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궁 몇 채가 있었다. 그 마당 앞에는 준회와 같은 차림의 호위무사들 스물 정도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 마른 침을 한 번 삼켜 넘겼다. 조금이라도 발을 삐끗하면 몰매를 맞을 것만 같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준회와 내가 그 앞을 지나치자 그들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수그렸다. 부담스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선당이라는 곳은, 다 친절히 글자를 알려주었던 동혁 덕분에 한자를 읽어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비로움과 성품을 길러 모아 집을 이룬다는 뜻의 글자였다. 그 우측의 동쪽으로 뻗어 있는 또 다른 궁에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한자가 가장 꼭대기에 쓰여있었다. 크게 밝힌다는 뜻으로, 비현각으로 소리내어 읽는 글자였다. 그 근처에 있는 나머지의 궁의 이름 역시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나는 갑자기 무릎을 꿇는 준회 때문에 모든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세자빈, 동궁으로 걸음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대드립니다."
"……."
"…맹세하겠습니다. 제 평생을, 목숨을 바쳐, 그대와 저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준회의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맹세하겠나이다. 그런 준회의 음성을 따라 마당 위에 있는 모든 호위무사들이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네 평생은 과분하다고 털어놓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나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굽혔던 무릎을 세워 나를 마주보았다. 날 향하는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내 그 눈빛은 내 손가락으로 닿았고, 그걸 따라 쳐다보고 있던 난 속으로 작게 탄성하며 급히 그에게 부탁했다.
"내가 별궁에서 깜빡한 것이 하나 있는데…….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경대 앞에 있을 거야, 분홍색이 도는 작은 주머니인데…. 거기 안엔 의원이 선물하셨던 귀한 연고도 있고, 아무튼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것이 들어있으니까 꼭 좀 나한테 가져다 줘."
"…의원이라면, 혜민서의 그 자를 말씀하십니까."
"아아, 응. 맞아. 아까 네가 말했던. 부탁, 들어줄 수 있는 거지?"
나는 생각 없이 가볍게 대꾸했고 준회는 아주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하마터면 그 모든 것을 별궁에 두고 올 뻔했다. 지금 생각이 나서 다행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분실을 자각했더라면, 틀림 없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시름을 놓고 준회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아무 내색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호위무사들은 일제히 미동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내 실수에 그들의 시간을 버리게 된 것 같아 미안해져서 얼른 걸음을 옮겨 자선당 안으로 들어갔다. 체감되는 크기는 별궁보다 약간 더 컸다. 지금 이 안에 누가 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 곳 어딘가에 세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신경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지금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
나는 살금살금 복도를 돌아서 가장 처음으로 본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여성스럽게 꾸밈한 방은 내가 별궁에서 지내던 곳의 내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도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 방에서 몇 걸음을 더 옮기면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이 안엔 틀림 없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까와 같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예상처럼 세자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아까와는 다른 차림이었다. 화려한 색깔의 면복을 벗고 그보다는 좀 더 단조로운 붉은 빛의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뜰히 그의 차림을 하나 하나 훑어볼 수 있는 건, 그가 턱을 괸 채로 소반 위에서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넓게 뚫린 창 아래로 나른한 햇살이 침투해 그의 사모를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는 그의 모습이 붉었다.
나는 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단잠에 취해 있었다. 세자는 눈을 감으니까 인상이 한결 착해보였다. 아무래도 깊게 잠들었는지, 그는 바로 앞에서 내가 손을 펼쳐 흔들고 있는데도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잠결에 숨을 마쉬고 내어쉼에 따라 어깨선이 가볍게 오르락거릴 뿐이었다. 그는 완벽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가까이서 세자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얼마 없을 것이다. 나는 아예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와 정말 조금도 닮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이목구비가 모두 남자다웠고 성숙했다. 나는 무심코 그 뺨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누가 봤더라면 변태로 단언했을 행동이었다. 나는 금방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몇 번 손으로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악취미가 있으십니다."
그가 퍼뜩 눈을 떴다. 나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왜 제 얼굴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 저, 그게……."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질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다가, 발을 헛디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 대신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한 번 입질을 한 딸꾹질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행동을 들킨 것부터가 이미 충분히 창피한데, 딸국질을 하는 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별로였다.
히끅, 히끅. 적막한 방 안에 괴상한 딸꾹질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물이라도 마시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눈을 굴려보는데 방 안엔 몇 개의 가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 딸국질을 멈추는 데 도움을 줄 법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망했다. 억세고 당찬 것만 보여줘도 모자를 판에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그가 앞으로 나를 또 얼마나 깔볼 것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처럼 입을 막고 서 있을 수만은 없어서 방을 나가 물을 찾아 마시려는데, 문 밖으로 등을 돌린 순간에 손목이 잡혔다.
"……."
"……."
그가 벽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어깰 들썩이게 하는 딸꾹질 때문에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어려웠다. 그는 내 손목을 좀 더 힘을 주어 잡았고 눈에는 어떤 돌발적인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입술 바깥으로 그의 숨결이 퍼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
"흘역증이 멈췄습니다."
흘역증이 도졌을 땐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특효라기에.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웃지도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항상 유지하던 무표정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숨을 괴롭게 쉬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딸꾹질이 멈춘 것이다. 세자, 그는 다시 소반 근처로 돌아가 앉았다. 나는 쭈뼛대며 그 앞을 서성거렸다. 그의 옆에 앉자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명색이 부부인데 서로 알아야 할 것은 마땅히 알고 있어야지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낮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이리 와서 제 옆에 앉으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하실 겁니까."
"…그래도 됩니까?"
"예."
그의 대꾸는 무심했다. 나는 속으로 이 상황이 낯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윤의 말을 따르고 싶어서 내게 거짓된 호의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무엇입니까? 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싫어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고, 어떤 그림을 가장 싫어하십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그는 내 입에서 무언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천천히 대답을 하셔도 됩니다. 앞으로 우리 둘이 가지게 될 시간은 차고 넘쳤으니."
"……예."
"그럼, 우선 저에 대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음성은 적당히 느슨해서 듣기가 좋았다. 자장가 같은 목소리였다.
"……이름이 한빈입니다. 나라를 빛내는 존재가 되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됐습니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싫어하여 가진 책은 소설 몇 권이 전부고, 잘하는 건 활을 쏘는 것과 검술입니다. 혹, 그 모습이 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음식을 가리는 일은 없고 음식을 거르는 일은 더 더욱 없습니다. 가을에 태어났고 그래서 추위에 강합니다. 아끼는 사람으로는 윤이 있고, 사랑하는 존재로는 바로 당신이 있습니다."
"……."
"더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혼잣말을 길게 늘린 말투였다. 그는 여전히 태연하고 별 것 아니라는 식의 태도였다. 그의 마지막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같이 잠을 청하시겠습니까?"
"예?"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제 그대는 제게 아무나가 아니니,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단 것을 삼키고 있다는,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
*기방: 기생들이 거처하며 유흥 일을 하는 곳.
*주비: 무리, 혹은 집단의 옛날 말.
*묘목: 눈을 하나 실명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
*시복: 화살집.
*취세아: 까마귓과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노색: 늙어 보이는 기색.
*자선당: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처소.
*계방: 세자의 호위를 맡기 위해 동궁에 설치되었던 조선의 관서. 비교적 높은 직책의 무술인들로 이루어졌지만 본문에는 궁의 호위무관들로만 구성됨.
*세자익위사: 계방의 다른 말.
*비현각: 세자가 업무를 보는 곳으로 자선당 동쪽에 있음.
*흘역증: 딸꾹질의 다른 말.
여러분 안녕하세요... 6233입니... ㄷㅏ... ㅎ
빨리 올리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아서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이 극단적인 연재 텀... 정말... ㅋ... ㅋㅋㅋㅋㅋ 재수 없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내일부턴 방학이니까 그래도 이틀에 한 번씩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지)!!!!!!!!!!
2014년 다 갔는데 2014 한양을 연재하는 소감이란... ^^ 하하하
저번 편에서 눈물점 님이 정말 감사하게도!!
브금을 여럿 찾아주셨는데 앞으로 글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넣을 예정입니다!
브금 추천 정말 감사해요...하트!
한 해가 다 가고 있는데 독자 님들의 이번 한 해는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힘들게 보내셨던 한 해더라도 나중엔 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질 테니까 너무 상심 마세요!
다가오는 2015년이 독자 님께 더 좋은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한빈아춤추자 님
또또 님
슬기 님
동동동 님
총총총 님
꾸준해 님
꾸주네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헤헷 님
페브리즈 님
햇님 님
떡볶이 님
파랑짹짹이 님
혜민서송씨 님
케빈 님
팬더 님
갠짠 님
천상여자 님
동동만두 님
눈물점 님
두둠칫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비회원 분들도...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부디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