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방에 들어가서 쓰지 않은 새 공책을 하나 꺼내왔다. 연필과 함께 가져오자 신기하다고 또 구경을 하는 두 명. 이리저리 둘러 보는 행동을 제지하고 맨 첫장을 펼쳤다. 이 곳은 우리집이다. 내가 갑이고, 얘네는 을이란 말이다. 고로 내가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 뭔가 계약서같은 걸 적어야겠는데 그런 걸 적자니 전정국이 쉽사리 협조 할 것 같지도 않고. 나는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제목을 크게 적었다.
[규칙 5가지]
첫째, 일단 집주인 나의 말을 잘 들을 것. 불응할 시, 밥 두끼 없음. 둘째,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 셋째, 개별활동은 허락 받을 것. 넷째, 머리 기르기 없음. 나만 기를 수 있다. 마지막, 가내 연애 금지. 마지막까지 크게크게 적은 나를 보며 두 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이해한 것인지, 정국은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이해 못 한 듯 했지만. 너네는 위험해. 게이의 싹이 터오르는 느낌이란 말이야. 물론 나의 덕후력이 한 몫 하긴 했지마는. 이 놈의 호모렌즈.
마지막은 무슨 뜻이냐며 둘이 입을 모아 물어보기에, 그냥 누군가와 사랑같은 걸 하지 말라고 둘러 댔다. 언젠가는 밖으로 돌아 다닐 텐데. 괜히 여자 하나 낑겨 들어왔다간 더 피곤해지니까 겸사겸사. 지금까지 봐온 행동들을 보면 그럴 일도 없겠지만, 얼굴들이 반반해서. 제대로 이해하긴 한건지, 둘이 한쪽씩 사이 좋게 잡고 그 다섯가지 항목을 정독한다. 테이프를 조금 뜯어와 잘 보이는 곳에 종이를 붙이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하는 동안 계속 시선은 종이에 머물러 있다. 보아하니 잘 지킬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대충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두고, 여분으로 있던 식탁보를 꺼내와 정국의 목 주위에 둘렀다. 이게 뭐냐고 또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정말로 머리를 내려 칠 뻔 했다. 7살도 아니고, 정신이 없네. 역시 가장 좋은 건 미용실이겠지만, 지금 얘네를 데리고 어딜 가냐도 문제였고. 일단은 친구들 머리 조금씩 봐주던 실력으로 머리를 살짝씩 다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라서, 다듬기가 편하다는 점. 네 번째 규칙이 기억이 안나냐며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를 한번 버럭 지르니, 그제서야 얌전히 앉아 있는다. 그래도 불만은 있는지 조금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옆에서 석진은 고개를 끄덕여가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전하께선 처음보는 소녀의 손길에도 가만히 있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하고 깝죽거렸고, 그게 무슨 소리냐며 뒤를 휙 도는 정국 때문에 대형 사고가 날 뻔했다. 그 결과 나는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고, 지금은 두 명 다 다소곳이 앉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새삼스럽게 우리나라 주부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분명 이런 아들들이 두 명보다 더 있는 집안도 있겠지. 상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암 걸릴지도 몰라, 정말.
"진아, 이걸 보거라."
얘가 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가벼워진 머리 좀 보라고 넘긴 거울을 석진에게 비추며, 정국이 투덜거렸다. 이 새끼가 최대한 예쁘게 다듬어 놓았더니 한다는 소리가. 분노가 밀려 올라왔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이번엔 석진을 불렀다. 생각보다 앉은 키가 커서, 나는 두꺼운 책 세권 정도를 발 밑에 두고 서야 했다. 입술을 불퉁 내밀고 우리를 쳐다보는 정국. 정말 다행이게도 석진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까 모습을 전부 지켜봐서 그런진 몰라도.
그러다가, 잠 좀 청해야겠다며 내 방으로 쏙 들어간 정국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나는 다시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나 미용사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나는 머리를 좀 잘 만지는 능력이 있는 듯 하다. 감탄사를 남발하며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나를 보며 석진이 웃었다. 확실히 남자는 머리에 따라 스타일이 달라진다고, 아까보다 더 깔끔해진 석진의 모습을 보고 내가 엄지 손가락을 올리자 멋 쩍은 듯 또 웃는다. 아 이런 분위기 얼마나 좋아. 화기애애하고. 전정국만 입 다물면 이게 얼마나 평화로워.
"그나저나, 석진……."
어, 뭐라고 해야하지. 딱 봐도 정국보단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을 하다 말자 의아한 듯 쳐다보는 석진. 호칭을 어떻게 정리해야하지. 외관으로는 대충 이십대의 느낌인데. 그 사이 웃음 소리가 거슬렸는지 얼굴만 빼꼼 내밀고 우리를 지켜보는 정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진이야 뒤 돌아 있으니 눈치 못 챌 거고. 장난 한번 쳐볼까. 정국도 내가 자신을 발견 한 걸 모르는 듯 하니까.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석진을 다시 불렀다.
"석진 오라버니."
"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이 소리 하나면 죽어나는 걸 잘 알지. 표정관리 안 된다. 계속 나오는 웃음을 꾸역꾸역 참으며 정국이 있는 쪽을 흘깃 보니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하기야, 자기한텐 풀네임이나 야라는 호칭이 전부였으니 꽤나 억울할거다. 그럼 뭐해, 동갑인 걸. 아니어도 동갑이라 할거고. 어느새 석진도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아이 재밌어라. 나는 지금까지 정국에게 보여주지 않은 최대한 환한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석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석진 오빠."
어감이 아주 간질간질 하겠지. 결국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버리는 석진과, 표정이 굳을 대로 굳어 버린 정국. 그러더니 정국은 그대로 방으로 다시 들어가버린다. 삐쳤나. 뭐 아무튼, 호칭은 이렇게 정하도록 해야겠다. 부끄러워 하는 것도 두 세번 듣다보면 익숙해질거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석진에게 거울을 대충 넘겨주고 방으로 들어왔더니, 이불을 두르고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정국이 보였다.
"삐쳤어?"
"아니다."
에이 맞구만. 웃으면서 침대에 걸터 앉자 발로 은근 나를 밀어 낸다. 달래주러 왔더니 이게 진짜. 조금 화가 났지만 참았다. 내가 화 낸다고 해서 풀릴 기분도 아닐거고. 뭐라고 달래줘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쪽으로 이불이 던져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기도 전에 기습공격과 무거운 이불 무게에 침대에서 떨어지는 나를 보고 정국이 놀라 일어났지만, 나는 이미 떨어졌고 골반부터 저릿거리게 올라오는 고통에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 진짜……!"
아, 아파. 허리도 찌릿 찌릿. 전기가 척추를 타고 오르는 기분. 내 비명에 석진까지 놀라 달려왔다. 순식간에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라 아픈 건 고사하고 쪽팔림까지 밀려왔다. 어버버 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정국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친 건 내 쪽 잘못이니까 사과하려 들어왔더니 침대에서 내던지는게 어딨냐, 아무리 빈정 상해도 이러는 건 아니지. 계속 지속 되는 아픔에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정국이 같이 화를 낸다.
"너도 할 말이 없어야 옳은 것이다."
"헐 뭐래."
"왜 진에게만 사근사근 대하는 것이냐?"
나 또한 조선에서 올라왔고, 너의 부탁으로 머리까지 잘랐거늘. 도대체 왜 석진에게만 잘해주는 것이야. 저리 곱상하게 생긴 놈들은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 헌데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오라버니, 오라버니 해가며 눈웃음을 치는 것이냐. 아무리 봐도 진은 외모적이나 뭐로도 호위모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내 오랜 벗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내 오랜 벗이라 네가 그러는 것도 기분이 나쁘구나. 너희 둘 다 죄인인 것이야. 내 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둘을 벌 할 것이다.
그리고 정적. 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불퉁 내민 정국이 우리 둘을 불만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 지금 이거 질투인건가. 송구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인 석진이 웃음을 터트렸어. 정국은 아직 애다 애. 그러니까 내가 동갑이라고 그러는거지. 말해놓고 자기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은 빨개져선 괜히 더 호통을 친다. 이렇게 보니 좀 귀여운 면도 있는 것 같고. 내가 다시 이불을 던지자 빠르게 받아들곤 머리 끝까지 덮어버리는 정국. 결국 오빠라고 안 해줘서 삐친거 맞구만.
"정국 오빠,"
"……."
"삐쳤어요?"
이불 밑에서 나가라는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 듯 들려왔다. 여기 내 방이거든요. 한번 더 오빠라고 불러주자 이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온다. 아 역시 남자는 다루기가 편해. 가끔 말 안 들을 때랑 깝칠 때만 제외하면. 내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이불 속에서 혼자 꼼지락 거린다. 은근 장난 치는 게 재밌네. 그나저나 석진과 같은 외모가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니. 조선시대 구경 한번 가야겠네. 현대엔 그런 사람 안 널렸는데.
---
암호닉은 다음 편부터 적어드립니다 =)
벌써 1월 5일이네요 시간 참 빨리가요 그쵸 8ㅅ8
제가 한살 더 먹었다는 것도 실감이 안나고 그러네요.
1월 안에 이거 완결 낼 생각입니다!
그래야 책자 제작도 빨리빨리 하고 뭐 예 희망사항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