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여인네와 한 방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조금."
아니 우리가 뭘 한다고. 건전하게 딱 누워서 잠만 자는 건데 왜 저리 걱정이 많을까. 물론 나도 이 상황이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는가. 어색함과 혹시 모를,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을 그런 상황을 대비 한답시고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옷방으로 다시 밀어넣기엔 내가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나도 미친 게 틀림 없었다. 열 여덟이나 처먹고 나서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다니. 이 역시 친구들이 본다면 개과천선이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쳐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이 꼴까지 나게 만든 건 그 친구년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간에 쥐고 있던 바짓자락을 놓자, 수줍은 표정으로 주름 잡힌 곳을 피는 석진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불도 안 끄고 있었구나. 발갛게 달아오른 석진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그걸 인지했다. 물론 내가 뭔가를 배우는 감이 있는 듯 했지만 그에 비례하게 병신이 되어가는 기분도 적지 않게 들었다. 사실은 아주 많이. 전정국이 정신 나간 짓들만 안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멘탈이 무너지진 않았을거다. 괜히 남들 눈에도 병신으로 보일까 괜히 걱정이 됐다. 원래 병신은 맞았지만. 혼자 또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서 넋을 놓고 있다가, 석진이 자리에 눕는 걸 보고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여기서 잘, 아니 주무실 거에요?"
예. 생각해보니 저 방은 조금 춥습니다. 나름 마음을 굳게 가진건지 이불을 조금 더 옆으로 끌고 간다. 석진이 이제 뭘 하던 내 관심 밖이었다. 남 자는 것 까지 신경 써주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얼른 자고 일찍 일어나서 다시 정리해야할게 산더미였다. 이 남정네 둘에게 가르쳐야 할 것도 많았고. 차차 이 현대에 적응해가게 도와주는 든든한 멘토의 역할이 되어야했는데, 생각보다 이 부담감이 장난 아니다. 내가 잘못 알려줬다가 역사책이 뒤바뀌면 큰일이다.
잠자리에 대해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었으나, 반듯하게 누운 석진에게선 저 잠 안자요, 하는 인기척이 무섭게 풍겨 나왔다. 뒤척이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돌아 누운 나까지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덕분에 나는 잠을 자려던 것을 포기하고 석진 쪽으로 돌아 누웠다. 석진이 엄청나게 긴장 된 상태로 헉하고 숨을 들이 마시는 것이 조용한 거실에 울려퍼졌다. 그냥 말이라도 걸려는 거였는데,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잔뜩 경직 되어 있는 꼴이 꽤나 웃겼다.
"석진 오빠."
"좀 웃깁니다, 조선에선 그런 말을 숫하게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현대 여성의 어감이 조금 더 느낌있긴 하지. 막 피어나는 꽃망울 마냥 수줍게 오라버니, 하는 조선의 여인들과는 다르게 패기넘치게 오빠라고 부르는 신현대 여성. 근데 정국이 삐쳐도 어쩔 수가 없는 게, 오빠라고 불렀다간 정말 포돌이한테 잡혀 갈 것만 같아서. 그나저나 조선시대에 석진과 같은 외모가 널렸으면 예쁜 사람들도 분명 많겠지. 이건 피곤해서 나는 눈물이다. 핑계가 절대 아니다. 갑자기 습기가 차는 눈가를 손으로 누르던 나는 다시 석진에게 말을 걸었다.
"석진 오빠, 잠 안 오시면 얘기 좀 해주세요."
"예? 무슨."
"전정국 얘기."
석진이 천장에 고정시키던 시선을 잠시 내리더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어.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 했지만, 다행히 석진의 얼굴엔 피곤함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아침에 일어나면 전정국만 쌩쌩해선 온 집안을 휩쓸고 다닐 듯 했다. 계속 느낀거지만, 전정국은 아무리 봐도 미운 나이 7살의 정석이다. 그러면서도 미운 고등학생의 표본이기도 하고. 만약 정국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다면 꽤 고생했을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안 봐도 뻔하구만.
"전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하의 존함을 입에 쉽게 올리는 분은 처음입니다. 어차피 백성들이 알지도 못하며, 안다 해도 목이 날아가니까요. 껄껄. 뒤에 조금 섬뜩한 말이 첨가 된 것 같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들어보니 석진의 웃음소리도 웃기다. 뭐 저렇게 웃지.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석진이 뭔가 생각 난 건지 신난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돌아 누웠다. 아까는 같은 공간에서 잠 안 자겠다며 옷장으로 걸어가더니만. 내가 빤히 쳐다보자, 부끄러운지 또 시선은 피한다.
"전하께선 조선시대에도 천방지축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어전회의 때 갑자기 사라지시는 건 기본이셨고, 툭하면 대관분들과 싸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물론 싸움은 대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였습니다. 옥체에 병이 들었을 때엔 쓴 약을 먹기 싫다며 궐을 뛰쳐나가기도 했습니다. 그 약을 안 먹고도 잘만 뛰어다니시는 걸 보면 다행이기도 하지만. 전하 뒤를 쫓아가는 어의의 모습은 꼭 보셔야합니다. 물론 조선에 가신다면 그 모습을 밥 먹 듯 보실겁니다. 그나저나, 조선에 돌아가야 할텐데 참 걱정입니다.
왜 별 거 안 들었는데 내가 다 피곤한 기분인거지. 갑자기 밀려드는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석진이 내 모습을 보더니, 주무실겁니까. 라고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입도 떼지 못하고 몸을 묵직하게 눌러오는 잠에 고개만 살짝 두어번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마저 들어야지. 아, 그러면 정국이 말하게 가만 두질 않겠구나.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나는 잠을 청했다. 석진도 다시 돌아 눕는 듯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까. 졸린 와중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새삼 세상에 있는 모든 부모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다 큰 사람도 이렇게 다루기가 힘든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다루기는 더 힘들 테니까. 처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 조금 막막했다. 과연 전정국이 내 말을 잘 따를까. 석진은 보아하니 좀 나이가 있어서 그나마 철 좀 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국이 문제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새끼. 이러다가 성격 파탄자가 될 것 같았다. 이미 성격파탄자인가.
"아 맞다, 전하께선 이 다섯개의 조항을 마음에 두실겁니다."
생각보다 속이 좁으시거든요. 잠결에 석진의 말이 들리는 둥 마는 둥 허공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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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님, 계란찜님, 꾹이님, 이킴님, 듀드롭님, 민슈가님, 단미님, 오라버니님, 봄날님, 눈설님, 홍콩님, 슈갭님,
스웩님, 나침반님, 취향저격님, 허니버터칩님, 슈가파파론리파파님, 정국꽃님, 사과찡님 ♡
최대한 분량을 늘리고 있으나, 짧게 짧게 가벼운 글을 쓰다가 이렇게 쓰려니 힘드네요 ;0;
책자를 중점에 두고 쓰는 글이다보니 더 신경 쓰고는 있는데, 독자님들은 괜찮으신가요!
좋은 글로 만나 뵐려고 하루에도 몇시간씩 머리를 굴리고는 있지만 재밌게 읽고 계신지 ㅠㅠ
정말 예정일 뿐이고 저 혼자만의 계획일 뿐이지만, 혹시라도 이 작품을 책자로 제작한다면
특전으로 조선시대썰이나 편의점썰이 껴들어갈지도 몰라요 (먼산) 편의점이 더 유력하긴 한데.. 아무래도 특전 제작할게 많아서.
예 그냥 제 김칫국일 뿐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