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 때는 그랬다. 너를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네 행동을 의식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내 일상 깊숙한 곳까지 너는 파고들었고 나는 애써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던 걸지도 몰랐다.
어린 날의 나는, 그게 사랑인지 몰랐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면, 내 안에 돋아나는 너라는 싹을 애초부터 뿌리채 뽑아냈어야 하는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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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간의 우리는.
미성년(未成年)
모든 것은 지원이 말한대로 흘러갔다. 내 뒷자리에 앉게된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상처입은 준회를 양호실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었던 그 때부터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교문앞에 서 있던 그에게 내 넥타이를 건네주었던 그 때부터일까. 준회는 노골적으로 내게 관심을 표했다. 준회는 쉬는시간이 되면 늘 뭉툭한 볼펜뚜껑 끝으로 내 등을 쿡 찔러왔고, 점심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데리고 급식소로 향했다. 준회는 내게 배려라고 말했다. 친구없는 전학생을 위한 배려. 그럴싸한 포장이였다. 준회가 그럴수록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지원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지원은 관심없다는 얼굴을 했다. 구준회와 김지원 늘 둘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학교생활에 나라는 이물질이 끼여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편했다. 내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인 이물질이라는 것을.
셋이서 함께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삼총사야. 옥상에서 담배를 입에 문 준회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옥상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고 지원은 처음 그를 이곳에서 보았을 때 처럼 위태롭게 난간 위로 걸터 서 있는 상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애는 두 눈을 꼭 감고서는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우리의 관계를 명명하자면 준회는 나를 늘 데리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지원이 내게 했던말이 생각이 났지만 나는 애써 준회에게 거절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늘 나를 끌고다니는 준회와 끌려다니는 나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걸어오고 있는 지원. 그 날 이후로 지원은 내게 준회와의 관계에 있어 어떤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암묵적 동의로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원은 여전히 내가 준회와 함께 다니는 것, '셋' 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우리의 관계를 못마땅해한다. 그래.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김지원은 나를 싫어한다.
지원과 나 사이에 준회라는 접점이 없다면 우리의 관계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부터 나는 조금 영악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매사가 무덤덤한 그 애의 얼굴이 싫었다. 나를 왜 싫어하는지, 그 이유가 뭔지. 내가 그렇게 싫다면 그 때 내게 우산을 건넨 이유가 뭔지. 왜 매정하게 나를 내치지 않는지. 왜 준회를 말리지 않는지. 왜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건지.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 머릿속에 그 애에게 묻고싶은 말들이 늘어날수록 그 물음들은 내 감정을 겉잡을 수 없이 몰아세웠다. 김지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언제나, 끝은 벼랑 끝에 서 있는 내 자신이였다. 그 애가 뭐라고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 빈도가 잦아졌다. 김지원이 미웠다.
늘 내게 말을 건네는 쪽은 준회였고 나는 앵무새 마냥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준회가 말을 건네면 지원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대화라는 상황으로 묶여있는 우리지만 우리의 대화는 맥락을 달리했다. 준회는 내게 관심을 쏟았고 내 시선 또한 올곧게 준회에게 향했지만 내 머릿속은 늘 옆에서 삐딱하게 고개를 돌린 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지원에게 있었다. 이쯤되니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애의 관심을 원해. 그 애가 나를 보고 내게 말을 건네어주었으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문득 이런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맹목적으로 그 애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는 내 자신이 끔찍하리만치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준회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집안일 때문이라고 했지만 지원이 눈치를 살핀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대충 직감했다. 준회에게 무슨일이 생긴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책상 밑으로 휴대전화를 꺼내어 문자라도 남겨볼까 싶었던 내 손짓은 허공에서 멈춰졌다. 아. 얕은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준회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머리가 울렸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 배로 먼 사이. 내가 혼자 쌓고있다고 생각했던 벽은 사실 준회와 함께 쌓아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원이 탁탁 소리나게 교과서를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 걱정 돼? "
지원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원은 손에 쥐고있던 교과서를 내려놓고 책상을 뒤지더니 연습장 한 켠을 부욱 찢어냈다. 그 다음에 필통에서 검정색 펜을 꺼내더니 아무렇게나 휘갈겼다. 탁 소리나게 펜을 내려놓은 지원이 찢긴 종이를 내 책상으로 내밀었다.
" 구준회 번호. "
" ......... "
" 걱정되는 것 같으니까. "
그 말을 끝으로 지원이 교과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책상서랍을 차지하는 몇몇 책들을 사물함으로 넣어두려는 것 같았다. 나는 지원이 남기고 간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종이 위에 적혀있는 번호대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액정 위로 준회의 번호가 완성되고 초록색 통화버튼으로 손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나는 휴대폰 액정을 한번, 그리고 교실 뒷편의 사물함에 서 있는 지원의 뒷모습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곤 휴대전화에서 손을 거두었다. 옆 쪽에 자리한 홀드버튼을 눌렀다. 준회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 된 것은 사실이다. 준회가 없는 오늘, 준회가 있었을 때 처럼 우리는 점심을 함께 먹어야할까. 아무래도 나와 둘이서 먹기는 싫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준회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어쩌자고 이렇게나 익숙해져버린 걸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오늘은 그냥 빵으로 때워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지원이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지원이 나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지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일어섰다. 나는 일순간 머리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랑 밥을 먹어? 왜? 묻고 싶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한번 더 지원이 건드렸다. 뭐해, 안가? 나를 내려다본 지원이 그렇게 말했다. 조금 당황스러워진 나머지 어,어 그렇게 말하며 앞서가는 지원을 뒤따랐다.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였어? 반듯한 뒷통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고싶었지만 금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지원은 담배를 자주 피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익숙하게 옥상으로 향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바람을 맞으며 옥상 문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른점이 있다면 늘 내 시선에 마주서서 담배를 물던 준회가 없다는 것과 그저 아무 말 않고 난간 위에 서 있던 지원이 오늘은 준회 대신 담배를 물었다는 것이다. 지원이 담배를 피는것을 보는건 그 때 이후 처음이라, 담배를 물고있는 지원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원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으며 나는 그 애의 반듯한 검은색 머리와 함께 휘날리는 뿌연 연기를 바라 볼 뿐이였다. 왜였는지 나는 천천히 지원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알싸한 담배향은 더욱 짙어졌다. 지원은 허공 어딘가를 직시하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 그 모습이 꼭 나를 홀리는 것 같아서 나는 기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원아. 지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 나도 담배 한 대만. "
지원이 아주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돼. 무덤덤하게 말했다.
" 왜? "
" 이거 피면 빨리 뒤지거든. "
" 상관없는데. "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그리고 빨리 죽고싶어서 담배를 핀다는 너한테 그런 말 듣는거 조금 웃겨. "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서 지원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낚아챘다. 지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게 보였다. 나는 아랑곳않고 반 정도 남은 담배를 내 입에다 갖대었다. 폐부로 스며드는 담배향이 몹시 썼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헛기침을 뱉어내지는 않았다. 나는 한모금 더 빨아들인 후 연기를 뱉어냈다.
" 지원아. 넌 사는게 재미가 없나봐. "
" ....... "
" 빨리 죽고싶어 하는 것두 그렇구. "
" ........ "
" 나도 그런데. "
" ........ "
" 그러니까 나, 너무 싫어하지마. "
" ........ "
" 죽는거야 상관없다지만, 너한테 미움받는건 왠지.. "
" ........ "
" 조금,슬퍼서. "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젖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모두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비벼 불씨를 마저 껐다. 나는 난간에 등을 기댄 체 눈을 감았다.
" 너. "
귓가로 지원의 목소리가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싫어하는거, "
" ........ "
" 아니야. "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어깨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원과 마주했다. 지원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은 화가난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그것 같기도 했다. 지원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새카맸다.
" 인정할께. "
" ......... "
" 네가 이겼어. "
" ..무슨, 말을. "
" 말 그대로야. 네가 이겼어. "
" 그러니까, 도대체 뭐를... "
" 뭐든. "
" ......... "
" 뭐든. 전부 네가 이겨버렸으니까, "
" ......... "
" 네 마음대로 해. "
" ......... "
"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
" ......... "
" 네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주겠다는 의미야. "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을 알리는 열기를 담은 바람이.
어쩌면, 여전히도 우리는.
미성년(未成年)
나는 김지원이 꽂아 준 드라마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드라마 조연을 하게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안하려고 했는데, 나를 붙들고 우는소리를 해대는 매니저오빠와 감독에 마음이 동한건 사실이다. 나도 측은지심이라는게 존재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매니저오빠에게 10회 까지의 대본을 받아들면서도 끝까지 김지원의 욕을 씨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새끼, 씨발새끼, 빌어먹을 !! 그러다 뻗쳐오는 열에 못이겨 대본을 집어던지면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사색이 된 얼굴로 주워오는 것은 오로지 매니저 오빠의 몫이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정신없이 액정을 두드리고는 귀에 갖다대었다. 신호음이 몇 번울리지 않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야 이 씨발놈아. "
분명히 수화기 너머의 얼굴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겠지.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맴돌았다.
" 니가 어찌나 단단히 매다 박아놨는지, 내가 빠져 나올래도 나올 수가 없어요. "
" 뭐가 문제야. "
" 하. 뭐가 문제냐고? 그걸 지금 몰라서 묻니? "
" 000. "
" 씨발!! 뭐가 문제냐고? 그래, 다 문제야. 모든 게 문제 투성이라고! "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구겨진 대본을 피고있던 매니저 오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걸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 나 청개구린거 알지. "
" ........ "
" 니가 날 얼마나 높은 곳 까지 올려놓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는데, "
" ........ "
" 어디 마음대로 해봐. 아주 꼭대기까지 올려놔보라고. "
" ........ "
" 계속 나 건드리면, "
수화기를 입가로 바짝 갖다대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삭히며 씹어뱉었다. 나도 장담 못해.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쇼파로 몸을 기대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매니저오빠에게 입을 벙긋거리며 손짓했다. 오빠, 대본 좀 줘봐. 9화. 매니저오빠가 쌓여있는 대본을 뒤적거리더니 내게 하나를 건네었다. 대본 제일 앞장에는 드라마의 제목이 적혀있었다. 숨소리. 그게 드라마의 제목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우 000님 이라고 적혀있었다. 16부작의 드라마, 그리고 내가 들고있는 9화는 극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지점이였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씬 넘버 37. 하은의 집 앞. 하은 눈 앞의 상혁을 노려보며 울분을 토해낸다.
" 아아, 더이상 내게 이러지 말아요. 당신이 내게 건냈던 달콤한 말들, 그 달콤함에 당신을 담았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만 싶어요. "
" ........... "
"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을 수가 있죠? 날 사랑한다구요, 진심이라구요? 비열한 위선자. 나에게 동정을 요구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는 시작부터 어긋나있었죠. 그래요, 그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제가 지금 가장 후회되는건 다름아닌 그거라구요. 왜 조금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왜, 왜..!! "
" ........... "
" 날 사랑한다고 했죠? 나는 아니야. "
" ........... "
" 당신이,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
" .......... "
" 당신이 늘 내 옆에 있는것만 같아서 숨이 차요. "
" ......... "
" 그러니까, 내가 질식해버리기 전에 죽어버려요. "
" ......... "
" 제발. "
나는 하은이 되어서 상혁이 아닌 지원에게 말했다. 통화시간은 1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끓어올랐던 하은의 감정을 삭히고 숨을 골랐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지원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말이 없길래 다시 한번 불렀다.
" 지원아, "
" 응. "
지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사는 게 재미가 없네. "
" .......... "
" 차라리 나를 싫어하지 그랬니. "
나는 문득 울고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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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와서 데둉해요. 컴퓨터가 자꾸 꺼지네요. 왜이럴까요? 인티 임시저장만 안됐다면 전 다 때려치웠을지도..
과거부터 풀어야할 얘기가 한참 남았는데....오ㅐ때무네 진도가...(먼산)
독자님들 댓글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초록글도 (울먹) ...
암호닉 받을게요. 신청해주십셔. 다음편에서 만납시다. ♥ 오타지적 피드백 쌍수들고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