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6 (I'm In You)
[먼저 가.]
교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니트가디건을 걸치려던 찰나, 김종인에게서 짧디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먼저 등교를 하라는 지나치게 간결하고 싱거운 문장이었다. 웬 일로 먼저 학교를 가라는 건지 궁금해 이유를 묻고자 녀석에게 짤막한 답장을 전송했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평소 녀석과 만나는 시각보다 더욱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어폰을 꽂았다. 역시 홀로 등교를 하는 날은 노래를 들으며 가는 게, 쓸쓸하지도 않고 좋다. 그러나 내적댄스를 유발하는 노래를 길거리에서 듣는 건 정말이지 비추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었다간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랄까.
"……."
김종인한테선 답장이 없었다. 원래 궁금했던 게, 아무런 답이 없으니 더욱 궁금해졌다. 전화라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녀석이 답장을 안 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금세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아…."
도대체 사회탐구는 공부를 어떤식으로 하는 게 맞는 것일까. 모의고사 문제를 풀고 48점을 받아 기분이 좋았던 것도 아주 잠시, 자신감에 가득 차 또 다른 모의고사를 풀어보면 35점…. 분명 같은 내용에 비슷한 유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쩜 점수 차이가 이렇게도 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꼼꼼히 열심히 푸는데 어째서….
한숨을 길게 내쉬곤 문제집 위로 축 늘어지듯 엎드렸다. 점점 수능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요즘들어 깊게 실감하는 중이다. 각 교과목 선생님들은 제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의 문제집을 풀어도 조금의 눈치조차 주지 않으셨고, 굳이 터치하려 애쓰지도 않으셨다. 수업시간에 자습을 주는 과목도 있었으며, 아이들이 잠에 취해 책상 위에 엎드려 있어도, 오죽 피곤했으면 엎드려 잠을 자겠느냐며 그냥 놔두곤 하셨다. 심지어, 체육복을 입고 등하교를 해도 될 정도였다. 이렇게 고3이라는 존재가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엄청난 대우가, 거의 10월에 접어들 즈음이 되자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한국지리 시간에 한국지리 선생님께서 주시는 자습시간이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신 선생님의 눈치를 흘끗 보며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방금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두세 번 울렸기 때문이다. 사실 수업시간에 진동이 한 번 울리든, 여러 번 울리든 대부분 확인을 하지 않곤 했지만 지금은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혹시 녀석의 답장이 이제서야 도착한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 한국의 지리나 세계의 지리에 굉장한 애착을 지니고 계신듯 보이던 선생님은, 역시나 지리에 관한 책을 읽고 계셨다. 다행히 선생님께선 제법 두꺼운 지리 책의 내용에 흠뻑 몰입하고 계신 듯해 휴대폰 사용을 들킬 염려는 없어 보였다.
지금은 3교시였다. 김종인이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1교시 쉬는시간엔 옆 반으로 향해 보기도 했지만, 웬 일인지 녀석의 자리엔 책가방이 없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가 없어 심심했던 건지, 오세훈 또한 제 자리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기에 난 그저 헛걸음을 친 셈이었다. 2교시 쉬는시간엔 출석부 정리를 하느라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에 교실에만 박혀있어야 했고, 난 녀석이 학교에 왔는지 안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3교시의 시작을 맞아야 했다.
어쨌든 문자…. 문자가 왔다. 김종인아, 지금 어디인 건데. 학교야? 왜 늦게 왔어? 왜 먼저 가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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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긴. 수업시간까지 쪼개서 문자를 보내고 그러진 않겠지.
*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크나큰 유리문에 달린 갈색 손잡이를 밀곤 약국을 나섰다. 살짝 벌어진 약봉투 속에 담겨있는 색색의 알약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득 얼마 전 무더웠던 여름 날, 아픈 척 감기몸살을 연기했던 때가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매사에 솔직해야 하며, 거짓된 행동을 해선 안 되는 것이었나 보다. 감기몸살을 연기했더니, 대략 한 달 반 만에 진짜 감기몸살을 얻게 되었다. 아픈 척 연기를 했다가 진짜 아프게 될 줄이야. 어제 저녁부터 목이 좀 따끔따끔하더니 결국….
자고 일어났을 땐 베개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분명 열이 나 몸이 뜨끈뜨끈하긴 한데, 그와 동시에 으슬으슬 춥기도 했다. 굳이 체온계로 열을 재보지 않아도 열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어지러웠고 두통도 심했다.
[먼저 가.]
웬만해선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침이나 콧물, 목이 따끔거리는 것은 거뜬히 참아낼 수 있지만, 이렇게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의 고열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먼저 학교에 가라 문자를 보내버렸고, 보냄과 동시에 후회를 했다. 나 혼자 학교를 가야 한다는 것도 싫었지만, 나 없이 혼자 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래도 괜히 나 때문에 걱정하게 만들기는 또 싫어, 병원에 들렀다 학교를 가고자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곧이어 도착한 답장엔 일부러 답을 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
이 시간에 등교를 해보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운동장엔 체육 수업에 한창인 1학년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항상 북적북적하던 현관도 한적하기만 했다. 느긋하게 신발을 갈아신곤 안으로 걸음을 뗐다. 역시 수업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휑- 하니 조용했다. 굳게 닫혀있는 교실 문을 열면 온 신경이 내게 집중될 것이 분명했으나, 그건 아무렴 상관 없었다.
반으로 들어가기 전에, 몰래 옆 반 창문을 기웃거려 보았다. 2교시 수업은 문학인 듯했다.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입가엔 절로 웃음이 번졌다. 열심히 한다. 집중하는 모습도 예쁘네.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고 싶다. 오늘은 아이보리색 니트가디건을 입었네. 옆짝꿍은 왜 저딴식으로 졸고 있는 거야. 여기가 덜컹거리는 지하철이라도 되는 줄 아나. 제발 반대편으로 졸아. 애 어깨에 네 머리 닿으려 하잖아.
"넌 몇 반이니?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무단 지각?"
"… 아, 담임선생님 허가 받았어요. 병원 갔다 온 거예요."
"오냐. 얼른 들어가."
"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지구과학 선생님이셨다. 우리반은 문과였던지라 별로 마주칠 기회가 없는 분이셨지만, 저번 중간고사 때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셨을 때 딱 한 번 봤던 적이 있다. 짧디 짧은 한 시간 동안 같이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꽤나 까다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건 단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대충 인사를 하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뜨끈뜨끈해 모든 사물들이 흐물흐물하게 보이는 듯했다. 열이라도 좀 내렸으면 좋겠는데….
*
"야, 인마. 일어나 봐."
얕은 잠에 빠져드려 할 즈음, 머리 위로 짜증나는 목소리 하나가 내려앉았다. 애써 고개를 들고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법한 목소리에 굳이 대답을 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쉬는시간 종이 치자마자 찾아와서 흔들어 깨우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 건지.
"아, 새끼야! 일어나 보라고!"
꽤나 끈질기게 달라붙어 말을 내뱉는 오세훈 탓에 힘겹게 상체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대략 30분 동안을 엎드려 있었던 탓인지, 시야가 흐릿하면서도 눈이 부셨다. 눈도 제대로 뜨이지 않아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안그래도 하얀 놈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오, 미친…. 꿈 속에서 쭉쭉빵빵한 누나들이 유혹이라도 했냐? 얼굴 왜이리 빨개?"
"자는데 왜 깨워. 넌 진짜 매를 버는… 아, 하루살이 같은 새끼. 빨리 하루가 지나가버렸음 좋겠다."
"뭐 그런 잔인한 말을 해…. 아, 근데 무슨 꿈 꿨냐? 형아한테 공유 좀 해줘 봐."
"꺼져. 꿈 안 꿨어."
"하긴. 귀염둥이밖에 모르는 넌 그런 꿈을 꿔도 꾸나 마나겠지. 순정파 해바라기 같은 새끼."
"뭐라는 거야. 옹알옹알 존나 시끄럽네."
"근데 너 오늘 왜 늦게 왔냐. 늦잠?"
"병원."
"병원? 너 어디 아파?"
"그냥 감ㄱ…"
"아, 상사병?"
"너 운동장으로 던져도 되냐."
"… 충격."
꽤나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으로 입을 막는 녀석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그래도 아픈데 코앞에서 신경을 긁어대는 오세훈 탓에 당장이라도 집에 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혀 안 그러게 생긴 놈이 말은 야무지게도 많았다. 그게 너무나도 시끄럽고 듣기가 싫어 다시 눈을 감고 책상 위로 엎어지려 하자, 녀석이 내 이마에 손을 얹어왔다. 차디찬 손이 이마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듣했다.
"… 야, 너 열 나."
"알아."
"아는 놈이 왜 이러고 있는 건데? 학교는 왜 왔냐. 열 장난 아닌데?"
"알면 닥치고 네 자리로 가."
"걱정해주는 사람한테 무슨 말이 그러냐. 일어나. 보건실 가자."
"귀찮아. 그리고 보건실 갈 정도는 아냐."
"뭐래. 일단 기다려 봐. 내가 ○○이한테 말하고 올게."
"미쳤어? 걔한테 왜 말해. 하지마. 하기만 해 봐."
"왜 하지마? 자존심 좀 그만 세워, 인마."
"너야말로 남의 일에 간섭 좀 그만 해. 왜 자꾸 끼어드는 건데."
"왜 끼어드는 거냐니. 내가 너희 둘의 큐피트이자, 네 전용 연애코치니까."
"지랄맞네."
"아, 어쨌든 보건실 가. 너 딱 만져만 봐도 족히 38도는 넘는 것 같아."
"약 먹으면 돼."
"약 먹고 보건실에서 쉬라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새끼가 고집은 더럽게 세, 진짜."
자꾸만 팔을 잡아 당기며 재촉하듯 말하는 오세훈 탓에 억지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주위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머리도 찌릿찌릿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녀석이 자연스레 나를 부축해오기 시작했고, 천천히 보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보건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녀석에게 재차 부탁을 했다. 제발 나 아프다는 거 말하지 마. 나 보건실에서 쉬고 있다는 거 말하지 마. 약속했다. 말하기만 해. 네 컴퓨터 포맷 시켜버릴 거야. 오세훈은 걱정 말라는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길고도 짧았던 3교시 자습시간이 끝이 났다.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 약속이라도 한듯 몇몇 아이들이 책상 위로 얼굴을 묻었고, 수업시간에 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남학생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역시 상위권 아이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피곤하지도 않을까….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쉬는시간에도 열심히, 게다가 점심시간이나 석식시간에도….
꺼내놓았던 분홍색 샤프와 하얀 지우개를 필통 속에 집어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4교시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게 될 것을 미리 방지하고자 물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김종인이 왔는지 옆 반도 슬쩍 훑어보고…. 작게 하품을 하며 교실을 나섰다. 요즘들어 잠을 자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수업시간엔 졸음이 쉴 새 없이 밀려왔고, 하품도 자주 나왔다. 수업시간엔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이 1순위인데, 꾸벅꾸벅 졸고나 있다니…. 이럴 바엔 차라리 밤에 일찍 자고 수업시간에 안 조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복도로 발을 내딛고 정수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바로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려졌고, 시선이 향한 곳엔 오세훈이 서있었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을 바라보고만 있자, 다갈색 머리칼을 깔끔히 정돈하던 손을 내리며 녀석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순간 너무나도 당황해 무어라 말을 건넬 수조차 없었고, 그저 오세훈이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묵묵히 녀석을 따라 걸음을 뗐고, 보건실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고 잡고있던 손목을 놓아준 녀석이 보건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종인 아파."
"뭐?"
"병원 갔다 2교시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왔어."
"… 병원? 아프다고? 왜?"
"감기몸살이라나 뭐라나. 열이 장난 아니더라."
"……."
"나보고 너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 신신당부 하는 걸 보니, 아픈 모습은 죽어도 보이기 싫은가 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 아."
"그래도 너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죽을 각오 하고 말해주는 거야."
"……."
"음…, 일단 들어가 봐. 어차피 보건선생님 계셔서 네가 따로 간호해 줄 건 없겠지만…."
"……."
"아, 너 4교시 뭐야?"
"… 사회문화."
"그거 네 수능 선택 과목이야?"
"아니…. 왜?"
"그럼 수업 빠져도 되겠네."
"… 뭐?"
"어차피 수능 때 볼 과목 아니잖아. 그럼 안 들어도 되는 거 아니야?"
"… 아, 그건…."
"듣고 보니 맞는 소리지? 그냥 한 시간 동안 김종인 옆에서 말동무나 해주다가 같이 점심 먹으러 가."
"……."
"와, 진짜 아이디어 좋다. 내가 생각한 거지만 참…. 대박인데?"
혼자 박수를 치며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어차피 수능 때 볼 과목이 아닌 시간이었던지라 4교시 역시 자습시간이 될 게 뻔했지만, 왠지 갈등이 되었다. 김종인은 걱정되고, 자습은 해야겠고…. 깊은 고민에 빠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오세훈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난 이만 간다. 김종인도 분명 좋아할 거야."
*
오세훈이 제 반으로 향하고나서야 숨을 깊게 내쉴 수 있었다. 사회문화 선생님껜 제가 대신 말을 잘 해주겠다며 걱정 말라 자부하던 녀석에게 아무런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이 수업을 빼먹는다는 건 어느 누가 보든 좋은 시선으로 보일 게 아니라는 건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김종인은 걱정이 됐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습시간보단 김종인이었다. 공부보단 김종인이었다. 넘쳐나는 게 자습인데 뭐…. 한 시간만 더 늦게 자면 되지 뭐….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디가 아파서 왔지?"
"저… 김종인이라고…"
"아, 종인이?"
"……."
"종인아, 여자친구 왔다."
안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아계신 보건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꽤나 말끔한 인상이, 앞머리를 세워 이마를 훤히 드러낸 헤어 스타일로 인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용건을 묻는 그에게 조심스레 녀석의 이름을 언급했고, 곧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말을 건넸다. 종인아, 여자친구 왔다. 여자친구 왔다…. 여자친구….
"… 여자친구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묻던 김종인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는 듯한 실루엣이 보였다. 녀석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내 쪽으로 그의 시선이 꽂혀왔다.
"너 수업은 어쩌고 온 거야? 선생님께 말씀은 드렸어?"
"… 아, 네."
"흐음, 그래? 내 확인증 같은 건 없어도 되는 거야?"
"없어도 될… 걸요?"
오세훈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거라 믿고, 대충 그럴 듯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게 조금은 미심쩍은 건지, 그가 고개를 갸웃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명찰에 적혀있는 '김준면'이라는 세 글자를 멍하니 응시하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 지금 볼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가봐야 하거든. 담당 과목 선생님한테 허가는 받았다니까 뭐, 걱정은 안 할게. 종인이 좀 잘 살펴줘. 알았지?"
"아, 네. 걱정 마세요."
"그래. 여자친구가 와서 그런지 조금은 안심이 된다."
"… 저 여자친구 아닌ㄷ…"
"근데 나 없다고 둘이 헛딴 짓 하고 그러면 안 된다. 알지?"
"… 전혀요."
장난이라며 씨익 웃곤 그가 보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은 심각하게 조용해졌고,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작게 심호흡을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녀석이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향했다. 상체만 일으켜 침대에 가만히 앉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있는 녀석이 보였고, 갑작스레 둘만 남게 되어버린 지금 이 상황이 괜스레 어색하게만 느껴져 쭈뼛거리듯 김종인에게 다가갔다.
"… 오세훈이 말했지."
"… 걔가 말 안 해줬어도 어차피 알게 될 거였어."
"……."
"감기몸살은 또 왜 걸린 거야. 방학 때도 한 번 걸려놓고…."
"……."
"날도 쌀쌀한데 딸랑 하복 하나만 걸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바보야."
"난 하나도 안 쌀쌀했으니까 그렇지."
"아픈 와중에도 말대꾸 하고 싶어?"
"……."
"오세훈이 그러던데. 너 열 장난 아니게 났다고. 지금도 열 나?"
"… 만져 봐."
녀석의 침대 끝에 살짝 걸터 앉은 채 물었다. 그러자 뜨끈뜨끈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자기 이마로 가져다놓는 녀석의 행동에 순간 너무나도 놀라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예상대로 녀석의 이마는 따끈따끈했고, 열이 오른 탓인지 녀석의 얼굴 또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엄청 뜨거워. 약은? 먹었어?"
"먹었어."
"… 조퇴하지. 아픈데 어떻게 버티려고."
"조퇴 안 해."
"야자라도 빼, 그럼."
"너 혼자 가게?"
"내가 애기야? 당연 혼자 갈 수 있지."
"난 혼자 가기 싫어."
"……."
"너 4교시 수업은 어쩌고 온 거야."
"오세훈이… 알아서 잘 말해준다 했는데…."
"… 아."
"……."
"… 너한테 말 안 하려 했는데."
"나한테 왜 말을 안 해. 아침에 문자 씹은 이유도 혹시 그거야? 나한테 알리기 싫어서?"
"… 아냐, 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디 가지 말고 옆에서 내 간호나 해."
틱틱대듯 말을 내뱉는 녀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간호를 해주는 건 물론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녀석이 아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한창 중요한 시기에 아프면 어쩌자는 건지…. 다행히 수시 원서는 모두 접수를 했다지만, 바로 코앞에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 아파선 안 되는 것이었다.
"너한테 옮길까 걱정이긴 한데."
"… 안 옮겠지."
"그런가."
느리게 눈을 꿈뻑이며 허공을 바라보던 녀석이 연신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축 늘어지듯 조심스레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왔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목석이라도 된 양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 위로 김종인의 뜨거운 체온이 가득 느껴졌고,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에선 은은하면서도 산뜻한 샴푸 향이 풍겨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마저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녀석과 나 사이의 간격이 많이 좁긴 좁은 듯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괜히 숨을 참게 됐고, 마음 편히 숨을 내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 힘들면 좀 눕지 그래."
"… 향수 뿌렸어?"
"아니. 나 향수 안 쓰는데."
"……."
"……."
"좋은 냄새 나서."
녀석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도 애매해 그냥 입술만 잘근잘근 씹으며 애꿎은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열이 높은 탓인지, 아님 약 기운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김종인은 지금… 뭐라 해야 할까… 무척이나 이상했다. 제 3자가 들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을 녀석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무척이나 이상하고 묘했다. 게다가, 평소 이렇게 가까운 스킨쉽은 일체 한 적이 없던 녀석이었으니 이러한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네가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이렇게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아팠던 적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테지.
"… 아아, 어깨 무겁다."
"… 아."
분명 열이 나는 건 녀석인데, 느낌상으론 마치 내가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자꾸만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것 같았고, 굳이 거울을 통해 확인해보지 않아도 될 만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살짝 투덜대듯 말하는 내 모습에, 녀석이 기대있던 머리를 조심스레 떼며 머쓱히 제 뒷목을 어루만졌다. 아파서 그런 걸까, 안그래도 짙게 진 쌍꺼풀 라인이 더욱 짙어진 듯했다.
"어, 너 얼굴 왜이리 빨개. 너도 열 나는 거 아니야?"
나른하게 뜨인 눈을 천천히 꿈뻑이며 김종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터질 것만 같이 위태롭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긴 정말이지 처음인 것 같았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이렇게 떨리고 부끄럽고 설레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김종인, 너 많이 아픈 것 같아. 아까 만져 보니까… 이마 진짜 뜨겁던데. 아파서 이러는 거 맞지. 열이 너무 많이 올라서 지금 제 정신 아닌 거지. 그래서 지금,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거지.
"… 아, 나 열 안 나. 더워서 그래, 더워서."
가만히 있었다간 정말이지 심장이 터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뱉어냈다. 물론 더웠던 건 사실이니까. 어쨌든간에 100퍼센트 거짓은 아니었다.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작게 하품을 하며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이기 시작했다. 눕기 편하게 이불도 살짝 걷어내 주었고, 베개 위로 머리를 내려놓은 김종인을 확인하곤 이불을 끌어 녀석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다시 한 번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것만 같았다. 약을 먹었는데도 왜 열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녀석의 이마는 한결같이 뜨끈뜨끈하기만 했다. 분명 졸린 것 같긴 한데 잠은 자지 않고…. 일단 조용한 분위기는 싫으니 소소하게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될 것만 같아 머리를 열심히 굴기 시작했다. 말을 꺼낼 기운조차 없어 보이는 김종인 대신 내가 먼저 화젯거리을 꺼내놓아야 했다. 무슨 말을 꺼낼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문득 잠시 잊고 지내던 단어… 아니,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삿포로에 갈까요….
"종이야."
"응."
"너 저번에 나한테 삿포로 가고 싶다 했잖아. … 같이 가자고도 했고."
"아, 응."
"너 혹시, 삿포로에 갈까요… 라는 말 알아?"
"……."
"그 말의 뜻이… 당신을 좋아합니다. 이거래."
"……."
"알고 있었어?"
넌지시,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무심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머릿속엔 과연 무슨 생각들이 들어있을까, 지금은 너무나도 궁금했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다는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문장에 담긴 뜻과는 상관없이 그냥 1차원적으로 '삿포로'라는 곳에 가보고 싶고, 눈 축제를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은 콩닥콩닥,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두근거리기 바빴다.
"거기 눈 축제 진짜 예뻐."
"… 응. 검색해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
"그러니까 꼭 가자고."
네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정말 그런 의도로 내게 말을 건넸던 것인진 아직 의문이고 물어볼 용기도 없지만, 난 이제 확신이 선 것 같아. 줄곧 머릿속으론 아니라며 부정을 해대기 바빴지만, 역시 마음은 아니었어.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잘 몰라. 어느 순간부터 네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 봐, 어느샌가 난 널 좋아하게 되어버렸나 봐.
김종인, 우리 삿포로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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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엔 좀 빨리 왔나요? 나름 빨리 왔죠? 잠깐이나마 시간 좀 날 때 후딱후딱 써서 그런지 최대한 빨리 올 수 있었네요!
참, 12시까지 구독료가 없다면서요? 그럼 처음으로.. 구독료를 한 번 40으로 해볼ㄹ...(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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